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十七花 * 소유아 이야기 (5)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말도 안 돼……"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유아가 아까부터 중얼거리고 있는 말이다.
눈앞에 먹을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몫의 양이 전혀 줄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만큼 충격이 컸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
시하루의 옆에 딱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유아가 앞자리에 앉은 예쁘장한 여……아니, 남자를 무서운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 어떠한 일에도 동요하지 않던. 게다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예쁘장한 미모를 살려 '사유'라는 이름으로 돌아다니던 두꺼운 낯짝은 어디 가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제 좀 그만하지? 나도 사정이란 게 있으니까 말이야."
나름의 '무기'로 여기고 있던 그 가면은 그녀의 앞에서 이미 무장해제 상태이다.
평소라면 박장대소를 했을 일일지도 몰랐지만, 배신감(?)보다도 다른 의미의 씁쓸함에 유아는 웃지 못했다.
심지어는 슬프기까지 했다.
예쁘장한 남자들이 등장하면 등장할수록 여인들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고, 그들의 화장은 두꺼워져만 간다.
하지만 화장을 하지 않는 유아에게 그들의 등장은 더더욱 민감했다.
꽃따리 오빠도 그렇고, 어제까지만 해도 여자인 줄 알았던 눈앞의 사신도 그렇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동안의 정을 보아 유시후까지 넣으면…….
어째서인지 그녀의 주변의 남자들은 모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물론. 그중의 한 명이 제 남자라는 사실이 조금 자랑스럽기는 하지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궐 밖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데에는 이 차림이 훨씬 편하거든.”
잠시 아무 말 없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서궁후가 곧 피식 웃더니 턱을 괴고 유아를 응시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차피 다 들통 난 마당에, 하대(下待)해도 괜찮겠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왜요?"
왠지 모르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시선이 조금 불쾌했던 건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아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난 서궁후. 하휘도의 왕이니까."
뜬금없이 자기 자랑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리고 너는 나한테 잘 보여야 할 테니까."
아직 교역 문제가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게다가 나는 왕. 너는 저 녀석의 신하."
순간. 그의 입에서 들린, 시하루를 지칭하는 '저 녀석'이라는 말이 유아의 귀에는 아주 거슬렸지만 맞는 말이기도 했으니…….
그저 답답함에 시하루의 옷깃만을 붙잡고 있을 뿐이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서궁후는 아무렇지 않게 차를 마시는 시하루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특이한 신하를 두었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넘보지 마라."
지금까지 무표정한 표정으로 관람 중이던 시하루가 바로 태도가 돌변하여 사납게 말했다.
둘을 가만히 바라보던 서궁후가 뭔가 재미있는 일을 떠올린 건지 피식 웃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럼 이렇게 하자."
그 웃음에 유아는 불안해졌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교역제한을 받아들일게. 단, 교역 물품은 약초로 제한하겠지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정말요?”
절대 안 된다고 거절하던 문제가 너무 간단히 해결되는 거 같아 찝찝했지만,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유아에게는 나쁜 게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쪽에서도 무언가를 제안하겠지만, 과제만 해결하면 되는 그녀로서는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라 어기고 있었다.
아무리 유아라고는 해도, 이제 막 들어온 신입. 그런 그녀에게 합의까지 맡길 리가 없다.
하휘도의 왕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으니, 적당한 합의는 실력 있고 경력 있는 대신들이 마무리를 짓겠지.
자신과는 관련 없는 일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대신 너는 내 신하가 되어라.”
물론 이 말을 듣지 전까지는.
분명 저번에 한 번 거절했던 거 같은데. 말귀가 어두운 건지 아니면 고집이 센 건지 모르겠다.
유아는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고. 시하루는 예상대로 옆에서 날뛰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웃고 있는 사람은 서궁후. 그뿐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왜? 하휘도에 서하연의 교육제도를 도입해 보겠다는 건데.”
하지만 그를 제외한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지금 저 녀석이 우리 유아를……!’
누군가를 엄청나게 화를 내고 있었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예쁜 건 알아가지고.’
누군가는 엄청나게 착각을 하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때? 이 정도면 좋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죄송합니다. 싫습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는 유아가 망설이고 있다고 생각한 건지, 서궁후는 설득을 하기 시작했다. 문제라면 시작함과 동시에 유아가 단칼에 거절했다는 거지만.
괜히 나섰다가 유아에게 한 소리 들을까 봐 걱정이 된 시하루는 아무 말도 않고 있었지만,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서궁후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으로 보아하니, 그의 인내심은 거의 바닥을 드러낸 듯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그의 기분을 풀어주는 것도 중요했지만, 지금은 더욱 중요한 문제가 있었으니 일단은 보류이다.
그나저나 너무 단칼에 거절했나…….
화가 나 보이는 시하루와 못지않게, 당황스러움으로 무장한 서궁후의 반응에 유아는 문득 생각했다.
괜히 기분 상해서 교역 문제를 없던 거로 하면 낭패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따라 하휘도로 갈 수도 없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거 큰일인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제안은 정말 감사드리지만, 전 제가 태어나고 자란 이 천유국이 좋습니다."
최대한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신경 썼지만, 별로 효과는 없어 보였다.
그녀의 거절에 그나마 다시 표정이 풀린 시하루와는 다르게, 서궁후의 표정은 자신의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 불만을 나타내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좋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천유국으로의 방문을 허락하도록 하지."
많이 봐줬다는 듯 조건을 다는 그이다.
이유도 없이 딱 잘라 '싫다.'라고 말하는 것을 피하고자. 유아가 순간적으로 떠올린 변명거리였건만. 이렇게 되니 오히려 제 무덤을 파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설마 우리나라가 싫다는 건 아닐 테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럴 리가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럼 뭐가 문제지?"
그녀가 하휘도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건 진심이다.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이야기를 들어본 결과. 아주 멋진 나라 같았기 때문이다.
서궁후는 그럼 이제 문제 없지 않느냐 묻고 있지만……. 사실은 아주 결정적인 이유가 남아 있었다.
될 수 있으면 과제기간 중에는 잊으려고 했는데…….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것은 불가능한가 보다.
