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참, 넌 나 무슨 일로 찾았어? 대장이 뭔가 당부하셨어? 아니면……, 저쪽에 무슨 낌새라도 생겼어?”
금하가 양악에게 물었다.
“……옷을 찾았다고 들었어.”
양악은 표정이 가라앉았으나, 손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아마 강으로 사람을 보내 끌어올렸나 봐.”
“그럼 됐지. 기껏해야 이틀 더 들썩이다가 조용해질 거야. 동양인이 아직 근처를 어슬렁대는데, 그들도 그렇게 신경 많이 쓰지 못해.”
금하는 양악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너 낭자 보고 싶은 거지?”
양악은 고개를 숙이고 웃을 뿐 그녀의 말에는 대답하지는 않았다.
“내 품속에 네 편지 한 통 있어. 직접 가져가.”
그의 손은 밀가루투성이라 품속에 손을 넣어 꺼내주기엔 적당치 않았다.
“내 편지?”
금하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홍당무를 입에 물고, 양악의 품에서 수월하게 편지 한 통을 집어냈다.
“아버지에게 드린 편지 안에 있었어. 너희 어머니가 인편에 부탁하셔서 보내신 것 같아.”
양악이 말하는 사이 금하는 이미 편지를 꺼내어 머리를 갸우뚱한 채 보고 있었다.
편지의 글자는 첫눈에 봐도 동생 원익이 쓴 것이나, 그 안에 쓰인 내용은…….
금하는 반 각이 넘도록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거, 이거……, 우리 엄마는 대체 혼수를 얼마나 약속했길래 역가가 이리 흔쾌히 승낙해?”
양악은 미리 보았기에 웃음이 났다.
“역가의 셋째가 네게 매우 관심이 있나 보다. 어릴 때 네가 그 대신 나쁜 놈들 때려준 걸 마음에 뒀나 봐.”
금하는 근심스럽게 이마를 두드렸다.
“그 일은 도련님도 기억 못 한다. 그게 그가 이신상허以身相许(*몸과 마음을 다 바치다.)까지 할 일이냐.”
“금하 어르신아, 너 우선 숨 좀 들이켜고 진정 좀 해. 내가 말해줘야 할 일이 또 있어.”
양악은 능숙하게 면을 주물렀고, 그녀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좋은 일? 나쁜 일?”
“그건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달라. 어쨌든 나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말해 봐.”
금하는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사소, 네 그 사가 오라버니가 우리 아버지한테 와서 말했어.”
양악은 일부러 잠깐 쉬었다.
“그가 널 아내로 맞을 거고, 너희 어머니께 편지로 혼담 넣고 싶대.”
“…….”
금하도 이번만큼은 홍당무를 씹지 않았고, 그 자리에 멍한 채 앉아 있었다.
양악이 그런 그녀를 놀렸다.
“점 좀 봐라. 너 요즘 애정운이 너무 좋다?”
한참이 지나서야 금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은 그러니까……, 이 도련님이 가게 문 열고 3년을 개시도 못 하다가, 처음 개시한 물건으로 3년을 먹고 살게 됐다는 거잖아! 역시 인생 한 방이네.”
그때, 금하의 뒤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울렸다.
“그 말은 그럴 때 쓰는 것이 아니다.”
금하는 목소리를 듣고, 기뻐하며 시선을 돌렸다.
“대인, 돌아오셨군요! 제가 식사 대접하려고 준비했어요. 얼른 들어가 앉으세요.”
육역이 그녀의 손에 있는 작은 홍당무를 흘끔 보았다.
“그걸 먹어? 토끼 먹이 준다고 생각하는 건가?”
“설마 그럴 리가요. 대인께 사찰 채소요리를 한 상 제대로 해 드릴게요. 제가 돈을 아끼려고 그랬다고 절대 오해하지 마시고요. 특별히 역서의 황력을 찾아봤는데요. 오늘이 재계하기 좋은 날이라 십만 공덕을 쌓을 수 있대요.”
금하는 말을 끝낸 후, 이 말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느낌이 너무 들었다며 조금 후회했다.
“흠, 내가 평소에 죄를 너무 많이 짓는다고 생각하는군.”
육역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의 말투는 기분이 상한 듯 좋지 않았다.
“그래서 공덕을 더 쌓아야 한다는 말인가?”
