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육역의 외조모 댁은 이 지방의 대부호 집안으로 금하는 바깥에 서서 눈앞의 청기와와 하얀 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대부호 대부분이 돈만 많은 이들이라고 우습게 보곤 했었다. 그런데 그의 집안은 이 지방의 명망 있는 명문 귀족으로 손꼽히기까지 했다.
어린 하인이 들어가 알린 후, 집사로 보이는 사람이 급하게 뛰어나왔다.
“아이고, 도련님 오셨습니까.”
“잘 지냈는가.”
“예,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집사는 그들 일행을 안내해 모두 집 안으로 들어갔다.
금하와 양악은 작은 원으로 안내되어 쉴 수 있었고, 육역은 곧장 내원으로 들었다.
하룻밤을 묵은 후 길 떠날 준비를 할 때, 금하는 그제야 마차가 두 대 더 늘어난 것을 알아차렸다. 원래 그들이 타고 온 것보다 훨씬 정교하여 좋은 것이다.
“내 사촌 여동생이 성묘하려 귀향하는데, 마침 우리와 동행하게 되었다.”
육역의 담담한 말에 금하는 멈칫 굳었다.
“대인 사촌 여동생도 있으세요?”
“내가 바위틈에서 튀어나온 것도 아닌데, 당연히 사촌 여동생이 있지.”
대화를 하는 사이, 섬세하게 가는 몸매에 생기 넘치는 소녀가 할멈의 부축을 받으며 문을 나섰다. 옆에는 또 시중드는 계집종 둘이 따랐다.
“큰오라버니.”
육역에게 절을 한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작년 연초에 둘째 오라버니가 장미화장수와 옥잠분을 가져와 자매들에게 주셨는데, 큰오라버니께서 특별히 준비한 것이라 말씀하셨지요. 감사합니다.”
육역이 희미하게 웃었다.
“별것 아니었다. 자, 이 두 사람은 육선문의 포쾌, 원금하와 양악이다. 이번 내 공무를 도와주고 있지. 이 여정은 그들도 함께 갈 거다. 이들은 몸에 칼을 지니고 있으니, 봐도 놀라지 말거라.”
금하는 자신이 가진 박도를 힐끗 보고는 침묵했다.
* * *
남으로 향하는 이 여정에 산길은 매우 많고, 굽이굽이 얽혀 마차의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양악은 혼수상태인 아예에게 미음을 먹였고, 그의 환부에는 약을 갈아줬다. 그런 후 마차 밖으로 기다시피 나와 마차를 몰고 있던 금하의 옆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았다.
“그는 어때?”
금하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들의 마차는 행렬의 맨 끝을 따라갔다. 다른 3대의 마차와는 그래도 거리가 있어서 누군가 들을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상처는 빠르게 아물고 있어. 그런데 사람이 계속 안 깨어나. 설마 여기가 다쳤나?”
양악이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켰다.
“그럴 리가. 내가 머리 쪽도 검사해 봤다.”
금하는 입으로야 이렇게 말했어도, 내심으로는 주저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만에 하나 소털처럼 가는 침 종류의 암기라면, 티가 안 날 수도 있어.”
양악이 말했다.
“내 생각엔 그래도 의원에게 봐 달라고 해야 할 것 같아.”
“그래. 쉴 때 기회 봐서 육 대인께 말할게.”
금하의 말에 양악은 살짝 멈칫했다. 그래도 아버지의 말씀이 바로 떠올랐다.
“……그냥 내가 가서 말할게.”
그의 말투가 이상하게 들려 금하는 양악을 흘끔 보았다.
“너 왜 그래? 난 요즘 네가 이상하더라. 마치 날 엄청 경계하는 것 같아.”
“어디가.”
양악은 그녀의 손에서 어색하게 말고삐를 받았고, 말을 모는 것에만 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금하가 볼 때 이런 모습은 분명 제 발 저린 모습이라는 것을 그는 생각지 못했다.
“빨리 말해. 이 어르신 인내심 없는 거 너 알잖아.”
금하는 손을 뻗어 그의 급소인 허리 간지럽히기 자세를 취했다.
“떠들지 마. 말 놀라면 큰일이야.”
금하가 그를 흘겨보았다.
“대장이 무언가 시키셨어? 너는 차마 내게 얘기 못 하는 거고?”
