124화
완만하게 굴곡진 시냇물은 산속을 구비구비 돌고 내려와 작은 마을을 지났다. 그 시냇물에 마을 사람들은 쌀을 씻고, 옷을 빨았고, 냇물은 다시 졸졸졸 소리 내며 흘러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갔다.
금하는 객잔을 나와 다리를 지나고, 시냇물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큰비는 이미 그쳤고, 해는 서쪽으로 잠기고 있었다. 석양빛이 비친 시냇물은 붉은빛으로 바뀌어 매우 윤기가 나고 투명했다.
돌이 많은 서덜(*냇가나 강가 따위의 돌이 많은 곳.)에 도착한 금하는 시냇가의 큰 바위를 골라 위로 기어 올라가 태양을 바라봤다. 이미 산 너머로 석양이 넘어가고 있어 남은 빛마저도 점점 사라져갔다. 그러다 주위는 어느새 푸르스름한 회백색으로 휩싸였다.
금하의 마음속은 허전해지고, 대신 실망이 그 자리에 가득 차올랐다. 그녀는 두 무릎을 껴안고 앉아, 발아래로 흐르고 있는 시냇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철퍽.
문득 옆쪽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 금하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열 몇 보가량 떨어진 냇가에 언제부턴지 모르게 도사 차림의 젊은 사람이 와 있었다. 그는 반쯤 낡은 남회색의 도포를 입고, 머리는 상투를 틀었으나, 얼굴은 측면이라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낚시를 하는 중이었다.
날이 어두워지려는데 낚시를 하네. 참 이상한 사람이다.
금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를 흘끔 더 쳐다보았다.
그때 그 도사가 고개를 돌려 금하를 바라봤다. 뒤이어 그는 유쾌하게 웃어 보였다.
―― 그의 두 눈은 고요하게 깊고 맑았다. 아무런 거리낌도 없고, 웃는 얼굴은 진실한 것이 마치 아이 같았다. 설령 용모는 평범하더라도, 동작이나 움직임 하나하나에 세속을 벗어난 기운 같은 것이 드러났다.
금하는 선량한 천성으로 다른 이에게 화를 푸는 버릇도 없었다. 속에 가득한 화는 지금 비록 사라지지 않았으나, 그가 이렇게 멋지게 웃는 것을 보고는 억지로나마 입술을 씩 올려 웃는 모양을 만들어냈다.
“도사님은 어느 도관 분이세요?”
그녀가 외쳤다.
빙그레 웃던 도사는 낚싯대를 가리키며 소리 없이 손짓했다. 조용 하라는 소리인가. 금하 역시 무릎을 안고 고개를 기울여 그가 낚시하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주위의 모든 것이 무거운 밤빛에 완전히 휩싸였고, 마을에는 집집마다 등불이 켜졌다.
등불의 온화한 등황색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금하는 어느새 마음이 욱신거렸다.
집에 돌아가고 싶어.
아버지가 웃으며 품속에서 돼지 머리 고기 한 봉지를 몰래 꺼내시던 것이 그립고, 어머니가 그녀의 해진 옷을 기워주며 끊임없이 잔소리하시던 것이 그립고, 동생이 그녀의 어깨너머로 기웃대며 종이의 틀린 글자를 우습다며 지적하던 것이 그리워졌다.
심지어 집안에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 그 콩 비린내조차 그녀는 이 순간 모든 것이 매우 그리워졌다.
금하는 코를 훌쩍거리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
감상에 젖어 풀어졌던 마음과 달리 그녀의 앞에는 잔혹한 현실이 놓였다. 일단 이 마음은 깊숙한 곳에 감춰버리고, 당장 어찌해야 좋을지 금하는 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조금 전은 순간 화가 치밀어 육역에게까지 독한 말을 퍼붓고 말았다.
앞으로는 또 어째야 해? 그가 정말 위에 찔러서 내 철밥통을 싹 없애 버리면, 또 어쩌지?
실의에 빠진 금하는 한숨을 쉬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한다면, 육역이 그녀를 위에 보고하지는 않겠지만, 그녀가 이처럼 하극상으로 들이받은 것은 모르긴 몰라도 앞으로 그는 따끔한 맛을 보일 것이다.
어찌해야 좋을까?
그녀는 갈수록 고민이 깊어졌다.
“어린 아가씨, 제가 생선을 대접하면 어떨까요?”
