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아예는 그가 밀어준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코 받지도 않고, 건드리지도 않은 채였다.
“왕은의 한창때 성미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고 들었지. 너는 그와 조금 닮은 곳이 있는 듯해.”
육역이 찻물을 음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그는 명을 받들어 대리사좌소경 동동의 부인과 아들을 호위하여 대비사로 불공을 드리러 갔다. 가는 도중 도둑의 흉계에 빠져, 동부인과 그 아들을 납치당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어.”
얘기를 들을수록 아예의 얼굴색이 점점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육역이 이어서 말했다.
“왕은은 중상을 입었고, 직무상 과실로 질책받았지. 그는 다친 몸으로도 도적의 행방을 쫓으려 했으나, 부상이 심하여 그만 정신을 잃고…….”
아예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를 주시했다.
“너는 병상에서 3일을 꼬박 지켰어. 하지만 애석하게도 아버님께서는 세상을 떠나고 마셨다.”
마지막으로 육역이 말한 후, 오랜 침묵이 지나서야 아예가 느릿한 어조로 물었다.
“……당신은 왕은이 내 아버지인 걸 어떻게 안 겁니까?”
“금강전사수는 제자에게만 전해지고, 네 아버지는 그때 제자를 거두지 않으셨어. 네가 세상에 살아 있지 않았다면, 나도 이 문파의 무공이 벌써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육역이 손안에서 가볍게 찻잔을 돌렸다.
“까닭도 없이 실종되었던 네가 엄가를 따르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강남에 와서 첩자 노릇을 하고 있다니, 한탄스럽고 가소로운 일이다. 왕은이 안다면, 지하에서도 아마 편치 못할 거야.”
“그 말, 무슨 뜻입니까?”
아예는 말을 꺼내자마자, 적당치 않음을 깨달아 빠르게 덧붙였다.
“나를 충동질하진 마십시오.”
“충동질? 우습군!”
육역의 어조는 냉랭했다.
“그때 동 부인을 납치한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다면, 너는 얼마든지 이 문을 나가도 좋다.”
“도적은 고소풍.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습니다.”
“흥! 고소풍은 보잘것없는 산적에 불과해. 진정 배후에서 지시한 사람이 누구인지, 네가 정말 알고 있나?”
아예는 순간 멍해졌다.
“배후에서 지시한 사람?”
육역의 어조는 여전히 담담했다.
“대리사 좌소경 동동에게는 심련이라는 좋은 친구가 있었다. 심련은 엄숭을 탄핵했다는 죄명으로 보안주로 좌천되었고, 일반인이 되었지. 길을 떠나던 그 날, 동동이 그를 배웅했다.”
아예는 한참을 기다렸으나, 육역의 말은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 사람을 그저 배웅하러 간 것뿐인가요?”
그예 아예는 참지 못해 물었다.
“넌 그들의 일 처리 방식을 분명 아주 잘 알고 있을 거다.”
육역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소풍이 동 부인을 납치하여 얻은 약속은 일이 끝난 후 네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받는 것, 금의위가 되는 것이지.”
아예는 오랫동안 넋이 나갔다.
“……그러니까, 내 아버지의 죽음도 그들의 계획안에 있었던 거군요.”
“그건 계획조차 필요 없던 거야. 네 아버지가 부상으로 사직하던지, 아니면 직무유기로 면직되어 처벌을 받던지, 그들에게는 차이가 없는 일이다.”
육역이 동정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네가 그리 가벼이 경성을 떠났고, 어쩌다 강남에 머물며 첩자 노릇을 하고 있냐는 것이야.”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갑자기 많은 빚쟁이가 밀어닥쳤습니다.”
결코 전부 말한 것이 아니었건만, 아예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화를 내며 일어나서는 경계의 눈빛으로 육역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이렇게 말한다고 내가 걸려들 거라 생각해?”
“나는 네가 그래도 구제 불능의 상태가 될 만큼 미련하진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쳇, 건방진…….”
