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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지하 (78)화 (78/224)

78화

연일 비가 내리다가 드디어 오늘 오랜만에 해가 나왔다.

양악은 우선 아버지의 시중을 들어 약을 드시게 했다. 아버지의 다리는 점차 부기가 가라앉고 있어서 이제 한숨을 돌리는 중이었다.

그 후 양악은 빨래를 하고 의동을 도와 뜰에서 약재를 햇볕에 말렸다.

“부탁이예요. 심 의원께서 어디 계신지 말씀 좀 해주세요. 우리 집 아가씨께서 다급히 의원님 와보시길 기다리고 계세요.”

계아는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의동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당장에라도 울 것 같았다.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스승님은 왕진을 가셔서, 의관 내에 안 계십니다. 아가씨, 조급해하지 마시고 외당에서 기다려주세요.”

의동이 좋은 말로 권했다.

“하지만, 우리 아가씨가…….”

계아는 왁,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우리 아가씨 어떡해요, 어떡해!”

이때 양악은 지붕에서 삼백초를 가지런히 널고 있었다. 그러다 이 소리에 머리를 내밀어 계아를 보고는 잠시 멍해졌다.

약재를 내려놓은 양악이 돌연 지붕에서 뛰어내려 계아의 앞까지 뛰어가 급하게 물었다.

“그 댁 아가씨가 어떻다고요?”

“누, 누구……세요?”

눈물을 글썽이던 계아는 단번에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전 얼마 전 향료 갖다 드린 사람입니다. 육 대인이 보내신 거, 기억나요?”

계아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말해 봐요. 그 댁 아가씨가 어떻다고요? 병났어요?”

양악은 급한 나머지 이마의 핏대마저 튀어나왔다.

계아가 훌쩍훌쩍 흐느끼며 말했다.

“병난 것보다 더 심해요. 아가, 아가씨는…… 아가씨는 귀신 들린 것 같아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앉아서 움직이지도 않고 눈은 멍하니 한 곳만 바라보고…… 사람이 거의 죽은 것 같아요.”

“함께 가봅시다!”

“그쪽은 의원도 아니잖아요.”

양악은 어쩔 수 없이 포쾌의 제패를 꺼내 소리 질렀다.

“얼른 날 데려가요!”

계아는 패 위에 무슨 글자가 각인돼 있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그가 관청 사람인 것만 알아보았다. 순간 그녀는 거역할 엄두도 내지 못하여 바로 그에게 길을 안내했다.

“관원 나리, 우리 아가씨 구할 방도가 있으세요?”

“몰라요.”

양악은 몹시 심란해져 그녀에게 말했는지, 자신에게 말했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나는 아가씨를 죽게 하지 않을 거예요. 아가씨는 절대 죽을 수 없어요!”

계아는 이미 종종걸음치고 있었건만, 양악은 그녀가 매우 느리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녀의 팔을 잡은 그가 큰 걸음으로 빠르게 앞을 향해 걸어갔다.

양악은 적란엽이 사는 작은 집으로 들어갔다. 다가와 무언가 묻는 가복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직접 사람을 밀치고,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적란엽을 지키던 반 귀머거리 할멈은 이렇게 덩치 큰 사람이 쳐들어온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움츠러들었을 뿐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낭자.”

적란엽은 여전히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양악은 그런 그녀를 보고는 그 말뿐, 더는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곳을 응시한 채 혼이 나간 듯한 얼굴로 그를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화장을 지워 창백하고 초췌한 얼굴은 일전의 아름다움이 사라져 사람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양악이 정신이 빠져있는 사이, 계아도 서둘러 들어왔다. 적란엽이 여전히 똑같은 모습이자, 그녀는 코가 시큰거려 또 울려고 했다.

“왜 이렇게 됐습니까?”

양악이 물었다.

“저도 몰라요. 어젯밤 아가씨는 돌아오신 후부터 넋을 잃으셔서는 아무 말도 안 하세요. 제가 대신 세수시켜드리고 옷 갈아입고 주무시게 했는데요. 이렇게 앉으셔서 밤새 움직이지도 않고, 지금까지 계속 이러세요.”

“아가씨는 어디에서 돌아오셨습니까?”

양악은 마음속 울분을 억지로 짓눌렀다.

“아가씨는…… 누군가에게 능욕을 당하신 겁니까?”

“전 몰라요. 아가씨는 어제 원래 매우 즐거워하시며 경성에서 온 공자 만나러 가셨어요.”

“경성에서 온 공자는 육 대인입니까?”

