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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지하 (80)화 (80/224)

80화

그를 본 금하는 순간 멍해졌다.

이유 같은 건 모르지만, 그녀는 이 사람이 마치 자신의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육 경력.”

유 상좌에게 이 ‘분’은 윗분으로 모실 수도, 아랫사람으로 무시할 수도 없는 상대였다.

“요즘 사건 때문에 수고가 많소.”

“대인, 별말씀을요. 이번 건은 소관도 함께 처리하는 것이니, 모두 당연한 일입니다.”

금하를 향해 돌아선 육역의 눈빛은 그리 좋지 않았다.

“원 포쾌, 내가 마침 널 찾고 있었다.”

“대인, 무슨 분부가 있으십니까?”

“어젯밤 사수죽을 강탈당한 일에 대해, 내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육역이 미간을 찡그렸고, 듣던 유 상좌는 어리둥절해졌다.

“어젯밤 사수죽을 강탈당했다고?”

육역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인. 어젯밤 제가 원 포쾌와 금의위 몇에게 사수죽을 호송하라 하였지요. 도중에 강탈당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고, 그중 몇 명은 도적에게 다치기도 했습니다.”

“뜻밖에도 도적이 이리 대담하다니. 육 경력은 괜찮소?”

“대인의 염려 감사드립니다. 소관은 괜찮습니다만, 이 도적을 잡지 못하여 마음이 실로 분할 뿐입니다.”

“그야 당연한 마음이지! 그 도적놈들이 국법도 안중에 없이 이렇게 제멋대로 날뛰고 있다니…….”

유 상좌가 금하에게 말했다.

“네가 당시 현장에 있던 이상, 도적을 잡는 데 최선을 다해 협조해야 한다. 육 경력이 네게 묻고자 하는 말이 있다니, 너는 먼저 가거라.”

“예. 그 계집종, 할멈과 요리사는…….”

금하가 떠보듯이 물었다.

“내일 가거라.”

“소관 명을 받들겠습니다.”

육역도 유 상좌에게 예의 있게 말했다.

“그럼 소관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얼른 일 보시오, 그리 예의 차릴 필요 없소.”

유 상좌가 급히 말했다.

금하는 육역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머릿속은 의문으로 가득 찼다.

설마 발각된 건 아니겠지. 육역이 소식을 알게 된 걸까? 그날 밤 그녀가 수상쩍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지금 끝장을 내자는 기세인가?

이렇게 조마조마 불안해하며, 육역이 묵고 있는 작은 원까지 계속 걸어왔다.

월아문으로 들어가서야 육역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의 어조는 더없이 냉랭했다.

“너, 어디를 갔더냐. 누구와 싸웠지?”

“아니에요!”

“상처가 다 벌어졌는데도 아니라고 해!”

육역이 그녀에게 왼쪽 팔을 눈짓해 금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때서야 옷소매 위로 피가 은은하게 스민 것을 알아차렸다.

어쩐지 아픈 게 점점 더 심해지더라니.

약효가 다 떨어졌나, 그렇게 생각한 원인이 여기 있었다.

그녀가 기억을 돌이켜 보니, 아마도 대양을 막을 때, 그에게 밀쳐졌고 자신이 담에 부딪혀 상처가 벌어진 것 같았다.

“이건……, 조심하지 않아 부딪혔어요.”

그녀는 이렇게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을 하려 했던 육역은 끝끝내 참고, 대신 품속에서 도자기 병을 꺼내 명령했다.

“우선 들어가. 내가 상처를 묶어주겠다.”

“괜찮아요. 제가 혼자 묶을 수 있습니다.”

금하가 급하게 말하고는 손을 내밀어 그의 손에 있는 도자기 병을 받았다. 그리고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진짜예요, 대인. 등 뒤의 상처도 전 혼자 싸고 묶을 수 있어요.”

“…….”

육역은 그녀가 들고 있는 약을 흘끔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분명히 이 약을 쓸 것이지?”

“이건, 대인의 호의이신데, 소관이 어찌 마다할 수가 있겠어요.”

금하는 도자기 병을 본 후, 고개를 들고 웃었다.

“게다가, 소관도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가 많으면 오히려 물지 않고, 빚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근심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이젠 걱정하지 않습니다.”

금하는 바로 방으로 들어갔고, 육역은 말이 없었다.

* * *

이 꼬맹이 계집애가 들어간 곳은 그의 방이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그녀는 그를 오히려 방 밖에 가둬둔 것이다.

육역은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포 자락을 걷어 올리고, 복도 난간 위에 기대앉았다.

안에서는 도자기 병이 탁자에 부딪히는 소리가 잠깐 들렸고, 이내 또 금하가 헉, 하며 숨을 짧게 들이켜는 소리도 들렸다.

주의해 듣는다면, 그녀가 고통을 참을 수 없어 내는 목 울림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평소에는 금하가 오히려 이렇게 기를 쓰고 강한 척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 한 터라, 그건 그것대로 육역을 화나게 하고, 또 웃게도 했다.

