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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지하 (114)화 (114/224)

114화

금하가 등을 돌린 동시에 똑바로 날아간 옷가지는 육역을 정면으로 덮어버렸다. 옷가지를 받아든 육역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옷을 입던 그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상처 치료할 때, 다 보지 않았나?”

금하는 투덜거렸다.

“그때는 상황이 위급했는데, 어떻게 같아요. 대인 정말 이런 습관들이시면 안 돼요.”

금하가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육역의 ‘아’ 하는 소리가 들려 그녀는 다급히 홱 돌아섰다.

그는 한쪽 소매만 걸치고 있었다. 아마도 움직여 등의 상처가 자극이 된 듯 육역은 미간을 찡그린 채 이것 보라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하는 어쩔 수 없이 재빨리 다가가 그가 옷을 챙겨 입도록 도왔다.

“어떤 습관을 들이면 안 된다고?”

육역은 아예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녀의 손이 허리를 감싸고 끈을 대신 매주는 것을 보며 입매를 살짝 위를 향해 올렸다.

그의 뒤에 선 금하는 끈의 매듭을 세심하게 지었다.

“그건……, 제 앞에서 옷 갈아입으시면 안 된다고요.”

육역이 돌아서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어조는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했다.

“네가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을 거야. 조만간 익숙해져야 해.”

금하는 무엇을 ‘조만간 익숙해져야 해.’라고 하는지 확실히 알아듣지 못했건만, 그는 벌써 옷소매를 매만지며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급하게 따라 나간 그녀가 말했다.

“대인, 아직 열나세요, 좀 쉬셔야 하지 않아요?”

“아니.”

“저도 함께 갈래요.”

그녀는 따라나섰고, 육역은 걸음을 멈췄다.

“안 돼. 네겐 훨씬 중요한 일이 있어. 이 옷들을 빨아 놓거라. 옷에 남은 술 냄새를 조금도 남기지 말고.”

“…….”

금하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제가 이래 봬도 육선문의 포쾌인데요.”

“그래서 내가 이 중요한 일을 네게 맡긴 것이다.”

그는 찬찬히 당부했다.

“손힘을 가볍게 하고, 비벼서 망가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걸 기억해.”

육역은 화가 나 뾰로통한 금하의 뺨을 어루만지지 않으려 애써 꾹 참았다. 그렇게 돌아선 그는 빠르게 문을 나섰다.

금하가 자신을 따라오길 원치 않고, 그녀를 일부러 관역에 머무르게 한 것은 육역이 지금 만나려고 하는 사람이 아예이기 때문이었다.

아예의 성격상, 누군가에게 신분을 간파당하면 그는 전부 죽일 생각부터 할 터였다. 금하의 그 어설픈 무공으로는 근본적으로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었고 육역은 그녀가 위험에 처하길 원하지 않았다.

* * *

더없이 쾌청하고 좋은 날. 오안방의 나루터에는 사공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화물을 나르는 이, 보충 물품을 나르는 이……. 슥 한 번 훑어본 육역은 상관희가 어디에 있는지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진정 만나고자 하는 이는 아예였다.

그러나 지금 당장 찾으려는 건 오히려 상관희였다.

이곳에 육역이 나타나자, 상관희의 눈에는 의아하다는 빛이 번뜩 스쳤다.

그녀와 육역의 비공식 거래에 있어서 만남은 줄곧 사전 약속이 돼 있었고, 그동안 이런 갑작스러운 만남은 없었다.

“육 대인께서 이쪽으로 오시다니,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탐문하는 그녀에 눈빛에는 경계의 뜻도 담겼다. 빙긋 웃으며 바라보던 육역은 옆에 있는 아예도 담담하게 훑었다.

“별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단지 강남에 온 지 여러 날인데, 사건은 줄곧 단서를 얻지 못하여 마음이 답답하더군요. 상관 당주가 양주인이라는 것이 생각났는데, 오늘 시간이 좀 괜찮으시면, 저와 양주풍경을 즐기시렵니까?”

산수풍경을 즐기러 가자는 그의 제안은 뜻밖이었다. 상관희는 육역이 무슨 속셈인지 알 수가 없었으나, 바로 거절하기도 곤란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요즘 잡무에 시달린 터라 마침 나가 둘러보려 했습니다. 다만 저란 사람이 말재주가 없어, 좋은 안내자는 아닙니다. 대인께서 꺼리지 말아 주십시오.”

“상관 당주께서 함께 해주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뭇 경치들이 따라올 수가 없지요. 어찌 싫다할 수 있겠습니까.”

육역이 웃으며 말했다.

물처럼 가라앉은 얼굴로 줄곧 말없이 옆에 서 있던 아예는 상관희가 말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는 함께 따라나섰다.

“흠, 이 아우님은 상관 당주가 나와 함께인 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육역은 상관희를 일부러 떠봤다. 그예 아예를 돌아본 상관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분부했다.

“넌 따라올 필요 없다.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아예는 속으로야 비록 불만스러웠지만, 차마 거역하지 못해 공수하며 물러났다.

* * *

그제는 관군 수천이 토벌에 나서서 내지에 잠입한 사십여 명의 왜구를 철저히 섬멸했다. 그 덕에 양주성 교외는 민심의 흉흉함도 거의 사라지고, 봄날은 따뜻하여 길 가는 행인도 이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성의 서쪽 교외 평산 아래.

육역과 상관희는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가 산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 종소리는 왜구에게 죽음을 맞은 스님들을 기리기 위해 울리는 것이었다.

