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의지하 (10)화 (10/224)

10화

“촛농이 왜 이렇게 많아?”

금하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 그건…….”

기패관이 급히 해명했다.

“서화와 비단 등의 물건이 배 안의 습기에 영향받을까 걱정이 되어 특별히 밀랍으로 입구를 모두 밀봉해뒀습니다. 이일은 제가 참장 대인께 보고드렸습니다.”

왕방흥이 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 서화들은 상당히 유명하고 귀한 것이라 곰팡이가 슬면 좋지 않으니까.”

“이리도 세심한 분들인 걸 몰라봤군요.”

금하의 표정은 웃을 듯 말 듯 했다. 그녀는 왕방흥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품속에서 작고 정교한 수정의 둥근 판을 꺼내어 불빛 아래 촛농을 자세히 살폈다.

양악은 양악대로 의식불명인 군사 앞에 꿇어앉았다. 입과 코 가까이 다가가 냄새를 맡고는 역겨움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한편, 육역은 다른 군사의 손목을 잡아 갸름하고 긴 손가락으로 군사의 맥을 세심히 짚었다.

왕방흥은 초조함이 가득한 얼굴로 옆에서 지켜보다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어떻습니까?”

육역이 잠시 후에야 군사의 손목을 놓고 왕방흥에게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생명은 지장이 없습니다. 한두 시진 지나 약효가 사라지면, 바로 깨어날 겁니다.”

“그럼 됐어요. 다행입니다.”

왕방흥은 초조하게 주먹을 말아쥐었다.

“이들이 도적을 봤을지도 모릅니다. 깬 후에는 단서를 말해줄 수도 있을 겁니다.”

이때 금하는 밀랍 부스러기를 털고 일어나 횃불을 든 채 선실 안을 천천히 돌고 있었다.

그녀는 때로 고개를 기울여 선실 벽의 긁힌 흔적을 자세히 살피기도 하고, 때로는 고개를 숙여 손으로 바닥의 길이를 쟀다.

마지막에는 창가에 이르러 다시 수정원판을 꺼내 창틀을 비추며 세심히 살폈다.

왕방흥은 이 어린 두 포쾌가 대체 무슨 꿍꿍이속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적당히 어슬렁거리는 것처럼 보였고, 단서에 대해선 말도 하지 않아 그의 인내는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만약 육역의 체면을 생각지 않았다면, 진즉 그 둘을 내쫓았을 터였다.

그러나 육역은 그 밤 신풍교 어귀에서 금하가 점쟁이의 옷에서 단서를 찾아낸 것을 직접 보았다. 지금은 그녀가 양정만을 따라다니는 것까지 알게 되었는지라, 육역은 부친이 말씀하셨던 그 추종술이라는 것이 매우 보고 싶었다.

그런 까닭으로 그는 전혀 조급해하지 않았고, 두 사람이 현장 조사하는 것을 느긋하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 * *

세부사항을 확인하면 할수록 금하의 눈 속에는 의혹도 점점 더 쌓여갔다. 양악과 잠시 시선을 마주친 후, 그녀는 양정만이 미리 당부한 ‘절대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라.’는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만약 정말 사건의 경위가 그녀의 파악대로라면, 그건 정말로 매우 재미없는 일이었다.

금하는 허리를 쭉 펴고는 아무도 몰래 입을 삐죽거렸다.

아무래도 일찍 돌아가 계속 잠이나 자는 것이 바른길인 것 같네.

금하가 그리 생각할 때였다.

“두 사람 단서라도 있나?”

육역은 그녀의 미세한 표정도 놓치지 않고 바로 물었다.

“이건…….”

먼저 양악을 바라본 금하는 꾸물거렸다.

“도둑이 단서를 거의 남기지 않았는데요. 저희 능력이 안 될 듯합니다.”

양악은 옆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 것인지, 그녀가 말을 잘한다고 칭찬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왕방흥은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이게 또 평범한 좀도둑 일이 아니라, 너희들이 알아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됐어, 됐어. 원래 너희들한테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배에서 내려라.”

금하는 간절하게 하품이 나오기도 했고, 그와 같은 수준으로 굴 생각도 없어서 양약을 끌고 선실을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또 그 순간, 왕방흥이 뒤에서 육역을 향해 개탄하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사실 저도 경성 안의 사건들은 거의 전부 금의위가 처리하고 있다는 걸 알지요. 육선문은 이름만 있을 뿐이고, 하릴없는 것들이나 먹여 살리고 있잖습니까. 늘 해결 안 되는 사건은 금의위 쪽으로 떠넘기면서…….”

여기까지 들은 후, 금하는 걸음을 딱 멈추고 왕방흥을 향해 돌아섰다.

“우리가 비록 재주가 많은 사람은 아니어도, 단서를 하나도 발견 못 한 건 아니에요. 단지 저는 말씀드린다고 해서 참장 대인이 그들을 반드시 잡을 것 같진 않아 걱정됐을 뿐이죠.”

왕방흥은 금하를 완전히 무시하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웃기는 소리. 변방을 지키고 오랑캐를 참살하는 우리가 어찌 좀도둑을 못 잡겠나. 너 같은 어린 포쾌가 으르는 말을 할 필요는 없다. 무슨 단서가 있다는 건지 말해 봐.”

