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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지하 (96)화 (96/224)

96화

육역이 기다린 건 이 순간이었다. 그는 한 바퀴 빙글 돌아 우두머리의 일격을 피했고, 바로 그의 옆쪽으로 붙어 들고 있던 비수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두머리의 목덜미에 바짝 겨눴다.

순간 그대로 움직임을 멈춘 육역이 다른 동양인들을 냉랭한 눈빛으로 훑고는 가볍고 정교한 동작으로 단번에 비수를 그었다.

팟, 소리와 함께 피는 버드나무 가지로 튀었고,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죽고 싶은 사람이 또 있나?”

담담히 물은 육역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나무에 등을 기댔다.

조금 전의 일격으로 그는 이미 모든 힘을 다했다. 우두머리를 죽여 다른 이들이 놀라 물러나길 기대한 것인데, 만약 다시 한 놈이라도 덤빈다면, 사실 이제는 그도 대응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정말 겁 없는 놈이 있어 젊은 동양인 한 놈이 와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후!

육역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어쩔 수 없이 있는 힘을 다 끌어모아 몸을 지탱하고, 그가 다시 싸우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돌진해 오던 젊은이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칼을 든 손은 허물어지듯 늘어져 마지막에는 쥐고 있던 칼마저 땅으로 떨어뜨렸다.

이 광경을 본 나머지 동양인들은 영문도 모르고 다시 다가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때, 노류림 밖에서 동양어로 고함 소리가 들렸다.

- 관병이 왔다! 빨리 철수해!

이제 그들에게 육역을 신경 쓸 겨를 같은 건 없었다. 땅 위에 널린 동료의 시신마저 거둘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우르르 한꺼번에 떠났다.

* * *

금하는 강변에서 란계촌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나는 듯이 달렸다. 그렇게 마을에 도착하여 천만다행으로 불꽃을 하늘로 쏘아 올렸고, 촌민들도 대피를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육역의 안위가 걱정되어 그녀는 조금도 쉬지 않고 다시 강변을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이렇게 클 때까지 그녀는 지금처럼 필사적으로 달려본 적이 없었다. 도둑을 잡을 때 충분히 목숨 바쳐 일한다고 늘 생각했건만,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예전의 자신은 얼마나 태만하고, 얼마나 무공 연습을 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깊이 깨닫고, 또 절실히 후회했다.

그때 조금만 더 노력했었다면, 내가 지금 더 빨리 뛸 수 있을 텐데.

대인, 제발, 제발 버텨 주세요.

금하가 모래톱에 도착하여 본 것은 바닥에 구르는 동양인의 시신 몇 구뿐, 육역과 다른 동양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쭈그리고 앉아 시신의 상처를 살폈다. 모두 단칼의 치명상. 그중 3구의 시신은 기습당한 것으로 분명 육역에게 당한 것이다.

이 밖에 모래톱 위와 풀숲 안에는 적지 않은 초리검이 흩어져 있어 금하의 심장이 꽉 조였다.

금하는 계속 주변을 살폈다. 하나하나 꼼꼼히 살핀 발자국이 노류림 쪽으로 향해 있자, 그녀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발자취를 따라 숲속으로 들어갔다.

* * *

사람의 그림자는 전혀 없이 담담한 피비린내만이 노류림의 정적 속을 가득 떠돌았다.

“육 대인?”

금하는 천천히 걸으며 사방을 살폈다. 혹시라도 나무 그림자 사이로 몸을 숨긴 사람을 놓치기라도 할까, 그런 생각으로 그녀는 매우 두려워졌다.

“육 대인? 육 대인 여기 계세요?”

밤바람이 버드나무를 스치는 솨솨 소리만 들려올 뿐 사방은 고요했다.

“육 대인!”

그때, 나무에 기댄 사람의 형체가 보여 금하는 재빨리 걸어가 손부터 뻗었다. 하지만 뒤늦게 동양인의 옷차림인 것을 확인하고는 움찔 멈췄다.

그 사람은 손을 나뭇가지에 걸친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또한, 그의 발밑은 검게 변한 선혈로 흥건히 젖었다.

금하가 허리를 굽혀 시신을 살펴보니, 그 사람의 치명상은 명치에 맞은 칼 한 방이었다. 그의 좌측에도 또 다른 동양인이 꼿꼿한 자세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의 인후에 박힌 토막 난 초리검이 달빛을 받아 눈처럼 하얗게 반짝거렸다.

하지만 그 사람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사지마저 여전히 미미하게 경련하고 있으니 죽은 건지 산 건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흡, 숨을 들이마신 금하가 뒤로 몇 걸음 물러서 그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어깨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나 여깄어.”

그것은 매우 낮고 익숙한 목소리.

금하는 빠르게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짙은 나무 그림자 사이로 빼어나게 잘생긴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 그가 살아 있어!

“육 대인!”

금하는 당장 아래로 힘없이 늘어진 육역의 손을 잡았다. 지극히 차가운 손. 순간 마음이 욱신 조인 금하는 그의 창백한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다쳤어요?”

“등에 작은 상처 몇 개 났을 뿐이야.”

육역은 가볍게 말했지만, 기운 없는 어조는 지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제가 볼게요……. 초리검은…….”

금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말을 잇지 못했다.

