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十五花 * 소유아 이야기 (3)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우리의 약속은 어디로 갔을까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잠깐 보러오는 거 정도는 괜찮잖아.”
얼굴에 그의 방문에 대한 환영이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툴툴거리는 그녀였다.
그런 색다른 환영인사를 받는 것이 이제는 익숙해진 시하루가 그녀의 볼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괜찮아?”
사실 시하루는 어제 유아가 하루 종일 궐 밖을 끌려다녔다는 말에 걱정되어 아침 일찍 찾아왔던 것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무리 타국의 사신이라고는 해도, 너무 기분 맞춰주려고 무리할 필요는 없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니요. 무리할 때는 해야죠.”
딱 부러지게 말하는 그녀에게 더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하루가 피식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걱정하지 말라니까요. 이래봬도 한 체력 하니까요!”
* *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
분명 시하루 앞에서 큰소리친 그녀였다.
하지만 그 말과는 다르게, 아직 오전이었지만 유아는 이미 체력이 다한 상태이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분명 어제 막 하휘도에서 왔다는 사신. 사유와 친해졌다. 그리고 천유국에서 유명한 먹거리들을 먹어보고 싶다는 이유로 그녀는 오후 내내 끌려 다녀야 했다.
정작 교역문제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쓸데없는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고, 내일은 제대로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지 싶었는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오늘도 이렇게 지나가는 건가…….”
오늘 아침. 어떻게 안 건지 모르겠지만, 궁녀가 기상을 알리러 오기도 전에 유아의 기숙사 방을 찾은 사유 덕분에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그녀였다.
아니, 그것까지는 좋다고 치고. 분명 어제로 끝이 났을 천유국 맛집 탐방을 다시 시작하자는 사유의 말에 유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물론 그녀 역시 ‘먹을 것’을 좋아했고, 그것에 대한 욕심도 엄청났지만. 늘 공부와 일이 먼저이다.
이렇게 해야 하는 것들을 다 제쳐놓고 맛집 탐방이라니!
하지만 그녀는 아주 조금의 반항도 할 수 없었다.
괜히 사신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가 교역문제에까지 영향을 끼치면 큰일이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최대한 어울릴 수 있을 때까지 어울려 줘야지.’
한계가 올 때까지만 참자.
그러고 보면 나쁜 일만은 아니지 않은가? 이것은 그저 고문일 뿐이다. 맛있는 고문.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우와. 이 가게 음식 정말 맛있네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는 언니가 추천해준 곳이에요. 저도 처음인데 정말 맛있네요.”
입속으로 들어오는 맛깔 나는 반찬들을 즐기는 유아의 머릿속에서 이미 일과 공부는 잊혀진 거 같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밥을 먹었으니 다음은 간식!”
유아가 밥 반 공기를 먹고 있을 때, 두 공기를 뚝딱 해치워버리고서 더 먹으러 가자니. 유아 역시 먹을 걸 좋아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다.
그녀는 진정한 식신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렇게 맛있는 건 많은 사람이 먹어봐야 할 텐데 말이에요. 이 가게는 손님이 적네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왜 그럴 거라고 생각하세요?”
뜬금없이 문제를 내다니? 한번 맞춰보라는 건가?
문제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아가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좋은 재료를 쓰는 만큼 가격이 높아졌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매출이 적은 건 또 아니에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럼 왜 다른 가게들은 좋은 재료를 손에 넣지 못했을까요?”
계속해서 질문하는 사유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유아는 곧 그녀가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 눈치챘다.
유아는 내색하지 않으며, 그저 자신의 앞에 놓인 차를 마시며 여유 있게 대답을 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재료구매 경쟁에서 밀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좋은 재료인 만큼 비쌀 테니까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래요. 경쟁. 그게 문제에요. 경쟁이 있는 곳에, 평등이란 존재할 수 없어요. 우리나라는 우리만의 문화와 방식이 있죠. 지금 다른 나라들이 탐내는 약초들. 우리나라에서 약초상은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요. 하지만 교역이 시작되면 약초상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겠죠. 그리고 계절별로 채집되는 약초의 수는 한정되어 있어, 수출까지 하면 국내 약초 가격이 오를 거예요. 살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겠죠.”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게 바로 그것이라는 듯. 사유는 눈을 반짝이며 빠르게 말했다.
하지만 유아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렇다면 그 나라 왕은 무능력한 왕이군요. 심지어 바보에 겁쟁이.”
일개 대신 따위가 제 나라 왕을 모욕하고 있는데, 사유는 침착해 보였다. 아니, 오히려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어제도 제 입으로…….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뇨아뇨. 그 녀석은 바보니까. 아니지. 오히려 그런 걸 더 좋아한달까요? 참고로 우리 왕은 취향이 독특해요.’
