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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지하 (112)화 (112/224)

112화

금하가 선실을 나가자마자, 엄세번은 품 안에 끌어안고 있던 시녀를 밀어냈다. 육역에게는 턱짓으로 가리키며 웃어 보였다.

“역시 아직은 어린 아가씨군. 그래도 끈기는 있는 편이야. 내가 예상한 시간보다는 더 길게 버텼어.”

“이리도 호의를 무시하는데, 대인께서 관용을 베푸시니 다행입니다.”

육역이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저도 아버님의 체면을 보아 저 아이에게는 다소 관대한 면이 있습니다. 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저 아이의 사부 양정만은 다치기 전 아버님의 유능한 부하였습니다. 아버님께서 옛정을 많이 그리워하시며 이번에 제게 명의를 찾아 그를 치료해주라 하셨지요.”

이 말은 언중유언, 말 속에 또 다른 뜻이 들어 있었다. 그걸 엄세번이 어찌 못 알아듣겠는가.

그가 바로 웃으며 말했다.

“아무렴. 이런 채 익지도 않고, 운우지정도 모르는 어린 아가씨는 흥미가 없네. 자네는 내가 가진 이것들을 좀 보게. 어느 것을 보아도 저 아이보다는 훌륭하지……. 자네 마음대로 선택해 봐. 나를 남처럼 소원하게 대할 필요가 없어. 내가 오늘 밤은 장담하는데, 자네가 가장 좋아할 만한 것으로 자넬 모시게 하지.”

육역은 웃으며 끊임없이 거절했다.

“안 됩니다, 여인들 모두 대인의 관심과 총애를 받는 이들인데, 그럴 순 없지요.”

“날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니까.”

엄세번의 눈짓을 하자, 두 명의 맨발 소녀가 육역의 몸에 기대고 달라붙었다.

“자네가 보낸 추응도가 실로 내 마음에 쏙 들었으니, 자네도 마음에 드는 걸로 둘을 골라가는 것이 어떤가. 날마다 예쁜 것들을 옆에 두고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육역은 시녀의 부드러운 허리에 손을 놓고 가볍게 어루만졌다. 무슨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한참 후에야 엄세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대인……,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소관이 오늘 온 것은 대인께서 도와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어섭니다.”

“우리 사이에 구태여 남처럼 그러나. 얼마든지 말해 봐.”

말하려는 이 일이 육역에게는 상당히 곤란한 듯했다. 그는 시녀에게 우선 술을 가득 따르라 하여 한 잔을 전부 마셔버린 후에야 말을 시작했다.

“대인도 아실 겁니다. 아버님께서 제게 강남으로 와 사건 처리를 하라 하신 것은 제게 이 기회를 빌어……, 위로 한 걸음 더 나아가라는 뜻이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운하 수리자금은 찾는 것이 늦어지고 있고, 성상께서는 이미 적당히 넘기지 않겠다고 하셨으니…….”

육역은 엄세번을 바라보고 있었고, 웃는 얼굴이 상당히 어색해 보였다.

엄세번은 대답 없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자신이 지금 듣고 있다는 것을 알렸을 뿐이었다. 그러니 육역은 계속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대인께서 소관을 한 번 도와주실 수 있으신지요. 대인의 한 마디는 아마도…….”

“한 마디?”

엄세번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시다시피 소관은 직위가 낮아 하는 말도 무게가 실리지 않습니다. 양주에 온 이래, 양주 지역의 관원들은 이 사건에 관한 관심이 적다는 것을 알았지요. 단서는 적고, 쓸 수 있는 인원도 극히 제한적입니다. 양주지부 방 대인은 대인 아버님의 제자이시니, 만약 대인께서 소관을 위해 한 마디만 거들어 주신다면, 이 십만 냥의 운하 수리자금은 아마도 쉽사리 갈피를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육역의 이 말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비굴한 아첨으로 그는 눈빛까지도 매우 간절했다.

그를 응시하던 엄세번은 잠시의 침묵 끝에 바로 이어서 크게 웃었다.

“됐다, 걱정하지 마. 한마디 말이면 해결될 일 아닌가. 자네와 나, 두 집안의 교제가 오래고 관계도 매우 돈독한데, 이렇게까지 자네가 말할 필요는 없지.”

육역은 안도의 한숨을 쉬는 얼굴로 기쁜 기색을 드러냈다.

