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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지하 (111)화 (111/224)

111화

“나는 양주의 설주가 입에 맞질 않아 경성에서 여러 단지를 가져왔지. 언연, 자네 평소 마시던 것이…….”

엄세번은 육역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팔걸이 위를 몇 번 두드리더니 바로 스스로 말했다.

“추로백, 맞지?”

“대인, 기억력이 좋으십니다.”

육역은 비록 웃음기를 띤 말투였으나, 금하는 그의 모습이 평소 웃고 말하는 것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를 흘끔 보았다.

“어린 아가씨는?”

엄세번의 시선이 다시 금하를 향했다.

“양정만은 사람이 융통성이 없지. 너희들이 밖에서 술 마시는 것 또한 허용치 않았겠지?”

이 사람 대장까지 알고 있어?

금하의 마음이 살짝 두려워졌다.

“소관은 음주를 잘하지 못합니다. 대인께서 양해해주십시오.”

엄세번이 다시 하하하 웃기 시작했다.

“얼마 전, 물가 근처의 칠분각 2층에서 어린 아가씨 너는 오안방의 소방주와 둘이 두 단지 가까운 설주를 마셨어.”

칠분각, 물가 근처……, 금하는 그 밤 보았던 ‘애별리’가 떠올라 안색이 변했다.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엄세번은 금하가 머뭇거리는 사이, 이미 육역을 향해 돌아섰고 그에게 웃어보였다.

“자네는 여자들의 이런 얕은수에 익숙해져야 해. 항상 처음엔 자기는 술을 잘 못 마신다고 말하지. 하지만 나중엔 자네가 꽉꽉 채워 두 단지 정도는 먹여야 그녀를 강제로 취하게 할 수 있을 거야.”

육역이 웃으며 답했다.

“그래도 대인께선 정확히 보십니다.”

엄세번이 흥이 가는 대로 내뱉은 지시에 따라, 시녀들은 더욱 많은 물건을 옮겨왔고, 눈깜짝할 사이 원래는 텅 비어 휘장만 펄럭이던 실내가 그득하게 차버렸다.

촛대, 병풍 가리개 모두 최상품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금하와 육역 앞에 놓인 작은 탁자는 놀랍게도 상아로 만든 것이었다. 그 위쪽에 놓인 옥으로 만든 주기酒器는 투명하게 매우 반짝거렸고, 광택은 온화하고……. 아름답긴 매우 아름다웠으나, 실로 지나치게 사치스러웠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금하는 고개를 돌려 옆쪽에 놓인 동으로 만든 꽃병을 바라보았다. 안에 꽂힌 도화나무 큰 가지에는 곱고 화사한 꽃잎이 달려 이제 막 새로이 꺾어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분홍의 도화 꽃잎은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눈으로는 꽃을 바라보았지만, 머릿속에는 도화림에 시신으로 버려진 여자들을 떠올렸다.

설마……. 아니야. 도화나무는 어디에나 필 수 있어.

금하의 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어떤 내색도 할 수 없어 그녀는 이를 질끈 물었다.

시녀는 우선 과일류를 내왔다. 선덕요宣德窑(*도자기로 유명한 경덕진의 관요.)의 청자에 담긴 영곡사에서 생산된 앵두는 하나하나가 은홍색으로 굵고 실했다.

엄세번은 앵두 꼭지를 집어 앵두를 입안에 넣었다. 그리고 그는 앵두를 다 씹어 삼키기 전, 잔에 있던 술을 연이어 한 모금 마셔서 앵두의 달콤한 신맛이 술의 신랄함에 뒤섞인 것을 혀끝으로 천천히 굴렸다. 그렇게 한참을 입 안에서 음미하고서야 느릿느릿 삼켰다.

“강남 운하 수리자금 사건은 윤곽이 잡혔던가?”

그는 앵두 씨를 뱉어내며 생각 없이 묻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묻는 대상이 자신인지 아니면 육역인지 몰라, 금하는 경솔하게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래도 대인께서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육역은 엄세번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웃음을 띤 채 직설적으로 말했다.

엄세번이 뭘 도와줘?

금하는 의아한 시선으로 육역을 바라봤다. 그 역시 몸을 약간 비스듬히 의자에 기댄 모습으로 술잔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표정과 행동에 드러난 나른함이 그녀에게는 상당히 낯설게 느껴졌다.