아마 금하가 너무 정신이 나가서일 것이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건만, 그 도사는 이미 그녀의 옆에서 불쑥 나타났다.
금하는 깜짝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누구세요?”
그 도사가 팔을 양쪽으로 벌려 보였다.
“저는 도사입니다.”
“도사도 명호가 있으실 텐데요.”
도사가 잠시 골똘히 생각했다.
“나는 남색 옷을 입고 있고, 도행이 높지도, 낮지도 않으니, 명호를 남도행蓝道行이라 하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이 사람은 예상외로 재미있는 곳이 있었다. 금하는 가만히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소남 도사님.”
“이 호칭도 괜찮군요. 친밀할 뿐 아니라, 부르는 것도 또랑또랑해요.”
매우 기뻐한 남도행은 돌아서 큰 바위에서 뛰어내리고는 그녀를 손짓하여 불렀다.
“어서 와 생선 드세요!”
그는 뛰어내리는 자세도 나비같이 민첩한 것이 뜻밖에도 상당한 경공의 고수였다.
금하도 큰 바위에서 뛰어내려 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야 그가 말한 물고기란 것은 바람에 말려둔 작은 어포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건……, 도사님이 낚은 고기예요? 냇물에서 낚으셨어요?”
어포를 손에 든 금하가 물었고, 남도행은 고개를 저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저는 도사입니다. 비록 비린 것을 금하진 않으나, 죽인 것을 보지 않고 듣지 않은 삼정육三净肉(*불교 용어, 죽이는 장면을 보지 않는 고기, 죽이는 소리를 듣지 않은 고기, 천신을 제사하기 위해 잡은 고기여서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난 고기를 말함.)만 먹을 수 있죠. 어찌 물고기를 잡아 제가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근데 방금 낚시하지 않으셨어요?”
의아해 묻는 금하에게 남도행이 낚싯대를 건넸다.
낚싯줄에는 원래부터 낚싯바늘이 매여 있지 않고, 은으로 만든 작은 방울을 드리우고 있었다. 금하가 방울을 흔들어 보니, 소리가 나지 않았다. 자세히 보면 방울 안에 방울추가 없었다.
“이걸 물속에 넣고 뭘 하셨어요?”
“그것으로는 물 밑에서 움직이는 암류(*일이나 형편이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하고 은근히 변하여 나아가는 기운.)를 감지할 수 있지요.”
“물밑의 암류?”
시냇가에 선 남도행은 어둠 속으로 졸졸거리며 흘러가는 시냇물을 바라보며 답했다.
“이 시냇물 위의 평온함만 보면 안 됩니다. 오히려 물밑에는 격류가 은밀히 솟구치고 있지요. 물고기들이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기란 진실로 쉬운 게 아닙니다.”
그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금하는 그의 말에 무언가 다른 뜻이 담긴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또 무엇을 얘기하는지는 기어이 알 수 없었다.
“어떤 물고기들은 헤엄쳐 올라가지 못하고, 시내 바닥에 가라앉습니다. 주검은 층층이 쌓여 다른 물고기를 떠받치고, 그렇게 해서 다른 것들이 순조롭게 앞으로 나아가도록 해줍니다.”
잠시의 침묵 후, 돌아선 남도행이 웃으며 돌연 화제를 바꿨다.
“이 어포 너무 짜지요? 사실 이건 주먹밥에 넣어야 맛이 괜찮습니다.”
“…….”
밤바람이 한차례 스쳐 지나고, 숲의 나무들이 흔들려 솩솩 소리를 냈다.
남도행은 시선을 돌려 숲 쪽을 바라봤다. 바로 낚싯대를 수습한 그가 금하를 향해 웃었다.
“전 마을에 가서 밥을 얻어다 어포 주먹밥을 만들 겁니다. 오겠습니까?”
금하는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 어떻게 육역을 마주해야 하나에 대해서도 아직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다.
다행히 남도행도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더욱 유쾌하게 웃었다.
“상관없습니다. 앞으로 인연이 있다면, 제가 또 밥을 대접하지요.”
금하가 고개를 끄덕이고, 공수하여 작별했다.
“도사님 몸조심하십시오.”
서덜 위의 울퉁불퉁 걷기 힘든 길이건만, 남도행은 눈 깜짝할 사이 이미 먼 곳으로 가버려 뒷모습마저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남도행이 갈 길로 가고 나니, 홀로 남은 금하는 번뇌가 다시 용솟음쳤다. 그녀는 작은 돌멩이를 집어 냇물 위로 던져 물수제비를 떴다.