그녀 역시 아무리 자신이 모시는 왕이라고는 해도 대신일 텐데……. 친구라던가. 왕과 특별한 관계일지도.
유아가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사유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들려달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존재하는 게 왕 아닌가요? 아예 발전을 포기하기보다는 그로 인해 생기는 피해를 축소시키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거 아닌가요? 새로운 시도로 인해 생긴 부작용이 두렵다고 피하는 거잖아요.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도전에는 늘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에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휘도는 다른 무엇들보다 평등을 우선시하는 국가라고 듣기는 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도전을 피하고. 모든 경쟁을 없앤다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어제 하루 종일 떠들던 모습이 거짓인 것 마냥, 조용히 앉아 유아의 말을 경청하던 사유는 다 마신 찻잔을 옆으로 밀어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럼 이랑은 노력만 있으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에 완벽한 평등이 존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니요. 그건 불가능하죠.”
곧바로 ‘아니다.’라고 대답한 유아 때문에 사유는 멈칫했다.
한바탕 우겨보려는 태도로 말할 때는 언제고, 자신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잠시 얼이 빠져 표정관리를 하지 못한 사유를 바라보던 유아는 씨익 웃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지만 평등에 ‘가까운’ 사회는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미 분위기는 유아 쪽으로 넘어간 상태.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난 왕이란 백성들 모두가 자신의 나라를 좋아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가 똑같은 눈높이인 평등한 위치가 있어야 한다 생각하고.”
유아의 기에 눌린 탓인지 어쩐지 기가 죽은 듯 들려왔다.
하지만 유아는 더 이상 몰아붙이지 않았고 오히려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음. 그건 견해의 차이겠네요. 아. 아까 바보라고 한 거 취소할게요. 의외로 멋진 왕일지도 몰라요. 겁쟁이는 취소할 생각 없지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우리 왕이 멋지다고 생각해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백성들을 생각해주잖아요. 자국의 고유문화에 신경도 쓰고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는 백점짜리 왕이에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
어느 정도는 자신도 이해하고 인정한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유아였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해두겠다는 듯 그녀는 탁자를 손을 탕! 내려치며 마지막으로 주장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지만 이건 확신할 수 있어요. 도전과 경쟁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는 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럼 이랑은 그것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평등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평등은 출신과 성별 등에 인생이 좌지우지되지 않는 거예요. 누구나 위로 올라가는 사회가 아니라 누구나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사회예요. 기회가 중요하죠. 천유국의 상징이기도 한 서하연은 그것을 위한 작은 노력이에요.”
이 나라 사람이 아니더라도 천유국의 서하연은 워낙 유명해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 교육 정신을 배우기 위해 직접 천유국으로 사신을 보내는 이들 역시 많았다. 아무리 하휘도가 작은 나라라고는 해도, 서하연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서하연에 대해 생각하느라 잠시 말이 없는 사유를 아직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유아는 최대한 그녀를 이해시킬 수 있을 예를 생각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까 이런 음식을 못 먹는다고 했죠?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떠세요? 경쟁을 최대한으로 배제한 하휘도의 백성들은 이런 음식은 아예 못 먹는 거고, 천유국 백성들은 모두가 이 음식을 먹어 볼 ‘기회’가 있는 거예요. 먹고 안 먹고는 개인별 노력에 달렸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유아는 다시 자리에 앉아 남은 다과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둘의 탁자에는 그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고, 사유는 뚫어져라 말없이 유아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큭’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은 유아의 눈에는 웃고 있는 사유가 보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냥 꼬맹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바른말을 해, 날 많이 놀라게 하네요.”
‘꼬맹이’라는 말이 심각하게 거슬렸지만, 최대한 거북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유아는 일부러 찻잔을 높이 들어 차를 마셨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번 천유국에서 뽑은 대신은 영리하네요. 그리고 아주 특이해요. 겁도 없고 말이에요.”
뜬금없는 칭찬에 유아는 당황스러웠다.
‘꼬맹이’라는 말에 상했던 기분이 짤막한 칭찬으로 인해 서서히 풀려 그것은 곧 표정으로도 슬슬 드러났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보통 ‘서궁후’라는 이름을 들으면 바로 인상부터 찌푸리던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알아요. 꽃따……. 아니, 전하께서 엄청 특이하고 이상하신 분이라고 하셨거든요.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죠.”
자신은 준비성이 좋다고 말하고 싶은 건지 괜히 우쭐해하는 유아였다.
사유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머릿속에서 어떤 것을 기억해 내기 위해 인상을 찌푸렸고, 곧 어렴풋이 어떤 이름을 떠올렸다.
“아……. 시하루.”
“어? 꽃따리 오빠를 알아요?”
