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육역은 돌아서 낡은 작은 배 위로 뛰어올라 조금 전 금하가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았다.
“저 배를 보았나?”
그는 금하가 보았던 좌선을 가리켰고, 금하는 배 옆에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보았습니다.”
“배에 탄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이 가느냐?”
“아니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금하는 대답을 하고서야 홀연히 깨달아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적 낭자가 말한 경성에서 온 그 사람이에요?”
육역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가 양주에 왜 왔는지 짐작할 수 있겠느냐?”
“주현이의 사건 때문에……. 아니, 맞지 않아요. 사람은 이미 죽었는데, 그 사람은 무얼 하려고 왔을까요. 적 낭자 때문이란 것도 아닐 거예요. 적 낭자의 말로 미루어 그 사람이 그녀를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걸 알 수 있거든요.”
금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운하 수리자금 때문에 온 건가요?”
육역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야말로 운하 수리자금 때문에 이곳에 왔지. 그는 아니야. …그 사람은 즐기러 왔지.”
“즐기러?”
금하는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양주의 정취와 인심을 즐기러요?”
“아니. 누군가를 발아래 두고 짓밟는 걸 즐기러.”
육역의 어조는 담담했다. 그러나 그는 냉랭한 눈빛으로 그 배를 바라보고 있었고, 금하는 이유도 없이 서늘한 기분이 들어 한동안 침묵했다.
“대체 누구를 발아래 두고 짓밟으려 해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육역은 대답하지 않았다.
금하가 자신의 질문이 경솔했음을 깨닫고, 더불어 그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을 만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그의 맑고 서늘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나.”
* * *
금하는 그가 농담을 하는 것인지 알고 싶어 오랫동안 그를 뚫어지게 보았다.
“대인을 발아래 두고 밟는다니요. 지나치게 생각하시는 거 아닐까요. 그렇다면 대인 아버님께서 그 사람을 분명 조각조각 잘라버리실걸요.”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흉악하신가?”
육역이 고개를 기울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흉악한 것과 상관없이, 사람은 자기 자식을 지키는 법이죠. 대인 아버님은 평소에도 기세가 주위를 압도하는데, 절대 누군가가 아들을 짓밟게 놔두실 리 없어요.”
육역은 금하의 어조에 극존칭이 빠지고 조금 더 친숙해진 것을 알아차려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는 지나치게 조심스럽던 조금 전의 모습을 완전히 잊었다.
“아버지가 매우 위엄이 있으신가?”
“당연하죠.”
금하는 두 팔꿈치를 뱃전에 기대고 생글거리며 웃었다.
“대인 모르시죠. 대인 아버님께서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지만, 작년에 육선문에 한 번 오셨어요. 저는 그때 후당에 숨어 살짝살짝 훔쳐보았는데요.”
금하의 표정이 조금 더 진지해졌다.
“바깥에 그저 바람이 한바탕 휙 불었다고 생각했거든요. 처음에는 미미하게 출렁이고 흔들리다가, 그 뒤로는 아득하고 막막해졌죠. 그건 돌과 모래를 날릴 만큼 거센 바람이 불게 하고, 꽃은 시들고, 버드나무는 꺾이고, 나무는 쓰러지고, 숲을 때려 부수게 해서…….”
“그건 저팔계가 온 장면이지?”
육역이 그녀의 말을 잘라 끼어들자, 한순간 멈칫한 금하는 육역을 가리키며 놀라고 의아해했다.
“대인, 그건 우리 명나라의 금서잖아요. 대인이 어떻게 이걸 보세요?”
“적반하장, 이 말이 바로 너를 두고 한 말이구나.”
눈썹을 치켜올린 채 육역은 탐구라도 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솔직히 말해, 넌 이 책을 몇 번 봤어?”
“당당한 육선문 포쾌의 몸으로 제가 어찌 금서를 읽을 수 있겠습니까.”
금하는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육역을 노려보는 척했다.
“저 떠보지 마세요.”
“그래서 몇 번?”
“겨우…, 두, 세 번밖에는….”
“음?”
“오, 육, 칠팔 번.”
그녀가 알랑거리며 슬쩍 웃었다.
“대인도 진짜 재미있게 보셨죠?”
육역은 희미하게 웃었을 뿐, 금하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반문했다.
