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법당 앞으로 돌아온 육역은 매우 기분이 유쾌해 보였다.
“날이 늦었습니다. 상관 당주께서도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으시겠지요. 저 때문에 지체 마시고, 성으로 돌아가시죠.”
상관희는 여전히 영문을 몰랐다. 그러나 그와 함께 더는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내심으로는 기뻐하며 바로 산에서 내려와 성으로 돌아갔다.
* * *
하늘에서 떡이 뚝 떨어지는 이런 비현실적인 일에 대해선 금하도 여지껏 꿈도 꿔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온 세상에 칼이 떨어질 정도의 어려움이 닥치지 않는 한, 하늘께서 이미 돌봐주시고 계신 거라 생각해 왔다.
그래서 유 상좌가 육역의 옷을 다 빤 그녀를 아문으로 가보라고 했을 때, 금하는 그다지 많은 생각을 해 보지도 않았다.
양주 아문 사람은 그녀에게 말했다. 최근 호적 조사 중에 누군가 성 북쪽에 방 한 칸을 임대했고, 그것을 반년 동안 빈방으로 내버려 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용모가 기술된 것으로는 주현이와 생김이 매우 닮았다고 한다.
양주 아문 사람은 이 사건은 육선문의 책임 하에 있는 것이라면서 빈방의 주소를 그녀에게 주며 조사하여 단서를 찾으라고 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그곳으로 가보았다.
그곳은 별 이상할 것 없는 평범한 민가로 안뜰로 들어가 보니, 텅 비어있었다. 집 안 역시 텅 비어있었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니, 역시나 텅 비어있었다. 다만 그곳에 사주식 침상이 놓여 휘장이 아래로 드리워져 있었다.
이미 무수한 사건 처리를 했던 경험에 비추어, 금하는 휘장을 열었을 때 시신을 볼 수도 있을 거라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시신이 없는 대신 그곳엔 박달나무 상자 8개가 놓여 있었다.
상자 위에는 자물쇠뿐 아니라 관부의 봉인 종이도 붙었다.
어렴풋이 무언가를 느낀 금하가 봉인 종이를 벗겨냈다. 그리고 갖고 다니는 작은 도구로 바로 열쇠를 열고 상자의 뚜껑을 들어 올렸다.
――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백은이었다. 한 덩이 한 덩이 빼곡하고 가지런히 붙어있었다.
그녀는 백은 한 덩이를 가지고 나와 은괴의 밑부분을 살폈다. 제조 문양이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 바로 그 잃어버린 운하 수리자금이었다.
양주에 온 지 수십일.
실마리란 처음부터 한결같이 없었다. 진정 애타게 찾으려고 할 때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으나, 아무 생각이 없을 때 오히려 우연히 찾게 된다고 했던가. 그 말대로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이렇게 찾게 되다니.
금하는 깊게 숨을 들이켜며 천천히 상자의 뚜껑을 덮었고, 이 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신경 쓰지 않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건만, 주의해서 확인하고 나자 그녀의 미간은 점점 더 바짝 일그러졌다.
모든 걸 조사한 후, 그녀는 마지막으로 원래의 모습대로 상자와 휘장을 돌려놓고, 묵묵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양주성의 거리를 아무런 목적도 없는 것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에서야 관역으로 돌아왔다.
육역이 관역으로 돌아왔을 때, 제일 처음 본 것은 금하가 돌계단에 무릎을 안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근심하는 얼굴로 완전히 정신이 나가 있어 그의 발걸음 소리도 거의 못들은 것 같았다.
“옷 몇 벌 빨았을 뿐인데 이리 억울해하는 것인가?”
그가 웃으며 물었다.
그의 음성을 듣고서야 금하는 문득 정신이 돌아왔다. 돌계단에서 튕기듯 일어나 서둘러 입을 열었다.
“대인, 돌아오셨어요!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말해.”
“여긴…….”
육역의 작은 원 안이라 해도 여전히 이곳은 적당치 않았다.
“들어가 말하겠습니다.”
육역은 불만 없이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긴장하여 문과 창을 빈틈없이 닫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우습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금하는 고개 들어 대들보를 바라보고, 또 고개를 숙여 침상 밑까지 검사해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다. 그러고도 그녀는 여전히 안절부절하지 못 했다.
“이러고 말해도 누가 들을 수 있을까요?”
잠시 생각하던 육역이 자신의 침상을 가리키며 진지하게 말했다.
“이불 속에 들어가 말할까?”
금하는 침상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고, 육역은 웃음을 겨우 참았다.
그녀는 육역을 끌고 탁자로 가 앉아서는 그의 귓가에 가까이 대고 여차여차 이렇다 하며 한바탕 얘기를 풀어놨다.
“은자를 찾았군. 좋은 일이네.”
육역은 당황함이 전혀 없이 여느 때처럼 매우 평온했다.
금하는 의혹에 찬 눈빛으로 그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잠시 후, 다시 그의 귓가에 가까이 대고 여차여차 이렇다며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음, 상자는 잘 잠겨 있었고, 봉인 종이 역시 그대로였어.”
육역은 그녀가 말하는 걸 잘 듣는 한편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집은 누군가 청소를 했는데, 하루를 넘기지 않은 모습이었고…….”
“쉿!”
금하는 잔뜩 미간을 찡그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이내 결의를 굳힌 것처럼 그의 귓가에 대고 마지막 한 마디를 꺼냈다.
그녀는 육역이 매우 놀랄 거라고 여겼다. 아니, 적어도 조금이라도 놀라며 의아해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나는 진즉 알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가볍고 온화했다.
“알고 계셨어요?”
