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달은 밝고 별은 드물었다.
육역은 등불 아래에서 가져온 문건을 펴보았다. 주현이의 사건뿐 아니라 우안방 및 그 방주, 당주 등에 관한 자료였다.
고경은 육역의 방문 밖에서 수시로 내려오는 명령을 기다렸다.
뜰 앞, 둥근 모양의 월아문 밖에서 누군가 머리를 내밀어 엿보는 듯했다.
고경은 예리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손은 본능적으로 이미 수춘도의 손잡이에 닿았고, 고함을 질렀다.
“누구냐!”
“놀라지 마세요, 접니다.”
금하가 만면에 웃는 얼굴로 월아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발걸음 가볍게 다가와 손으로 조용히 방안을 가리켰다. 낮게 억누른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육 대인은 식사하셨어요? 기분이 어떠세요?”
고경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무뚝뚝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그게……, 사건 조사를 하는데, 경비가 좀 모자라요. 저와 대양의 주머니는 한계가 있고, 유
대인은 또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육 대인께 먼저 은자를 지출하실 수 있나 청하려 합니다.”
금하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고경은 조금 불가사의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육선문은 어떻게 이런 뻔뻔스러운 인간을 배출시키나.
그는 놀라고 의아해졌다.
“이 한밤중에, 돈 달라고 왔다고?”
“방법이 없어요. 저도 사건 조사를 위해서죠. 배를 빌리는 비용이 적지 않아요.”
금하가 설명했다.
그때, 문이 끼긱 소리를 내며, 안에서 열렸다. 육역이 겉옷을 반쯤 걸친 채 문 앞에 나타났다. 희미하게 미간을 찡그리고는 금하를 바라봤다.
“배를 빌려 무엇을 하려 하지?”
“그게 이런 거예요, 대인…….”
비록 웃음은 다소 억지스러운 곳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돈을 구하는 마음은 절실했다. 금하는 만면의 웃음을 유지하며 육역에게 한바탕 이 일을 설명했다.
육역은 다 들고 잠시 침음하다가 고경에게 분부했다.
“내일 나는 호수 유람을 할 것이니, 자네는 향선(아름다운 배) 한 척을 준비해. 그리고 이 소식을 밖으로 알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지?”
고경이 순간 어리둥절하다가 바로 대답했다.
“소관 이해했습니다.”
“가보게.”
“물러가겠습니다.”
한쪽에 처박혀 있던 금하는 영문을 모르는 눈빛으로 육역을 바라봤다.
그가 고개 숙여 그녀를 바라보고, 눈빛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갑자기 깨달았다. 무척이나 기뻐했다.
“향기로운 미끼로 사냥감을 유인하는 거군요!”
육역 정도의 남자라면, 틀림없이 향기로운 미끼가 될 수 있었다.
그것도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미끼. 멀리서라면 사냥감은 저 별로인 성격은 못 볼 테니까.
“살신성인하시려는구나.”
금하가 중얼거린 말에 육역은 미간을 살짝 구겼을 뿐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내일 너는 시녀로 꾸미고 옆에서 시중을 들어라. 양악에게는 하인으로 꾸며 따르게 하고.”
육역이 분부 후 그녀를 주시했다.
“네 정보가 정확하길 기대한다. 내 시간을 헛되이 쓰게 하지 마라.”
“분명 정확하죠. 대인 할아버지께서 제게 말씀해 주신…….”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 육역은 그녀의 눈앞에서 이미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그녀는 하마터면 코를 부딪칠 뻔했다.
하지만 금하는 털끝만큼도 기가 죽지 않았다. 문틈에 매달려 목소리를 높이고 성의를 담아 말했다.
“대인 할아버지는 사람이 유난히 좋으세요. 제가 대인 모시고 언제 한 번 뵈러 갈까요?”
이번은 안에서 아예 등마저 꺼졌다.
금하는 코를 문지르며, 돌아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 *
다음날은 또 흐리고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호수 위는 가랑비가 만든 연무로 가득했고, 물가까지 온통 가득 밀려들었다. 안개비가 내리는 사이로 배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그중 아름다운 배 한 척 위에 몇 명이 타고 있었다. 그 위에 더해진 꽃 향, 과일 향과 술 향이 코끝을 맴돌고, 사람을 취하게 했다.
금하는 수수한 옷을 입어 시녀로 분장했다. 양쪽 머리는 빗어서 땋았고, 다시 비단 끈으로 쪽진 형태로 만들었다. 거기에 얼마간의 귀여운 색감을 더했다.
이때 그녀는 양손을 단정하고 바르게 소매 속에 모으고, 본분을 지켜 배의 바깥 선실 창문가에 서 있었다. 옻칠한 듯한 새카만 눈동자만이 데굴데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양악은 그녀의 옆에 있었다. 그는 하인으로 분장하여 붉은 전모를 쓰고 안쪽에 붉은색을 덧댄 청록색의 상의를 입었다. 한껏 활기가 있어 보여 옷을 입자마자, 금하의 대대적인 칭찬을 받았다. 그만큼 복장이 그에게 유달리 잘 어울렸다.
금의위 천호인 고경은 이슬비를 마다치 않고, 뱃머리에 섰다. 쭉 뻗은 모습은 당당하고, 아름다운 수가 놓인 선명한 옷은 바람이 불어와 펄럭거리며 날렸다. 거기에 냉담하고 준엄한 얼굴까지 더해졌다. 그는 언제라도 초개와 같이 목숨을 아끼지 않을 자세가 매우 다분했다.