“네가 자주 보는 건 몇 회야?”
“손오공이 이랑신二郎神의 도움을 받는 그 회차요. 오공이 그에게 고맙다고 하자, 이랑이 말해요. ‘첫째로 그 국왕은 하늘에 닿을 만큼 복이 많고, 둘째로는 어진 동생의 신통력이 무량한 덕이지 어찌 내 공덕이 있겠는가.’ 제가 원래는 이랑신이 강직하고 공사는 분명해도, 고의로 튀는 행동으로 뽐내는 것 같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회차를 보고는 그에 대한 편견이 사라져 매우 좋아하게 됐죠.”
뒤이어 육역이 금하의 말을 이었다.
“그건 63회차다. 손오공과 저팔계는 요괴를 소탕하여 용궁을 들쑤시고, 이랑신과 일행은 악을 물리치고, 보배를 되찾다.”
금하는 저도 모르게 놀라고 기뻐했다.
“맞아요! 정말 자세히 기억하시네요.”
“나도 널 한번 시험해 봐야겠다. 네가 기억하는지 보자.”
육역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소리 내어 낭독했다.
“불문의 깨달음에 관해 묻노라니, 참선과 도를 구하는 이는 무수하나, 종종 끝내는 헛되이 늙는구나.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고, 눈을 쌓아 식량을 만드니, 얼마나 오랫동안 판단을 잃고 헤매겠는가…….”
이 구절은 금하에게 더없이 익숙하여 그녀는 바로 이어서 낭독했다.
“가는 털은 대해를 삼키고, 작은 겨자씨 안에는 수미산이 들어가네. 금빛의 승려가 미소 지으니, 깨닫게 되면 십지삼승을 초월하고, 사생육도의 윤회로 귀결된다……. 이건 8회차 처음 시작 부분인 ‘소무만苏武慢’, 맞죠?”
고산과 대해도 털과 겨자라는 아주 작은 것에 숨길 수 있을 만큼 불법의 깨달음은 끝이 없다고 노래한 ‘소무만’을 금하는 꽤나 득의양양하게 낭독했다.
육역이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양 포두가 네가 연공에 게으르다고 말했지. 알고 보니 그건 모두 잡서를 보느라 그런 거였어.”
“대장이 그렇게 제 얘길 하셨어요?”
금하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런데요. 대인도 잡서를 보셨는데, 무공은 왜 이렇게 잘하세요?”
육역이 여유롭게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이마를 찍은 후 다시 자신을 가리켰다.
“타고난 자질이 달라.”
“……제가 대인보다 조금 둔하다고 그냥 대놓고 말씀하셔도 전 받아들일 수 있어요.”
금하가 눈을 부릅뜨고 말했으나, 육역은 기꺼이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네가 나보다 둔한 것이 결코 조금 뿐은 아닐 텐데.”
금하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여유를 부렸다.
“모두 관부 사람들인데, 말도 너무 솔직한 건 좋지 않죠.”
이 말 역시 배에 탔던 그때, 육역이 그녀에게 한 말이었다.
‘이제 알았어요. 대인이 아까 절 그들과 한패라고 말씀하신 건 제가 죽든 살든 신경 쓸 필요 없을 그럴듯한 명분을 위해서였군요!’
‘모두 관부 사람들이다. 말도 너무 솔직한 건 좋지 않아. 일을 성사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망치고 있군.’
이 순간의 이곳과 그때의 그곳은 여전히 같은 달빛 아래였건만, 모든 것이 크게 달라져 금하는 말을 마치자마자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육역은 타고난 성품이 내성적인 데다가 어릴 때부터 감정의 변화를 밖으로 드러내선 안 된다고 교육받은 이였다. 그런데 그런 그라도 금하가 앞뒤로 몸을 들썩이며 크게 웃는 것을 본 데다 예전 일까지 떠올라 고개 숙여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점점 거세지는 밤바람을 따라 강물 위에는 물결이 일렁거렸다.
금하의 웃음이 채 멈추지 않던 그때, 육역이 갑작스레 경계하며 고개를 들었다. 동남쪽을 바라보던 그가 작은 배에서 바로 뛰어내려 그녀를 끌고 깊은 풀숲으로 숨어들었다.
“누가 있어요?”
