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넌 주현이가 벽에 혈서라도 썼을 거라 생각하나?”
그가 냉랭하게 흥 콧소리를 냈다.
“그가 언관 출신임을 잊지 마. 그에게 만약 억울함이 있었다면, 설마 상소 올리는 법을 잊었을까?”
그랬다. 주현이는 예전 이부의 급사중으로 바로 언관이었다.
언관이라는 이 직책은 품계는 높지 않으나, 감찰과 언사言事(*군왕에게 진언하거나 정사를 의논하는 일.)를 책임진다.
자세히 말하자면 위로는 황제에게까지 바른말을 할 수 있고, 아래로는 백관을 탄핵할 수 있는 감찰직이었다.
언관이 되면, 바르고 정직하게 직언해야 할 뿐 아니라, 명예와 절조를 부귀보다 아껴야 했다.
만약 주현이가 십만 냥의 운하 수리비를 탐했다는 이런 큰 누명을 썼다면, 그가 한마디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나?
하지만 육역을 바라보던 금하는 여전히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등롱을 들어 세세하게 실내 곳곳을 계속 비춰나갔다. 원래는 어떤 흔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제거하지 않았나 의심하여 벽 외에 모서리 하나까지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육역도 그녀를 개의치 않고, 그 스스로 벽 위의 서화를 살펴봤다.
“어?”
금하는 소박한 민호주闷户橱(*함 같이 생긴 농.) 아래에 있는 둥근 자기 단지를 등롱으로 비추고, 손을 뻗어 그것을 끄집어냈다.
종이로 바른 윗면은 망가져, 보자마자 열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코 가까이 가져다 냄새를 맡으니, 술 향이 솔솔 풍겼고, 또 다른 냄새가 나기도 했다.
소매를 걷어 올린 그녀는 단지에 손을 넣어 두 움큼을 건져 올렸다. 그녀가 건져 올린 것은 견직물로 둘둘 만 두 개의 물건이었다.
왕 노인이 상당히 놀라 하며 말했다.
“이 술 단지 안에 물건이 숨겨져 있었다니요!”
육역도 보고 다가왔다.
등불 아래에서 견직물을 한 겹 한 겹 벗기니, 안에 있던 물건이 천천히 드러났다. 그저 거무스름한 물건으로 덩어리졌으며 일부는 부스러졌다.
“이, 이게 뭡니까?”
왕 노인이 영문도 모른 채 쳐다봤다.
“영지겠네요. 영지로 담근 술.”
금하는 아주 그럴싸하게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몸을 튼튼하게 해 장수할 수 있게 하고, 3개월을 쭉 이어 마시면, 하루에도 팔백 리를 갈 수 있답니다.”
왕 노인이 “오, 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 대인은 매우 마르시고, 기력도 안 좋으셨죠. 아마도 보양을 하고 싶으셨나 봅니다.”
금하의 허튼소리를 무시하고, 육역은 부서진 찌꺼기를 조금 집었다. 코끝에 놓고 가볍게 냄새를 맡았다.
“향료다. 이건 분명 곽향, 그리고…… 정향이야.”
그는 세심하게 몇 번 냄새를 맡고는 이내 확신할 수 있었다.
금하는 이미 소박한 민호주의 서랍을 빼냈다. 안에는 푸른 쑥과 붉은 광택이 나는 광물인 주사朱砂가 놓여 있었다. 이것들은 서신이 아니기에 아문 사람들은 아마도 쓸모가 없다고 여긴 듯했다. 그래서 옮기지 않았을 터였다.
이 두 물건을 본 금하는 어떤 생각이 떠올라 왕 노인에게 물었다.
“주 대인께서 일찍이 아저씨에게 우수牛髓(소의 뼛속에 든 골)나 우지牛脂(쇠기름)가 필요하다고 한 적이 있나요?”
왕 노인이 이상해했다.
“확실히 시동인 주비가 제게 와 물었습니다. 어디서 우수와 우지를 살 수 있냐고요.”
금하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네요. 주 대인 이 분은 역시 사랑에 푹 빠진 분이셨어요.”
육역이 그녀를 바라봤다.
“넌 어떻게 그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지?”
“이것들 때문이죠!”
금하가 푸른 쑥을 만지작거리며 청산유수로 이야기했다.
“이건 연지를 만드는 처방이에요. 정향과 곽향을 견직물로 싸서는 따뜻한 술 안에 넣어둡니다. 3일을 담가두고 다시 향이 스민 술과 이 두 종의 향료를 우수와 우지에 넣고는 약한 불로 졸여요. 그리고 푸른 쑥을 넣어 유지의 색과 광택을 투명한 백색으로 빛나게 하는 거죠. 마지막으로 견직물로 유지를 거르고, 사기그릇이나 옻칠한 그릇에 따라 식히면 돼요. 붉은 주사朱砂를 더 넣게 되면, 빨간 입술연지를 만들 수 있고요. 주사를 안 넣어도 되는데, 그건 얼굴을 가꿔주는 얼굴 화장품이 돼요.”
그녀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 상당히 조리가 있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넌 어떻게 이 배합법을 알지?”
“이게 ‘제민요술齐民要术(*북위 시기 농학자인 가사협이 저술한 종합 농서.)’에 쓰인 배합법이에요. 원래 우리 엄마가 집에서 해보려 하셨어요. 연지를 만들어 파시려 한 거죠. 안타깝게도 재료비는 비싸고, 가격은 또 올릴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만두셨어요.”