금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이 일이 엄세번과 관련이 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었어요. 아마 그가 사람을 써 은자를 숨겨놨겠죠. 그러나 이 은자들이 금고 그 안에 그대로 있었을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했어요. 그럼 처음부터 이 은자는 잃어버린 적이 없던 거예요! 대인은 이게 대체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계세요?”
“위로는 양주지부부터 아래로 은자의 창고를 관리하는 이사吏司, 그리고 양주 아문, 제형안찰사사까지…….”
육역은 잠시 말을 끊었다. 여전히 그는 매우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들 전부 은자는 처음부터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건 그들 모두가 함께 손잡고 짠 판이군요.”
금하는 가슴을 위아래로 들썩거리며 끊임없이 분개했다.
그녀는 엄숭이 막강한 권력을 온 나라에 휘두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가 되어서야 권경주야权倾朝野라는, 막강한 권력이 전 조정과 민간을 압도한다는 이 네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뼈가 사무치도록 깨닫고 말았다.
그런데 왜 하필 은자는 오늘 갑자기 튀어나온 거야?
육역을 바라보던 금하는 문득 그가 배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순식간에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가 말했다. 그자는 그를 자신의 발아래 두고 짓밟고 싶어 한다고.
그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던 그녀의 손바닥에 ‘시약示弱’이라는 글자를 썼었다.
스스로 약점을 내보였던 그.
아아, 그랬구나.
금하는 육역의 앞에 천천히 웅크리고 앉았다.
그가 엄세번의 앞에서 비굴하게 아첨할 수밖에 없던 것이 생각났고, 이것은 그녀 자신이 허리를 굽히고 비굴해지는 것보다 더욱 그녀를 견디기 힘들게 했다.
금하는 시선을 들어 육역을 바라봤다.
“그래서 배에서 대인이…….”
“그뿐이 아니지.”
육역이 담담히 말했다.
“나는 구경의 그 생신 선물 전부를 그에게 보냈어.”
이런 관료사회의 일이란 금하에게는 알 듯 말 듯 하다가도 결국은 뭔지 모를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음, 물건이 오히려 제 가치를 충분히 발휘한 거군요. 그래서……, 이 사건은 끝난 셈인가요?”
육역이 빙긋 웃었다.
“그래. 끝났다.”
거대하고 끝도 없는 좌절에 에워싸인 채 금하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 지금껏 이런 사건은 처리해 본 적이 없어요. 애별리에 있던 여인의 시신 몇 구는 이렇게 헛되이 죽은 거군요. 이름도 없고, 그들을 찾는 이도 없이.”
“……언젠가는…….”
육역의 말이 끊겼다. 머릿속에 홀연 떠오른 것은 절에서 본 그 불상이었다.
그 날이 얼마나 더 걸릴까, 그는 알지 못한다.
과연 그 날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그 역시 그는 알지 못한다.
다만 지금은 눈앞의 이 아이가 엄세번과 더는 엮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육역은 안도할 수 있었다.
* * *
깊은 밤이 되어 육역은 방안에 홀로 앉아 먹을 갈고 상소를 썼다. 창밖에서 넘어온 밤바람에 탁자 위의 등불마저도 맹렬하게 일렁거렸다.
“나는 너를 아주 오래 기다렸지.”
육역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글을 쓰며 담담하게 말했을 뿐이었다.
밤의 어둠은 고요하고, 바람이 나뭇잎을 쏴아 스치는 소리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후, 검은 그림자 하나가 건물 지붕에서 몸을 날려 뛰어내렸다. 마치 낙엽처럼 가볍게 날아 바닥에 내려앉고는 차가운 시선으로 창 안의 육역을 바라봤다.
“탁자에 차가 있다. 들어와 잠시 앉아 내가 이 상주서를 다 쓸 때까지 기다려.”
육역은 고개를 숙인 채 계속 공문을 써 내려갔다.
그 자리에서 움직일 것 같지 않던 아예는 잠시 후 문을 열고 들어가 탁자에 앉았다.
붓이 지나는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한 실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육역은 붓을 내려놓았다. 방금 다 쓴 상주서를 후후 불어 말리며 웃었다.
“운하 수리자금 사건이 마침내 끝났다. 넌 경성으로 돌아갈 건가?”
아예는 냉랭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당신이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릅니다.”
“만약 알아듣지 못했다면, 네가 여기 올 리 없지.”
육역이 상주서를 포개어 접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넌 이 무공을 갖고서도 오안방에서 3년이나 틀어박혀 있었는데, 억울하다는 생각은 안 드나? 아니면, 가기엔 미련이 남아?”
아예는 그를 바짝 주시했고, 육역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내가 강호인은 아니지만, 강호의 규칙 정도는 조금 알고 있다. 방을 배반한 자에게 삼도육동의 형벌이 빠질 순 없지. 하지만 너처럼 오안방에 잠복한 금의위라면 또 모르겠다. 상관 당주가 널 어찌 처리할까?”
아예의 눈 속에 순간 살의가 일었다.
“하지만 안심해라. 내가 얘기하려고 했으면, 오늘 벌써 얘기했어. 널 기다린 이유는 너와 거래를 하기 위해서야.”
육역은 그에게 시선도 두지 않았다. 유유히 장포를 들어 올리고 앉아 차 두 잔을 따랐다. 한 잔은 자신에게, 또 한 잔은 아예에게 밀어주었다.
“난 지금까지 누군가와 거래를 한 적이 없습니다.”
아예의 어조는 냉담했다.
“아주 좋군. 네겐 오늘이 정말 좋은 시작이야.”
육역의 웃음 띤 얼굴이 온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