할 수 없다는 듯 유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곧 고개를 든 그녀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똑바로 서궁후를 응시하며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원래 직책 같은 거 내세우는 거 별로 안 좋아하지만……. 저도 입장이란 게 있으니.”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서궁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제부터 당신을 하휘도의 왕으로서 대할 테니……."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거 같은 분위기에 서궁후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유아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무슨 중요한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아까부터 불쾌감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던 옆자리의 누군가가 선수를 치며 끼어들었다.
“이 녀석, 내 아내야.”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시하루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큰소리로 외쳤다.
그 목소리가 오죽 컸으면 분주히 주위를 맴돌던 궁인들까지도 걸음을 멈추고 그들이 있는 정자를 바라볼 정도이다.
유아는 그가 자신의 말을 가로채 갔다는 것에 불만인 듯했지만, 시하루는 혼자 만족스러워 보였다. ‘드디어’라는 생각을 한 건지,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다.
“왜? 너 내 아내 맞잖아. 아니야?”
유아가 아무 말도 않고 있자, 불안해진 건지 시하루가 고개를 돌려, 확인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서궁후 역시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사실이 맞느냐는 눈빛으로 유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가장 당황스러운 입장은 유아였다.
각자의 의미가 다른 두 남자의 시선을 견디다 못한 유아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옆자리의 시하루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건지 입가를 가리며 웃기 시작했고, 앞자리에 있던 서궁후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삐끗할 정도로 놀란 거 같았다.
순식간에 태도가 바뀌었다.
“무……뭐?”
여전히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던 서궁후는. 조금 더 확실한 답변을 들어야겠다는 듯 유아에게서 시선을 떼고, 시하루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어.
물론 보통의 군신 관계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부관계로도 보이지는 않았다.
도대체 이들의 관계는 무엇인가!
서궁후의 복잡 미묘한 표정에 시하루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다.
‘분명 지금쯤 네 머릿속은 난리가 났겠지.’
* *
“이 차림 오랜만이네요.”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나온 유아는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당분간은 일에 집중하고 싶다던 그녀는 화려함보다 편안한 차림을 추구했기 때문에 왕후로서의 품위가 느껴지는 옷이 어색했다.
당장에라도 벗어 던지고 싶었지만, 여전히 시하루와 유아 사이의 관계를 인정 못 하는 서궁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차려입어 줘야 믿어주지.
벌써 열 번도 넘게 부부 사이라고 설명했지만, 절대 믿으려고 하질 않는 바람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는 유아가 신경 쓰였던 건지, 옆에 앉아 있던 시하루가 그녀의 소매를 걷어주었다.
그제야 조금 나은 건지 살짝 찌푸리고 있던 인상이 조금은 풀렸다.
“말도 안 돼.”
사유. 그가 서궁후였다는 걸 알았을 때의 유아가 보인 반응과 비슷하다. 아니, 조금 더 심한 반응이다.
“배신자.”
뜬금없이 배신자? 유아는 모르겠지만, 서궁후는 아까워 죽을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엄청나 보이던 것이 임자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더 엄청나 보이는 게 현실.
게다가 꼭 데려가고 싶은 아이였는데. 하필이면 저 꼴도 볼기 싫은 놈의 것이라니!
더더욱 안타까운 상황이다.
“그래. 생각해보니 마침 잘됐네. 네가 이렇게 천유국에 올 일이 몇 번이나 더 있겠냐? 이럴 때 인사해야지.”
“……그건……그렇지.”
섬나라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배도 타야 하는데. 자주 오는 게 더 이상하지.
“잠깐.”
생각해보니 이건 아니라는 듯. 어떤 사실 하나를 떠올린 서궁후가 비장해 보이는 표정으로 시하루의 말을 막아섰다.
“분명 네 부인 이름은 ‘유아’아니었나? 그새 후궁을 들였어?”
그의 말에 시하루의 표정이 한눈에 불쾌하다는 마음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굳어져 갔다.
“내가 유아 아닌 여자랑 혼인할 리가 없잖아!”
결국에는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럼 네 옆에 앉아 있는 그녀는 뭔데?”
버젓이 증거가 옆에 앉아 있는데 무슨 변명을 하고 있냐고 따져 묻기까지 했다.
반면, 시하루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는 듯 유아를 바라봤고, 유아는 ‘그러고 보니…….’라는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서궁후. 그가 오해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유아가 자신의 이름을 ‘소이랑’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
“죄송합니다.”
자기 잘못은 바로 인정하는 게 그녀이다.
갑자기 자신에게 미안하다 사과하는 유아의 태도에 놀란 건, 그 사과를 받는 서궁후뿐만이 아니었다.
“첫 만남에 제가 알려드린 이름은 ‘서하연의 호’라고 하는 다른 이름입니다. 어쩌다 보니 그만…….”
자신이 왜 그때 본명이 아닌, 서하연의 호를 알려준 건지 의문이었는데. 이제 알 거 같았다.
당시에는 ‘그녀’였던 그에게서 느껴져 오는 위화감 때문이 분명했다.
‘본능적인 자기 보호’라고 해두자.
“그게 뭐야.”
자신을 경계하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이제는 섭섭해지기까지 했다.
“꽃따리 오빠와 몇몇을 빼고는 아무도 믿지 말라고 배웠거든요.”
“누가 그래?”
“꽃따리 오빠가요.”
그러고 보니.
서궁후는 그들의 대화에 종종 등장하는 ‘꽃따리 오빠’라는 단어가 이제야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꽃따리 오빠가 누구야?”
친오빠라도 되는 건가 하고 물었지만, 싱긋 웃는 유아가 가리킨 건 다름 아닌 옆자리. 천유국의 왕이다.
그리고 시하루 역시. 그것은 자신이라는 듯 살짝 손을 들고 있었다.
“하…….하하.”
어이가 없다.
무슨 이런 웃긴 부부가 다 있나. 심지어 왕과 왕후이다.
“하. 어쩐지 말하는 게 보통 사이는 아니라는 생각을 들었지. 그래도 숨겨둔 애인이나 그런 건 줄 알았는데…….”
“뭐?”
“왕후께서 서하연의 꽃이라는 건, 들었거든. 서하연의 꽃이 왕후가 되면 후궁은 들일 수 없다고 들었으니…….”
‘숨겨둔 애인’이라는 말에 시하루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지만, 다행히 유아가 말린 덕분에 싸움을 일어나지 않았다.
“유아는 제 본명이에요.”