“술을 따라라.”
맑고 담담한 음성.
금하는 소리를 듣고 급히 내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알맞게 데워진 술이 든 동 주전자를 들고는 청자색의 잔에 부었다. 매우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잔을 가득 채웠다.
“대인, 드시죠.”
그녀는 ‘따뜻’하고 ‘선량’하고, ‘공손함’과 ‘겸손함’으로 가득한 어조를 만들어냈으며, 목소리는 낮고 말은 느렸다.
그녀는 시녀 분장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자부했고, 스스로도 매우 만족했다.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만족스러움이 드러났다.
“대인, 저도 그런대로 괜찮죠?”
육역이 잔을 들고, 담담한 시선으로 그녀를 흘끗 보았다.
“안개비, 작고 빠른 배, 좋은 술, 아름다운 시녀, 앞선 세 가지는 모두 얻었는데, 유일하게 마지막 하나는…….”
그는 굳이 말을 끝내지 않았다.
“……소관이 아름다운 용모로는 아주 쪼오금 모자라긴 하죠.”
금하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어조는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사건 조사는요, 대인께서 아쉬운 대로 참고 쓰시면 안 될까요?”
육역의 입매가 어렴풋이 곡선을 그렸다.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아쉬운 대로 그냥 써야지.”
* * *
가는 빗줄기를 머금은 바람이 선창을 때려 쏴쏴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던 금하는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양악에게 작은 소리로 귓속말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 적란엽이 호수에 놀러 나올까?”
양악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가까운 곳에서 물결 소리가 들렸다. 마치 배가 가까이 온 것 같았다.
뱃머리의 고경이 들어와 육역에게 보고했다.
“대인, 뱃머리에 오안방의 기가 있는 배가 접근해왔습니다.”
오안방!
금하는 빠르게 양악과 시선을 교환했다.
제형안찰사사의 폭파 사건으로, 그녀는 어제 일을 마친 후 특별히 오안방의 본부를 다녀왔었다.
방의 사람들이 말하기로는 소방주는 노방주를 모시고 성 밖으로 제를 올리러 갔다고 했었다. 그녀는 또 나루터로 가서 상관희를 찾았지만, 나루터에 금의위가 나타난 것을 보고 그만두어야 했다.
저 배에 있는 이는 도대체 누구일까.
짐작하고 있는 와중 밖에서는 이미 그쪽 배에 탄 사람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안방 상관당주가 육 대인을 뵙고자 합니다.”
고경이 미간을 찡그렸다.
“대인, 저들은 강호인입니다. 만나고 싶지 않으시면, 소관이 돌려보내겠습니다.”
육역은 전혀 동요 없이 고경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방하다. 일전 나는 상관당주와 급하게 지나친 인연이 있지. 다시 한번 그녀와 얘기를 나누고자 하니, 모셔 오도록 해.”
“예.”
고경이 돌아서 선실을 나갔다.
상관희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녀가 왜 육역을 만나려고 할까?
금하는 의혹으로 가득 차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인, 적란엽은 만나지 않으시게요?”
“급하지 않다. 모두 아름다운 여인인데, 하나를 더한다고 또 무슨 상관이겠나?”
육역이 고개를 기울여 그녀에게 반문했다. 그의 눈빛이 살짝 짓궂게 반짝였다.
이 대답은 확실히 좀 뻔뻔스러웠다. 금하는 할 말이 없어 입가를 실룩거렸다.
그때, 선체가 살짝 흔들렸다.
반투명하고 얇은 천의 발 너머로 섬세하고 가냘픈 사람의 모습이 날렵하게 뱃머리로 뛰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고경이 그녀를 안내해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의 상관희는 그날 나루터의 모습과는 어딘가 살짝 달랐다.
옅은 회홍색의 비단 저고리 위로 간혹가다 내리는 빗방울이 하늘하늘 부드럽게 흩어져 내리고, 한층 도드라진 가느다란 허리는 한 줌도 되지 않을 만큼 가냘파 보였다.
당주로서의 유능함과 노련함은 조금 덜고, 여성의 아름다움과 부드러움은 조금 더 강조했다.
금하는 내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과 시선이라도 마주치길 바랐고, 적어도 그녀가 온 이유라도 알 수 있길 바랐다. 그러나 상관희는 시종일관 그녀를 한 번도 보지 않았으며, 양악마저도 보지 않았다.
육역이 일어나 맞이하며 웃었다.
“상관당주, 이리 빨리 다시 만날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상관희도 매우 예의 바르게 공수했다.
“안개비 자욱한 날의 호수 유람이라. 경력 대인께서는 고아한 흥취를 즐기시는군요.”
“양주는 훌륭한 곳으로 안개비는 시를 부릅니다. 만약 이 비가 경성에 왔다면, 비는 얼음 칼 같아 더는 조용하고 한가한 정취를 느낄 수 없었겠지요.”
육역이 그녀를 안쪽 선실로 안내했다.
그곳은 바깥 선실보다 더욱 고상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고, 모든 것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작은 화로의 숯은 진즉 돋워져 바깥 선실보다 더욱 따뜻했다.
금하는 공손하게 눈을 내리깔고 다반을 받쳐 든 채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각자 차를 따라주었다.
이어서 화로에 백합 향을 뿌렸는데, 조심치 않아 많이 흘렸다. 먼저 향을 흡입한 금하는 두어 번 재채기했다.
육역은 그녀가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고는 참지 못했다.
“되었다. 너는 문을 닫고 나가거라.”
나가? 문을 닫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