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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지하 (107)화 (107/224)

107화

금하는 머리를 푹 수그린 채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를 보던 육역도 고개를 숙여 그녀의 표정을 가만히 살폈다.

금하는 상처받은 것이 역력한 얼굴이지만, 이 이상은 그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사정을 알게 된 금하의 반응 또한 그는 어느 정도는 예상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이 이리될지는, 게다가 그녀가 ‘그’의 눈에 그리 일찍 띄리라는 것은 육역이 전혀 생각한 바가 아니었다.

잠시 후 육역이 물었다.

“넌 지금 내가 먼저 사정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날 원망하고 있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금하는 그제야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소관이 그럴 리가요.”

당연히 이것은 본심과는 다른 말이었고, 육역도 알고는 있으나, 지금은 달래지 않았다.

“원망하지 않는 이상, 네 고민은 번뇌일 뿐이야. 앞서 너는 네가 나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내가 이미 내막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지. 그래서 넌 지금 마음이 착잡한 것이다. 사실 속은 건 너였으니.”

“소관이 어찌 감히 대인을 속이겠습니까.”

“넌 사수죽을 놓아주기 위해 고의로 부상을 입고 속임수를 써서 고비를 넘기려 했어. 그렇게 보면 결국 놀림거리가 된 건 바로 나 아닌가?”

육역이 침착하게 말했다.

“나는 네게 따지지 않았는데, 오히려 네가 내게는 하나하나 따지고 싶은 것 같구나.”

금하는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가 하는 말이 오히려 일리가 있는 듯하고, 자신이 먼저 그에게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한 것 같았다.

“대인 말씀이 과하십니다. 소관이 어찌 감히 대인께 따지겠어요.”

육역이 정중한 태도를 갖추어 보였다.

“이렇게 네가 나를 한 번 속여 놀리고, 나도 너를 한 번 속여 놀렸으니, 피장파장인 셈이구나.”

금하는 어딘지 모르지만, 그의 말에 잘못된 곳이 있는 것 같아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육역이 그녀가 허위로 보고했던 일을 추궁할 생각이 없다고 한 이상, 그녀도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저흰 비긴 셈이에요.”

“그럼.”

육역이 몸을 바짝 붙여 왔다.

“이젠 네가 어젯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할 수 있겠구나.”

금하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래도 그다지 편치 않은 기분에 아예 일어나 탁자 앞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녀는 우선 큰 잔에 찻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사실……, 무슨 큰일도 아니었고요……. 그건, 그건 바로…….”

금하는 한참을 어물쩍대다가 갑작스럽게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

“육선문에서 하는 일은 항상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돕고, 생활이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고, 죽음이 닥친 사람을 구조하고 부상자를 돌보는 겁니다. 대인께서도 분명 들어본 적 있으시죠?”

“들어본 적 없다.”

육역의 대답은 매우 명쾌했다.

“들어본 적 없으셔도 괜찮아요. 지금 제가 말씀드렸으니, 대인은 이제 들어보신 거예요.”

금하는 손에 든 잔을 끊임없이 만지작거렸다. 머리로는 어떻게 얘기해야 하나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대인도 아시다시피 어젯밤 대인은 동양인의 표창 독에 중독되셨어요. 심 부인이 치료 방법을 생각해 내셨고, 약을 발라 이상 반응이 나타나면 그때 서둘러 탕약을 드셔야 했어요. 심 부인의 의술이야 말할 필요도 없이 훌륭하시죠. 대인 지금은 반 이상 상태가 좋아지셨잖아요.”

“음?”

육역이 그녀가 계속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금하는 암담하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 말해야 했다.

“그때 바르는 약 안에 뱀독을 섞었거든요. 분명 칼로 살을 베어내는 듯한 고통이었을 거예요. 대인께선 그래도 무쇠 같은 불굴의 철인이라서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소리는 지르지 않으셨지만, 이를 너무도 세게 무셨어요. 그래서 무슨 방법으로도 탕약을 드시게 하지 못해 제가 아저씨께 입에서 입으로 대인께 먹이시라고…….”