“흥. 차라리 후궁이었다면 어떻게든 해봤을 텐데 말이지. 그 유명한 왕후라니.”
“어? 저 하휘도에서도 유명해요?”
유아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그녀가 무심코 넣은 ‘도’는. 이미 그녀가 천유국에서 유명인사라는 걸 말하는 것과 같았다.
“천유국의 왕이 꼼짝도 못 하는 여인으로 유명하지.”
“잘됐네요. 그렇죠, 전하?”
뭐가 잘 된 거라고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유아가 웃으니 마냥 좋다고 따라 웃는 시하루이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서궁후는 자신의 눈앞에 앉아 있는 저 남자가 과거 그 남자와 동일인물이 맞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바보네. 바보야.”
“그냥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도 괜찮아. 네 마음 이해가 되니까.”
그냥 다 좋단다.
“아. 하지만 달라고는 하지 마. 너 말고도 노리는 사람이 꽤 되니까.”
툭하면 호랑이가 제 동생 울리지 마라. 괴롭히지 말라 등으로 잔소리를 해대지를 않나, 유아가 새언니라고 부르는 기센 여인은 또 쓸데없는 말을 하질 않나. 민폐 부부가 따로 없었다.
거기에 다시 복직한 이신은 시도 때도 없이 자신과 유아를 고문하듯 일을 시켰다.
이게 끝이 아니다. 희안궁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은 유아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대비마마까지 자기가 심심하니 말동무가 되어달라는 이유로 그녀를 부르고는 했다.
“적이 너무 많아, 잠시라도 독차지를 할 수가 없어. 넌 절대 이런 멋진 여자랑 혼인하지 마라.”
지금 저게 부러우라고 하는 소리인지, 아니면 정말 진심이 담긴 충고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나도 임자 있는 여자는 안 건드려. 왕후님은 더더욱. 전쟁 일어날 일이 있나. 무서워서 못 건드린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나도 너랑은 싸우고 싶지 않거든. 골치 아파져.”
“하지만 왕과 신하의 관계라면 괜찮겠지?”
“……그 정도라면……뭐.”
어째 목소리가 시원치 않은 게, 그것마저도 허락하기 싫었지만, 유아가 싫어할까 봐 마지못해 내린 결정 같았다.
“잠깐만요. 잠깐.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고요. 그래서요? 제 과제는 어떻게 되는 거죠?”
자신을 빼고 벌어진 두 남자의 수다에 직업정신이 투철한 유아가 다급히 교역에 관련된 문서들을 그에게 내밀며 다시 한 번 설득하려고 했다.
“천유국 특유, 서하연의 교육 방식에 관심이 있으신 거지요?”
그는 왠지 약점 잡힌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기는 했지만…….
“서하연의 교육방식을 그쪽에 도입할 수 있게 할 테니 하휘도의 약초 교역을 승인해주세요.”
당돌해 보이는 유아의 말에 서궁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내민 문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이러다가 과제인 교역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대신 자격은 물 건너가 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고개를 든 서궁후 표정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알게 된 많은 사실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많이는 안 돼. 하지만 적당한 어느 선 정도는 승인해줘도 괜찮겠지. 우리 쪽도 얻는 게 있으니까.”
“정말요?”
“그래.”
사실 그가 마음을 바꾼 지는 꽤 되었다.
전에 그녀와 함께 시장을 돌아다녔을 때.
‘평등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평등은 출신과 성별 등에 인생이 좌지우지되지 않는 거예요. 누구나 위로 올라가는 사회가 아니라 누구나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사회예요. 기회가 중요하죠. 천유국의 상징이기도 한 서하연은 그것을 위한 작은 노력이에요.’
다른 나라에서 아무리 좋은 물건을 내세워도 변하지 않던 마음이 그녀의 말에 흔들리고 말았다.
자신을 꽤나 놀라게 한 이 여인에 대해 관심이 생겨, 좀 더 두고 보고 싶었는데…….
“참 다행이야.”
“네?”
“만난 지 얼마 안 됐다는 게 말이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행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다행’이라는 단어는 나름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좋은 거 아니겠는가.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대충 보니 시하루와도 나름 친한 거 같은데, 이렇게 되었으니 앞으로 자신과도 잘 지내달라는 유아의 인사였다.
“타국의 왕과 왕비가 친하게 지내면 주위에서 뭐라 할 텐데?”
“왜요?”
“…….”
유아 특유의 궁금하다는 표정에 서궁후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유아 대신에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를 챈 시하루가 나서서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 녀석에게 그런 눈치는 없어.”
“네가 고생하겠구나.”
“그것도 심하게.”
지금 자신을 놓고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냐는 듯 그녀의 눈은 매의 눈이 되어 두 남자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답변은 들을 수 없었고, 둘은 그저 웃고 있을 뿐이다.
* *
과제였던 하휘도 교역문제도 잘 해결된 것 같고. 엄청난 친구도 한 명 사귄 거 같으니 만족스러운 이야기의 끝 같았다.
자, 그럼 문제도 해결했으니 남은 건…….
잘못을 한 남편을 혼내는 일이다.
“자. 이제 말씀해보시지요.”
“응? 뭐를?”
저. 저. 보라.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척’하는 눈빛을.
자신은 전혀 잘못한 게 없다 말하고 있는 시하루의 눈빛과 절대 물러서지 않고, ‘너의 죄를 끝까지 밝히겠노라.’라 말하고 있는 유아의 눈빛이 맞서고 있다.
하지만 늘 먼저 꼬리를 내리는 건 이 나라의 왕이다.
하늘 아래 살면서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인이 몇이나 더 있을까.
“저한테 거짓말했어요.”
“…….”
“부부 사이에는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을 이용해 따지고 있는 그녀이다. 그 역시 자신의 죄를 아는 건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미안.”
결국, 그가 선택한 건 솔직하게 사과를 하는 방법이다.
“저한테는 만나본 적도 없다고 했잖아요. 심지어 하휘도에 간 적이 있다는 말도 안 했어요.”
생각을 하는 건지, 아니면 대답을 피하려는 건지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러다가 나중에 다른 여자 만나고 안 만났다고 거짓말하는 날이 올까 두려워지네요.”
“아니. 그럴 일은 절대 없으니까.”
“미리 말하는데, 나 서하연의 꽃이에요. 제대로 안 지키면 다른 사람한테 빼앗길지도 몰라요.”
