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궁안에 잠들어 있는 꽃-39화 (39/44)

四十花 * 꽃의 이름을 아는 자 (7)

“무슨 일로 부르셨죠?”

얼마 전. 막무가내 간택 전이 끝이 나고 이제 내일이면 진유한의 근신이 끝나 그가 궐에 올 것이다.

안 그래도 제 딸이 간택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에 잔뜩 분개해 있을 텐데 그것에 대비할 시간도 모자라는 이 마당에 이리 차나 마시자고 자신을 부르다니.

“이신에게 들었습니다. 희수궁의 보수를 위해 잠시 동안 유아의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고요…….”

그 말에 시하루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신…….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어!

희수궁이 보수 중이라는 건 사실이다.

이제부터 유아가 머물 곳이었으니 그것에 맞게 새로 단장을 하겠다는 의미에서였고, 겸사겸사 희안궁도 고칠 생각이었다.

희안궁은 처음부터 귀족 집 영애들이 머무는 궁이 아니었다.

희안궁은 그의 선선대 왕께서 만든 궁으로 후궁이 머무는 곳이었다.

하지만 시하루의 아버지이신 선대왕께서 서하연의 삼화였던 대비마마와 혼인을 하면서부터 필요 없는 궁이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시하루에게도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내버려두는 건 쓸데없는 공간낭비였으니 이를 어떻게 활용할지도 고민이다.

“희안궁에 방이 많이 비었다던데…….”

제 아버지가 오기를 기다리며 이를 갈고 있을 무서운 여인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짐을 싸 떠났기 때문에 더 이상 희안궁에서 자리가 부족하다는 우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짧은 희수궁의 보수기간 동안 유아의 거처를 그곳으로 하는 게 어떠냐는 대비의 질문에 시하루는 고개를 저었다.

“거기는 악한 기운이 많아서 안 됩니다.”

여기서 그가 말한 ‘악한 기운’이란 ‘월향’을 뜻하는 것이다.

여우 굴에 유아를 보낼 수는 없었다. 물론 둘이 붙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혼자 중얼거리며 두 여인이 대결을 펼쳤을 때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시하루이다. 반면, 그런 아들을 바라보던 대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그럼 영희궁…….”

“너무 멀어서 안 됩니다. 그리고 유아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이 못 됩니다.”

아니. 언제부터 제가 왕후의 공부환경에 신경을 썼다는 건지…….

“……그럼 듣자하니 제2의 집과도 같다는 유월가(家)…….”

유월가의 ‘유’자 하나가 나오기 무섭게 시하루가 인상을 썼다. 떠오르고 싶지 않은 인물을 떠올렸을 때 나올 법한 표정이다.

“그곳에는 좀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가 살고 있어서 안 됩니다. 위험해요.”

“크흠……. 그럼 궐 안에 있는 예비실은 어떻습니까? 다른 나라에서 귀한 손님이 오실 때 내어드리는 방 말입니다. 그곳의 시설도 아주 좋습니다만.”

“보안이 철저하지 못해서 안 됩니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그렇다면 뭘 어쩌겠다는 건지…….

자기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고 있는 대비로서는 어떻게든. 이랑이 머물 처소를 구해야만 했다.

“……그럼 이 대비전은 어떻습니까? 이곳에도 빈방은 많습니다. 시설 역시 좋고, 보안도 철저하지요. 악한 기운도 없고, 사나운 호랑이도 안 살고. 심지어는 중앙궁과 멀지도 않고, 공부하기도 좋을 거 같은데요?”

대비의 본심이기도 했다.

일도 잘 풀렸겠다. 시하루가 마무리를 하는 동안만이라도 유아가 자신의 곁에 머물며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토를 달던 시하루가 이번에는 조용하다. 할 말을 잃은 그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대답했다.

“이곳은 공기가 안 좋아서 안 되겠습니다.”

그의 말도 안 되는 대답에 대비는 너무나 기가 찼는지 하! 하고 숨을 내뱉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결국 그녀가 선택한 건. 제 아들을 비꼬는 말투였다.

“우리 아드님께선 좋으시겠습니다? 빈방도 많고, 시설도 좋고, 보안도 철저하고, 악한 기운도 없고, 사나운 호랑이도 안 살고, 멀지도 않고, 안전하고, 공기도 맑은 곳에 지내셔서 말입니다!”