“이 상자들은 장목樟木에 검은 옻칠을 한 것으로 길이는 두 척 팔, 넓이는 일 척 육, 높이는 두 척 일, 맞죠?”

금하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웃을 듯 말 듯 하며 그를 바라봤다.

왕방흥은 수하인 기패관과 함께 순간 놀라 얼이 빠졌다.

“너, 너 그 상자들을 보았나?”

“흔적에 따라 추측했을 뿐입니다. 바닥에 이렇게 많은 촛농의 흔적이 있는데, 모르는 척하기도 어렵죠.”

금하가 이어 말했다.

“제가 방금 참장 대인께서 그들을 반드시 잡을 것 같진 않다고 말씀드린 건 이 도적놈들의 수가 많고, 믿는 구석이 있어 두려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매우 오만방자하여 왕방흥 대인의 군사 정도는 전혀 안중에도 없을 걸요.”

“어찌 그리 생각하나?”

육역이 그녀를 주시하다가 캐물었다.

금하는 육역을 흘끔 보고는 선실 벽 위의 여러 곳에 난 긁힌 흔적을 가리켰다.

“벽 모두 이런 식으로 긁혔습니다. 상자를 옮길 때 난 소리가 크고 매우 시끄러웠을 거라고 미뤄 짐작할 수 있죠. 이건 도적놈들이 믿는 구석이 있어서 두려움을 몰랐던 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긁힌 흔적이 도적들 소행이라는 걸 넌 어찌 알아? 군사들이 상자를 옮겨 들어올 때 긁힌 걸 수도 있다.”

금하가 들고 있던 수정원판을 육역에게 직접 보라고 건넸다.

“방향과 긁어낸 흔적이 다릅니다. 긁힌 곳을 한 번 자세히 보시죠.”

육역이 받아든 수정원판은 반짝이며 매끄러웠고, 그녀의 온기가 아직은 살짝 남아 있었다.

육역이 들여다보니 수정은 작고 정교했다. 가운데는 오목하고 주변은 볼록해서 수정 조각을 사이에 두고 보게 되면, 물체를 몇 배로 확대할 수 있었다.

그가 긁힌 흔적을 자세히 살폈다. 톱밥 말린 것의 방향이 금하의 설명대로 과연 위를 향했고, 이는 당연히 상자를 들어 올릴 때 생긴 것이었다.

“그건…….”

금하가 말을 하려는 순간, 양악은 몇 번이나 기침 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더는 말하지 말 것을 알렸다.

“비록 몇 가지 단서를 찾아낼 순 있었지만, 이 사안은 복잡합니다. 저희는 보잘것없는 포쾌로 경험도 미천할 뿐이라, 이 건이 천하에 악명을 떨치는 해적의 소행이란 것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람 수는 4-6인 사이고, 범행 수법이 능숙한 걸로 보아 분명 상습범이에요. 지금쯤은 이미 물길을 따라 몇 리 밖 먼 곳에 가 있어 추격이 쉽지 않을 겁니다.”

금하는 곁눈질로 천연덕스럽게 얘기하는 양악을 흘겨보았다. 그래도 가까스로 꾹 참아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왕방흥은 한동안 멍하니 듣고 있다가 이때서야 끼어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강은 지류가 매우 많은데, 도적이 이미 물길 따라 내려갔다면, 어찌 추적할 수 있겠나? 대장군의 크나큰 은혜를 입은 이 몸은 지금 생신 선물을 강탈당하고, 도적은 종적을 찾을 수 없으니 실로 돌아가 대장군을 뵐 면목이 없구나.”

왕방흥의 기분 같은 건 조금도 고려치 않고, 금하가 농을 섞어 말했다.

“왕 대인 제발 넓게 생각하셔서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짓은 하지 마십시오. 아니면 앞으로 펼쳐질 부귀가 아까우실 텐데요.”

“너……, 그게 무슨 뜻이냐?”

왕방흥이 노기가 가득한 눈으로 금하를 사납게 쏘아보았다.

“얘 말은 왕 대인께서 구 대장군 휘하로 일을 하시니, 이 부귀가 변치 않을 거라는 뜻입니다. 저희는 진실로 아주 많이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매우 부럽습죠.”

금하가 무슨 말을 하기 전 가로채 수습에 나선 양악이 왕방흥을 향해 두 손을 공수했다.

“저희는 재주가 없어 별 도움을 드리지 못하니, 대인 양해해 주십시오.”

이 말의 뜻인즉 작별 인사였다.

왕방흥 또한 그들에게 인내심이 거의 다 했기에, 불만스럽게 마음대로 하라는 손짓을 했다. 그는 금하와 양악이 선실을 나가는 것을 보고서는 육역을 향해 웃었다.

“저걸 봐요, 육선문 것들은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나쁜 버릇이 있거나 허황한 말만 할 줄 알고, 제대로 된 일이란 조금도 할 줄 몰라요.”

육역 또한 두어 차례 가벼운 기침을 하며 그 또한 왕방흥을 향해 공수로 작별을 고했다.

“대인도 지나친 걱정은 마십시오. 군사들이 깨어난 후엔 아마 상황이 좋아질 여지가 있을 겁니다.”

육역의 말에도 왕방흥은 수심에 찬 표정뿐이었으나, 그래도 예를 갖춘 후 기패관에게 육역을 배에서 배웅하라고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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