“감사합니다, 대인. 소관의 직위가 높아지는 날, 결코 대인의 은덕을 잊지 않겠습니다. 아, 그 추응도가 진품인 이상, 수집한 다른 그림도 분명 가품일 리가 없습니다. 소관이 내일 사람을 시켜 서화를 모두 배에 실을 터이니, 대인께선 신경 좀 많이 써 주십시오.”

“자네야말로 나를 알아주는 이로구만.”

엄세번은 하하하 웃으며 다시 시녀를 품 안에 안았다.

오늘 밤은 달빛이 때마침 좋았다. 노래와 춤이 흐드러진 가운데 두 사람은 사경四更까지 술을 마시고서야 자리를 파했다.

* * *

“대인, 이리로 오시지요.”

작고 정교한 유리 등롱을 든 맨발의 소녀가 앞에서 육역에게 길을 안내했다. 그는 늑대 가죽의 깔개를 밟으며 그녀를 따라 2층으로 내려왔고, 그렇게 바로 어느 선실 앞에 섰다.

시녀는 그를 위해 선실 문을 열어주었다.

“대인, 쉬십시오. 안에는 이미 주인님 분부대로 준비를 잘해 두었습니다. 만약 대인께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방울 줄을 잡아당기시면 됩니다.”

육역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방으로 들어섰다. 등 뒤의 시녀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고개 돌려 문빗장을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했지만 빗장을 걸지는 않았다.

이 선실 안의 비단 탁자보가 깔린 둥근 탁자 위에는 원래 등이 켜져 있었다. 빛은 조금 어둡다 해도 휘장이 아래로 드리워진 조각무늬 침상 안에 사람의 형체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다.

내가 오늘 밤은 장담하는데, 자네가 가장 좋아할 만한 것으로 자넬 모시게 하지.”

―― 육역은 엄세번이 했던 말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상처가 이제 막 나아 가는데 과한 술을 마신 탓일까, 육역은 온몸이 편치 않았다. 휘장을 걷어 올려 무엇인가 보고자 하는 흥미 같은 것은 전혀 없이 그는 피곤함만을 느끼며 탁자 옆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촛불이 팟 소리 내며 타오른 소리에 그는 애써 정신을 차리려 했다.

그가 생각한 모든 일은 끝났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방심은 할 수 없었다. 엄세번은 쉽게 의심을 풀지 않을 테니까. 육역의 머릿속은 묵직했고, 그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자조했다. 결코 그의 생에서 이토록 비굴하게 굴어본 일이 없건만.

피식 웃던 육역은 먼저 그 자리를 떠났던 금하를 떠올렸다. 그녀 또한 오늘밤은 길고도 힘이 들었을 텐데.

금하는 어느 선실에 있을까? 그의 옆방에 있을까? 아무 일도 없겠지?

…… 이런저런 생각이 어지럽게 일어나는데, 누군가 그의 선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누구냐?”

“대인, 잠드셨어요? 술 깨실 물을 가져왔습니다.”

문밖의 사람이 예의 있게 말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육역이 일어나 침상으로 가 앉았다. 그는 신발을 벗으며 밖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라.”

문을 밀고 들어온 시녀가 쟁반 위의 옥 그릇을 공손하게 탁자 위에 놓았다. 그렇게 그녀는 다시 나가고 문을 닫았다.

육역은 옥 그릇을 바라보았지만, 가져오는 것도 귀찮아졌다.

그는 신발을 다 벗고 침상으로 올라가 휘장을 걷었다. 술에 취한 척 누워 쉬려고 하던 그였건만, 침상의 휘장을 걷어 올리자마자 멍하니 굳었다.

―― 둥글둥글하고 흑백이 분명한 한 쌍의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도 친숙한 것이지만, 그 눈 안에 서린 분노의 기운만은 한동안 볼 수 없던 것이었다. 육역은 이렇게 그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 저도 모르게 매우 웃고 싶어졌다.

“왜 네가 있어?”

육역이 머리를 갸웃 기울인 채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며 손을 내밀어 그녀의 볼에 붙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겨주었다.

그녀, 금하는 움직일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는 듯했다. 애써 눈썹을 찡그리는 것이 힘써 무얼 하고자 함인지 처음에는 몰랐다.

육역은 문득 금하의 시선을 따라 아래를 보았다. 비록 그녀의 팔은 움직일 수 없으나, 손가락이 계속 뭔가를 그리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내 육역은 그녀의 손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동관이 있어요.’