발악과도 같은 외침에도 시하루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태도에 오히려 분한 듯 씩씩거리는 대비를 향해 그가 웃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귀여운 부인을 얻은 거 아닙니까.”

싱긋 웃어 보이기까지 하는 저 남자가 진정 자신의 아들이 맞는가. 당장 피 검사라도 해보고 싶은 대비이다. 전부터 이상했지만 최근 들어 장난 아니야!

“후우……. 그럼 그동안 유아는 어디서 지내게 할 생각이십니까?”

대비가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해 물었다. 그러자 그만 돌아갈 생각인지 방을 나서려던 시하루가 걸음을 멈추었다.

“흐음……. 할 수 없지요.”

한숨을 쉬며 문을 붙잡은 그가 고개를 돌리며.

“본의 아니게 제 방에서 지내야겠지요.”

* *

“저 사람들 뭐하는 거예요?”

과제를 하던 유아가 소란스러운 밖을 보고 창문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궁인들이 짐을 하나둘 밖으로 끄집어내고 있었다.

“희수궁 보수가 끝나기 전까지 네가 머물 곳이 없잖아. 할 수 없이 중앙궁으로…….”

“아. 저 신입관리기숙사에서 지내기로 했어요.”

시하루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유아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순간 자신이 이상한 소리라도 들었다는 듯 그가 당황해 하더니 그녀의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의 거처를 정하는 문제로 대비와 시하루가 다툼을 벌인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공부도 하고 좋지요. 뭐. 이미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이신공이 추천해주셨거든요.”

이신! 네놈의 짓이냐!

어머니의 뜻도 간신히 꺾어냈는데, 설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신이 벌써 손을 써뒀을 줄이야.

다 된 마당에 갑자기 등장해 코를 빠뜨리는 이신의 죄는 나중에 묻기로 하고.

일단 자신이 왕후라는 사실을 잊은 그녀의 굳은 의지 먼저 잠재워야 했다.

“아니. 네 궐이 떡하니 있는데 왜 거길 들어가?”

“나 신입관리교육 받아야 한단 말이에요. 시험만 통과하면 되는 줄 알아요? 천유국 전통인 과제 뽑기도 해야 하고 할 게 얼마나 많은데요.”

유아가 목록들을 들어 보이며 울상을 지었다.

시하루는 그녀가 정식으로 왕후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쁠지 몰라도 그녀에게는 해야 하는 일이 늘어난다는 의미였다.

그 종이를 받아든 시하루 역시 유아를 따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게 어디 있어.”

일정표만 봐도 알 수 있듯, 그가 그녀에게 알콩달콩한 신혼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언제는 보석과 장신구만 좋아하는 여인들은 싫다더니 차라리 그것이 나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사주면 그만이라지만, 유아가 원하는 건 차원이 다른 것이다. 배움의 길은 끝이 없다는데…….

자신이 만족하기 전에는 책을 놓지 않는 그녀이니 왠지 외롭고 쓸쓸한 삶이 예상되었다.

‘아니면 함께 공부하시라고요.’

곁에 있던 이안이 눈치를 보며 생각했다.

애당초 그의 아버지가 원하신 건 그것일 테니 말이다.

그는 기대되었다. 부부는 닮아간다고 했으니, 어쩌면 조만간 시하루가 유아의 공부병이 옮아 책을 붙들고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오늘은 뭐 할 거야?”

쌓여있는 책을 흘끗 바라보던 시하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부터 신입관리교육 일정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

“그런 게 있었나?”

평소라면 공부한다는 말에 두 눈이 빛이 났겠지만, 지금의 그녀에게 그 많은 일정은 무리였다.

“갑자기 잡혔대요. 이따 오라버니가 데리러 온다고 했어요.”

“고생하네. 힘 내.”

* *

“소월가의 가주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그의 성격으로 용케 근신기간을 잘 참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진유한은 타인의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특유의 무표정 가면이 산산조각이 나 벗겨져 있었다.

이제 이판사판이라는 뜻과 같았다.

그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월향은 단걸음에 희안궁에서 나와 중앙궁으로 걸음을 했다.

방 안으로 들어서는 진유한의 눈이 빠르게 유아를 찾아 헤매고 있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사실 이 자리는 시하루. 그가 유아 몰래 만든 자리였기 때문에 그녀 없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호랑이한테 말해두길 잘했어.’

시하루는 생각했다. 궐 안에 진유한이 왔다는 소식이 그녀의 귀에 들어가면 앞뒤 다 제쳐놓고 뛰어올 게 분명했다.

