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의지하 (15)화 (15/224)

15화

육역이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믿고 안 믿고는 내게 달렸지. 들어나 보자.”

“두 달 전, 타타르인이 쳐들어와 약탈을 자행했는데, 구가는 비겁하게 죽음을 두려워해 출병하지 않았소. 타타르인들은 몇 개 마을에 불을 질렀고, 백성들은 살 곳조차 죄다 사라졌지. 추운 사람은 얼어 죽고, 배고픈 이는 굶어 죽고, 병에 걸린 사람은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고…… 우리는 저 생신선물을 탈취하여 그들에게 나눠주고자 했소. 우리는 그들에게 빚을 진 셈이니까.”

육역은 역시 냉소적으로 웃었다.

“네가 말한 구실은 그럴듯하다. 허나 정말로 생신 선물이 손에 들어왔을 때, 너는 몇 대를 벌어도 손에 넣지 못할 금은보화가 가득한 것을 보고 아마도 손을 떼기가 아쉬웠겠지.”

“나는 이 한평생을 즐겁게 살려고 했을 뿐 금전을 위해 산 적은 없소.”

사수죽은 육역이 꼬치꼬치 캐어묻기만 하니, 짜증을 참지 못했다.

“잔소리만 늘어놓지 말고 죽이려면 죽이고, 사지를 찢으려면 찢으슈.”

구란의 소행을 왕방흥이라고 어찌 모를까.

단지 그는 부침이 심한 관료사회에서 벼슬을 오래 해 오며, 나라를 지킨다는 기개는 일찌감치 전부 사라져버렸을 뿐이다.

그 또한 의지할 곳 없이 떠돌며 기아와 추위에 허덕이는 난민을 보았지만 거의 무감각했고, 이 말 없는 수하의 마음속에 솟구친 굴욕을 지금껏 몰라보았다…… 이런 굴욕은 이미 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했다.

그러나 이 순간 사수죽의 말을 듣다 보니, 한 자 한 자 그의 몸속 깊숙이 박혔다.

“이놈에게 필시 공범이 있을 것이니, 제가 데리고 배로 돌아가 천천히 심문하겠습니다. 육 경력, 이번에 생신선물을 되찾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돌아가 반드시 대장군께 보고하겠습니다.”

왕방흥은 일부러 사수죽을 거듭 발로 찼다.

“……죽고 싶으냐,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육역이 일어나 왕방흥의 앞에 선 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참장 대인, 이 사람은 데려갈 수 없습니다.”

“그건 왜입니까?”

왕방흥이 육역을 바라봤다. 그는 이미 금의위를 건드리면 골치가 톡톡히 아프다는 진리를 떠올리며, 이 일로 육역을 들쑤시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육역은 냉랭하게 웃고는 대답 없이 되물었다.

“참장 대인, 그가 방금 구란 대장군이 죽은 이의 목을 베어 공을 가로챈 일을 거론했습니다. 이것에 대인은 반박하지 않으셨는데, 설마 진실입니까?”

왕방흥이 어물쩍거렸다. 꿈에서 깬 것처럼 가까스로 정신이 들었으나, 이미 꼬투리를 잡힌 후였다.

“아니요. 당연히 진실이 아닙니다. 이놈이 헛소리한 겁니다.”

육역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냉랭하나 예의 있게 말했다.

“사안이 중대하여 가벼이 볼 수 없습니다. 저는 금의위로서 직책이 있으니, 그를 데리고 돌아가 자세히 물어야 하지요. 그러니 참장 대인의 많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건…….”

왕방흥은 금의위의 일 처리 수법을 잘 알고 있었고, 이렇게 된 이상 지금은 한 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먼저 사람을 불러 상자를 배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기다리시죠.”

육역이 또 말했다.

“이 생신 선물도 대인께선 가져갈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화가 난 왕방흥이 관리의 위세를 드러내어 어조를 높였다.

“육역, 사람을 너무 우습게 보지 마시오!”

바깥 창 아래, 안의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던 금하는 매우 즐거워졌다. 그녀는 양악의 옷소매를 당겨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역시 금의위 간이 크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 생신 선물을 통째로 꿀꺽하려고 해. 그럼 왕방흥은 왜 부른 거야? 이거 고의로 열 받게 하려던 거 아닐까?”

양악도 뭐가 뭔지 잘 몰랐다. 손짓으로 그녀에게 조용하라 한 뒤, 이어서 안쪽의 동정을 엿들었다.

“이 장욱(*중국 당나라 현종 때의 명필가.)의 춘초첩 두루마리가 시중에서 어떤 가격으로 팔리는지 대인은 아십니까?”

육역은 그와 논쟁할 가치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손을 뻗어 상자에서 서화 한 점을 꺼내 가볍게 폈고,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평을 시작했다.

왕방흥은 일순간 말이 막혔다.

“그건…….”

“진대건의 진초천문, 오도자(*중국 당나라 화가로 불상과 산수화에 정통했음.)의 남악도.”

육역이 손이 가는 대로 뒤적거려 보며 쯧쯧 혀를 찼다.

“여기 또 송 휘종의 추응도도 있군요. 제가 기억하기로 이 추응도는 원래 궁중의 물건입니다.”

“말도 안 돼요. 이게 어떻게 궁중의 물건일 수 있습니까.”