금하는 억지로 두어 번 웃었다.
“대인 생각이 너무 많으십니다. 소관이……, 평소 대인의 보살핌을 많이 받았으니, 대인께 한 끼 정도는 당연히 대접해야지요.”
육역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잠시 응시했다. 그런 후 부엌 안의 양악을 흘끔 보았을 뿐 더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등을 보던 금하는 영문을 알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홍당무를 오도독 베어 물었다.
“보아하니, 저분 오늘 심기가 상당히 꼬이셨다. 누가 저분 건드렸냐?”
양악이 재빠르게 두부피를 탕에 넣어 펄펄 끓이고는 국그릇에 담아 금하에게 내줬다.
“계속 멍하니 뭐 해. 주인공이 돌아왔는데, 빨리 음식 내야지.”
금하는 서둘러 칠기 소반을 꺼내어 국그릇을 놓았고, 매우 조심스럽게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의 육역은 미간을 희미하게 찌푸린 채 찻물을 따르고 있었다.
“대인 오늘 일이 뜻대로 잘 안되셨어요?”
그녀는 국그릇을 잘 놓고는 넌지시 떠보며 물었다. 하지만 육역은 그녀를 곁눈질로 보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누가 대인 화나게 했어요?”
금하는 오늘 따라 말하는 것이 유달리 성실했다.
“분명 그들이 잘못했겠죠! 대인, 우선 탕 드시고 노여움을 푸세요.”
그가 또 그녀를 바라보다 담담히 말했다.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요즘 너는 좋은 일이 겹쳐 오는군. 내가 축하해줘야 하나?”
“대인 절 비웃지 마세요!”
금하는 안 그래도 이 일을 근심하던 차라 그녀의 말에는 고민이 가득했다.
“사소는 어쩜 저렇게 제멋대로일까요? 제가 어떻게 그에게 시집을 가요? 이건 혼란만 일으키는 거잖아요……. 대인, 이 일은 절대 유 대인께 알리지 말아 주세요. 절대, 절대!”
그때 양악이 끓인 돼지기름으로 볶은 무를 들고 들어왔다.
볶은 무는 노르스름한 색이 났고, 윗면에 잘게 썬 파를 뿌렸다. 그리고 군데군데 뿌린 작은 새우는 촛불 아래에서 보니 매우 윤기가 나고 투명하게 빛났다.
“그런데 사소가 아버지께 말하더라. 네가 이미 동의했다고.”
양악의 말에 금하는 더욱 머리가 띵하고 조급해졌다.
“나는 사소에게 이 일을 다시 얘기하자고 했어. 이걸 어떻게 동의했다고 해? 대양……, 사소가 겉으론 매우 정상이잖아. 그런데 왜 생각은 조금도 안 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할까?”
“너는 동의하고 싶지 않으면 직접 거절하면 되지, 굳이 왜 다시 얘기하자고 해?”
양악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그 상황을 너는 모르잖아.”
현재 금하는 배가 급습당한 그 밤의 일을 상세히 말할 수 없었으니, 그야말로 해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사이, 육역은 이미 탕 한 그릇을 담고 있었다. 그는 청화 그릇 안에서 국자를 느릿하고 가볍게 휘저었다.
“그날, 내 기억으로는 너도 이 일이 좋은 일이라고 했지.”
육역까지도 한 발 끼어들 거라고는 진정 생각지 못하여 금하는 울고 싶은 마음으로 변명했다.
“전 엉겁결에 그렇게 말한 거잖아요. 그때 전 열이 나 머리가 어질어질했는데 그가 무슨 말을 하건 제가 신경이나 썼을까요. 그리고 이런 일을 제가 어떻게 혼자 동의해요? 우리 집은 경성이고 그는 강남에 있고, 저를 이렇게 멀리 시집보내는 건 우리 엄마도 동의하시지 않는다고요! 게다가…….”
금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사소 옆에는 상관 언니도 있잖아요. 두 사람은 예전 혼약도 했었고, 상관 언니가 그에게 정이 아주 깊고 두터운데, 제가 어떻게 그 안에 끼어들어요. 만약 진짜로 시집가게 되면, 온종일 상관 언니와 부딪치게 될 거고요. 쌍도 실력이 엄청난 언니가 계속 집착에 사로잡혀 있다면, 분명 어느 날 절 조각조각 내 버릴 수도 있어요. 제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할 사람이에요?”