잠깐이나마 그녀를 붙잡아둬야 할 무언가가 필요했고 이신을 설득해, 없던 교육일정을 만들었다. 그녀가 눈치채지 않도록 호랑에게 빚까지 지며 말이다.

‘유아는 제가 붙잡아 둘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하시려는 일이나 잘 마무리 지으시죠. 아. 대신에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는 겁니다.’

안 들어도 되는 수업을 들어야 해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닐 호랑이를 위해 시하루는 최대한 이 담화를 빨리 끝내야 했다.

“오늘 그대를 부른 이유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겠지?”

“예.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는 모두 끝냈나?”

시하루의 재촉에 진유한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확실히 그가 밀리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는 이대로 쉽게 물러서지 않으리라.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저 역시 송구스럽지만. 아무래도 그 약속은 지키지 못할 거 같습니다. 전하.”

“누가 부녀지간이 아니랄까 봐, 하는 말이 똑같군.”

잔뜩 긴장해 있던 월향이 진유한의 말에 조심스럽게 웃는 게 보였다. 그것이 더더욱 마음에 안 든 시하루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시하루 그도 진유한이 약속을 지키겠다며 쉽게 물러설 확률은 낮을 거라 예상했다.

“간택되지 못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저 역시 전하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습니다. 원래 소월가의 후계자인 유아에게 이 자리를 돌려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가 시하루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아이가 소월가의 소유아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순간 짜증을 못 참은 시하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했지만 꾹 참았다.

“지금까지 죽은 줄로만 알았던 후계자입니다. 그런데 십 년 후에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서는 소월가의 소유아라고 하면 그게 사실인지 거짓인지 어떻게 압니까?”

스스로가 소유아라는 걸 증명해보라는 의미였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아무리 그것이 사실이라고는 해도 힘들다.

“왕후에게 소월가의 인장이 있다는 걸 잊었나?”

언젠가 유아가 대신들 앞에서 들어 보인 물건을 생각해보라며 말했다.

그것은 서하연의 꽃들에게 주어지는 새하얀 노리개였고, 그 고리에 작은 도장 하나가 매달려 있는 물건이었다.

“소월가의 인장은 저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진짜라는 걸 증명해줄 사람이 있습니까?”

그가 소월가의 인장을 본 적 없다는 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인장에 대한 도안만 봤기 때문에 찍혔을 때의 모습은 알아도 실제 인장 자체는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소월가의 인장을 복사할 수가 없었다.

본적이 없으니 그것이 진짜인지 확신할 수 없다고 우겨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 인장이 진짜라는 걸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그녀가 진짜 소유아라는 걸 증명할 방법은 있지. 들어오라고 해라.”

증명할 사람이 있다는 그의 말에 진유한이 긴장을 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세 명의 남자가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한 명의 백발노인이 등장하기 무섭게, 진유한은 백지장마냥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그대는 정말 오랜만이군. 아들에게 가주권을 물려줬다던데 잘 지내고 있는가?”

유아에게도 익숙하고 시하루에게도 익숙한 인물이 별로 기분이 안 좋은 듯 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렇게 부르지만 않으셨다면 더욱 좋은 노후를 보내고 있었을 텐데 말이죠.”

“미안하군. 하림.”

시하루는 생각했다. 그 호랑이가 왜 성격이 그래 먹었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네. 제 아비와 똑같잖아.

그렇다. 그가 바로 전 유월가의 가주이자 유시후의 아버지인 유월 하림이었다.

얼마 전에 유시후에게 모든 것을 떠맡겨놓고는 자신은 여유롭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느라 여념이 없는 그는 갑작스러운 시하루의 호출에 불만이 매우 많았다.

“뭐……. 유아의 일 때문이니까 온 겁니다만.”

그녀와 관련된 일만 아니었으면 두 번 다시 이 궐에 걸음 할 일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빨리 이 일을 마무리 짓고 싶은 시하루에게는 그의 투정이 들리지 않았다.

“소월가의 전 가주부부가 변을 당하시던 날. 후계자 소유아는 그대가 데리고 있었다고 들었다. 이게 사실인가?”

그의 말에 진유한이 소리 없는 경악을 했다. 분명 사건 현장에 그녀의 시신은 없었다.

운 좋게 살아남은 그녀가 주변 어딘가에서 살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 사방팔방으로 찾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설마 바로 옆인 유월가에서 은폐를 했을 줄이야.