금하가 매우 유감스럽다며 개탄했다.
“이 세상은 돈을 많이 벌고 싶어도 고민할 게 많아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또 내쉬었다. 옆에 있는 왕 노인까지도 따라서 고개를 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육역은 그녀에게 본론으로 돌아오라고 가벼운 기침 몇 번을 해야 했다.
“이 연지 만드는 여러 과정이 매우 번거로워요. 그런데 그는 이걸 직접 만들었단 말이죠. 각별하게 마음을 쓴 것과 이 여인에 대한 깊은 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금하는 계속해서 감탄했다.
“주현이가 이렇게 다정다감한 사람일 줄은 생각지 못했네요.”
육역이 향낭을 떠올리고, 왕 노인에게 물었다.
“그에게 연인 같은 것이 있는지 아는 바가 있는가?”
“그건…….”
왕 노인은 다소 곤란해했다.
“소관은 이 사택을 돌볼 뿐으로 주 대인은 지금껏 여인을 데리고 온 적이 없으셔서 확실히는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은 주비가 알 겁니다. 그 며칠 아팠던 거 외에는 걔가 모두 주 대인 곁에 있었지요.”
“주비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금하가 물었다.
“주 대인의 사고 후, 바로 잡혀 들어갔죠.”
왕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걔는 겨우 열서너 살에 아직은 그저 아이일 뿐인데, 옥에 갇혔으니 어찌 견딜 수 있겠습니까?”
“괜찮아요. 관아의 감옥일 뿐이고,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조옥도 아닌데요.”
금하가 그를 안심시켰다.
육역이 그녀를 힐끔 보았다. 금하는 어느새 고개를 저으며, 다시 또 이어서 다른 곳을 검사하고 있었다.
묘한 여자다. 일을 건성건성 하는 것 같으면서도, 주변 사람 하나까지 놓치지 않는다.
금하에게 향했던 육역의 시선이 순간 창밖을 향했다.
밖에는 밤바람이 빙글빙글 말리며 불었다.
간간이 느껴지는 이른 봄추위, 그윽한 매화 향도 약간.
바야흐로 달빛은 그저 좋았다.
* * *
축축하게 젖은 청기와에는 촘촘히 이끼가 깔렸다. 갈라진 틈 사이를 비집고 나온 몇 개의 강아지풀이 제멋대로 흔들거렸다. 그는 바로 한 손으로 난폭하게 뽑아버렸다.
사소는 야행복을 입고, 머리와 얼굴은 천을 뒤집어썼다. 꼼꼼하게 옷을 잘 갖춰 입고는 제형안찰사사의 지붕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는 긴장으로 미간을 찡그렸고, 풀줄기를 자근자근 씹었다. 오늘 밤은 지나치게 휘영청 밝은 달빛도 상당히 원망스러웠다.
그의 발아래 열 몇 걸음만큼 떨어져 있는 곳이 바로 제형안찰사사의 감옥이다.
양악의 말로 미루어보면, 사수죽은 배에서 끌려온 후 이곳에 갇힌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들어가느냐가 문제였다.
어떻게 해야 사수죽을 찾고, 데리고 나올 수 있는가도 문제였다.
사소는 낮게 몸을 숙이고는 아래쪽으로 지나간 두 명의 금의위 이목吏目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모두 조끼식의 쪽빛 긴 덧옷을 입고, 허리의 가는 혁대에는 동패를 매달았다. 감옥 앞에서 몇 마디를 하니, 지키던 간수가 그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풀줄기를 퉷 뱉어낸 사소는 이미 마음속에 계획을 세운 차였다. 그는 조용하게 몸을 굴려 지붕에서 내려와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사소가 다시 나타났을 때, 원래 입고 있던 야행복은 이미 금의위 이목의 복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의 체격은 원래 매우 우람했다. 그런 그가 이 훔친 복장을 입고 보니 그의 긴 손과 발이 더욱 분명하게 도드라졌다.
그는 거만하게 으쓱대며 곧장 감옥 문 앞으로 가 간수에게 말했다.
“경력 대인께서 사수죽을 심문하신다며, 내게 데려오라 하시었소.”
다분히 낯선 사람인지라, 두 명의 간수는 말없이 그를 가늠해보고 있었다.
사소가 거듭 기침을 했다.
“경성에서 오신 육 경력 육 대인이시오.”
육역의 이름을 들은 간수들이 갑자기 무언가를 크게 깨달은 듯했다.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감옥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육 대인께서 사수죽을 심문하신다며 사람을 보내셨다. 너희들이 잘 모시어라!”
안쪽의 간수가 한 마디 대답했다.
사소는 계책이 반은 실현되자, 은근히 기뻐했다.
그가 성큼 걸어 안으로 들어갔는데, 몇 걸음 걷지 않아 갑자기 뒤에서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문은 이미 다시 잠겼고, 뒤이어 또 둔중한 소리가 울렸다.
3척도 되지 않은 앞쪽에는 어느새 허공에서 철문이 내려와 단단히 앞길을 막아 버렸다.
오던 길은 끊겼고, 갈 길은 막혔다. 뜻밖에도 그는 그 안에 갇혔다.
“도둑놈이 물정을 모르고, 감히 금의위를 사칭해!”
간수의 차가운 웃음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