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의지하 (76)화 (76/224)

76화

금하가 다시 깨어났을 때 하늘은 조금 더 밝아진 듯했지만,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반쯤 몸을 기대어 일어났고, 거의 뛰어들다시피 들어온 사소를 영문 모를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너 괜찮아?”

사소의 얼굴은 긴장으로 가득했다.

금하가 이상해했다.

“괜찮아. 급한 일 있어?”

“내가 밖에서 문을 반나절은 두드렸다. 왜 대답이 없어?”

“……아마 내가 깊이 잠들어서 그랬나 봐.”

그녀는 눈을 문지르고는 다시 물었다.

“오빠, 급한 일 있어?”

“내가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너 보러 온 거야.”

사소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팔을 보고는 불안해졌다.

“상처가 매우 깊다고 들었어. 네가 느끼기엔 어때?”

“괜찮아. 대수롭지 않아.”

금하는 신발을 꺾어 신고, 바닥으로 내려왔다.

어질어질한 몸으로 탁자 옆까지 와서는 손을 뻗어 마실 물을 따르려 했다. 그러다 갑자기 다친 팔을 건드려 그녀는 아픔에 바로 입을 쫙 벌렸다.

“내가 할게.”

사소는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녀 대신 풀로 엮은 바구니의 덮개를 열었다. 안의 주전자를 들자, 가볍게 달랑거렸다. 안에는 물이 전혀 없었다.

“여긴 물도 없냐. 이렇게 해서 어떻게 상처를 치료해.”

그가 화를 내며 말했다.

“양악은 요즘 매일 의관에서 양숙을 모시고 있고, 널 돌봐줄 사람도 없잖아. 이러면 안 되지! 차라리 네가 나 있는 곳으로 옮겨. 우선 부상을 잘 치료하는 게 중요해.”

“필요 없어. 대장과 양악 모두 없는데, 내가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유대인은 더욱 화를 내실 거야. 게다가 또 한 분 있어. 그쪽은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분이야.”

금하는 맥없이 탁자 위에 엎드려 속으로 생각했다.

부엌에 먹을 것이 남았을까.

“그 자식이 화가 나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내가 너한테 얘기 안 했어? 이 시시한 공무 따위, 망치면 망치는 거라고. 나는…….”

이 말까지 하다가 사소는 매우 거북해져서 잠시 말을 그쳤다. 왜 이러지.

그는 말을 바꾸어 말했다.

“……네가 또 갈 곳이 없는 게 아니잖아.”

말이 막 끝나자마자, 문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람이 냉랭하게 말했다.

“듣자니, 원 포쾌에게 더 좋은 기회가 생기려나 보군.”

금하는 육역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그녀는 벌떡 고개를 들고 있어 섰다. 이번에는 너무 맹렬하게 일어나 다친 팔까지 영향이 미쳤다. 아픔에 그녀는 속으로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당치도 않습니다. 대인, 부디 오해하지 마세요. 유 대인 들으시면 곤란해져요.”

그녀는 급하게 변명했다.

“넌 앉아.”

육역이 미간을 찌푸렸다.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그녀의 앞에 놓고는 분부했다.

“약 마셔.”

금하는 느리게 앉았다. 고개를 숙여 아직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는 탕약을 바라봤다.

그녀가 망설이며 물었다.

“이 약은…….”

“열을 내릴 수 있다. 네 상처에 좋아.”

육역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요. 제 말은……, 이 약을 대인이 달이셨어요?”

“내가 역졸에게 달이라고 시켰다.”

금하는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그런데 또 육역이 여유있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 처방은 내가 한 거야. 그럼 넌 안 마시겠다고 할 건가?”

금하는 채 대답하지 않았는데, 영문 모른 채 한쪽 옆으로 밀려났던 사소가 이미 그녀 대신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의원도 아니잖아. 뭘 근거로 이 약을 마셔야 해? 혹시 문제라도 생기면, 당신이 책임질 수 있어? 흥!”

“당신은 내가 책임질 수 있을지 없을지를 어찌 알지?”

육역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반문했다.

사소는 더는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손을 뻗어 금하를 끌어당겼다.

“가자! 내 쪽으로 가. 내가 너 봐 줄 의원 찾을게.”

“넌 그녀를 데리고 갈 수 없어.”

육역이 차갑게 말했다.

“뭘 근거로. 얘가 당신 것도 아니잖아?”