놀란 진유한과 달리 유월 하림은 너무나도 침착해 보였다.

“예. 그들이 지방으로 내려가던 날 저녁. 여기 있는 시무형과 함께 열이 펄펄 끓는 모습으로 저희 집에 왔습니다.”

“시무형. 그 말이 사실인가?”

유월 하림의 바로 옆에 서 있던 시무형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원래 그날 유아님 역시 그들을 따라 지방에 내려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몸 상태가 나빠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도중에 그녀를 데리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다른 이들 중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또 있는가?”

“가주 대리 자격으로 빈 소월가를 지키고 있던 장로 몇몇이 알고 계십니다.”

“장로들이라니!”

그럴 리가!

장로들까지 이미 그녀가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진유한의 입을 다물 생각을 못 했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을 했다는 건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스스로 지방으로까지 내려가면서?

세 번째로 들어온 백발노인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가주님께서 사고를 당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뒤. 저희 역시 정신이 없었죠. 그런데 여동생이신 유희님의 죽음을 확인하고 오신 진유한님께서 유아님 역시 함께 돌아가셨다고 하셨습니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왜 그동안 말하지 않았던 거지?”

이미 진유한은 자리에 굳어버린 상황이라 묻고 싶은 게 많아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시하루 그가 먼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진유한님께서는 재빠르게 유아님 역시 사망처리로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이를 본 유월 하림님께서는 유아님을 숨기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하셨고. 서하연의 려화와 대비마마께서 개입하시게 된 겁니다.”

잠시 동안 방 안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하지만 항상 안부는 주고받았습니다. 저희가 대놓고 접근을 하면 소월가 쪽에서 눈치챌 게 분명하니 저희만의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 말에 진유한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럴 리가. 소월가의 장로들의 움직임이라면 한시라도 눈을 뗀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말이지?

“아마 유아님은 모르고 계시겠지만, 저희는 정기적으로 돌아가며 서화당의 유아에게 편지를 보내고는 했었습니다. 내용은 여러 가지였지만……. 늘 답신에 자신의 이야기를 쓰셨기 때문에 어떻게 지내시는지 정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말에 시하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유아에게 ‘적화유’라는 이름으로 편지를 주고받아 봐서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고민에 대한 제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그녀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던 도중. 서화당의 일을 도와주는 ‘수아’라는 아이에 대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그 아이를 통해 유월가와 대비마마와도 서신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주권을 받을 수 있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유아님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발설하지 말라는 대비마마의 명령에 따라 저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이상은 말이 필요 없겠지.

“더 할 말 있는가?”

“……제가 소월가에 바친 시간이 무려 십 년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계속 우기고 끝날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어쩌지……. 고민하던 그는 이미 자신의 손이 있는 종이를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것만은 안 쓰려고 했는데…….’

“안 되겠습니다. 지금 당장 귀족회의를 열어….”

“열든가 말든가 네 마음대로 해라. 이제 눈 하나 깜짝 안 할 테니까.”

“귀족들의 가주권 문제는 아무리 전하시라고는 하나 간섭하실 수 없는 문제입니다. 만일 저에게서 가주권을 강제로 빼앗아 가시는 날에는 다른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거 같지는 않을 거 같은데 말입니다.”

“……유아가 아직 가주권을 받지 않았으니 현재까지는 그대가 소월가의 가주라는 걸 부정하진 않겠다.”

그럼 그렇지. 진유한이 작게 미소 지었다.

가주권이란 게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 그것은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왕이 권력의 힘을 이용해 강제로 가주권을 빼앗아 간다면 그건 곧 귀족들에게 위협이 될 게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시하루가 짜증을 내면서도 간택전을 펼치게 해달라는 부탁까지 들어준 게 아닌가.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진유한이기에 그는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왕께서 나를 위협하고 있지만 사실 그는 어떻게 못 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가주권을 내려놓는 일만 없으면 된다.’

반면.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이미 다 눈치챈 시하루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웃기지만 그의 말이 맞기 때문이다.

지금 그가 가주권을 무리하게 빼앗았다가는 개인적인 감정으로 귀족들의 일에 끼어든 게 되고 만다.

어찌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그가 결국 ‘할 수 없지…….’를 중얼거리며 손안의 종이를 펼쳤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래도 전하와 약속한 게 있으니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하의 말씀대로 고향으로 내려가겠습니다. 하지만. 소월가의 본가 역시 제 고향이 있는 곳으로 옮기겠습니다.”