어느새 유아의 얼굴에는 시하루를 괴롭히는 것으로 생긴 즐거움이 한가득 번지고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는 그것을 알 리가 없었고, 장난인지 모르는 그의 기분은 더더욱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그러고 보니 서궁후님 내일 돌아가신다는 데, 확 따라가 버릴 까보다.”
한바탕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반응이 조용하다.
아무래도 약을 올린다는 것이 정도가 지나쳤나 보다.
“……혹시 하휘도를 그냥 그대로 내버려뒀으면 했어요?”
유아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그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그녀의 말이 정곡을 찌른 건지, 그의 어깨가 들썩였다.
이제 장난은 그만해야지. 그럴 일 없겠지만, 이러다가 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나 풀이 죽어버린 그를 살리기로 했다.
“……사실 아버지께서 그 문제를 추진하실 때 나는 반대 입장이었어.”
“그러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하지.”
“너랑 일 문제로 대립하기 싫어.”
“사람이 어떻게 의견차이가 없을 수 있어요? 원래 충돌이 생기고, 대립하고 그러는 거예요.”
유아의 일방적인 훈계가 어느 정도 끝이 날 무렵.
여전히 기가 죽어 있는 시하루를 바라보던 그녀가 뜬금없이 물었다.
“나 사랑하죠?”
“당연하지.”
대답이 빠르다.
“그러면 그러지 마요. 어떻게 보이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부 말해줘요. 의견차이로 실컷 싸우는 일이 있다고 해도. 저는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분하니까요. 우리 조회실 안에서는 실컷 싸워요. 단 궁에 돌아오면 조회실 안에서 있던 일은 잊는 거예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아가 씨익 웃으며 제안했다.
“그래. 알았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따라 웃는 시하루. 과연, 백성들이 천유국의 실세라 불리는 그녀이다.
한껏 무게 잡고 몰아세울 때는 언제고. 이제는 안아달라는 듯. 두 팔을 벌리고 있다.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며 배운 것이 있다고 하면, 그녀의 능청스러움도 그중 하나이다.
시하루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그녀를 보며, 이신은 항상 말했다.
‘유아님. 제발 시하루님 버리지 마세요. 유아님이 안 계시면 전하 하나가 아니라 이 나라가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 *
“아직 그 차림은 익숙하지가 않네요. 돌아가시는 길도 여장하시는 게 어떠세요? 제 옷 빌려드릴까요?”
지금이라도 당장 자신의 옷장에서 예쁜 옷 한 벌 꺼내올 테니 언제든 말하라는 태도였다.
하지만.
“나도 네 그 차림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아. 솔직히 말해서 안 어울려.”
마주 보고 선 유아와 서궁후가 서로의 옷차림을 지적하고 있다.
배웅 준비를 끝낸 시하루가 나왔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더 늦었으면 서로 감정까지 상할 정도까지 갔을지도.
“언제 한번 하휘도에 놀러 와.”
“네. 같이 갈게요.”
유아가 시하루 손에 잡힌 손은 빼기는커녕, 더욱 꽉 붙잡으며 활짝 웃었다.
“아니. 너 혼자 와. 저 녀석은 데리고 올 필요 없어.”
“그럼 아마 평생 못 가겠네요.”
서궁후는 둘이 찰싹 붙어 알콩달콩해 보이는 그들 때문에 심기가 불편했다.
물론 전날도 사이가 나빠 보이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애정행각(?)이 더 심했다. 하휘도에 돌아가는 대로 예쁜 색시 하나 찾아봐야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너희 둘 짜증 나.”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결국 그가 선택한 말은 이 짧은 한마디이다.
“나중에 또 놀러 와라.”
형식적인 인사라는 게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하지만 서궁후가 그런 걸 신경 쓰겠는가.
“그래. 아마 그때는 나를 배웅할 인원이 지금보다는 더 늘어나 있겠지?”
“아들 하나에 딸 하나래.”
“그건 또 뭐야?”
즐거워 보이기까지 하는 시하루에 못마땅한 서궁후이다.
“유아의 미래 계획.”
“……뭔지는 모르겠지만. 힘내라.”
“그래. 힘낼게.”
* *
[ 1년 후 ]
천유국
시율왕(=시하루) 16년.
“허허. 오셨습니까.”
“안녕하십니까.”
나이가 지긋하신 영감들이 뒷짐을 지고 여유롭게 어느 큰 궁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최근 천유국에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고 있었다.
과거. 성격 나쁜 시하루가 기분이 나쁠 때면 모두가 긴장해야 하는 아슬아슬한 나날과는 차원이 달랐다.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니 조회실 문 앞에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오늘도 조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렇게 궐을 찾은 그들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막 들어설 때였다.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전하야말로. 그렇게 나오시면 곤란하지요!”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입니까? 이러다가 죽습니다. 모든 걸 잃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확신도 없는 길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너무 위험해요!”
문이 열리기 무섭게 상냥한 아침 인사가 아닌, 날카로운 두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펴졌다.
하지만 놀라기는커녕. 둘은 익숙하다는 듯 당사자들에게 들리지 않을 아침 인사를 한 뒤. 제자리에 착석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높을 대로 높아진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누가 오건 말건 관심 없었다.
“아. 오셨습니까.”
끼고 싶지 않아 무관심한 시선으로 둘의 다툼을 관람하고 있던 유시후가 나이가 지긋한 영감님들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일…….”
“무엇을 정하는데 저리 난리이신 겁니까?”
주제가 매번 바뀌었기 때문에, 전반전을 보지 못한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을 유시후에게 물었다.
그 질문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듯 다시 자리에 앉아 책장을 넘기던 그가 한숨과 함께 대답하기를.
“아……. 장기 훈수요.”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아침조회 시간보다 일찍 모인 이신과 유시후. 그리고 시하루 부부.
남는 시간 동안 이신은 유시후에게 장기 시합을 제안했고, 시하루와 유아가 이를 구경하던 중에 이리 싸움이 나 버렸다.
정작 장기를 두던 사람은 흥이 깨져 제자리로 돌아가 버렸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말싸움은 끝나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것참. 또 쓸데없는 걸로 저러시는군요.”
“사이가 좋으신 건지, 나쁘신 건지.”
“그만 말려야 하지 않나요?”