벌떡 일어나 문을 나선 아예의 신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방 안에 남은 육역은 아예가 마시지 않은 찻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은 더없이 복잡해졌다.
* * *
운하 수리자금을 찾은 후, 유 상좌가 상주서를 써 올렸다. 일행은 양주에 남아 성상의 회답을 기다리고 있을 뿐으로 하루하루가 더할 나위 없이 한가로웠다.
성 밖으로 나간 금하는 야생닭을 잡아 대장의 몸보신을 해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좋지 않은 운에 종일 돌아다녀 봐도 야생닭은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 홰나무 꽃을 많이 따서 대양에게 홰꽃밥을 해달라 할 거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의관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문 앞에서 때마침 사소를 만났다.
아예 때문에, 그리고 상관희가 자신에게 여전히 불만이 있는 것을 알기에, 금하는 그동안 차마 오안방에 갈 수가 없었다. 이런 때에 사소를 맞닥뜨린 금하는 그에게 분명하게 설명해야 할 그 일이 생각나 그를 의관으로 재빨리 끌고 들어갔다.
“어째 며칠을 그림자도 안 보이냐. 넌 뭐가 그렇게 바빠?”
사소가 들어가며 물었다.
“오빠, 앉아 봐. 내가 할 얘기가 있어.”
금하는 그를 후원의 돌걸상에 눌러 앉혔고, 표정마저 정색했다.
“대장께서 내게 다 얘기하셨어. 오빠가 우리 엄마한테 혼담을 넣으려 한다는 바로 그 일 말이야.”
그 말에 사소의 얼굴도 온통 진지해졌다.
“그래, 나도 계속 생각 중이었다. 경성의 관례는 내가 잘 몰라. 빙례(*신랑집에서 신부집에 보내는 예물.)는 얼마나 해야 격식에 맞아?”
“아니야, 오빠. 우리가 지금 빙례 얘기할 때가 아니라고…….”
금하가 계속 이어 말하려고 하는데, 뒤에서 양악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금하 도련님아, 네 어머님이 또 편지 보내셨다.”
그가 편지 하나를 그녀에게 전해 주고는 손을 뻗어 그녀가 메고 있던 광주리를 받았다. 그가 광주리 안의 홰꽃을 떼며 중얼거렸다.
“두세 끼 만들기 충분하겠다.”
금하는 편지를 펼쳐 대충 한 번 읽고 미간을 찡그렸다. 곧이어 다시 한번 세세히 정독하고는 불만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리 엄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지? 이건 사기 치는 거잖아!”
“왜 그래?”
사소가 의아해하며 묻자, 홰꽃을 따던 양악이 웃으며 말했다.
“네 어머니는 이 혼사를 성사시키기로 굳게 결심하신 거 같아.”
“무슨 혼사?”
사소는 점점 더 영문을 몰라 했다.
금하의 어머니는 금하와 역가의 셋째 공자와의 혼사를 서둘러 성사시키기 위해, 금하의 사주팔자를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역가의 셋째 공자와 궁합이 매우 잘 맞는 사주를 금하의 것이라며 거짓으로 만들어냈다. 이번에 온 편지는 금하에게 그 거짓 생년월일의 사주팔자를 명심하고, 절대 실수로 입 놀리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내용이었다.
양악의 설명을 들은 후, 사소는 그제야 이해가 되어 울상인 금하를 바라보았다.
“너 어머니한테 나에 대해 말씀드려. 나는 사주팔자 따지지 않아.”
맞다. 일은 하나씩 해야 해. 먼저 눈앞의 이 일을 해결하자.
깊게 숨을 들이켠 금하는 마음을 다잡으며 사소의 어깨를 거듭 두드렸다.
“오빠는 정말 의리가 있어. 하지만 이 혼담은 그만두자.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첫째, 우리 집은 경성이고, 오빠는 양주에 있지. 우리 엄마는 분명 나를 이렇게 멀리 시집보내기 섭섭하실 거야. 나도 오빠한테 처가살이하라 하기 미안해.”
