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사소와 금하. 두 사람의 내력을 얘기하려면, 십여 년 전으로 거슬러가야 한다.
사소가 어렸을 적 부친을 따라 경성에 온 일이 있었다.
그때는 음력 섣달로 눈이 많이 내려 오가는 길이 매우 위험했다.
그는 아저씨라 부르던 양정만의 집 본채 앞에서 아기처럼 희고 뽀얀 얼굴에 똥글똥글하니 공 같은 여자아이를 보았다. 사소는 손을 내밀어 그 아이의 땋은 머리를 잡아당기려 했다. 그런데 똥글똥글 공 같은 계집아이가 꽥 소리를 지르며 그의 손목을 확 물어버렸다.
“누가 이 계집애가 자라 새끼처럼 닥치는 대로 물고,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줄 알았겠어?”
사소가 상관희를 향해 쓰라린 어조로 말했다.
“내가 그때 얘한테 얼마나 많이 당했는데.”
금하가 가지런하고 하얗게 반짝이는 치아를 드러내며 의기양양해 했다.
“너 그때 내 이가 튼튼하다고 질투했지.”
상관희가 풋 하고 웃었다.
“강에 떨어진 건 어떻게 된 일이야?”
“모두 쟤 탓이에요!”
“모두 쟤 탓이야!”
두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이 상대를 비난했다.
양악이 상관희를 향해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그게 모두 계화떡 한 조각 때문이었죠. 얼마나 처참하던지. 아마 저 둘은 말할 염치가 없을 겁니다.”
이 일에 대해선, 사실 사소는 책임을 면키 어려웠다.
그의 잘못은 그때 금하를 강아지로 여겨 놀리지 말아야 했다는 것과 일부러 계화떡을 높이 높이 들어 그녀를 안달이 나게 했다는 데 있었다.
그녀가 어디 남에게 놀림당할 사람이던가.
강가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곧장 사소에게 달려들었다.
결과 두 사람은 떡과 함께 강물에 풍덩 빠졌고, 동지섣달 추운 날에 어른들 모두를 놀래 진땀 흘리게 했다.
* * *
양정만이 절뚝거리며 걸었다. 그를 눈여겨보던 사백리가 미간을 찡그렸다.
“양형, 이번에 오셨으니, 여기서 며칠 계십시오. 제가 의원에게 반드시 형님의 다리를 고치라 하지요.”
양정만이 담담하게 웃었다.
“내 이 다리는 말이야. 운명이지, 병이 아니야. 그러니 구태여 자네를 귀찮게 할 필요가 있나.”
“양형…….”
사백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연회는 난각暖阁(*난방 설비를 하여 몸을 녹일 수 있게 했던 큰 방에 딸린 작은 방.)에 준비하라 했습니다. 양형 다리에 한기가 들까 걱정이라, 대나무 화로통도 더 준비하라 했어요.”
하루 찬바람을 맞았을 뿐인데, 다친 다리가 확실히 시큰시큰하여 견디기 힘들었다. 양정만은 더는 거절치 않았다.
“우리 모두 늙었군요.”
사백리가 한숨을 내쉬자, 사소는 들으면서도 마음속 어딘가에서 편치 않은 감정이 솟구쳤다.
양정만이 사백리를 토닥이며 미소 지었다.
“우리 모두 아직 살아 있잖나.”
사백리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소를 향해 몸을 돌리고는 탁한 목소리에 거친 숨을 쉬며 지시했다.
“양숙의 아들, 그리고 이 낭자는 네가 나 대신 잘 모셔야 한다. 소홀해서는 안 돼.”
“소자 알겠습니다.”
사소가 온순하게 대답했다.
사백리는 마음을 놓지 못한 채 상관희에게 향해 당부했다.
“……이 아이를 잘 챙기게.”
말속의 뜻은 더없이 명백했다. 아들이 어렵게 돌아왔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 도망가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상관희는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난각 안, 두 노인은 술잔을 들고 옛일을 얘기했다.
그리고 밝고 아름답게 장식된 응접실 안에서는 상관희가 가복에게 각자의 앞에 단정하고 정갈한 술자리를 마련하라고 하여, 양악과 금하를 환대 중이었다.
사소는 황화리목黄花梨木으로 만든 둥근 팔걸이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채 이따금 시선을 들어 금하를 흘끔거렸다.
냉채가 먼저 상에 올랐고, 금하는 매실 땅콩 절임 몇 개를 집어 입안에 넣었다.
씹으니 달콤한 맛이 났다. 그녀가 고개를 든 순간, 사소는 그녀의 목덜미에 남은 한 줄기 불그스름한 흉터를 분명히 보았다.
“너…….”
사소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너, 그거…….”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그 밤은 매우 아슬아슬했다.
만약 털끝만큼의 착오라도 있었다면, 그녀는 이미 죽어 황천으로 가고 있을 터였다.
“응?”
금하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봤다.
“넌……, 넌 명색이 아가씨가 어떻게 포쾌를 하고 있을 수 있냐?”
사소는 어색하게 화제를 돌렸다.
“금의위 따라다니며 함께 뒤섞여서 말이야.”
“어째서 여자는 포쾌 하면 안 되는데? 여기 상관 언니는 또 주작당주잖아. 얼마나 위풍이 있어!”
금하가 고개를 돌려 상관희를 바라보며 매우 친밀하게 그녀를 불렀다.