이쯤 되니 슬슬 그들이 걱정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둘 사이가 나빠지면 궐 안의 분위기 역시 어두워진다.
“아니요. 그냥 내버려두세요. 이제 곧 끝날 테니까요.”
유시후가 말려야 하나 마나. 고민하는 그들에게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그의 예상대로 어느새 조용해진 그들이다.
잠시 시선을 떼고 있는 사이. 그 의미 없는 다툼의 결말을 보지 못한 이들의 시선이 다시 그들에게로 향했다.
“좋아요. 이제 화해해요.”
“그래.”
실컷 싸워놓고.
어느새 서로 손을 잡고 방실방실 웃고 있다.
잠시나마 걱정했던 이들에게는 이보다 어이없는 일이 없었다.
조회실 안에서는 주제에 상관 없이 의견 차이가 생기면 거의 무조건 싸운다. 그리고 많이 싸우는 만큼 많이 화해한다.
절대 조회실 밖에서는 싸우지 않는다. 다툼이 끝나지 않더라도 조회실을 벗어나면 그 일은 잊는다. 이것이 그들의 규칙.
덕분에 조회실 안은 늘 시끄러웠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궐 안은 아주 조용했다.
“아니. 잠깐만요. 그게 아니지요!”
화해의 악수를 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다시 조회실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너야말로. 이번에는 네가 틀렸어!”
“자꾸 그럴 거예요? 그럼 이 문제는 이신공께 여쭤보는 건 어때요? 누구 말이 맞나!”
얌전히 앉아 차를 마시던 이신이 화들짝 놀랐다.
이러다가 괜히 자신에게까지 불똥이 튀는 건 아닌가 싶어 불안하다는 눈치이다.
“그러든가! 미안하지만, 이신은 내 편이거든.”
무슨 자신감으로 하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것은 시하루. 혼자만의 생각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유아는 그가 지금 편 가르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건지 잔뜩 약이 올랐다가 문득 생각난 듯 응수했다.
“이신공은 몰라도. 우리 아들은 분명 엄마 편일 거예요.”
그녀의 말에 시하루가 잠시 주춤했다.
“……왜 또 그게 그렇게 돼…….”
바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유아의 입가에는 벌써부터 승리의 미소가 살포시 걸렸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듯 시하루는 그나마 자신을 이해해 줄 누군가를 향해 다가갔다.
“유시후. 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넌 그래도 남자잖아. 적어도 나랑은 같은 입장이잖아. 어떻게 생각해?”
이번에는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그에게 불똥이 튀어버렸다.
자신의 말에 집중하라는 의미에서 책까지 가져가 버린 시하루 때문에, 그는 화가 나 보였다.
“……아직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는 데, 도대체 두 분은 뭐 하시는 겁니까?”
“첫째는 무조건 아들이라니까요?”
그녀 역시 어디서 오는 확신인지 모르겠지만. 하도 들어서 그런지 이제는 시하루의 머릿속에서도 ‘첫째는 아들.’이라는 것이 거의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어떻게 하면 좋아?”
“……뭘 어떻게 해요? 나중에 태어나면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시던가요.”
귀찮아 죽겠다는 듯 유시후가 대답을 하며 시하루의 손에 들린 책을 되찾아갔다.
대충 던진 말이었는데, 의외의 해결책을 찾았다는 듯 한결 밝아진 표정들이다.
“좋아. 그럼 나중에 물어보자.”
“두고 보세요. 제 편이 분명하니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그들의 아이는 이러한 부모 때문에 태어나기 전부터 미래에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슬슬 마무리되는가 싶던 그들의 쓸데없는 다툼이 또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의 얼굴에는 ‘또 시작이다.’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고, 이제는 관심 없다는 듯 웃으며 각자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오늘도 두 분의 다툼은 끊이질 않네요.”
“허허. 그렇다면 오늘도 참 평화로운 하루가 되겠군요.”
이들이 시끄러우면 시끄러울수록.
그것은 곧 천유국의 평화를 의미했다.
과거 조용하고 차가웠던 궐은 이제 그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이다.
왕의 옆에 그녀라는 꽃이 있는 한.
그 행복은 영원할 것이다.
옛날 옛날에
궁 안에 잠들어 있는 꽃이 있었다.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꽃은 세상에 나와, 더더욱 활짝 피었고.
어느새 궐 안은 그 향기로 가득 찼다고 한다.
[ 궁 안에 잠들어있는 꽃 본편 完 ]
四十八花 * 시하루 이야기
봄 향기가 물씬 풍겨오고 있다.
따듯해진 날씨에 겨우내 잠자고 있던 꽃들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뭐 하세요?”
이제야 할 일을 다 끝낸 건지, 밖으로 나온 유아가 정원을 지나가다 연못가 정자에 올라있는 시하루를 발견하고 물었다.
“그냥 생각 중.”
“무슨 생각 하는데요?”
“그냥 생각.”
지금 말장난을 하자는 건지…….
실실 웃으며 말하는 게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아무래도 이신과의 둘만의 시간이 그에게 꽤나 큰 정신적 소모를 요구한 모양이다.
원래는 유아, 시하루, 이신. 이렇게 세 명이 모여 함께 공부를 하는 시간이었는데, 하필 오늘은 서하연의 입학시험 날.
서하연의 분교와도 같은 희안궁으로 들어오겠다 지원한 학생들을 보기 위해 오늘 하루는 자리를 비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늘 하던 공부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으니…….
“갑자기 미안해지네요.”
“알면 나만 두고 가지 마.”
안 그래도 학생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함께 가겠다는 그를 의자에 꾹꾹 눌러 앉혀놓고 나와 마음이 불편했는데…….
“다음에는 같이 가요.”
희안궁이 그렇게 먼 곳도 아닌데 말이지.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건데요?”
그러고 보니 아직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다는 걸 깨달은 그녀의 질문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속 대답을 회피하는 시하루였고, 그녀는 들을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결국, 그녀의 집요함에 시하루는 피식 웃으며 항복 선언을 해야만 했다.
“너 처음 만났을 때 생각.”
“저 처음 만났을 때요? 아~. 그러고 보니 그때도 이렇게 따듯한 봄이었죠?”
따스한 봄날.
자신이 영희궁에서 나와 그를 만났던 날을 떠올리는 듯 그녀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아니. 그거 말고.”