계속 말하던 금하는 육역이 상관희에게 마음을 두었을 거라고 짐작했던 일이 문득 떠올라 급히 뒷말을 수습했다.
“대인, 물론 저는 상관 당주를 매우 존경합니다. 그녀에게는 절대 불만이 없으니, 대인은 오해하지 마세요.”
육역이 손을 내저으며 상관치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넌 정말 멀리도 생각한다……. 계속 말해 봐!”
“계속 말해요?”
금하는 어리둥절해졌다.
“전 할 말이 없는데요. 어쨌든 저는 동의할 수 없는 일이고, 우리 엄마도 승낙하지 않을 거예요. 내일 저는 그의 생각을 확실히 끝내줄 겁니다.”
금하의 손이 결단성 있고, 단호하게 탁자를 내리쳤다. 그리고 양악은 옆에서 진지하게 충고했다.
“사소는 체면을 매우 중시해. 사람 너무 난처하게 하지 마.”
“안심해. 나한테 생각이 있어.”
비록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으나, 금하는 여전히 고민이 되어 이마를 문질렀다.
“그럼 됐고……. 참, 난 가서 춘병 구워야 한다.”
양악은 부엌이 걱정되어 부랴부랴 되돌아갔다.
금하가 다시 육역을 보니, 그는 탕을 반 가까이 마셨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어딘지 재미있어 보여서 금하를 의아하게 했다.
“대인.”
금하는 다시 심기일전하여, 매우 성실하게 웃어 보였다.
“술을 데워다 드릴까요?”
“술도 준비했나?”
이것은 육역이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지난번 제가 방 치울 때, 모서리가 둥근 궤 안에서 술 두 단지를 찾았어요. 아직 뜯지 않았던데, 대인 한 번 드셔보시겠어요?”
육역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분명히 네가 초대한 것인데, 어째서 내 술을 마셔야 하나?”
금하는 대놓고 뻔뻔스러워졌다.
“요리란 손재주가 좋기만 하면 그런대로 맛을 낼 수 있지만, 좋은 술과 졸렬한 술의 구분은 너무도 명확해요. 안타깝게도 제겐 대인께 좋은 술을 빚어드릴 능력이 없어요. 사실 이게 누구의 술인지는 중요하지 않죠. 중요한 건 대인이 맛있게 드시고, 즐겁게 마시는 거 아닐까요? 제가 술을 데워다 드릴게요!”
“잠깐, 그 술은 과실주다. 데울 필요 없어.”
육역이 고개를 살짝 기울여 잠시 생각했다.
“과실주는 맛이 엷고 색이 훌륭한 것이 특징이지. 유리잔을 쓰는 것이 좋아.”
“제가 어디로 가야 대인 쓰실 유리잔을 구할까요?”
금하는 근심 서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육역 역시 마주 보다가 잠시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두자.”
금하는 그가 음식을 먹기 시작한 것을 보고, 궤로 가서 술 단지를 찾았다.
부잣집 자제는 정말 따지는 게 너무 많아. 시중들기 진짜 어렵다.
금하가 한창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육역의 목소리가 또 들렸다.
“이 무는 돼지기름으로 볶은 건가?”
금하가 술 단지를 들고 웃음을 머금은 채 가까이 왔다.
“맞아요! 이 색과 광택이 얼마나 좋은지 좀 보세요! 대양이 볶은 이 요리는 일품이죠. 이거 한 접시면, 저는 밥 세 그릇은 먹을 수 있어요.”
육역이 천천히 여유 있게 물었다.
“채소요리만으로 차린 자리라 하지 않았나? 왜 돼지기름을 썼지?”
“돼지기름을 써야 맛있어서…….”
“십만 공덕은 어떡하고?”
그가 물었다.
“그런 건 상관 마시고요. 대인이 사실 공덕이 부족하신 건 아니잖아요!”
금하는 그가 진정 모시기 힘든 상사라는 걸 깊이 깨달았다.
“이 음식 정말 맛있어요. 그냥 아쉬운 대로 드시면 안 돼요?”
육역은 그녀가 살짝 토라진 것을 알아채 시선을 내리깔고 희미하게 웃었다.
“되지. 아쉬운 대로 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