“언니, 듣기로는요. 언니가 3년 전 홀로 동가의 수채를 접수하셨다면서요. 제가 속으로 엄청 부러워하고 있어요. 그때 얘기 좀 해주실래요?”
이때, 뜨거운 요리가 상에 올랐다.
상관희는 그들에게 요리를 나누어 권하고 나서야 자리에 앉아 온유하게 웃었다.
“그때 동가의 수채는 내분 중이었어요. 나는 시기를 잘 잡은 것뿐이고, 때마침 운도 좋았죠. 말할 만한 것이 별로 없어요.”
금하는 감탄을 연발하며 칭찬했다.
“언니는 생긴 것도 예쁘고, 무공도 잘하고, 또 이렇게 겸손하시니……, 저는 정말 진심으로 탄복할 뿐이에요.”
옆에서 사소가 들으며 탄식했다.
“역시 사람이 관가에 들어가면, 주둥이 무공도 세진다더니. 만나자마자 사람을 홀려 버리네. 누나, 얘 수에 넘어가선 안 돼.”
상관희가 온유하게 웃었다. 그를 상관하지 않고, 가복을 불러 술을 따르게 했다.
“술은 사양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밖에서 술을 마시는 건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양악이 잔을 사양하며 웃었다.
“용서하십시오.”
금하는 사소를 지켜보는 것에만 정신이 팔렸다.
“뭘 갖고 만나자마자 사람을 홀려 버린다고 해? 내 말은 구구절절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이야.”
사소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상관희에게 물었다.
“누나가 우리 아버지 병나셨다고 하지 않았어? 내 보기에는 기력 아직 괜찮으시더만.”
이 말에 상관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하려던 말을 하지 않고 한동안 답을 하지 않았다.
“난 누나가 날 돌아오게 하려고 거짓말한 거 알아.”
상관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소는 그저 그녀가 마음의 가책을 느낀다고 생각했을 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됐어. 아버지 멀쩡하셔서 나도 안심했고, 누나 탓 안 해.”
상관희는 그를 한 번 보았을 뿐 말을 하지 않았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노방주님은 당연히 걱정이 많으셨을 거고, 당연히 그다음으로는 심기가 쇠해지셨겠지?”
금하가 요리를 집는 한편 고개를 저으며 말참견을 했다.
“이렇게 큰 방帮인데, 그분 근심이 큰 건 이상하지 않아.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
“……무슨 허튼소릴 하는 거야?”
사소가 불쾌한 기색으로 금하를 주시했다.
“보자마자 알겠더라.”
금하가 당연하다며 말했다.
“얼굴로 봤을 때, 미간의 세로 주름이 깊은 것은 근심이 깊다는 것이지. 피부는 어두운 황색이고, 게다가 몸에 담비 외투를 입고 있으셨어. 그건 봄날의 헛바람도 감당치 못할 상황이라는 걸 뜻해. 무술을 익힌 사람은 호흡이 느리고 긴데, 그분의 호흡은 오히려 짧고 급해. 이따금 흉강에서는 휘파람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대부분 심폐에 이상이 있으면 그래.”
사소는 아연했다. 그를 따라 상관희도 조금은 놀랐다. 그녀는 금하가 이렇게 상세하고도 철저히 관찰했을 줄은 생각지 못한 것이다.
“넌 무슨 그런 터무니없는 소릴 막 떠들어?”
사소는 정신이 돌아왔으나 여전히 믿지 않았다.
“원 낭자의 말이 터무니없는 게 아니야. 의원은 천천히 몸조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어. 어르신은 이미 몇 개월째 탕약을 들고 계신다.”
상관희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말했다.
“……내가 설마 이런 일로 너를 속이겠니.”
사소는 넋이 나간 듯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말 좀 할게, 오빠. 본인 아버지는 병환 중이신데 그냥 나 몰라라 하고, 사이가 무슨 팔백 리만큼 먼 의형제는 필사적으로 구하겠다고 그래. 이건 말이 좀 안 되지.”
금하가 눈썹을 세운 채 그를 바라봤다.
“너…….”
“너는 무슨 너야. 얼굴만 가린다고, 천하가 태평해져?”
금하가 그를 향해 희디흰 이를 드러내며 질책했다.
“만약 육역이 제때에 힘을 거두지 않았다면, 배 위에서 나는 오빠한테 죽었어.”
이 일을 말하자, 사소는 확실히 꿀리는 데가 있었다. 하지만 곧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화근덩어리가 오래오래 산다더니, 네 명도 참 질기다. 그건 그렇고. 너희는 육선문인데, 어째서 금의위와 함께 어울려 다녀?”
“우린 이번에 대리사좌사승 유 상좌, 유 대인을 따라 강남에 조사차 온 겁니다. 금의위 육 대인과 함께 일해요.”
양악이 매우 무거운 시선으로 사소를 바라봤다.
“육 대인은 경성금의위 최고지휘사 육병의 아들로, 무공이 뛰어나고 심사는 더욱 깊어 헤아리기가 어려워요. 우리는 한 집안 형제이니, 사형도 내 충고 한마디 들어요. 그를 건들지 마십시오.”
사소도 정색한 채 그들을 보았다.
“걱정하지 마. 절대 너희를 끌고 들어가지 않아. 하지만 나도 한 마디만 묻자. 사 형님은 지금 어디에 갇힌 거야?”
“그 형님은 대체 오빠와 어떻게 엮인 의형제이기에 그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금하가 의아해하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