육역이 미간을 찌푸렸다.

“음?”

“그런데 우리 아저씨가 정조를 생명보다 중히 여기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별의별 방법을 다 써서 설득했지만, 그분은 하지 않으셨죠.”

뒷부분으로 갈수록 금하의 말은 매우 빨라졌다.

“당시의 상황은 위급했고, 자칫 잘못했으면, 대인께선 죽어 황천으로 가셨을 가능성이 컸어요.”

금하가 후, 재빨리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그래서 저는 제 어머니의,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7층 탑을 쌓는 것보다 낫다.’는 말씀을 떠올렸고요. 또 우리 아버지의 ‘도와줄 수 있으면, 화끈하게 도와줘.’라는 말씀도 생각났고요. 대장은 말씀하시길, 죽음을 보고도 구하지 않는다면 인간성이 헛된 사람이고,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돕고 생활이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고, 죽음이 닥친 사람을 구조하고 부상자를 돌보는 것은 모든 이에게 책임이 있으니…….”

“나는 다 죽어가고 있는데, 너는 그리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

“음, 저는 대인께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제가 정말 무례하려던 것이 아니라…….”

금하는 입술을 깨물고 그를 바라봤다.

“제가 대인께 약을 먹여 드렸어요.”

그녀가 이렇게 시원스럽게 인정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 육역도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러고서야 깊고 은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입으로 내게 약을 먹였다고?”

“대인 절대 오해하지 마세요. 정말 상황이 매우 급하고, 별다른 방법도 없고 어쩔 수 없었어요.”

금하는 근심으로 이마를 짚었다.

“대인도 생각해 보세요. 저는 아가씨인데, 따지자면 제가 훨씬 손해잖아요?”

육역이 느릿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리 따지면 네 말이 맞다……. 만일 네가 울고 시끄럽게 억지를 써 내게 널 아내로 삼으라고 요구한다 해도, 나 역시 고려해 봐야겠지.”

금하가 얼른 손을 들어 제지했다.

“대인 절대 고려하지 마세요. 저는 감히 넘볼 수도 없는 대인께 그런 생각 해 본 적이 티끌만큼도 없어요. 이 일은 제가 원래 대인께 알려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우리 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해요. 제가 이 일로 대인께 절 아내로 맞으라 강요한다면, 그거야말로 공갈 협박이 되는 겁니다!”

육역은 그녀의 말에 정신이 멍하니 나갔으니, 이거야말로 지극히 보기 드문 일이었다.

금하는 엄숙하고 당당한 어조로 계속 이야기했다.

“육선문 포쾌로 밖에 나와 있는 제가 어찌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구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은혜를 입고서 보답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대인과 저 모두 공문 사람이니, 이에 대해선 대인도 분명 저와 생각이 같으실 겁니다.”

“너는 날 과대평가했구나.”

육역이 대나무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넌 정말 내가 책임지는 걸 원치 않아?”

“네, 정말 원치 않아요. 그러니 대인도 당연히 이 일로 절 곤란하게 하시면 안 돼요. 제가 대인이 다치신 걸 이용해 사심을 채우려 했다는 그런 류의 말은 대인도 절대 함부로 퍼뜨려선 안 되신다고요.”

금하는 마음을 놓지 못하여 몇 번이나 당부했다.

“만약 우리 엄마 귀에 들어가면, 전 정말 좋은 날은 다 가는 거예요.”

육역은 흥, 소리를 내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녀의 입술을 흘끔 보고는 물었다.

“네 그 상처는 내가 깨문 거야?”

“맞아요. 그때 제가 아파서 정말……. 됐습니다. 별일 아니에요!”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더는 얘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젯밤에 만약 다친 사람이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너는 역시 똑같이 했을까?”

육역이 마지막으로 묻자, 잠시 멈칫한 금하는 깊이 생각을 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반드시 그랬을 거예요! 사람을 구하는 것인데, 신분의 높고 낮음, 귀하고 천함, 친하고 소원하고 그런 걸 구분하면 안 되죠.”

육역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중간에서 잘랐다.

