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잠시 후 양악은 잘 구운 춘병과 속에 넣을 재료, 찍어 먹을 장까지 모두 가지고 들어왔고, 금하는 그를 도와 함께 상을 차렸다.
그녀는 이 춘병의 속 재료에 한껏 신경을 썼던 터라 원래는 육역에게 일일이 설명해주려 했었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찬물 몇 대야를 뒤집어쓴 듯하고, 그도 아마 좋아하진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정성스럽던 처음의 감정도 반 이상은 줄었다.
요리를 거의 다 상에 올린 후, 금하는 육역에게 술을 따라놓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양악과 부엌으로 가 상을 차리고 남은 음식을 먹으려 한 것이다.
“대인 아쉬운 대로 드세요. 소관은 물러나겠습니다.”
육역은 그녀가 갈 것을 예상치 못했다는 듯 의아해했다.
“넌 또 어딜 가려고?”
“대인, 저도 배가 고파서 대양과 밥 먹으러 갑니다.”
금하는 양악을 끌어당겨 자신과 함께 가야 한다는 뜻으로 눈짓했다.
“이렇게 한 상 가득 무를 차려놓고는 나 혼자 먹으라고? 정말 나를 토끼로 알고 밥 주는 거냐.”
육역이 언짢은 기색으로 그들을 불러 앉혔다.
“모두 앉아 함께 먹는다.”
“그건 부적절합니다. 신분이 유별한데, 저희가 어떻게 대인과 함께 앉아 밥을 먹을 수 있습니까.”
금하는 뜨거운 김이 솔솔 나는 음식을 보면서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면 대인께서 먼저 드세요. 저희는 옆에서 시중을 들고, 다 드시면 그다음에 먹겠습니다.”
육역이 그녀를 흘끔 보고는 간단하게 명령했다.
“앉아. 밥 먹어라.”
그래도 눈치는 있어 금하는 헤헤 웃었다.
“기왕 대인의 호의시니, 그럼 더는 사양치 않겠습니다.”
하지만 양악은 사양하며 물러났다.
“아버지께서 아직 잠자리에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의관으로 돌아가야 하니, 대인께서 양해해 주십시오.”
육역이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너는 가거라. 양 선배께 내가 시간 내서 뵈러 가겠다고 안부를 전해 드리게.”
월아문 밖까지 양악을 배웅하던 금하는 무언가 하려던 말이 있어 잠시 머뭇거렸다.
“됐다. 내일 내가 직접 가서 대장께 말씀드릴게.”
“술 마시지 마. 육 대인 앞에서 추태 부리는 건 진짜 곤란하다.”
“알았다. 도련님이 술 마시고 언제 추태를 부렸다고.”
양악은 몇 번 더 당부했고, 금하는 빨리 가라고 재촉하며 그를 보냈다.
* * *
“당주께 보고 드립니다. 사람은 이미 안전하게 도착했고, 모든 것을 분부대로 처리했습니다.”
단정하고 간편한 옷을 입은 아예가 시선을 내리깔고 상관희에게 보고했다.
그녀는 뱃머리에 서 있었으나, 눈빛이 어느 곳을 향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예의 존재 또한 한참이 지나서야 발견하고는 온화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돌아왔구나.”
아예가 시선을 들어 바라보니, 짧디짧은 이틀 사이였건만, 상관희는 그새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
기어이 참지 못한 아예가 물었다.
“당주,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상관희는 고개를 저으며 나루터를 바쁘게 왕래하는 방 사람들을 시선으로 훑었다. 그러다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호수로 나가 기분전환을 하고 싶구나.”
아예에게 다른 말은 필요 없는 군더더기일 뿐으로 그는 즉시 배의 사공에게 노를 받고는 그에게 하선하라고 눈짓했다.
작은 배 한 척과 그 위의 사람 그림자 둘이 잔잔한 수면 위로 어른거렸다.
뱃머리에 홀로 서 있는 상관희는 내내 넋이 나가 있었다. 아예는 선미에서 말없이 노를 저었으나, 시선은 잠시도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 * *
호수 가운데 이르르니, 달은 이미 하늘 가장 높은 곳에 떠올라 눈이 부시게 밝은 달빛은 한창 물 위로 반짝거리며 쏟아지고 흩어졌다.