사소가 목소리를 높였다. 정식으로 육역과 맞선 셈이었다.

“최소한 그녀가 당신 것도 아니지.”

육역의 어조는 비록 높지 않았으나, 냉랭한 한기로 오싹했다.

“그녀…….”

사소는 목이 막혔다. 더 생각도 안 해보고 말이 불쑥 튀어 나갔다.

“당신이 믿든 안 믿든, 본좌께서는 내일 금하를 아내로 맞을 거야!”

육역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볼 겨를이 없었다. 금하는 이미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오빠, 이일은 우리 다음에 다시 얘기해. 중요한 일 있지 않아? 가서 일 봐. 나 염려할 필요 없어. 나 여기서 매우 좋아. 가 봐. 배웅 안 한다…….”

“넌 왜 항상 날 내쫓아?”

사소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불만스럽게 말하는 사소의 옆에 육역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런데 그의 입술 가에는 보일 듯 말듯 희미한 웃음이 서려 있었다.

“오빠, 나 아직 열나. 오빠가 떠들어서 내 머리가 온통 욱신거려. 내일 다시 와.”

금하는 그를 문으로 미는 한편 무기력하게 말했다.

그녀에게 두 걸음가량 밀린 사소가 문 입구에 버티고 돌아서 정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내가 널 아내로 맞겠다는 거 못 믿냐?”

“나는…….”

금하는 그의 말에 한순간 얼이 빠졌다.

“아니, 믿어. 이건 좋은 일이잖아. 이 일의 관건은 우리 어머니께서 결정하셔야 한다는 거지. 내 스스로 결정할 수가 없어. 이 일은 안 급해. 나중에 내가 기력 찾고 한가해지면, 우리 다시 천천히 상의해.”

“이렇게 말하는 거로 봐선, 너도 원한 거다.”

사소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이렇게 좋은 일을, 내가 왜 원하지 않겠어.”

금하는 얼떨결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녀의 이 말을 듣고서야, 사소는 비로소 돌아서 떠났다.

물론 가기 전 육역을 다시 한번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침내 그를 보냈다. 금하는 한숨을 돌리고는 육역을 향해 돌아서 웃으며 겸연쩍어했다.

“그가 바로 시골 덜렁이예요. 대인께서 넓으신 아량으로 아무쪼록 그와 상대하지 마세요.”

육역은 원래 얼굴이 물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는 기분이 다소 누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우울해져 빈정거렸다.

“아직 시집도 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리 서둘러 시댁 대신 편들어 주나?”

금하는 잠시 멍해졌다. 그러다 문득 중요한 일이 생각나 다급하게 말했다.

“대인, 이 일은 절대 유 대인께 말하지 마세요. 부디부디, 소관이 부탁드릴게요. 아직 사건조사 기간인데, 혹시라도 유 대인께서 제가 딴마음이 있다고 여기시고, 제 죄를 다스리신다면, 그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에요.”

“네가 그래도 두려움을 알긴 하는구나!”

육역이 차갑게 흥, 하며 탁자 위를 입술로 가리켰다.

“먼저 약 마셔.”

명령을 들은 금하는 두말하지 않았다.

약사발을 들어 꿀꺽꿀꺽 숨 한 번 쉬지 않고, 그릇째 쏟아부었다.

육역은 그 모습을 보고 원래는 용서해 주기 위한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대인. 대인께서 내리신 처방이 정말 특효가 있어요. 이 약을 제가 마시자마자, 온몸이 가뿐해지고, 기분이 맑고 상쾌해졌어요. 기경팔맥에 따뜻한 것이 돌아다니는 것 같아요.”

금하는 약사발을 내려놓았다. 하는 말이 고스란히 아첨하는 말이었다.

“너 데였잖아.”

육역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약은 방금 달였다. 계속 뜨거운 김이 오르는 걸 못 보았나?”

“괜찮아요. 전 뜨거운 거에 강해요.”

재빨리 말을 한 금하는 뒤돌아 몰래 혀를 내밀고 열을 식혔다.

다시 돌아섰을 때, 뜻밖에도 육역이 자리에 계속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대인, 분부할 일이 또 있으세요?”

금하가 넌지시 떠보며 물었다.

육역은 손이 닿는 대로 빈 잔을 들고 탁자 위에서 빙그르르 돌렸다. 답도 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가 담담히 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