청력과 시력에 있어 금하는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계속 귀를 기울여 듣던 육역이 잠시 후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동양인이야. 동남쪽, 백 보 이내, 이쪽으로 오고 있어.”
“……저 오늘 재수 옴 붙었다고 진즉 말씀드렸잖아요.”
금하는 귓속말을 하자마자 땅에 붙어 지면 위의 움직임을 느꼈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켰다.
“어림잡아 3, 40명은 돼요! 분명 관아가 찾지 못한 그 왜구들일 거예요!”
관아에 이 왜구들을 토벌하러 출병하라고 어떻게 알려야 할까?
지금은 깊은 밤, 인적도 드문 데다가 이곳은 황량한 야외였으니, 그녀가 성으로 돌아가 관아에 보고하고, 또 관아에서 병사를 보내면, 아마도 상황은 이미 너무 늦을 터였다.
바람이 불어와 풀이 요동치고, 금하는 바람에 실린 그들의 단편적인 말이나마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동양어를 모르는 그녀는 그들이 무얼 말하고 있는지는 알아듣지 못했다.
육역은 정신을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그의 미간이 점점 더 긴장으로 일그러지자, 금하는 그가 알아듣는 거라는 생각으로 그의 소매를 가볍게 잡아당기며 근심스럽게 육역을 바라보았다.
많은 말을 할 필요도 없이 이젠 육역도 그녀의 뜻을 알아들었다. 금하를 가까이 끌어당긴 그가 나직한 귓속말로 전했다.
“저들이 말했어. 지난번 획득한 연잎을 그린 은 접시가 매우 좋다, 오늘 가서 제대로 긁어모아야 하고 좋은 물건을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고.”
가서 제대로 긁어모은다…….
저들은 마을에 강탈이나 도살하러 가겠다는 뜻이야? 이번에는 또 어느 마을로 가려고?
금하의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육역이 이때 떠올린 생각 또한 그녀와 같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미리 양주 지도를 봤다는 것으로 그 지도에는 성 외곽에 있는 촌락의 위치도 포함되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육역은 머릿속에 지도를 다시 소환시켰다. 강과 물길, 마을과 촌락 하나하나를 세세히 훑고, 그와 금하가 지금 있는 곳을 중심으로 자세히 주변을 살폈다.
이곳과 거리가 가장 가까운 곳, 또한 동양인이 가는 방향에 맞아떨어지는 마을은……, 란계촌이야!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1리 정도 떨어진 란계촌이야.”
육역이 그녀에게 귀엣말했다.
“너는 마을로 가서 소식을 알려. 관아는 마을마다 연화탄(*폭죽의 일종.)을 보내두었다. 일단 왜구를 발견하여 연화탄을 점화하면 관병이 바로 달려오게 되어 있어.”
금하가 긴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북쪽으로 1리, 기억하지? 밤인데 넌 방향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겠어?”
그의 물음에 금하는 힘껏 고개를 끄덕이고, 입술 모양을 이용해 소리 없이 말했다.
“할 수 있어요.”
육역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 조심해.”
금하는 서둘러 움직이려다가 뒤늦게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대인은요?”
“나는 이곳에서 그들을 잡아두겠다. 하지만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는 몰라. 넌 반드시 빨리 가야 해!”
“저들은 3, 40명에다 검술과 암기고수도 많아요, 대인은…….”
육역의 무공이 고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지만, 금하는 이번 일이 극히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알아.”
금하의 얼굴에 드러난 걱정이 마음에 걸려 육역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농담을 던졌다.
“네 무공이 조금 더 야무져서 저들을 잡아둘 수 있었다면, 나는 너를 남게 했을 거다.”
육역이 농담한 것을 알고 있다 해도, 금하의 얼굴에는 바로 죄책감이 드러났다.
“빨리 가.”
“대인, 조심하세요! 특히 초리검이요.”
육역이 계속 재촉하자, 금하는 거듭 당부하며 마음이 먼저 급해졌다.
그때, 때마침 강한 바람이 불어 풀잎이 요동쳤다. 금하는 행적을 숨기기 쉬운 이때를 놓치지 않아 몸을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풀숲을 빠져나갔다.
육역은 그녀의 기지가 엿보여 살짝 웃었으나, 재빨리 웃음을 거두고 정신을 집중했다. 동양인의 발걸음 소리는 이미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