유아가 기억하는 그들의 첫 만남은 방금 말한 그 봄날이었지만, 시하루의 표정을 보니 그녀가 말하는 봄날이 아닌 듯했다.
“그보다 좀 더 빠른 어느 봄날.”
그녀가 기억하고 있던 봄보다 더 빠른 봄이 있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예전에 그가 그랬다.
‘난 오래전부터 네 증표를 갖고 있었거든.’
‘난 꽃따리 오빠에게 증표를 준 적이 없는데요?’
‘하지만 우리는 만난 적이 있었어.’
‘나 머리 좋아요. 기억력도 좋지요. 우리가 예전에 만났다면 내가 꽃따리 오빠를 처음 보던 그날 분명 기억했을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기억 따위 없었지만. 그가 계속해서 우기니 어쩐지 사실 같았다.
설마 이런 걸로 거짓말할 리가 없는데.
하지만 그녀는 뛰어난 기억력을 갖고 있다. 그런 그녀가 그를 기억 못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심지어 이렇게 잘생긴 사람을!
당시 발끈한 그녀에게 그가 말했다.
‘아마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닐 거야. 뭐, 굳이 말하자면 기억에 없는 거겠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몇 번이고 설명을 부탁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늘.
‘비밀이야.’
하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알려 주려나?
* *
자세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따사로운 햇살과 상냥하고 향긋한 바람이 불었던 기억이 나는 걸로 보아, 봄이 분명했다.
봄놀이니 꽃구경이니. 사람들의 들뜬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지만, 당시의 나는 봄과 어울리지 않게 어두웠다.
나는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그리고 하루 종일 방 안에서.
그저 창 너머로 봄날을 구경하는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창밖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아주 맑았고. 코끝을 스치는 향은 매우 좋았다.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이 완벽한 봄날을 즐기지 못하는 나 자신이다.
“시하루님. 이제 슬슬…….”
“힘드신 건 잘 알지만, 이럴 때일수록 대신들에게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셔야…….”
모든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다.
늘 아무렇지 않게 그 자리를 지킬 줄 알았던 아버지의 건강은 순식간에 악화되었다.
언젠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건 어렸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이다.
갑자기 궐 안의 모든 이들의 관심이 나에게로 향하고. 내 세상인 줄만 알았던 궐 안은 그저 답답한 감옥처럼 느껴졌다.
거기에 오늘처럼 맑은 하늘을 보니 내 처지가 더더욱 우울하다.
상대에게 약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
표정을 감추고. 절대 마음을 내보이지 말자.
이 갑갑한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나’를 잊는 수밖에.
“소유란? 소월가(家)의 가주?”
“예. 며칠 전부터 시하루님을 만나고 싶으시다며……. 계속 기다리셨습니다.”
소월가와 유월가.
아버지께서 두 가문을 의지하고 있었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왕위에 오른다고 해도. 그들과 잘 지내야 한다는 거 역시 잘 알고 있다.
“……별로 만나고 싶지 않다.”
사람들과는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정치니 뭐니. 그것들은 아직 나와는 관계없는 어른들의 세계이다. 때문에 천유국의 기둥과 나눌 이야기 따위 없다.
하지만 이신은 무슨 생각인지 계속해서 나를 그와 만나게 하기 위해 별의별 수를 쓰기 시작했고, 나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 이신만 보면 자연스럽게 도망치고는 했다.
‘그 날’ 역시.
북적거리는 사람들의 틈에서 살짝 벗어나, 밖으로 나오던 길이었다.
‘오늘도 왔나? 소월가의 가주. 끈질기군.’
도망도 계속해서 시도하면 그 실력이 늘어난다.
최대한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길이 아닌 정원의 가장자리 길을 이용한 탓에 옷이 엉망이 되었지만 벗어났다는 것에 만족하자.
“아. 이제 거의……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나무와 잡초들을 신경 쓰느라 미처 보지 못한 장애물에 나는 그대로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뭐야! 왜 이런 데에 가마가 놓여 있는 거지?!”
대충 보니 여자가 타는 가마이다. 게다가 크기도 작은 것이 분명 어린 여자아이나 탈 법한 가마인데……. 누군가 온 건가?
아니……하지만 제 딸을 데리고 궐에 들어올 사람이 몇이나…….
“괜찮으세요?”
가마 주인에 대한 호기심에 계속 주변을 돌던 나는 무심코 모서리를 발로 툭툭 쳐보고 있는데, 갑자기 안에서부터 어느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상대로 어린아이의 목소리.
가마의 문이 닫혀 있어 안을 볼 수가 없었고 이렇게 외진 곳에 시종도 하나 없이 달랑 가마만 놓여 있으니 당연히 빈 가마라고 방심한 나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누……누구냐?! 궐 안에는 무슨 일로 들어온 거지?”
괜히 머쓱해져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 아버지를 따라 들어왔어요.”
아버지? 궐 안의 대신인가? 아니. 그 전에 어린 여식이 있는 대신이 있었나?
대충 몇몇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쨌든…….
“심심한데 마침 잘됐네.”
“네?”
“내 말동무라도 해줘.”
이신이 포기할 때까지. 그리고 소월가의 가주가 돌아갈 때까지.
딱히 할 일도 없었으니 오히려 잘 된 일이 아닌가.
가마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은 당황한 거 같았지만. 그건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나는.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정말 순수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 *
“안녕. 아. 이거 가져왔는데, 먹어볼래?”
예전에 나눈 대화에서 그녀가 다과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챙겨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옆에 나 있는 작은 문이 살짝 열리더니 마찬가지로 작은 손이 나와 상자를 잽싸게 낚아채 가져갔다.
“……너 진짜 밖으로 안 나올 거야? 항상 안에 있잖아.”
어느새 보름이란 시간이 지났다.
이 궐 안에서 내가 왕세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건 그녀뿐이다. 덕분에 그녀 앞에서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말할 수가 있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가 있었고, 때로는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수도 있었으며, 고민 같은 것도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그 고민들을 해결해 준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가벼워지는 기분이다.
항상 비슷한 시간에 이신이 나를 찾아오고. 나는 그것을 피해 도망간다.
그리고 사람들이 별로 없는 정원을 지나고 지나면.
항상 같은 자리에 그녀가 있는 가마가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께서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라고 하셨어요.”
