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차 반 잔을 마실 시간이 지난 후, 고경이 와서 금하에게 물었다.
“육 대인께서 물을 말씀이 있다. 오늘 선박 임차비는 모두 은자 두 냥이고, 배 위의 차와 간식은 은자 3전으로 셈한다. 대인이 임시로 너희 대신 이미 지급하셨어. 너희가 언제 은자를 갚을 예정인지 물으시는데?”
금하는 서 있던 그대로 놀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석상처럼 굳었다. 한참 후에야 정신이 돌아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배, 배는……, 육대인 본인께서 필요하셨던 거 아닌가요? 왜 지금 저희에게 돈을 지불하라 하시죠?”
“그건 내가 몰라. 나는 단지 대인 대신 물어보러 온 거다.”
다른 일은 그런대로 상관없다. 하지만 은자 건은 유독 금하를 근심케 했다.
배를 빌리는 데, 2냥 3전을 써버리다니. 이건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유 대인에게 청구한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그녀는 초조하게 제자리를 맴돌다가, 이 일이 조금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육역을 찾아가 말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 * *
문은 잠기지 않고 그냥 닫혀만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대담하게 문을 막 열 수 없었다. 그녀는 단정하고 예의 바르게 문밖에 서서 단정하고 예의 바르게 문을 두드렸고, 단정하고 예의 바르게 말을 했다.
“육 대인, 소관 보고 드릴 일이 있습니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들어와라.”
안에서 담담한 소리가 들렸다.
금하는 손으로 뺨을 문지르고, 아래턱을 이리저리 움직여 풀었다. 이어서 봄꽃같이 웃는 얼굴을 재빨리 만들어내고는 걸음을 내디뎌 안으로 들어갔다.
내실, 육역은 이미 일상복으로 갈아입었다.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월백색의 옷을 입고 검은 머리카락은 끈으로 느슨히 묶은 채, 서안 앞에 바르게 서서 고개를 숙여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육 대인?”
금하가 넌지시 물었다.
“기다려라.”
육역은 시선도 들지 않고, 온통 집중하여 서안 위만 보고 있었다.
금하는 입을 다물고 얌전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실내는 고요하고 조용하여 육역의 손가락이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그 소리를 따라 자세히 보니, 그는 큰길이 종횡으로 교차하는 듯한 어떤 지도를 보는 중이었다. 분명 어떤 도시의 지도였다.
한참이나 기다려도 육역은 시선을 들지 않았다.
금하는 기둥처럼 서 있었으나, 다리가 아픈 줄도 몰랐다. 단지 얼굴에 차곡차곡 쌓아둔 미소는 정말 유지하기 힘들었다.
꼬박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고서야, 육역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힐끔 보았다. 금하는 급하게 웃는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무슨 일이지?”
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옷소매를 매만지며 마치 무심한 듯 물었다. 입술 끝이 희미하게 위로 들리고, 눈가에 짓궂은 웃음이 설핏 보이다가 순간 사라졌다.
“육 대인, 방금 천호 고경이 제게 배를 빌린 은자 두 냥 삼 전을 언제 갚을 거냐 물었습니다. 향선을 빌린 건 대인의 의견이라 생각했는데, 어찌 저희에게 은자를 갚으라 하시는지요. 분명 그가 잘못 들은 걸 테죠?”
금하는 생글생글 웃었다.
육역이 고개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평온하게 말했다.
“그는 잘못 듣지 않았다.”
“……저기…….”
금하의 웃는 얼굴이 반은 무너졌다. 그래도 나머지 반은 여전히 굳세게 버티고 있었다.
“대인, 이, 이건 좀 맞지 않죠…….”
“왜 맞지 않아?”
육역이 서안 뒤에서 돌아 나왔다.
“넌 내게 은자를 빌리러 와서, 배를 빌려 사건을 조사하고 싶다고 말했었지?”
“……예, 그랬죠. 하지만 저는 향선을 빌리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향선은 이렇게나 비싸서 유 대인 쪽에 제가 청구하기도 어렵습니다.”
금하는 가까스로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실 따져보면, 향선은 대인이 빌리셨죠. 적 낭자가 만나려고 한 이도 대인이셨고, 이 배의 임차비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 육역이 말을 잘랐다.
“네 말대로 따져볼까. 강남으로 와야 했던 이 사건을 나는 공동으로 처리하고 있었지. 배를 빌리는 것이든, 적 낭자를 보는 것이든 모두 너희 육선문과 공동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육역이 시선을 들어 금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오늘 배는 너도 앉았고, 적 낭자는 너도 보았다. 사건의 실마리는 네가 얻었고, 간식은 네가 대부분을 먹었지. 그런데 배의 임차비를 내게 내라 하니, 어디에 이런 도리가 있더냐.”
이번에는 금하의 얼굴이 철저히 무너져 내렸다.
“……저, 저는 그냥 몇 개 먹었을 뿐인데요…….”