천둥소리가 처마 끝에서 맴돌던 것도 잠시. 이내 굵직굵직한 빗방울이 별안간 후드득 떨어지고, 빗줄기는 돌길 위를 투둑투둑 소리를 내며 때렸다.

* * *

이상하게도 육역이 준 약은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상처 위에 바르면 오히려 서늘하고 차가워 매우 편안해졌다.

금하는 옷을 다시 챙겨 입고 일어나서야 여기가 육역의 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놀라 황급하게 문을 열고 방을 나왔다.

육역은 바로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대인, 소관이 죽어 마땅합니다. 잠깐 잊어먹고 여기가 제 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미안해하며, 몰래 그의 눈치를 살폈다.

육역은 그녀를 흘끔 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 다친 것이 가치가 있던가?”

금하는 육역의 이 질문이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순간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녀는 차라리 알아듣지 못한 척 해버렸다.

“네?”

육역이 몸을 일으켰다. 고개 숙여 옷소매를 가지런히 매만지고는 그가 천천히 말했다.

“내가 네게 물었다. 팔에 이렇게 칼을 맞을 필요가 있었던가?”

“필요가 있죠. 당연히 필요가 있었죠.”

이제 정신을 차린 금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대인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일하고, 매우 험악하고 위험한 곳조차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물며 이것은 아주 사소한 상처일 뿐인걸요.”

이 말에 육역은 그녀를 더는 상대하지 않았다. 흥하며 콧방귀를 뀌더니 그는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짐작건대 그의 심사가 아주 좋지 않았다. 금하는 문밖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떠보는 어조로 말했다.

“대인 아무 일 없으시면, 소관 그만 먼저…….”

금하는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한 채 문 안에 있는 그에게 차갑게 말이 잘렸다.

“들어와, 내가 물어볼 게 있다.”

금하는 할 수 없이 다시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육역은 모서리 장식이 붙은 네모난 탁자에 앉아 스스로 찻물을 따르는 중이었다.

“이런 일을 어디 대인께서 하십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육역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금하는 본능적으로 그의 기분을 맞추려고 했다. 손을 내밀어 그가 손에 든 찻주전자를 잡았는데, 육역이 오히려 팔을 굽혀 그녀를 비켜나게 했다.

“넌 차분히 좀 있어.”

육역은 언짢은 시선으로 그녀를 흘끔 보고는 연이어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앉아!”

지체하지 않고 바로 앉았다지만, 금하는 도무지 육역에 관해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가 그 밤 사수죽을 강탈당한 일에 대해 눈치를 챘다면, 그녀를 처벌해야 맞는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를 편히 앉게 하지, 응당 무릎을 꿇려야 하는 것이 도리에 맞을 텐데?

만약 그가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면, 왜 기분은 좋지 않고 얼굴은 또 이렇게 어두워 보일까?

금하는 단정하고 예의 바르게 앉아 있긴 했지만, 머릿속으로는 자신이 도대체 어떤 실수를 하고 착오가 있었는지 부단히 돌이켜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육역의 안색을 주의하여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점차 초조해졌다.

“너, 정말 내게 보고하고 싶은 사안이 없어?”

육역이 찻물을 마시다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관은 대인께서 무슨 말씀을 듣고 싶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종류의 말은 금하가 제일 싫어하는 것으로, 어릴 때 어머니는 늘 정색을 하고 물으시곤 했다.

‘너 오늘 말해야 할 무슨 일 없니?’

그건 금하를 그야말로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그녀는 늘 어머니는 모든 것을 아신다고 생각해서 결국 곧이곧대로 전부 얘기해야만 했고 마지막에는 한결같이 한바탕 두들겨 맞았다.

육역이 미미하게 눈썹을 세웠다.

“맞다! 대인께 보고 드려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요.”

금하는 적란엽을 가져다 막기로 결심하여 말투를 무겁게 했다.

“적 낭자에게 문제가 생겼어요!”

“무슨 문제?”

“상세한 상황은 소관도 잘은 모릅니다. 다만 그녀가 어젯밤 배에서 경성에서 왔다는 공자를 만났다는데, 돌아온 후 이상해졌다는 것만 압니다. 적 낭자는 밤새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정신이 나가 멍해 있고요, 옆 사람의 말도 전혀 듣지 않는다고 해요. 그녀의 계집종이 급하게 의관에 와서 의원을 찾았는데, 마침 대양을 만난 거죠.”

금하는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대양은 대인께서 적 낭자에게 매우 마음을 쓰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대인 대신 보러 갔어요.”

“나 대신 적 낭자를 보러 가?”

육역은 우스워졌고, 금하는 헤헤 웃어 보였다.

“심 의원이 적 낭자에게 침을 놓고서야 겨우 정신이 돌아왔지만, 여전히 말을 안 하고, 울기만 한답니다. 대인, 그녀는 누군가에게 능욕을 당한 걸까요?”

육역의 마음속에는 이미 어느 정도의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냉랭하게 웃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인께선 혹시 이 일을 이미 알고 계셨어요?”

금하가 그의 표정을 보고는 짐작하여 물었다.

“그 배에 있던 이는 누구일까요?”

“……내가 비록 만나고 싶지 않아도, 만날 수밖에 없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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