엄세번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얘기를 좀 해 볼까. 주현이가 경성에서 호부급사중이었을 때, 상소를 올려 나를 욕하는 일이 정말 많았어. 그래도 난 그의 행동을 괘념치 않았건만, 그자는 계속 내 욕을 하더란 말이야. 그러다 결국 나도 참을 수가 없어서 아예 그를 공부의 도수청 이사랑중으로 추천했네.”

이 말에 금하는 자신이 무언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엄세번은 지칠줄도 모르고 자신을 욕한 언관을 오히려 추천했다는 말이야? 게다가 공부 도수청 이사랑중이라는 이 자리는 과외 수입이 꽤 많은 자리였다.

하지만 육역은 놀랍지 않다는 듯 담담하게 웃었다.

“만약 소관의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가 운하수리의 책임자가 된 것도 대인의 뜻이었습니다.”

이제 엄세번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넘쳐흘렀다. 마치 아이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를 생각해 낸 것 처럼 얼굴에는 흥분의 감정마저 떠올랐다.

“자네는 그가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 그가 말했지. 이 운하 수리자금은 한 푼도 모자람 없이 전부 운하 수리 용도로 써야 합니다, 하하하…….”

금하는 주현이의 부패한 시신을 떠올렸다. 엄세번과 함께 육역 역시 웃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녀만큼은 웃지 못했다. 그녀는 이 말 어디에 웃을만한 곳이 있는지 도저히 알지 못했다.

“아마 은자는 내려 보낼 때, 여러 겹으로 잘 묶었을 거야. 그는 경성에서 직접 은자를 받아, 자신의 사비를 써서 배를 임차했고, 십만 냥의 운하수리자금을 양주까지 운반했어.”

돌이켜 생각하는 엄세번의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난 그 배에 당장 사람을 준비해 뒀었지. 나는 그가 노름에 돈을 걸게끔 하고 싶었지만, 그는 신념이 굳건했어. 난 그에게 무척 탄복했다네. 다만, 후에 양주에 도착하고 미인을 만나더니, 그 역시 바른길을 걷지 못하더군. 아깝지, 참 아까워…….”

주현이가 걸은 한 보 한 보는 원래 모두 엄세번의 계획안에 있던 거였어.

금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오안방은 운하수리자금의 운송을 책임졌다. 이리 된 상황이라면, 배에서 자리를 마련해 주현이를 도박으로 끌어들이려 한 사람은 아예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육역이 고개를 저었다.

“그다지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주현이 같은 부류는 평소에 자신은 청렴결백하고, 다른 이는 지극히 혼탁하다고 여기죠. 당장 자신의 차례가 왔을 때엔 그 자신은 전혀 버티지도 못하면서요. 가장 역겨운 부류입니다.”

“맞는 말이야! 그가 만약 정말 버텼다면, 나는 그를 대단한 인물이라 존경했을 걸세.”

엄세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안타까워. 미인계를 썼을 뿐인데, 그는 버티지 못했어. 그 뒤에 더 좋은 수들이 있었는데, 쓰질 못하다니, 참 아까워.”

뒤에 더 좋은 수들이 있었는데, 쓰질 못했다……. 듣던 금하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대로라면 설령 주현이가 적란엽에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더라도, 그 뒤로 엄세번이 어떤 수를 써서 그를 다뤘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엄세번의 말에 의하면, 주현이는 새장 안의 새와 같았다. 그의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것이다. 새장 안에서 죽을 때까지.

“다른 수가 또 있습니까?”

육역은 흥미가 많은 것처럼 보였다.

“불가에는 팔고八苦가 있지. 생, 로, 병, 사, 애별리爱别离(*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 원증회怨憎会(*원한의 상대를 만났을 때 겪는 고통.), 구부득求不得(*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고통.)…….”

엄세번은 유감스럽다는 눈빛을 하며 손으로는 짝을 맞춘 앵두를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한 번씩은 돌아가야 놀만 한 데 말이지. 아쉽군. 겨우 애별리에서 그는 그만 버티지 못했어.”

애별리, 애별리……. 금하는 돌연 깨달았다. 그가 그녀에게 몇 차례나 고의로 애별리를 보여줬다는 것은 사실 그녀에게 암시를 해주고 있던 것이다.

왜 그녀에게 암시하려 했을까? 역시 재미있다고 느껴서? 아니, 그의 눈에 자신은 주현이와 마찬가지로 소일로 날을 보내는 그가 잠시나마 흥을 돋우는 놀이 인형 같을까?

“어린 아가씨.”

엄세번이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한동안 나가 있던 정신이 번쩍 들어 그를 향해 공손하게 말했다.

“대인, 분부가 있으십니까?”