너무도 순식간에 어느 말이 지나갔지만. 사유는 순간 자신이 정상적이지 못한 걸 들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어. 아주 예전에 하휘도에 오신 적이 있었거든요. 유아와 같은 이유로. 교역 문제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전하께서는 그런 말 한 적 없었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아는 생각에 잠겼다.
사유를 만나러 가기 전. 분명 그가 말했다.
‘난 지금까지 그 녀석 목소리를 들어본 적조차 없어. 심지어는 얼굴도 제대로 본 적이 없어.’
그런데 사유는 하휘도의 왕 서궁후와 시하루가 만난 적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뭐지?
“아.”
다시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그때 그와 그녀가 나눈 대화의 어떠한 부분이 말이다.
정확하게는 시하루. 그가 하휘도의 왕과 제대로 만나본 적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한 어떤 말이.
‘하휘도의 왕. 서궁후. 그 녀석은 정상이 아니야.’
‘걱정하지 마세요. 단련됐으니까.’
‘아니. 그 왕은 미친놈이야. 대화가 안 통하는 놈이라고.’
‘차근차근 시도해보면 대화 정도…….’
‘아니. 그게 아니라. 난 지금까지 그 녀석 목소리를 들어본 적조차 없어. 심지어는 얼굴도 제대로 본 적이 없어.’
이상하다. 너무 이상해.
분명히 ‘대화가 안 통하는 놈’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만나 대화를 시도한 적이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럼 둘은 정말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는 건가?
아니. 만났건 안 만났건.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왜 나한테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지 않은 거지?
“전하는 어땠어요? 얌전히 하휘도만 둘러보고 돌아갈 성격은 아닐 텐데?”
“맞아요. 거의 하루 종일 서궁후와 싸우기만 했어요.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었고 의견 차이가 컸거든요.”
재미있는 일이 생각났다는 듯 사유가 피식피식 웃으며 말하자, 유아는 좀 더 자세히 들려달라는 눈으로 바라봤다.
“하휘도에 머무는 내내 거의 밖에 나가 돌아다니기나 바빴죠.”
정작 일을 하러 가서는 관광을 하느라 정신없었다는 말에 슬슬 유아의 화가 끌어 오르기 시작했다.
과연. 왜 그녀에게 자신이 하휘도에 직접 갔었다는 말을 하지 않은 건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가 떠나는 날. 뭐라고 하셨는지 아세요?”
“마지막까지 한바탕 했나 보죠?”
한 번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사람이면 끝까지 싫어하는 성격인 시하루를 떠올리며, 유아가 말했다.
그러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던 사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 나라 꽤 괜찮네.”
응?
“배웅을 위해 나섰던 궁후는 비꼬는 거냐고 화를 냈죠. 그런 그에게 천유국의 왕이 말하더군요. ‘나 역시 무슨 신도 아니고. 앞으로 일어날 폐해에 대해 잘 대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없어. 그런 의미에서 이 나라, 나름대로 괜찮네.’……라고.”
교역 성사시키러 간 인간이 오히려 그 나라에 칭찬을 늘어놓고 왔다는 말이 된다.
유아는 이 일이 끝나고 다시 여유로운 생활이 돌아온다면, 언젠가 하루 날을 잡아 시하루에게 교역 성사를 위한 마음가짐과 방법에 대해 강의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아니. 그것보다도 우선은!
‘잘 들어. 부부 사이에는 거짓말하는 것도 물론 안 되지만, 해야 하는 말을 숨기는 것도 안 되는 거야. 알겠어?’
본인이 그렇게 말해놓고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이거 억울해서 그냥은 못 넘어갈 일이다.
앞에다 앉혀놓고 그때 그가 한 말을 똑같이 해주리라!
혼자 분노하느라 바쁜 유아의 변화무쌍한 표정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던 사유가 큰 소리로 웃었다.
“그 왕에 그 신하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은 그 왕과는 정반대이네요. 아주 재미있어요.”
그제야 사유의 존재를 깨달은 유아가 재빨리 제정신으로 돌아와 어색하게 웃어넘기려고 했다.
“그나저나 천유국의 왕이랑 친한가 봐요? 말하니까 얼굴이 활짝 피네. 보통의 군신 관계가 아닌 거 같아요.”
“음……. 보통의 군신 관계는 아니에요. 아마도.”
군신 관계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보다는 아무래도 부부 사이라고 말하는 편이…….
하지만 당분간은 제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으니, 군신 관계로 해두자. 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조금 많이 특별한 군신 관계로.
“역시. 꽤나 총애를 받고 있는 모양이네요. 영리해서 그런가? 왕이랑 따로 알고 지내는 사이인가요? 친해요?”
“네? 아~. 엄청 친해요.”
무려 부부 사이니까요.