“전 정말 몰라요. 그 배에는 아가씨 혼자 가셨고, 저는 쫓아갈 수 없었어요.”

양악은 관절이 우득 소리가 날 만큼 주먹을 꽉 쥐었다.

“아가씨 혼자만 오르게 했다…… 분명 능욕당한 겁니다! 아, 아가씨는…… 나, 나는…….”

계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럼 어떡해야 하죠? 관에 보고해야 하나요?”

양악은 제자리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가까스로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당장은 아가씨가 제일 중요합니다. 제가 곧 심 의원을 모셔 올 테니, 아가씨를 잘 돌봐줘요.”

말을 하면서도 양악은 마음을 놓지 못하여 적란엽을 계속 바라봤다.

양악은 급히 의관으로 돌아와 의동에게 심 의원이 어디로 왕진을 갔는지 자세히 물었다. 그렇게 양악은 왕진을 끝낸 심 의원을 직접 만나 적가로 모시고 갔다.

심 의원이 먼저 적란엽의 맥을 짚을 동안, 양악은 긴장하여 침상 난간을 꽉 쥔 채 기다렸다.

“아가씨의 증상은 격렬한 비통함으로 마음이 어지러워진 것입니다. 게다가 평소 선천적으로 심맥에 손상이 있고, 기혈이 약합니다…….”

심 의원이 침착하게 말했다.

양악은 그의 말을 끝까지 얌전하게 기다리지 못하여 다급히 물었다.

“치료할 수 있죠? 아가씨는 아무 일 없겠죠?”

“당연히 치료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아가씨는 선천적으로 심맥에 손상이 있어서 장기간 요양이 필요합니다. 크게 기쁘거나, 크게 슬퍼할 일이 있어서도 아니 되시죠.”

심 의원은 따라온 의동에게 의료 꾸러미를 열게 했다.

그중 긴 은침을 한 대 꺼내어 적란엽의 인중 위를 거듭 찔렀다.

오히려 이를 보는 양악이 은침이 찌를 때마다 온몸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고, 침상 난간을 꽉 쥔 그의 손끝이 나무를 파고들어 부스러기가 생길 정도였다.

바로 피 한 방울이 스며 나온 동시에 적란엽이 아, 하며 소리를 냈다. 그녀의 눈동자가 놀라 움직이고, 기어이 정신이 되돌아 왔다.

“아가씨…….”

계아가 적란엽의 손을 잡자, 그녀는 느리게 눈동자를 움직여 계아를 바라봤다. 정교하고 섬세한 아래턱이 미세하게 떨리고, 끝내 눈물이 후드득 흘러 내렸다.

적란엽의 흐느낌을 들으면서도 양악은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두 눈을 부릅떠 그녀를 바라볼 뿐, 그는 움직일 수도 없는 듯했다.

심 의원의 느린 음성이 이어졌다.

“울면 좋아집니다. 다음번에 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여러분은 침을 놓을 수 없으니, 그때는 세게 뺨을 한 대 때리는 것도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더는 이렇게 급한 상황을 만들 필요가 없지요.”

그의 마지막 한 마디는 양악을 향해 한 말이었다.

양악은 심 의원을 보고 있다 해도, 정신이 여전히 제대로 돌아오진 않았다. 입술을 달싹거리지만, 무슨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심 의원은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고, 의동에게 의료 꾸러미를 챙기라 하고는 할멈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가 집을 나섰다.

적란엽은 여전히 울었고, 울수록 마음은 더 상했다. 그녀는 마치 몸에 남은 기력 전부를 우는 것에 쏟아붓는 것 같았다.

“아가씨…… 아가씨…….”

계아가 옆에서 가볍게 부르며 따라 울었다.

양악은 계속 얼이 빠진 채로 서 있었다. 그녀의 흐느낌을 따라 그의 몸 안에서도 무언가가 천천히 빠져나가는 것 같고,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양악은 오래도록 조용히 서 있다가 조용히 그곳을 나왔다.

* * *

금하는 오늘의 두 번째 맛있는 식사를 즐기는 중이었다.

오후 밥 시간이 되자, 역졸은 다시 칠기 합을 들고 왔다. 그녀는 거듭 감사를 표하며 받아 든 후 탁자에 놓고 재빨리 열어 보았다.

―― 안에는 맑은 비둘기탕, 두부 부침과 표고청경채볶음, 그리고 쌀밥이 있었다.

아침 그때보다 더 풍성해서 금하는 놀랍기만 했다.

양주 관역이 부상자에게 이리도 대접이 후한 줄 진작 알았으면, 아마 자신은 수시로 잔병치레를 했을 터였다.