엄세번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 움직일 수 없는 눈이 꼼짝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유유히 물었다.

“넌 조금 전 왜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니?”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소관이 어찌 감히 대인을 기만하겠습니까.”

그의 갑작스러운 비난이 어떤 의미인지, 금하는 순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 네가 말했지. 저 아이의 왼쪽 귀밑머리는 오른쪽 귀밑머리보다 가지런하지 못한데, 그건 창이 오른쪽에 있어서이다. 사실 또 다른 원인이 있었는데, 너는 말하지 않았어……. 이 아이는 오른손을 다쳤지.”

말을 하는 사이, 엄세번은 손을 뻗어 그 시녀를 재빨리 잡아당겼다. 조금 힘을 주자마자, 시녀의 오른쪽 옷소매 전체가 마치 벗긴 것처럼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눈처럼 하얀 어깨 위에는 두 줄기의 흉악한 붉은 채찍 자국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그가 손등으로 부드러운 피부를 가볍고 섬세하게 쓸어내리니, 옷이 벗겨진 시녀는 전율하며 소름이 돋았다.

금하는 이를 악물었다. 그 시녀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그녀가 당한 굴욕을 알 수 있었다.

“넌 비록 아가씨지만, 육선문의 포쾌 신분이야. 이런 방중의 즐거움을 모른다고 할 리는 없겠지?”

엄세번의 어조는 살짝 들떠 있었고, 눈빛에는 희롱의 빛이 가득했다. 그는 시녀의 손을 들어 올려 손목 부근의 상흔을 가볍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건……, 소관은 보고 들은 것이 적습니다. 대인께서 용서하십시오.”

금하는 그가 말하는 방중의 즐거움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혐오감을 누른 채 공손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육역은 결코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고개를 한껏 젖혀 술 한 잔을 마셨다. 옆에 있던 시녀가 보고는 급히 다가와 그에게 술을 가득 따랐다.

그의 눈빛 속에 스친 격한 감정의 불길은 이 선실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술은 더더욱 쓴 약과 같았으나, 그는 순식간에 감정을 감췄다.

“문제 될 건 없다. 넌 아직 어린 아가씨니……. 물론 사실 그리 어린 것도 아니긴 해.”

엄세번이 하하하 웃으며 육역을 향해 돌아섰다.

“나라면 이 즐거움을 한번 잘 가르쳐 줄 수 있는데 말이야.”

금하는 육역이 웃는 것을 들었을 뿐 결코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 * *

해가 서쪽으로 조금 기울면서 시작한 자리였다. 그러나 달이 중천에 올 때까지 먹고 마셨음에도 끝날 기미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오늘에서야 금하는 전해만 듣던 엄세번의 주량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한 단지 한 단지 마시며 쌓아 올린 것이 적어도 예닐곱 단지는 되었으니, 그야말로 그는 술고래였다.

육역은 그만큼 많이 마시지는 않았으나, 어림잡아 그 역시 두세 단지는 마셨다. 그는 가무기歌舞伎(*일본 전통극 가부키의 음역.)가 앞에서 경쾌한 노래와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있었고, 표정과 태도 또한 느슨하게 풀렸다.

술 단지가 쌓이는 사이, 엄세번의 말솜씨는 여전히 교묘하고 조리 있었으나, 행동은 방탕하기 이를 데 없어 그의 품에 안긴 시녀는 거침없이 농락당했다.

금하는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안했다. 이 사람에게 절대로 미움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면서도 기어이 견디지 못했다.

“소관은 아직 공무가 남아 있습니다. 먼저 인사를 드리니, 대인께서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여봐라!”

엄세번이 취기 묻은 목소리로 분부했다.

“어린 아가씨를 객실로 모셔 쉬게 해라.”

“대인, 소관…….”

금하가 말을 아직 꺼내지도 않았는데, 엄세번은 말을 끊었다.

“너는 보잘것없는 육선문 포쾌인데, 공무가 나 공부좌시랑보다 많을 수 있나? 내 앞에서 공무 얘긴 그만하고. 오늘 밤, 자네 둘은 배에서 쉬어. 내일 아침은 자네들 좋을 대로 가되 나의 흥취는 깨지 마.”

“…….”

그녀는 육역을 바라봤고, 그는 유유한 표정으로 웃었다.

“엄 대인의 호의신데, 네가 무시하면 안 된다.”

그조차 이렇게 말하자, 금하는 비록 내키지 않는 일이었으나 이를 꽉 물고 공손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대인. 소관 물러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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