“되었다! 혼자 좀 쉬고 싶으니, 너는 나가봐라.”

금하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그의 심중을 헤아렸다. 말을 하는 것도 조심스러워졌다.

“화나셨어요? 그래서 제가 이 일은 말씀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쓸데없이 머리만 아파졌죠? 사실 대인은 손해 본 것도 없으신데…….”

“나가라!”

“네. 그럼 쉬시면서, 조금 좋은 쪽으로 생각해 보세요.”

금하는 그의 말을 따라 방을 나서긴 했지만, 한 걸음 걷고 세 번은 돌아보며 매우 미련이 남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금하가 완전히 방을 나가 문을 닫고서야 육역은 참으려야 참을 수 없는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신선한 죽순의 맛이 소금 절임 고기에 잘 스며들었고, 고기의 진한 육즙은 서로 어우러져 신선한 죽순으로 스며들었다. 두 가지가 서로 보완하고 어우러져 각자의 장점을 더욱 잘 드러내게 하니, 이 둘은 바로 최고의 궁합이라 할 수 있었다.

금하는 절임 고기를 한 입 베어 물고, 바로 이어서 밥을 크게 한 입 떠먹었다. 이렇게 먹어야만 하늘이 주신 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었다.

“너 왜 쟤한테 밥 안 가져다주니?”

개숙이 밥을 먹으며 묻자, 금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방금 여쭸는데, 입맛이 없으셔서 안 드시겠대요. 저분이 지금 화가 엄청나셔서, 좀 피해있는 게 나아요.”

“왜 화가나?”

개숙은 영문을 몰라 했다.

“어제저녁 일이요. 굳이 추궁하고 물어서, 할 수 없이 얘기했어요.”

금하는 한숨을 쉬면서도 음식은 열심히 먹었다.

“역시 저분은 모시기가 쉽지 않네요.”

개숙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아이야말로 너한테 그런 큰 재미를 봐놓고, 그럼 몰래 좋아해야지. 화는 왜 내?”

“아저씨도 저분이 어떤 신분인지 생각 안 하시는군요. 저분은 제가 본인에게 그런 큰 잇속을 챙겼으니, 몰래 좋아해야 하는 건 저라고 생각할걸요.”

금하는 한숨을 쉬며 탄식했다.

심 부인은 매우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금하를 바라보다가 다시 개숙을 향했다.

“바깥세상이 이렇게나 변했어요?”

“아니야, 아니야. 이 계집애 머리에 문제가 있어. 얜 상관하지 마……. 너 정말로 몰래 좋아했냐?”

뒤의 말은 금하에게 물은 것이다.

“어떻게 그래요. 제가 좋을 게 뭐가 있어요. 입술도 물려서 이렇게 됐는데요.”

말은 그렇게 했다지만, 금하의 볼에는 상당히 의심스러운 발그레한 두 개의 구름이 떠올랐다.

“솔직히 말해서요!”

금하는 다시 한번 크게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떠넣고 어물어물했다.

“진짜 그런 건 없지만, 저는 뭐 그냥, 그냥……. 저도 무슨 손해 본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 말에 그 단정하고 신중한 심 부인마저도 웃음이 터져 가볍게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그래, 계집애야! 이렇게 생각하는 게 맞는 거다!”

개숙이 한 손으로 거듭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손자가 비록 나보다 떨어지긴 하나, 아쉬운 대로 풍채 좋고 훌륭한 인물이긴 해. 넌 손해 보지 않았어.”

“……”

금하는 개숙의 힘에 밀린 나머지 탁자에 머리를 찧을 뻔했다.

“이모, 저 두부 만들 줄 알아요. 내일 시간 봐서 제가 두부 만들어 맛보시게 해 드릴게요.”

금하는 심 부인에게 더없이 사근사근했다.

“우리 집에는 독보적인 비법이 있어서, 그 방법으로 만든 두부는 정말 맛있어요.”

심 부인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말을 잠시 멈췄다.

“아가씨는 더 있을 필요 없어요. 나는 곧 여길 떠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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