약속은 지켜야겠고, 가주권도 내려놓을 수 없으니 아예 고향으로 모든 걸 들고 내려가겠다는 말이었다.

왠지 곤란한 상황에 처한 거 같았지만 의외로 시하루는 침착했다.

“그래. 그렇게 한다면 내가 막을 수 없지.”

그의 빠른 인정에 진유한이 ‘이제 됐다!’라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방 안에 있던 다른 이들 모두 지금 제정신이냐는 표정으로 시하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전 본가 이전 문제로 바빠질 거 같사오니 이만…….”

“아. 잠깐. 소월가의 가주. 돌아가지 전에 그대가 주의해야 하는 게 한 가지 있는데…….”

괜히 말이 길어지기 전에 빠져나가려던 진유한이 다시 멈춰 섰다. 다 잘 끝났는데 왜 부르느냐는 그의 표정에 시하루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가주권 문제는 이미 해결…….”

“아니. 사실은 문제 하나가 더 남았더군.”

가주권과 상관없는 또 다른 문제가 남았다는 말에 진유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시하루는 아까부터 들고 있던 종이를 그에게 내밀었다.

“서하연의 려화에게서 받은 탄원서다.”

뜬금없이 여기서 왜 서하연의 려화가 나오는지. 게다가 탄원서는 또 뭐고?

“려화의 말에 따르면. 며칠 전부터 누군가가 감히 서하연의 꽃들을 감시하기 시작했고, 이를 은밀히 조사해본 결과 소월가의 가주가 연관이 되어 있다는 걸 알아냈다고 하더군.”

시하루가 친절히 탄원서의 내용을 읽어주자 진유한이 예상치 못한 문제에 당황해 했다.

이는 확실히 그가 시킨 일이었다. 며칠 전. 소유아가 서하연에 있을 거라 생각해 감시를 명했었다.

절대 들키는 일 없도록 주의하라고 했건만!

“표정을 보아하니 맞네.”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됩니까?”

“아니. 뭐 별문제는 되지 않지. 하지만 서하연의 꽃들을 멋대로 쫓아다니면서까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으니 려화가 화가 단단히 나서 말이지…….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고.”

도대체 뭘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건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소월가의 가주를 서하연을 기준으로 반경 10리 이내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려달라더군. 그렇지 않으면 유아를 내어줄 수 없다고 협박하기에 할·수·없·이 승인해줬어. 그냥 알아두라고.”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유한이 순간 당황해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10리라니! 그것도 반경 10리?! 아예 이곳으로 돌아오지 말라 이 뜻이군.

하지만 별문제 되지 않았다. 어차피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이었으니 상관없었으니까.

“이제 다 되었으니 이만 가 봐도 괜찮겠죠?”

“그래. 얼른 가봐.”

친절하게 배웅까지 해주는 시하루가 이상했지만, 이제 모두 끝났다는 생각에 그는 홀가분해졌다. 그리고 궐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을 때려는 순간.

“아. 반경 10리 안의 땅에는 있을 수 없는 거 명심하고. 이건 어명이야.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도록.”

“예에?!”

지금 장난하나.

땅을 밟지 말고 집까지 돌아가라는 말이었다.

기가 막힌 진유한과 달리 시하루는 여전히 침착해 보였다.

“아. 그래도 걱정하지 마. 그대가 소월가의 가주자리에 있는 한. 소월가 집은 그대의 소유니까. 개인재산까지 뭐라 할 수는 없지.”

지금 집까지 돌아가는 것도 문제가 있어 보이는 마당에 아예 집 밖에서 나오지 말라는 말.

게다가 고향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다시 나올 수밖에 없는데, 도대체 자신에게 뭘 어쩌라는 말인지.

“집까지 어떻게 돌아가라는 말씀이십니까?!”

따져 묻기 시작한 그에게 돌아서려던 시하루가 뭐 어려울 거 있느냐는 듯 간단하게 답했다.

“날아가던지. 순간이동을 하던지. 여러 가지 있지 않나. 내가 이런 것까지 일러줘야 하나? 그냥 알아서 요령껏 가.”

“전하!!!!!”

“려화의 편지를 보면 ‘진유한’이 아니라 ‘소월가의 가주’라고 쓰여 있으니까. 그 이름을 버리던가. 알아서 선택해.”

문 앞에 서 있지만 나갈 수가 없는 진유한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한 상황에 빠져버렸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걸 승인하시면!”