이 아이는 바보다.
바보스럽게도 부모 말을 너무 잘 듣는 아이다.
그게 또 귀엽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럼 이 문이라도 좀 열어봐. 안 답답해?”
보름이다. 이 아이와 만난 지 벌써 보름인데,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는 게 말이나 되나?
하지만 고집 있는 녀석이다.
이미 몇 번을 시도해봤지만 늘 실패로 끝이 났으니. 이제는 시도조차 해보기 두렵다.
아니. 그전에 시간 낭비이다.
“좋아. 그러면 이름이라도 알려주던가.”
“어머니가 모르는 사람한테 이것저것 알려주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름과 얼굴을 모를 뿐이지.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
잠시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보름 동안 쌓인 경험으로 판단하건대. 지금 그녀는 생각 중이다.
“이름이 뭐야?”
나는 한 번 더 물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대답할 차례이다.
“……소유아요.”
“소유아?”
사실 이름을 물은 건. 딱히 부를 호칭이 없어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런 특별한 정보를 얻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설마 소월가의?”
“아. 네. 아버지께서 소월가의 가주세요.”
아버지 쪽을 피하려다 그 딸을 만나게 되다니.
특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나는 지금까지 도망치느라 잔뜩 민폐를 끼친 상대의 딸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 *
“몇 달 정도 걸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빨리 만나 뵐 수 있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요즘 아버지께서 고민이 있으신 거 같아서 걱정이에요.’
그런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그 고민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걸 알게 되는 날에는 미움받을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과연. 그 아비에 그 딸이다.
고집도 이런 고집이 없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유아는 부모님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녀의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상냥하고 멋진 분들이었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
처음 만난 소유란은 내가 생각했던 이들과 달랐다.
“기분이 나쁘실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어린 딸아이가 있어서 그런지, 시하루님 역시 제 눈에는 어린아이로 보이기는 합니다.”
감히 왕위를 물려받을 왕세자를. 대놓고 어린아이 취급하는 사람이었다.
그와 항상 같이 다닌다는 유월가의 가주. 하림 역시 그러했다.
처음에는 괘씸했지만. 그들과 자주 만나다 보니 오히려 편해졌다.
단순히 딱딱한 군신 관계에서 벗어난. 마치 친척 같은 느낌.
소유란은 말이 많은 아저씨였고, 유월 하림은 그에 비하면 무뚝뚝했다.
하지만 이따금씩. 말할 때는 확실하게 하는 성격이었다.
언젠가 소유란이 하림이 아들에게 꼼짝도 못 한다고 놀려댔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럴 때면 하림은 가만히 있지 않고, 그가 딸 바보라는 등. 부인에게 잡혀 산다는 등.
정말 둘이 친한 사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서로 헐뜯기 바빴다.
“……예쁜가?”
“네?”
“소유란. 딸…….”
내가 유아와 만나고 있다는 걸. 그는 아직 모른다.
만난 지는 오래됐지만, 제대로 얼굴도 본 적 없었으니. 당연히 궁금했다.
딸 이야기에 소유란의 표정이 보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밝아졌다.
“우리 유아라면……. 엄청 귀엽죠. 나중에 분명 남자들이 줄을 설 거예요.”
밝아졌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제 딸과 결혼하게 될 남자를 향한 분노(?)가 분명하다.
‘감히 내 딸을!!’
“……그럼 나중에. 나중에 내가 좀 더 자라서. 제대로 된 왕이 되면…….”
“아무리 저하라고 하셔도 안 됩니다.”
아직 말도 다 안 꺼냈는데…….
그걸 또 눈치를 채고 단번에 안 된다고 말하는 소유란 때문에 기운이 빠졌다.
“……모르는 이상한 놈에게 줘버릴 바에야 나을 거 아니야.”
“글쎄요……. 그러려면 아마 많이 노력하셔야 할 겁니다. 제 딸은 장난 아니거든요.”
지금 저게 ‘허락’인 것인지 아니면 ‘반대’인 건지 확신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아마 나는 이미 늦었다. 빠져나올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단 하나뿐.
무조건 잘 보여야 한다.
제대로 된 왕이 되자. 궐 안이 아닌 밖에서도 유아가 잘 볼 수 있도록.
한 사람한테만 잘 보이면 된다.
백성을 위해야 하는 왕의 다짐은 사실 이러한 불순한 이유에서 나왔다.
물론.
그러한 내 계획은 금세 물거품이 되어, 그 날의 다짐 따위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지만.
* *
“아. 안녕하세요~.”
오늘도 늘 그렇듯. 같은 시간에 유아를 만나러 가는 길.
항상 그 자리를 지키는 가마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머니와 비슷해 보이는 연령대의 여인은 나를 향해 밝게 인사를 하고 있다.
차림으로 보아하니 궁녀는 아니었고, 그렇다고 누군가의 시녀도 아닌 게 분명했다.
아니. 다른 건 다 상관없다고 치고.
‘어떻게 이 장소를 알고 있는 거지?’
평소 궁녀들도 잘 안 오는 장소인데.
게다가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반응.
“아~. 유아는 지금 자요. 어제 밤늦게까지 책을 읽은 모양이더라고요. 정말…….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말이 많은 여자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혼자서 말하고 있었다.
확실히 활발하고 재미있는 분 같았지만. 유아만큼은 즐겁지 않았다.
표정에 드러난 건가.
“이런. 제가 너무 들떠서 그만……아. 사실은 이걸 드리려고요.”
달랑 종이 한 장이 내 손에 들어왔다.
“유아 이름?”
“어제 남편에게 들었어요. 우리 유아와 꽤 친하신 거 같은데……. 혹시라도. 나중에 말입니다. 아주 나중에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아, 남편에게는 비밀입니다? 분명 울 테니까요.”
“이걸로 뭘 어쩌라는 거지?”
“왠지 저하와는 특별한 인연으로 묶여 있는 거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제 예감이 틀리지 않는다면. 아마 훗날 그것이 크게 도움이 될 거예요.”
이깟 종이가 큰 도움이 될 거라니?
“……하지만. 저와 한 가지 약속을 해주셨으면 해요.”
“약속?”
“……만약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흘렀을 때. 저하께서 유아가 아닌 다른 분을 마음에 두게 되는 날이 오면. 그 종이는 바로 없애주셨으면 좋겠어요.”