아예는 노를 놓고 뱃머리로 향했다. 그러나 채 반도 가지 못하여 상관희의 분부가 들렸다.
“선실 안에 술 두 단지가 있어. 들고 오너라.”
상관희의 명령을 따라 들어온 선실은 어두컴컴하여, 아예는 그녀가 말한 술 두 단지를 손을 내밀어 더듬어 찾았다. 손대중으로 보아 단지는 매우 무거웠는데, 안쪽의 술이 흔들리는 것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아예는 잠시 주저하다 술 단지를 밖으로 옮겼다. 달빛 아래 드러난 술 단지는 진흙으로 입구가 봉해지고, 몸통에는 진흙이 많이 묻었다.
그때 손수건을 꺼낸 상관희가 몸을 굽혀 호숫물을 적셨다. 그리고 그녀는 단지의 더러운 것을 천천히 닦아 내기 시작했다.
멍하니 보고 있던 아예 또한 그녀를 도왔다. 가진 수건이 없던 그는 옷자락 한쪽을 찢어 호숫물을 적셨다.
유약을 발라 반질반질 빛이 나는 술 단지의 표면으로 달빛이 담담하게 반사됐다. 상관희의 하얀 손가락이 가볍게 그 위를 쓰다듬다가 그녀는 지극히 가벼운 한숨을 연달아 토해냈다.
“네 칼 좀 빌릴 수 있을까?”
상관희가 묻자, 아예는 두말하지 않고 허리춤에서 상어날밑단도를 꺼내어 그녀에게 전했다.
그녀는 칼로 단지 입구를 따라 꼼꼼하게 그어 작은 틈을 만들었다. 그렇게 봉했던 진흙이 떨어지고, 술 마개를 열자마자 짙고 그윽한 술 향이 코를 찔렀는데, 냄새만으로도 최상의 술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술, 맛이 좋을까?”
상관희는 아무 생각 없이 묻는 듯했고, 아예는 ‘예.’ 한마디 하고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술입니다.”
“좋은 술이야. 맞아.”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건 우리 아버지가 묻으신 이십 년 된 여아홍女儿红이야.”
여아홍…… 여아홍은 집안에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땅에 묻는 술로, 그 아이가 시집갈 때가 되어서야 파내어 마실 수 있는 술이었다.
아예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는 빠르게 움직여 술을 다시 틀어막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외쳤다.
“이 술은 꺼내면 안 되는 겁니다!”
“그건 이미 쓸모가 없어. 땅에 묻혀있는 것보다, 지금 마셔버리는 것이 낫다.”
상관희가 아예의 손을 떼어내려 했으나,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주, 안 됩니다!”
아예는 술 마개를 단단히 눌러서 그녀가 다시 열지 못하게 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우셔도 출가할 때나 마실 수 있는 술을 꺼내 못 쓰게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난 괴롭지 않아. 단지…… 속이 텅 빈 것 같아. 이 몇 해 나는 줄곧 그를 기다리고 있었거든. 내가 잘하지 못했나. 그래서 그는 돌아왔어도 내게…….”
“당주는 그에게 너무나도 잘하고 계세요!”
상관희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아예는 분노했다. 아니, 그래서 더 분노했다.
“그가 이 모든 걸 당연하다고 여길 만큼 잘해 주셨어요. 그가 언제 당주를 염두에 둔 적이나 있습니까! 그 같은 사람은 한 방의 주인으로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전혀 당주께 어울리지…….”
“닥쳐!”
상관희가 발칵 성을 냈다.
“나는 네게 뒤에서 비난하라 허락하지 않았다.”
그 말에 아예는 입을 다물었으나, 눈동자 깊은 곳에는 고통이 스몄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당주는 앞으로 마음에 맞는 낭군을 만나시어 시집가실 겁니다. 소방주 보다 백배 천배 좋은 분으로…… 저는 절대 당주가 이 술 손대시게 할 수 없습니다!”