“위에 독이 묻었잖아요. 저, 저는 중독 후에는 사람 몸이 마비된다는 걸 알아요. 대인도 움직임이 많이 느려진 걸 느끼신 거죠?”

육역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맞아요. 대, 대인 긴장하지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금하는 자신이 긴장하여 말을 심하게 더듬거리면서도 여전히 그를 위로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육역이 조용하게 말했다.

“넌 진정 좀 해.”

“네네, 그럴게요…….”

금하는 깊게 숨을 들이켜고, 정신을 가다듬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계속하여 심호흡만 하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저, 저는 매우 냉정해요! 제가 있으니, 대, 대인 안심하세요. 별일 없을 거예요. 저, 정말 별일 없을 거예요. 제가……, 맞다! 동양인은 분명 해독약을 갖고 다녀요. 제가 가서 저들의 몸을 뒤져볼게요!”

금하는 우선 육역을 부축해 나무 기둥에 기대어 앉혔다.

“여기 계세요.”

금하는 동양인의 시신을 수색하기 위해 벌떡 일어났고, 육역은 그런 그녀를 끌어당기려 했으나 지금은 힘에 부쳐 그럴 수가 없었다.

“……조심해!”

“네네, 알아요, 안다고요…….”

금하는 연거푸 대답하면서도 손은 이미 나무에 기대어 있는 시신을 수색하여, 그가 갖고 있던 금비녀, 은꼬챙이, 장명쇄 같은 것들을 바닥에 쏟았다.

하지만 병이나 상자에 들었을 해독약은 보이지 않아 그녀는 초조해졌다.

“왜 죄다 쓸모없는 것뿐이야!”

금하는 시신의 옷, 요대, 신발, 칼집까지 모조리 뒤졌으나, 해독약은 흔적도 찾지 못했다.

그녀는 다시 땅 위에 누워 있는 동양인을 향해 돌아섰다. 지금은 그가 죽었나 살았나조차 제대로 모르지만 상관없었다. 그녀는 망설임도 없이 바로 그의 품을 뒤졌고, 그 사이 금은 장식품 몇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죽지는 않았다 해도 적어도 혼절은 했을 거로 생각한 동양인이 두 눈을 번쩍 뜨고, 입술을 살짝 벌렸다.

“조심해!”

육역은 옆에서 줄곧 금하에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순간 위협을 간파한 그가 급하게 바닥의 흙덩이를 잡아 던졌고, 동시에 높은 곳에서 맹렬한 기세로 튀어나온 알 수 없는 물건 하나가 한꺼번에 동양인의 입을 향했다.

퍽―.

동양인은 입안에 머금고 있던 가는 침으로 금하를 기습하려던 중이었다. 그러나 그 침을 내뱉기는커녕 오히려 흙덩이로 입안이 꽉 틀어막혔고, 연이어 물건 하나가 그를 숨도 못 쉬게 들이받아 이번에는 진정으로 숨이 끊겼다.

어….

한동안 얼이 나가 있던 금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죽은 놈을 때린 물건을 집어 들었다.

그건 닭발이었다.

“아저씨, 숨지 마세요!”

고개를 홱 든 금하가 다급하게 소리치자, 가까운 나무 위에서 헤헤하는 웃음소리가 짧게 들렸다. 그 뒤를 이어 그림자 하나가 재빠르게 땅 위로 뛰어내렸다.

달빛 아래 나타난 이는 남루한 옷차림에 수염과 머리는 반백인 거지다. 그러나 육역은 그의 착지자세만으로도 이 사람의 무공이 매우 고강하여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님을 알아보았다.

“아저씨, 사람 목숨이 달렸어요. 빨리 오세요!”

금하가 초조해했다.

“이분을 다치게 한 암기에 독이 묻었어요!”

반쯤 몸을 웅크린 개숙이 가늘게 뜬 눈으로 육역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안달이야, 네 남자냐?”

“아저씨 손자예요!”

금하는 퉁명스럽게 정정해 줬고, 육역은 개숙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조금 전 선배님께서 손 쓰셨지요.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후배가 다쳐서 예를 다할 수 없음을 용서하십시오.”

“사소한 일이야, 사소한 일. 말할 것도 못 돼.”

개숙이 불편하다며 손을 내저었다. 육역이 이처럼 점잖게 예의를 차리니, 오히려 그가 한동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어색해했다.

금하는 여전히 동양인의 몸을 수색 중으로, 그녀는 시신의 묶은 머리까지 전부 풀어헤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찾는 것은 없어서 마음이 급한 나머지 발을 동동 구르고, 입으로는 계속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거야? 해독제를 안 갖고 다니는 게 말이 돼!”

개숙이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그녀는 이미 바깥쪽의 다른 시신 몇 구를 수색하러 바람처럼 휭하니 노류림을 달려나갔다.

“저 계집애, 어쩜 저렇게 당황해서 쩔쩔매니.”

고개를 젓던 개숙이 육역을 보고는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자네 아버지가 육병이지?”

육역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정말 그의 아들인가? 친아들?”

개숙이 다시 물었고, 육역은 여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수염을 쓰다듬던 개숙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매서운 어조로 말을 뱉었다.

“아, 젠장, 넌 정말 내 손자구나!”

육역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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