육역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더없이 태연자약했다.
“사람이란 각박하지 않고, 관용이 있어야 하지.”
대체 누가 각박하고, 관용이 없는데?!
* * *
금하도 평소 말솜씨가 유창한 쪽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를 써도 말로는 육역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잠시 주저했지만, 뾰족한 수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는 의기소침하고 풀이 죽어 밖으로 향했다. 그런데 앞발이 겨우 문턱을 넘어서고 뒷발은 아직 따라붙지도 않던 순간이었다.
육역이 뒤에서 하는 말이 다시 들렸다.
“이후 사람이 없을 때, 너는 내가 있는 이 방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세상이라는 건 함부로 떠드는 소인을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는 없지. 내가 비록 깨끗한 명성은 없다 해도, 그래도 얼마간의 결백이나마 지키고 싶어 해.”
이 말은 조금 뜬금없었다. 그녀는 어리둥절해져, 망설이다가 그래도 고개 돌려 물었다.
“함부로 말하는 소인이요?”
냉랭한 육역의 시선을 마주친 순간, 금하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이 커졌다.
“오늘 나는 너희의 사건 조사를 돕기 위해, 적 낭자를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 소인의 무리가 있었어. 뒤에서 내가 무슨 색욕에 미친 사람이라 하더군.”
육역이 돌아서서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
금하는 마침내 이 일의 발단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때 창밖에서 발소리가 났던 것을 곰곰이 돌이켜 생각했다. 아마도 육역은 바로 그때 창밖에 있었고, 그 말들을 전부 들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자신은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당장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함부로 말을 내뱉었다고 뉘우치고 괴로워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리저리 궁리를 해봐도 좋은 방법이 없었다. 그저 진실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대인,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는 대양을 곤경에서 구해주고자 순간 마음이 급했어요. 그래서 무슨 거리낌도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그런 말들을 해 버렸어요. 도량 넓으신 대인께서 이번에 용서해 주시면, 제가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거리낌도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해버렸다?”
육역이 살짝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때, 금하는 반응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요, 그런 말은 그야말로 검고 흰 것 구별 못 하고,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뛴 것이죠! 대인, 이번은 용서해 주세요!”
금하의 사근사근한 말에도 육역은 여전히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금하 모르게 슬쩍 눈빛으로 웃던 그가 손가락으로 무심하게 방 안의 책꽂이를 슥 훑었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또 먼지가 있나…….”
금하는 살짝 멈칫했지만, 바로 서둘러 그의 말을 받았다.
“제가 해요, 제가 합니다. 제가 청소할게요!”
“당치 않다.”
“마땅해요. 마땅합니다. 대인을 편히 머무시게 하는 것은 소관이 응당 해야 할 일이에요.”
그녀는 사근사근 얘기하고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육역은 더이상 말하지 않고 서안 앞으로 돌아갔다. 그는 계속 지도를 보기 시작했고, 그의 시야에 그녀는 마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건 아마 묵인한다는 뜻일 거다. 금하는 속으로 알아차리고는 밖으로 나가 물과 걸레를 가져왔다. 소매를 걷어 올리고, 구석구석 닦아내기 시작했다.
이런 일들은 그녀가 어려서부터 집에서 익숙하게 하던 것들이다. 마음먹고 하면, 행동이 매우 민첩하고 빨랐다. 게다가 지금은 갑절로 온 힘을 다하고 있었고, 육역이 화가 가라앉아 그 은자 두 냥 삼 전을 제해 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었다.
잠시 후, 고경이 들어왔다. 그는 이 상황을 보고는 그녀를 몇 번 흘낏거렸다. 하지만 차마 뭔가 묻지는 못하고 육역에게 공수했다.
“대인 분부하신 일은 소관이 이미 사람을 보내 조사하라 하였습니다. 다른 분부가 있으신지요?”
“당분간 중요한 일은 없네.”
육역이 붓을 들어 먹물을 묻혔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그에게 말했다.
“자네 이 이틀 고생했어. 돌아가 쉬고, 내일 아침 다시 오게.”
“감사합니다, 대인. 소관 물러가겠습니다.”
고경이 나가기 전 금하를 다시 힐끔 보았다.
그녀는 지금 긴 탁자의 다리를 붙들고 못살게 구는 중이었다.
그 다리 아래쪽은 덩굴무늬 장식이 새겨졌는데, 보기에 좋았으나 다리의 오목하게 팬 곳마다 먼지가 쌓였다.
그래서 깨끗이 닦아내려면 매우 번거로웠다.
그녀는 손톱으로 파내기도 하고, 걸레로 닦아내기도 하며 한창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고경이 다시 육역을 보니, 그는 바람은 살랑 가볍고 구름도 옅은 맑게 갠 하늘같이 태평스러운 모습이었다.
이건 아무리 다르게 보려 해도 배부른 고양이가 쥐를 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육역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보잘것없는 포쾌를 괴롭히고 있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고경은 남몰래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