왕방흥의 목소리는 컸으나, 마음속은 점점 조마조마해졌다.

“이 일을 철저히 조사해야 함은 구 대장군의 청렴한 명성까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육역이 왕방흥을 향해 몸을 살짝 기울여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제가 아는 바로 구 장군은 지난번 수도로 돌아와 성상의 총애를 받으시나, 재상 엄 대인께는 매우 무례합니다. 또, 지금 변경은 마시장으로 일대 혼란이 일어서 성상께선 이미 적당히 넘기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영리한 새는 나무를 골라 둥지를 튼다고 했으니, 이 정도 쯤은 참장 대인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음성은 그야말로 가볍고 부드러웠으나, 이 말 자체는 왕방흥의 정수리를 번개처럼 내리쳐 그는 한참이나 입을 열 수 없었다.

육역이 말한 재상 대인은 분명 엄숭이다. 당시 구란은 엄숭의 손에 발탁되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엄숭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변경의 상황이란 난장판이라고 말하는 것도 가벼울 만큼 엉망이었다. 성상이 적당히 넘기지 않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그때가 되면 조정 누구도 구란을 지킬 이가 없을 터였다. 병권을 몰수하고, 면직하고 조사하여 처벌하는 것은 짧은 시간에 이뤄지는 일이었다.

이런 생각이 왕방흥의 마음속을 휘돌자, 그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바로 육역을 향해 공수하며 후하게 말했다.

“육 경력의 말이 맞습니다. 이 일은 확실히 철저히 조사해야 하지요. 제가 만약 도와야 할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바깥 창문 아래 금하는 육역이 왕방흥의 귓가에 한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왕방흥이 돌연 호쾌하게 대답한 것을 들었을 뿐이었으니, 속으로 의심이 생겨 탐문하듯 양악을 바라봤다.

하지만 양악도 알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어깨를 으쓱거렸을 뿐이었다.

“참장 대인의 이해에 감사드립니다.”

선실 안에서 육역이 말했다.

“그럼 저는 먼저 가겠습니다.”

왕방흥이 돌아서다가 옆에 있던 사수죽을 보고는 끝내 참지 못했다.

“이놈은 오랫동안 저를 따랐습니다. 이번 일을 저질렀지만, 진정한 사내라 할 수 있지요. 육 경력께서 제 체면을 보아, 고문에 조금의 여지를 남겨주시면 감사하기 그지없겠습니다.”

“그가 고분고분하면, 저는 그를 힘들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수죽은 다급하게 왕방흥에게 말했다.

“제 아래의 전우들은 모두 분수를 알고 지금에 만족하며 사는 이들입니다. 이일은 그들과 무관하니, 대인 절대 그들을 곤란하게 하지 마십시오.”

왕방흥은 무슨 말도 하지 않은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곧바로 선실을 나갔다.

사수죽을 바라보는 육역의 차가운 눈빛 속에는 조소의 의미가 아주 명확하게 드러났다.

“뭘 봐! 나도 너희들한테 이런저런 몽둥이며 고문 기구가 널렸다는 것은 알고 있어. 때릴 테면 때리고, 무슨 인정사정 봐주는 것도 필요 없어. 이 몸도 그런 건 즐겁지 않다!”

사수죽이 그를 노려보며 소리를 높였다.

“방금 그 말들 나도 다 들었다. 너도 엄숭의 개일 뿐인데, 뭘 그리 우쭐대? 기생오래비 같은 놈!”

창밖, 안의 상황을 듣고 있던 금하는 혼자 피식 웃었다.

육역의 생김새를 곰곰이 떠올리니, 매우 잘생긴 것은 확실했고, 풍류를 즐기는 아름다운 공자라 할 만하다. 하지만 온종일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일을 하며 거드름을 피우는 것은 훨씬 사람을 질리게 한다.

반면 양악은 듣더니 계속 고개를 저었다.

저 남자는 경솔한 사내다. 육역을 욕하는 건 은혜를 모르는 일인데, 게다가 엄숭까지 끌고 들어가 욕하다니. 이거야말로 죽으려 환장한 거지.

그러나 안쪽 육역은 오히려 화를 내지 않았고, 심지어 어조는 가볍고 잔잔했다.

“사실 어젯밤에 나는 매우 일찍 잠이 들었어. 너희들이 수색한다고 배에 오르기 전까지 나는 아주 깊은 잠을 자고 있었지.”

잠시 멍해졌던 사수죽은 상황을 깨닫자마자 벌컥 화를 냈다.

“네 놈이 감히 나를 속여! 그런데. 당신이 어떻게 생신선물 숨긴 곳을 알았지?”

“내가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네가 알 필요가 없다.”

육역이 차갑게 웃었다.

“생신 선물을 수밀봉창에 안에 숨기자 한 이 생각은 네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해. 또 누가 있지?”

“그냥 나 혼자 생각해 낸 거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선실 밖의 금하와 양악은 매우 처절하고 처참한 울음소리를 들었다. 두 사람 깜짝 놀라 거의 본능적으로 일어나 선실 안을 바라봤다.

사수죽이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반쯤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두 손은 무릎을 감싸고, 얼굴은 감당할 수 없는 아픔으로 잔뜩 일그러져있었다.

그 옆에 육역이 서 있었다. 그의 두 눈은 마치 모든 것이 그의 예상대로라는 듯 금하와 양악을 정확히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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