아예가 술 단지를 들고 선실로 들어갔다.
선실 안 구석에는 평상시 비가 많이 올 때 선봉 위를 덮는 방수포가 마침 있어서, 그는 방수포를 잘라 단지 위를 막은 후 끈으로 단단히 묶고는 다시 뱃머리로 가져갔다.
“너 이건…….”
상관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아예는 술 단지 두 개를 물속으로 나란히 던져버렸다. 풍덩, 소리를 낸 술 단지는 매우 빠르게 꼭지도 보일 새 없이 퉁퉁퉁퉁 호수 속으로 가라앉았다.
“네가!”
상관희는 화가 나 말도 나오지 않고 무작정 그에게 따귀를 날렸다. 그러나 아예는 아파도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그저 애원에 가까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드는 낭군과 혼인하실 때, 제가 호수에 들어가 건져 드리겠습니다.”
상관희가 화를 내며 말했다.
“내가 만약 평생 시집가지 않으면?”
“그럴 리가요. 당주 같은 좋은 여인에겐 분명 당주를 배려할 줄 아는 아주 좋은 분이 나타날 겁니다. 분명 그럴 겁니다!”
은은한 달빛. 그 아래 드러난 아예의 얼굴 반쪽은 붉게 부풀어 올랐다. 바라보던 상관희는 더는 말없이 천천히 주저앉아 무릎을 감싸고 머리를 묻었다.
가볍게 뱃전을 두드리는 호수의 물소리는 그녀의 흐느낌 소리를 지워주고, 아예는 그대로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 * *
제일 먼저 아주 얇게 구운 춘병 피皮를 한 장 잘 깐 위로 땅콩가루를 한 겹 뿌렸다. 그 뒤로 썰어 볶아 투명해진 무, 기름에 튀긴 두부채와 금황색의 달걀 지단을 차례로 올리고, 거기에 마늘가루와 파밑동을 더한다. 마지막으로 다시 약한 불로 투명하게 볶은 파래의 일종인 호태浒苔를 뿌리고는 조심스럽게 피를 말았다.
금하는 만족스럽게 탄식하며 춘병의 처음과 끝을 먹기 좋게 오므렸다. 그런데 이제 막 깨물려고 하는 순간, 옆에서 쑥 나온 손이 아주 자연스럽고 거침없게도 그녀가 방금 잘 말아둔 춘병을 휙 가져갔다.
“…….”
금하가 놀라 어리둥절해진 사이, 육역은 그녀가 만 춘병을 자세히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보기엔 속이 전부 무뿐이야. 이렇게도 먹을 수 있나?”
“당연하죠. 정말 맛있어요. 드셔보세요!”
그녀의 열성적인 재촉에 육역은 시험 삼아 한 입 깨물어 세심히 씹고 음미했다. 그러다 그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맛이 조금 이상하다.”
턱을 괴고 육역이 씹는 것을 지켜보던 금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호태 맛이 아닐까요? 대인의 입에는 맞지 않죠?”
금하는 호태가 담긴 접시를 육역의 코밑으로 건네주었고, 냄새를 맡은 육역은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이 맛 맞아.”
“보세요, 이거죠. 대인은 이해할 수 없으시겠지만, 이 호태가 춘병 맛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에요. 하지만 이건 남쪽 사람들의 입맛이라 대인은 아마 입에 맞지 않으시겠죠.”
금하는 스스로 얇은 병피 한 장을 가져와 채소를 올렸다.
“남쪽 사람들의 입맛?”
“네. 대장이 소싯적에 복건福建성에서 여러 해 사셨대요. 그래서 대양이 만드는 음식도 남쪽 사람들의 입맛을 따라가요. 그쪽에선 이걸 춘병이라 부르는 대신 윤병이라 부른대요. 이 맛에 익숙해져야 맛있는 걸 느낄 수 있어요.”
금하의 말에 육역은 시선을 내리고 생각에 잠겼다.
강남으로 내려오기 전 육역은 양정만의 문서를 살폈다. 그는 분명 강서인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소싯적 복건에서는 왜 여러 해를 살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