그녀가 그의 손바닥에 쓰기를, 동관의 한쪽 끝이 이 방에 있고, 다른 한 끝은 밖에 있어 이것으로 이 방의 소리를 도청할 수 있다고 했다. 형부에 있는 특수한 감옥 몇 개에도 바로 이 동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육역은 그녀의 뜻을 이해했으나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동관이 어디에 있는지 찾는 것조차 귀찮아졌다.

이곳은 엄세번의 구역으로 당연히 그의 눈과 귀를 피할 수 없었다. 만약 피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그에게 더 큰 의심을 살 수 있었다.

‘알아.’

그 또한 그녀의 손안에 글을 썼다.

‘넌 왜 여기 있어?’

금하의 눈에서 분노의 불꽃이 튀었고, 손가락은 그의 손바닥을 간지럽게 마구 그었다.

‘분명 근육을 약하게 하는 연근산을 쓴 거예요, 저 개자식!’

육역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를 안쪽으로 옮겨 놓은 후, 옷을 입은 채 그녀의 옆으로 누웠다. 그 사이에도 그녀의 손은 여전히 그의 손 위에 놓여있었다.

금하는 옷을 사이에 두고도 그의 몸에 변함없이 열이 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걱정이 된 그녀는 손끝으로 써서 물었다.

‘대인 열나죠? 그 술 때문이에요?’

‘괜찮아.’

그는 짧은 단문으로 썼다.

금하는 아주 큰 힘을 들이고서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피곤이 가득한 육역의 얼굴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썼다.

‘엄세번은 개자식이에요!’

눈을 감고서도 육역은 손바닥이 간질거렸고, 그녀가 쓴 글자 하나하나가 느껴져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대인을 괴롭혔어요?’

그녀가 아무렇게나 휘갈겨 쓰며 물었다.

육역은 조금 전 비굴하게 아첨하던 것을 떠올렸다. 입안에 씁쓸한 쓴맛이 느껴졌지만,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전 대인이 그 앞에서는 대인 같지 않아서 매우 속상했어요.’

그녀는 계속 써갔다.

그는 잠시 여러모로 생각해 보고, 그녀의 손안에 두 글자를 썼다.

‘示弱.’

시약, 약점을 드러내다.

병법에 이르기를 적이 자신보다 강할 때 적을 물리치고 승리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때 약점을 드러냄으로써 적을 무디게 하고 적을 방심하게 한 다음, 다시 기회를 노릴 필요가 있다.

이 두 글자가 담고 있는 뜻을 열심히 고민하는 듯, 한참이 지나고도 금하의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육역이 매우 재밌다는 듯 손끝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간지럽게 긁었다.

‘그는 왜 저를 대인 침상에 데려다 놓았을까요?’

그녀가 이 일을 떠올리고는 휘갈겨 써서 물었다. 그리고 육역은 사실대로 답해줬다.

‘그가 말했다. 내가 가장 좋아할 만한 것으로 모시게 하겠다고.’

엄세번은 그의 감정을 대략 눈치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육역은 굳이 전부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 엄세번의 반응은 그가 생각지 못한 것도 아니다.

지금 상황에선 눈치챘다는 사실이 육가와 엄가, 두 가문이 체면상 사이가 틀어지지 않는다면, 크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이제까지 엄가와는 사이가 틀어지고 싶지 않았으니, 주도면밀하고 확실한 계책이란 본래부터 그에게 필요치가 않았다.

그러나 육역의 이 솔직한 말은 금하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고, 바로 다른 생각을 하게 했다.

아마 연근산의 부작용일 거야. 그래서 머릿속이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쉽게 하게 해.

‘대인이 마음에 들었던 아가씨는 엄세번이 아까워져서 대충 절 데려다가 구색을 맞춘 거예요.’

이것이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 이유였다.

침묵하던 육역은 고개를 돌렸다.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손끝으로 글을 썼다.

‘나는 마음에 든 것이 없었어.’

그건 다 똑같은 거예요. 전부 저로 대충 구색 맞춘 거라고요.

금하가 침묵하는 동안, 뱃속에서 꼬르륵꼬르륵하는 소리가 몇 번 울렸다. 그녀는 난처한 눈빛으로 육역을 바라봤다.

“배고파?”

그가 물었고, 금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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