“귀방 다친 동료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그의 물음에 상관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육역이 품에서 작은 도자병을 꺼내어 건넸다.

“이 약을 써보셔도 됩니다. 동양인의 기이한 독에 매우 효과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상관희가 받아들고 물었다.

“대인께선 저를 찾으신 것이 이 일 때문인가요?”

육역은 웃으며 반문했다.

“흠, 저와 단둘이 구경을 나왔는데, 제게 꼭 다른 저의가 있어야 합니까?”

“대인 무슨 그런 말씀을…….”

“하하하, 농담입니다.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육역이 웃으며 다시 물었다.

“참, 오늘 그 아우님은 당주에 대한 충심이 매우 지극하더군요. 그는 어릴 때부터 당주를 따랐습니까?”

“아예 말씀이시군요.”

상관희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3년 전 제가 동가 수채에 갔을 때 만났어요. 그때 마침 그를 구할 수 있었고, 아예는 방에 남았습니다. 아마 제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래서……, 나이는 어리나, 일하는 것이 세심하지요.”

상관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예는 평소 말수가 거의 없어서 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사실 그녀도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일을 하는 것이 매우 확실했고 함께 한 날이 오래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믿게 되고 신뢰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육역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바르고 곧은 태도에 성실까지 하니, 매우 바람직하군요. 보기에는 소방주와 비슷한 나이 같던데. 성격은 천지 차이입니다.”

사소를 떠올리자, 상관희의 마음은 여러 가지로 복잡해져 그녀는 쓰게 웃었다.

“사소는……, 이번에는 대인께서 빠져나갈 길을 만들어 주셔서, 저는 참으로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성격으로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모릅니다.”

“제가 큰 일을 한 것도 아닌 것을요.”

육역이 손을 들어 손차양을 만들었다. 해를 가리는 척하며 먼 곳 야생 버드나무 숲을 바라보니 그사이에 사람이 숨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육역은 희미하게 웃었다.

역시 따라왔어. 넌 상관희를 진정 아주 많이 걱정하고 있군.

* * *

두 사람은 산을 천천히 올랐다. 절은 본래 크지 않고, 참배하는 이도 그리 많지 않았다. 겨우 남은 스님 몇이 불전에 꿇어앉아 망혼의 제도를 위한 경을 읽고 있었다.

육역은 불전에 절을 몇 번 올린 후, 시주함 앞으로 갔다. 품속에서 몇 장의 은표를 꺼내 금액은 보지도 않고 그곳에 넣었다.

바라보던 상관희는 살짝 의아함이 들었다. 그녀는 육역 같은 이런 고관의 아들은 관료사회의 알력을 볼 만큼 보았으니, 대부분 신 같은 것에 신경쓰지 않고, 예불도 단지 분위기를 맞출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육역의 표정은 경건하고 정성스럽다. 전혀 거짓 같아 보이지 않았다.

“대인, 심중에 원하는 것이 있으신지요?”

그녀의 물음에 육역은 살짝 웃었을 뿐 답은 하지 않았다. 그는 대전을 돌아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지장왕보살 앞에 멈췄다.

―― 거대한 종 아래, 아주 작고 작은 보살상이 조용히 서 있었다.

중생도진(衆生度盡, 중생을 모두 제도하는 것이),

방증보제(方證普提, 깨달음의 완성이니),

지옥미공(地獄未空, 지옥이 텅 비기 전에는),

서불성불(誓不成佛, 절대 성불하지 않으리).

육역은 방석에 무릎을 꿇어 몇 번 더 절을 올렸다. 그러니 옆에서 지켜보는 상관희는 더욱 이해할 수 없어졌다.

육역이 일어서 그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상관 당주, 이곳은 자주 오지 않습니까?”

상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예불은 노방주를 모시고 대명사로 주로 가곤 하니, 여긴 확실히 자주 오진 않아요. 그곳의 참배객이 여기보다 많습니다.”

“절이 아무리 작아도, 바치는 것이야 모두 진짜 부처께 바치는 것이지요.”

대화를 하는 사이, 육역은 순간 시선 끝으로 사람의 그림자가 스친 것을 흘끔 보았다.

이내 그가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한참을 걸었더니, 목이 조금 마르는군요. 제가 뒤꼍에 가서 우물이 있나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죠.”

상관희가 고개를 끄덕일 틈도 주지 않고, 그는 바로 큰 걸음으로 사라졌다.

상관희의 아름다운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육역의 이번 행보가 매우 이상하다고 줄곧 생각했으나, 또 대체 어디가 이상한지 그녀는 명확히 말할 수도 없었다.

육역은 벽 모퉁이에서 방향을 바꾸었다. 그렇게 나는 듯 발을 스치고, 몇 번이나 몸을 날려 절의 후원에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아예를 막아섰다.

은행나무 아래 서 있는 아예는 어둡고 깊게 가라앉은 얼굴로 꼼짝도 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온다. 나뭇잎은 흔들려 그의 얼굴 위에도 빛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육역은 그를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태연자약하게 우물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우물물을 길어 올려서 양손으로 물을 떠 씻고는 마치 그는 전혀 보지 못한 것처럼 다시 돌아서 걸어갔다.

아예는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그는 육역의 뜻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직접 육역이 있던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그곳 우물가에서 햇빛 아래 반짝이는 작은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우물가에 단정하게 놓인 것이 얇디얇은 잎 모양의 금장식이란 것을 확인한 순간, 아예는 그 자리에 움찔 굳었다.

그는 그것이 적란엽의 것임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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