유아가 활짝 웃으며 말하자, 사유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흐음……. 그 말을 들으니 이상하게 기분이 별로네요…….”
사유의 말에 유아는 당황스러워했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기분이 상한 거지?
순간 자신이 말실수를 한 건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이 한 말을 되돌아봤지만, 그렇게까지 무례한 부분은 없었던 것으로 결론을 냈다.
기분이 별로라 말하고 있는 사신에게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몰라 고민하던 유아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쳐주는 것을 선택했다.
“어……음. 기운 내세요.”
유아에게 격려의 말을 들은 사유는 어이가 없었던 건지 피식 웃어버렸다.
“어제오늘 계속 밖으로 끌고 다녀서 미안했어요.”
“아. 설마 일부러 그런 거였어요?”
유아의 얼굴이 ‘네가 감히 내 시간을 낭비하게 하다니!’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사유는 여유로워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무시했다.
“귀로 듣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사실은 혼자 돌아다닐 생각이었는데 정말 다행이네요. 당신을 만나서.”
“……사유, 어딘가 이상해요.”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갑자기 사과해온 탓일까?
유아는 어제의 그녀에게서 느끼지 못한 어느 분위기를 느꼈지만, 그냥 기분 탓이겠구나 하고 넘어갔다.
“이랑이 말한 서하연에 대해 흥미가 생겼는데. 내일은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래요?”
“서하연이요? 물론 좋지요~. 백문이 불여일견! 그럼 내일 직접 가볼래요?”
서하연이라는 말에 유아의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빛나기 시작했다.
“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 아니었나요? 난 그렇게 들었는데…….”
“아. 저는 서하연의 꽃이어서 권한이 있거든요. 그리고 잠깐 정도는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 *
어딘가 답답해 보이는 표정의 사유가 궐의 입구에서 유아와 헤어져 자신의 방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
“아. 이제 왔어? 빨리 왔네. 그런데 왜 하필 자네야.”
사유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게 분명해 보이는. 방문 앞에 서 있는 어떤 남자를 향해 말했다.
화가 나 보이는 남자가 사유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더더욱 인상을 찌푸리며 꼬고 있던 팔을 풀었다.
“먼저 가버리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것도 혼자.”
그의 말에 사유는 또 잔소리를 들어야 하느냐는 등을 중얼거리며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아직 자신이 할 말은 다 끝나지 않았다는 듯 남자는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라 들어오며 계속 말했다.
“어디 가실 거면 훌쩍 떠나지 마시고. 말씀 좀 하고 가시라고 몇 번을 말씀드려야…….”
“편지 남겼잖아.”
“하아……. 뭐, 됐습니다.”
잔소리에도 꿈쩍 않는 사유의 태도에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방 안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뭐 이미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짚고 넘어가면 뭐하나……. 라고 생각한 그는 곧 사유를 꾸짖는 걸 포기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포기 못 하겠다는 표정이다.
“……그나저나 또 그런 차림으로…….”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좋잖아.”
또다시 시작되려는 잔소리의 기운을 감지한 사유가 먼저 선수를 치는 것으로 남자의 입을 막았다.
“안 그래도 갈아입으려고 했어. 쉴 때까지 이 차림으로 있는 건 나 역시 불편하니까 말이야.”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아 보이는 남자를 강하게 한 번 흘겨본 사유는 겉옷을 훌러덩 벗어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작은 칸으로 나뉘어 있는 공간으로 걸어 들어갔고, 곧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계속 그런 차림을 돌아다니셨다가 들키기라도 하시면 나라 망신이라는 걸 잊지 말아 주세요…….”
“알아. 알아. 조심할게.”
“또한, 원래 오기로 한 사신 대신 이렇게 직접 사신 행세를 하시는 것 역시 들켜서는 안 됩니다…….”
“그래그래.”
“좀 진지하게 들어 주세요……서궁후님.”
그의 말을 끝으로. 옷을 다 갈아입은 건지 시야에서 사라졌던 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긴 머리를 묶은 그는 확실히 예쁜 얼굴을 갖고 있었지만, 분명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
“나 진지한데? 아. 맞다. 그러고 보니 할 말이 있는데.”
“안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밖으로 나온 그에게 곱게 접힌 다른 윗옷을 건네던 남자가 걱정된다며 말했다.
하지만 사유란 이름을 썼던, 본명은 서궁후에 사실은 남자였던 그의 입에서 나온 건 아주 의외의 말이었다.
“나도 왕후 하나 두는 게 어떨까?”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돌아온 건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반응이다.
놀란 듯 여전히 멍하니 서 있는 남자의 반응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그였지만,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떠올린 듯 곧 그의 표정이 살살 풀렸다.
“아주 재밌는 애를 발견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