그녀가 굳센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 난 포쾌 일을 좋아해. 오빠는 강호인이고, 나는 관가 사람이야. 이것도 진심으로 불편한 게 많아. 요컨대, 한마디로 말해서, 오빠의 호의는 내가 마음속 깊게 감명했어. 혼사 같은 게 이뤄지지 않아도 우리의 정은 그대로 이어질 거야.”
그녀가 말을 끝냈어도 사소는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알고 보니 네가 서생 그런 종류를 좋아했구나?”
“당연히 아니지. 우리 엄마 쪽은 내가 또 무슨 수든 생각해내야 해.”
금하는 근심스러운 눈빛으로 양악을 바라봤다. 하지만 양악은 그녀를 외면하며 다른 곳을 바라봤다.
“나 보지 마. 나는 절대 너희 어머니 적수가 아니야. 곧 경성으로 돌아갈 테니, 너는 얼른 네 스스로 방법을 생각해 봐.”
“대장께 우리 엄마한테 말씀드려달라고 할까? 내가 아직 어리니 성혼은 서두르지 말고, 두어 해는 더 기다리는 것이 어떠냐고 말야.”
금하는 양정만이 머무는 사랑채로 가려다가, 오히려 양악에게 붙잡혔다.
“육 대인이 지금 안에 계셔. 너는 잠시 기다렸다가 들어가.”
“육 대인이 안에 계신다고?”
금하가 한참을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댔다.
“그분이 뭐 때문에 대장을 찾아오셨어?”
양악이 고개를 저었다.
금하는 그를 향해 소리 없이 손짓했다. 살금살금 다가가 문틈으로 힐끔 보려고 하는데, 때마침 누군가가 안에서 문을 열었다.
―― 육역이 바로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육 대인.”
코끝이 거의 부딪칠 뻔한 금하는 급히 뒤로 한 보 물러섰다.
육역은 손을 뒤로해 문을 다시 닫고서야 그녀를 바라보았다.
“듣자니 네 경사가 가까워졌다지. 내가 널 축하할 차례군.”
“무, 무슨 경사요?”
“네 어머니께서 궁합을 보시기 시작하셨으니, 다음은 바로 좋은 날을 택일하여 신부집에 알리는 납길의 차례지.”
그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어떻게 대인까지 다 아세요?”
금하는 대장의 입이 사실은 너무도 허술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아봤다.
천천히 걸어 돌계단을 내려가던 육역은 그녀의 곁을 지나치며 무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아깝군. 나는 조금 전에야 양 선배의 북진무사 차출을 신청했는데…….”
‘북진무사’ 이 네 글자를 듣자마자 금하는 우뚝 몸을 세웠다. 그의 뒤를 따라가며 급하게 물었다.
“왜 대장을 북진무사로 차출하려 하세요?”
“선배님의 다리 상처는 적어도 2개월은 더 요양해야 한다. 차출하게 되면, 그는 제대로 요양할 수 있고, 육선문도 뭐라 할 말은 없게 된다.”
육역은 돌 탁자 쪽으로 걸어갔다.
“너와 양악은 그의 수하라 함께 차출되었다.”
“대인 생각하시는 것이 역시 주도면밀하십니다!”
금하의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그 말씀은 대장이 양주에 남아 요양하실 수 있다는 거죠?”
“당연히 할 수 있지. 다만.”
“다만 뭔가요, 대인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소관이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육역이 마치 곤란한 일이 있는 것처럼 잠시 사이를 두자, 금하의 어조는 다급해졌다.
“나는 곧 절강으로 가게 될 게다. 수하 없이 갈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네가 여기서 할 일 없이 한가할 테니 데리고 가 심부름을 시켜도 그런대로 괜찮을 것 같긴 하다.”
육역의 어조는 담담했다.
“하지만 듣기로 네 경사가 가까웠다지. 성혼을 위해 경성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조급할지 모르겠군.”
“그럴 리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