금하는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 매우 흡족한 마음으로 마지막 한 모금의 탕을 전부 마셨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그릇을 가지러 이렇게 빨리 와?

의아해하며 금하가 문을 열자, 그곳엔 양악이 서 있었다.

“대양, 너 왜 그래? 대장 쪽에…….”

양악의 안색이 심상치 않아 그녀는 순간 긴장했다.

“대장 병세가 변한 거야? 심각해?”

“아버지는 괜찮으셔.”

양악은 다른 말없이 조용히 들어왔다.

“나, 적 낭자를 만났어. 그녀가 많이 좋지 않아.”

대장이 괜찮다는 말을 듣고서야 금하는 마음을 놓고, 다시 의아해했다.

“적 낭자가 왜?”

양악은 격자무늬의 문이 달린 서가 앞에 멈췄다. 그는 꼿꼿이 서 있으나 안색이 매우 나빴다. 아무런 말도 없던 그는 금하가 여러 번 반복해서 묻고서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세한 상황은 나도 모르지만, 겉모습을 봐서는 분명 누군가에게 능욕당했어.”

살짝 멍해진 금하가 물었다.

“누구에게 능욕을 당해? 그녀의 양가가 양주지부의 막내 처남이잖아. 누구 간이 그렇게 커서 감히 그녀를 괴롭혀?”

“듣기론 경성에서 온 공자래.”

양악의 말투에서는 서늘한 한기가 배어 나왔다.

……경성에서 오고, 또 양주지부의 막내 처남도 안중에 없다…….

“대양.”

금하는 바보도 알 만큼 간단하게 양악이 가리키는 것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금하는 알고 있다. 육역은 사람이 비록 조금 미운 구석은 있지만, 결코 여자에게 힘으로 어떻게 할 사람일 수 없다고.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양악을 억지로 끌어 앉혔다.

“대양, 네가 지금 화가 많이 나 정신이 없단 걸 알아. 하지만 네가 상황을 자세히 말해야 나도 널 도울 수 있어.”

양악은 이번 일에 자신이 결코 무모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리저리 여러모로 생각해 보아도 그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도와달라 할 수도 없기에 그는 금하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었다.

이내 깊게 한숨을 내쉰 양악이 오늘 계아를 만난 후의 일을 있는 그대로 금하에게 전부 털어놓았다.

얘기를 다 들은 금하는 순간 미간을 찡그렸다.

“나는 네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알지만, 육 대인은 아니야. 어젯밤 육 대인은 사수죽을 데리고 사람을 확인하러 오안방에 갔어.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사수죽을 강탈당한 바람에 한바탕 난리도 아니었다. 그는 적 낭자를 상대하러 갈 시간을 전혀 낼 수 없었어.”

“누구에게 강탈당했는데?”

양악이 묻자, 금하는 소리는 내지 못한 채 그에게 눈짓으로만 알렸다.

양악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안 그래도 나도 칼을 맞고, 치료하고 있잖아. 아, 이건 절대 대장에게 말씀드리지 마!”

금하가 그에게 거듭 당부했다.

양악은 그제야 그녀의 왼팔이 상당히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심하게 다쳤어?”

“아니, 찰과상이야. 그리고 이 관역은 부상자 대우가 진짜 좋아. 끼니마다 푸짐하게 가져다준다. 난 이렇게 혼자서 비둘기 한 마리를 다 먹는 건 처음이야!”

금하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작은 뼈 무더기를 입술로 가리켰다.

“네가 오는 거 진작 알았으면, 내가 좀 남겨 두는 건데.”

“괜찮아. 잘했어.”

지금 어디 먹을 생각이나 나겠나. 양악은 그래도 마음을 조금 놓았다.

“그럼 넌 이 일이…….”

“적 낭자는 배에 탔는데, 계집종은 따라 탈 수 없었다.”

금하는 매우 이상함을 느꼈다.

“그녀는 아무리 뭐라 해도 연약한 여자야. 게다가 생긴 것도 예쁘지. 그런데 그녀의 양가는 예상 밖으로 그녀 혼자 배를 타게 허락했단 말이지.”

금하의 눈매가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이상하지 않아? 그날 우리가 적란엽의 배에 탔을 때, 비록 본 건 그녀와 계집종뿐이었지만, 배에는 사공도 있었고, 하인도 4, 5명으로 적지 않았어. 적 낭자의 양가는 그녀가 금 거북이 낚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함부로 적 낭자가 능욕을 당하게 그냥 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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