양악은 말없이 온 마음을 다해 열심히 마차를 몰았다. 금하도 그에게 강요하진 않았지만, 고개를 갸우뚱한 채 온 마음을 다해 열심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 반 잔을 마실 시간이 지난 후, 양악은 끝내 먼저 나가떨어져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어. 내게 너 잘 지켜보고, 너를 육 대인과 멀리 떨어뜨려 놓으라고.”
금하는 순간 얼이 빠졌다.
“대장이 내가 그분에게 뭔가 잘못이라도 할까 봐 걱정하시는 거야?“
“아버지도 특별히 짚어 말씀하신 건 아니야.”
양악이 말고삐를 몇 번 채쳤다.
“내 짐작으로 아버지 뜻은 네가 의도치 않게 그에게 실수하는 걸 당연히 걱정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남녀가 유별하니, 네가 그에게 이용당할까 그걸 걱정하시는 것 같아.”
“대장은 생각이 너무 많으셔.”
금하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고, 앞쪽을 향해 입을 삐죽거렸다.
“너 봐라, 집안의 사촌 여동생이 교양있고, 학식도 갖추고, 빼어나게 아름다워. 근데 어떻게 내가 마음에 들겠어?”
“그렇긴 하다.”
양악은 그녀의 말에 맞장구치다가 무심하게 물었다.
“저 사촌 여동생은 이름이 뭐야?”
금하는 그리 좋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한 번 쏘아보고서야 답했다.
“순우민. 육 대인의 외조모의 친정 큰오빠의 둘째 아들의 딸이야.”
“어?”
단번에 알아듣지 못한 양악이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정리한 후에야 반응했다.
“그녀는 육 대인 외조모의 종손녀야. 이렇게 보면, 그녀도 대가댁 규수구나.”
“그렇더라. 그녀를 모시는 유모가 우리 엄마보다 기품있게 차려입었어.”
금하는 쯧쯧 혀를 찼다.
* * *
정오의 태양은 그야말로 강렬했다. 일행은 가까스로 작은 가게를 찾아, 쉴 수 있었다. 그러나 가게에 있는 건 밀가루로 만들어 구운 따빙(*대병大饼.)과 산토끼고기뿐으로 만들어 내놓은 것도 변변치 않았다. 순우 낭자는 말할 것도 없고, 시중드는 계집종들까지 다들 미간을 찌푸렸다.
사촌 여동생이 입맛이 없어 먹지를 못하니, 육역은 주인에게 조금 더 담백한 요리를 만들어 내오게 했다.
옆에 있던 금하는 이상하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런 상황도 재미없어져 그녀는 따빙을 들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금하는 마부가 말에게 물을 먹이는 것을 보면서, 멍하니 따빙을 뜯어먹었다. 오래지 않아 따빙은 다 삼켰건만, 대체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고, 그저 배만 불렀다.
말에게 물을 먹인 마부 둘이 그녀의 곁을 스쳐 곧장 가게로 들어갔다. 고개를 돌린 금하는 그들의 뒷모습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미간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그때 토끼 다리 하나가 옆에서 쑥 나왔다.
“토끼 고기가 좀 질기다. 조금이라도 먹어.”
양악의 말에 금하는 고개를 저었다.
“너 먹어라. 날이 뜨거워서 난 못 먹겠다. 너 저 마부 둘 봤어?”
양악도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아 손을 거뒀다.
“봤어. 무예인이지?”
“평범한 무예인이 아니야.”
금하가 눈썹을 추어올렸다.
“저 사람들 걷는 모습을 봐. 어디가 하수들 같니.”
“대부호의 마부는 평범한 집 마부보다 기백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게다가 순우 낭자는 먼 길 가는 거라 외조모께서 능력 출중한 사람 몇 딸려 보내 호위하게 하는 것도 인정과 도리에 맞지.”
양악이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왜? 너는 저들한테 문제가 있다고 의심해?”
“마부 같지 않아. 넌 잊지 말고 육 대인께 한 마디 상기시켜 드려. 저 두 사람 더욱 주의하시라고.”
금하가 그에게 당부했고, 양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대화를 하는 사이, 누군가 뒤에서 다가왔다. 직감적으로 돌아본 금하는 육역과 옆에 따라온 순우민을 보고 굳었다.
육역이 양악에게 지시했다.
“마차가 요동치는 바람에 순우 낭자의 속이 안 좋아졌다. 내 생각엔 이 가게의 음식도 나름 괜찮기는 하나, 아무래도 네 요리 솜씨만은 못해. 낭자가 몇 입이라도 더 먹게 간단한 요리 두어 개 할 수 있겠나?”