잘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바로 없애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이지?
그녀의 말을 확실하게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손에 쥐어진 하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단지 이름이 적혀 있는 종이에 불과한데 무언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아주 오랫동안. 손에서 놓지 못할 거 같은. 소중한 느낌이.
“내일도 올 거지?”
“음……. 죄송해요. 어머니랑 아버지랑 다 함께 다른 지방에 가기로 했거든요. 당분간은 이곳에 없을 거예요.”
밤을 새웠다더니. 피곤함 때문인지 들려오는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그럼 할 수 없지. 돌아와서 보자.”
“돌아오면 같이 꽃구경이라도 해요.”
“가마에 탄 채로? 그건 불가능할 텐데?”
설마 내가 가마를 지고 돌아다녀야 하는 건 아닌가 살짝 걱정되어 물었더니, 안에서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에 올 때는 두 발로 걸어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 진짜?”
만난 지 석 달이 다 되어가던 날의 약속이었다.
그러고 보니 신기했다. 물론 처음에는 그녀가 어떻게 생겼을까 아주 많이 궁금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마음속에서 그것은 상관없지 않겠느냐 말이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늘 그렇듯 인사를 나누고. 늘 그렇듯 궐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나는 기다렸다.
삼일 뒤.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다.
그것은 두 발로 걸어오겠다는 유아도 아니었고, 그녀가 타고 있던 가마도 아니었다.
단 한 장에 종이에 적힌.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바로 전날. 받은 종이는 아직도 내 손에 쥐어져 있다.
여전히 얼굴은 모른다. 오직 기억하는 건 이름과 어렴풋이. 가마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뿐이다.
더 이상 만나지 못할 사람이었지만. 나에게 그녀의 이름이 적힌 이 종이는 둘도 없이 소중한 보물이 되어버렸다.
……그나저나. 어른 말 들어서 나쁠 거 하나 없다더니.
* *
“……다시 생각해보니 괘씸하네.”
“뭐 때문에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좀 놔주세요.”
제 딴에는 끌어안는다고 생각하는 거 같지만, 유아는 고통스러웠다.
아니. 안기는 거 자체는 좋아하지만 꼬집는 건 싫어한다.
“나만 슬퍼하고 나만 기다린 거잖아! 너 가만히 있어. 아직도 분이 안 풀리니까.”
“그러니까. 뭘요?”
“……아직은 말 안 할 거야. 물론 결과적으로는 좋은 결말이지만, 왠지 내가 너무 비참해져.”
유아를 울리려고 작정이라도 한 건지 평소라면 이쯤에서 그만두었을 시하루가 끈질기게 유아를 괴롭히고 있었다.
‘애정표현’이라 우기고 있지만. 지나가던 누가 봐도 그것은 일방적으로 유아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주위의 아무 궁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던 유아의 귀에 구세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여전히 시하루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진 데에 비해, 그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어졌다.
“아. 또 왔어. 저 방해꾼.”
즐거운 시간도 이제 끝이라는 듯. 지원군의 등장에 잠시 얌전해진 유아를 꼭 끌어안고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그리 길지 않은 보폭으로 언제 올라온 건지 모를 작은 남자아이 하나가 어느새 그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시율. 이제 막 4살이 된 그들의 아들이다.
“또 어머니 괴롭히신 거죠?”
“저 녀석은 내가 너랑 손만 잡고 있어도 저 난리더라. 얄미워.”
괴롭히지 말라는 아이의 앞에서 대놓고,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유아의 머리를 턱으로 콕콕 찍는 것으로 일부로 상대를 자극하는 걸 보면 그 역시 애나 다름없다.
꽤나 아플 텐데 의외로 얌전히 있던 유아가 그의 품 안에서 맑은 웃음소리를 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말했죠? 제 편이라고.”
언젠가 아들은 제 편이라고 말한 기억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래. 나 혼자 외로워.”
그 작은 손으로 어떻게든 둘을 떨어뜨려 보겠다고 달려드는 아이를 한 손으로 간단하게 제압해 버리는 시하루가 궁금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율. 이 아버지랑 어머니 중에 누가 더 좋아?”
“어머니요.”
조금의 망설임조차 없다.
똑 부러지는 아이의 대답에 시하루가 툴툴거렸다.
“하여간에 귀염성이 없어.”
어머니를 도우러 왔다가 도리어 똑같이 잡혀버린 율이 시하루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무리였다.
“뭐. 괜찮아. 난 다 사랑하니까.”
말은 괜찮다고 하지만, 어딘가 씁쓸해 보인다.
잠시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던 그가 마치 간절한 소원을 빌 듯 말하길.
“네가 이번에는 딸이라고 했지? 딸은 좀 내 편이었으면 좋겠는데.”
“아니요. 딸도 분명 제 편이에요.”
시하루의 작은 소망에 유아가 절대 양보 못 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에 욕심도 많아.”
“그러니까 저한테 잘 보이세요. 저는 꽃따리 오빠 편이 되어 줄 수도 있어요.”
“그것 참 영광입니다. 마마.”
꾸벅 인사하는 시하루에 여전히 그의 품 안에 안겨 있던 유아와 율의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들을 멀리서 바라보던 궁인들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고,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씩 했다.
“정말, 예전의 그 얼음판 같던 궐이 맞나 싶다니까요……. 앞으로 더더욱 밝아지겠죠?”
“그럼요. 이제 곧 두 번째 꽃도 태어날 테니. 더더욱 궐 안의 꽃향기가 짙어질 거예요.”
시하루의 미소를 바라보고 있던 이들이 웃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던 과거의 그를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자고로 남자는.”
자리에 멈춰 행복해 보이는 가족의 모습을 바라보던 이들 중.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한 마디에 모든 이들이 피식 웃으며 이구동성으로 뒤를 이었다.
“여자 하기 나름이라고들 하죠.”
*
언제부터인가 천유국에는 꽃들이 있다.
그 꽃들은 향이 짙어, 모든 이들을 사로잡는다고 한다.
궁 안에도 꽃이 핀다.
그리고 그 꽃의 향기에, 얼어붙었던 천유국의 심장이 녹았다고 한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 꽃들의 향기가 이 천유국에 피어나길 바라며.
[ 궁 안에 잠들어 있는 꽃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