“통, 통, 통…….”
작은 돌은 시냇물 위를 통통 뛰어서는 마지막으로 어두운 곳에 가라앉았다.
금하는 돌멩이 하나를 던지고는 돌아서 다시 몇 개를 주우려 했다. 그런데 누군가 그녀 앞으로 손을 내민 것이 보였다. 펼친 손바닥 가운데에는 매끄럽고 윤기 나는 조약돌 대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
고개를 든 금하는 그 돌의 주인을 바라보며 멍하니 얼어붙었다.
육역이 자신의 손바닥에서 조약돌을 주워 혼잣말하듯 말했다.
“물수제비 뜨는 돌은 편평한 걸 골라야 해. 이런 모양이 잘 튕겨. 이건 안 돼. 너무 동그랗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금하가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대인……, 화 안 나셨어요?”
육역이 바로 시선을 들어 그녀를 흘끔 보고는 의아해했다.
“나는 네가 내게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아, 사실 전…….”
금하는 저도 모르게 멋쩍어졌다.
“정말 하극상이라고 위에 말씀하지 않으실 거예요?”
육역은 골라낸 작은 돌 전부를 그녀의 손안에 놓고,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녀를 바라봤다.
“후회했지? 네가 후회할 줄 알았다. 넌 그래도 쏟아내어 통쾌했고, 한때나마 용기를 과시했지. 어떠냐. 이 난처함에서 물러날 기회를 주지 않았을 때 네가 어떻게 해결할지 볼까?”
이유 같은 건 모른다.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니, 금하의 눈에는 저도 모르게 안개 같은 뿌연 물기가 가득 서렸다. 아주 가까이 있는 육역조차도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저는 순우 아가씨를 일부러 겁주려고 한 게 아니에요. 대인은 이 일로 절 나무라시면 안 돼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짓깨물었다.
“저도 아가씨가 피를 보고 혼절할 줄은 몰랐어…….”
그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 육역은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당겨 안았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 뒤를 눌러 자신의 어깨 위에 기대게 했다.
“앞으로 힘이 들 때면, 네게 내 어깨를 빌려줄 수 있어.”
육역의 탄식 섞인 목소리는 바로 그녀의 귓가에서 들렸다.
금하는 그의 이런 친밀한 행동을 뒤늦게나마 의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육역과의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게 된 그 순간부터 금하의 머릿속은 멍멍해졌다.
그녀의 눈가에는 작은 눈물방울이 여전히 맺혀 있었다. 그러나 금하는 조금 전 자신이 왜 마음 아파하고 있었는지를 완전히 잊었다. 그저 멍하니 그의 어깨에 기대어 반복해서 그의 말을 생각할 뿐이었다.
어깨를 빌려줘……?
한참 후, 금하는 불쑥 머리를 들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그를 힘껏 밀었고, 육역의 품을 애써 벗어나 뒤로 물러섰다.
“대, 대인……, 전 비록 말단 관리일 뿐이지만, 저를 마음대로 희롱할 수 있다고 생각지 마세요!”
금하는 분노했지만, 육역은 그녀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명백하게 네가 먼저 나를 희롱한 거야. 너야말로 정말 적반하장이다.”
“제가!”
금하는 다급하고 놀라 소리쳤다.
“제가 언제 대인을 희롱했어요?”
“심 부인 집에서 넌 네 입으로 내게 인정했지.”
그의 손가락이 슬그머니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그는 고개를 기울이고 달빛에 비추어 그녀의 입술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위쪽 잇자국은 이미 사라졌네? 이렇게나 빨리…….”
“그그, 그건 대인께 약을 먹여 드리기 위해서였어요. 어떻게 그걸 희롱했다고 칠 수 있어요!”
그가 이렇게나 가까이 압박하듯 다가와 금하는 다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했기에, 그녀는 그만 서덜 위의 자잘한 돌에 걸려 하마터면 고꾸라질 뻔했다. 다행히도 육역이 재빨리 그녀를 다시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금하는 애써 벗어나려 했으나 바로 육역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렸다.
“그대로 있어!”
그녀는 무언가 이상한 일이 생긴 거라 생각하며 본능적으로 몸이 얼어붙었다.
다음 순간, 살짝 고개를 숙인 육역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에 입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