“대인, 과찬이십니다. 소관은 이곳이 산중인 것이 걱정일 뿐입니다. 아마도 식재료가…….”
양악이 매우 난감해했다.
“우선 부엌에 가 보거라. 산해진미까지 만들 필요는 없다. 입에 맞기만 하면 돼.”
육역은 온화하게 뜻을 굽히지 않았고, 양악은 할 수 없이 자리를 떠났다.
혼자 그 자리에 남은 금하는 그저 그들 둘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굳이 육역도 말을 하지 않았다.
“저……, 아무리 솜씨 좋은 부인도 쌀이 없으면 밥을 지을 수 없대요. 대양이 이따 만든 게 별로라도, 대인 너무 뭐라 하지 마세요.”
금하는 순우민을 향해서도 웃어 보였다.
“순우 낭자도 잘 봐주세요.”
순우민이 온화하고 부드럽게 웃었다.
“원 낭자,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제가 여러분께 폐를 끼치고 있는데요. 여러분들께서 양해해 주시기만 바랄 뿐이어요.”
인사치레의 형식적인 말이야 금하가 자신 있는 분야다. 그녀도 곧바로 웃어 보였다.
“산길이 울퉁불퉁 험해 앞으로 가기가 힘들어요. 날도 덥고요. 우리도 입맛이 없는데, 아가씨는 당연하죠.”
“당신들은 포쾌라 종일 동분서주하네요. 매우 힘들죠?”
“본분이고, 모두 당연한 거죠.”
순우민의 물음에 금하는 웃으며 답했다.
“사실 지금까지 온 길은 그래도 괜찮았어요. 만약 큰비라도 만난다면, 그게 정말 고생이에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먼 하늘가에는 낮고 무거운 천둥소리가 한바탕 대단하게 울렸다.
육역은 그녀를 흘끔 보았을 뿐 별다른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는 돌아서 안으로 들어갔고, 그녀에게 웃어 보인 순우민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금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먼 곳을 조망했다. 과연 하늘 가에는 새카맣게 구름이 드리워졌다.
“아마도 지나는 구름이겠지. 꼭 비가 오지는 않을 거야.”
그녀는 자신 없게 중얼거렸다.
* * *
양악이 만든 훌륭하고도 간단한 요리를 먹고, 일행은 다시 길을 떠났다. 채 한 시진이 되지 않았는데, 억수 같은 큰비가 하늘에서 쏟아졌다.
애당초 산길은 험했고, 길은 감당하지 못할 만큼 진창이 되었으니, 더욱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었다.
금하가 탄 마차는 물건이 가장 많이 실리기도 했고, 안에는 또 아예가 있었기에, 마차중에서 가장 무거웠다. 마차는 때때로 진흙 구덩이에 빠지곤 해 그때마다 금하와 양악은 막 쓰는 담요를 정신없이 마차 바퀴 아래 깔았다. 그리고 말에 채찍을 휘두르며 마차를 밀었고, 그러느라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었다.
이렇게 해도 어떤 구덩이는 빠져나오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히 육역이 앞쪽의 마부 한 명에게 그들과 함께 마차를 밀라고 해 그제야 빠져나와 앞으로 갈 수 있었다.
그들의 마차 외에 다른 마차 역시 상황이 나은 것도 아니었으니, 육역까지도 직접 마차를 밀었다. 육역이 끝내 내리지 못하게 한 순우민을 제외하고, 사람들은 전부 온몸이 흠뻑 젖었다.
* * *
날이 저물 무렵 마침내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객잔으로 들어온 후, 일행은 우선 각자 방으로 돌아가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방금 옷을 갈아입은 금하는 머리를 말리며 생각에 잠겨있었는데, 그때 마침 누군가 그녀의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연 후 그녀는 잠시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죽청색의 장포를 입은 육역이 입구에 서 있었다.
그녀는 원래 그에게 무슨 분부가 있나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방금 고민하던 일이 떠오르자, 생각을 바꾸어 급하게 그를 끌어당겼다. 그러고 곧바로 문을 닫았다.
문득 육역의 눈매가 희미하게 움찔했다.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반쯤 젖은 금하가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문을 닫자, 육역은 매우 호기심 서린 시선으로 그 움직임을 조용히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