왜 그런 문서를 승인했냐고 묻는 그에게 시하루가 싱긋 웃으며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몰랐어?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엄청 잘하는 게 하나 있거든. 그게 또 이럴 때 빛을 보게 될 줄은 나도 몰랐네.”

웃고 있던 시하루가 자리에 굳어버린 진유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주 작은 목소리. 그리고 조금은 사납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하기를.

“이것보다 더 한 일도 할 수 있는데……. 어떻게, 내가 또 무슨 일을 할지 궁금하지 않나?”

진유한. 그가 잘못 생각했다.

귀족가문의 일에 끼어드는 것을 꺼려 할 거라 생각했지만 시하루 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디 해볼 테면 더 덤벼보라는 반응이었고, 언제든지 자신은 그에 대응할 자신이 있다는 의미로 들려왔다. 왕에게 덤벼 어찌 이길 수가 있겠는가.

“내가 귀족들을 무서워할 거라고 착각하지 마. 내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이제 자진 폐위문서밖에 없으니까.”

차라리 처음에 그냥 물러서라고 할 때 물러서는 게 더 나았을지도. 괜히 이렇게까지 맞서는 바람에 하나도 못 얻고 맨몸으로 쫓겨나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으니 말이다.

四十一花 * 마지막 꽃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예요?”

정자에 앉아 끝내지 못한 일을 마저 하고 있던 유아가 저 멀리서 걸어오는 시하루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잠깐 볼일이 있어서…….”

시하루는 그녀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변명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그러한 모습은 마치 남편의 바가지를 긁는 부인의 모습과도 같았고 그에 유아의 주위에 있던 궁녀들이 작게 웃었다.

“정말. 수업이 끝나고 와봤는데 아무도 없어서…….”

갑자기 일정이 잡힌 신입관리교육이 끝나기 무섭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는데, 얌전히 앉아서 제 할 일을 하고 있어야 할 시하루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어디 갔겠지 싶었는데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는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유아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설마 자신의 앞에서만 성실한 척하는 건 아니겠지?!

“미안. 그런데 정말 중요한 일이었어.”

“……이상하게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어딘가 기분 좋아 보이는 그의 표정을 지적하는 말이었다.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하려고 오기 전에 미리 무표정 연습도 했는데. 이렇게 무너지다니……. 연습의 성과 따위는 없었다.

그의 입가에는 감추려고 노력해도 감춰지지 않는 미소가 보였다.

정자에 오르는 동안에도 유아는 그에게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평소에도 이상했지만 오늘따라 더욱 이상하다.

유아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아 제 할 일을 끌어당기던 시하루가 슬며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요? 저한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일에 집중하라는 듯 손으로 종이를 톡톡 치던 유아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유아야!”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다.

자신을 친숙히 부르는 목소리에 유아는 고개를 번쩍 들었고 시하루는 고개를 숙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가만히 있으라니까 저 할아범들이!’

시하루가 한숨을 내쉬며 상황을 설명해주기 위해 유아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로 오는 무리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이고~. 못 본 사이에 우리 아가 정말 다 컸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러게 말이야. 애였을 때는 마냥 귀엽기만 하더니.”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제 엄마를 닮아서 남자 여럿 울릴 미모일세. 과연. 전하께서 그렇게까지 나서신 게 이해가 가.”

처음? 아니.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사람들이 갑자기 그녀에게로 다가오더니 당황해하는 그녀를 둘러싸고 저마다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좀 구해달라는 듯 저 멀리 있는 시하루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내는 그녀였지만, 무슨 생각인 것인지 그는 그저 한숨 섞인 웃음으로 지켜볼 뿐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누구세요?”

오랜 침묵 끝에 그녀가 말했다. 그 질문에 잠시 그들의 눈에는 ‘서운함’이 보였지만 곧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 오래됐기도 하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항상 업어달라고 칭얼거려서 이 할아버지가 업어주고는 했는데 기억 안 나?”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무슨 소리야. 내가 업고 다녔는데!”

할아버지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아가 잠시 멈칫했다.

‘설마…….’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시하루를 바라보며 뭐라 입을 뻐끔거리는 그녀였고, 그것을 어떻게 알아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장로 할아버지들?”

그녀의 말에 세 명의 할아버지들이 감동한 듯 눈을 반짝이더니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봐봐. 기억해냈잖아. 우리 유아는 총명하다고 내가 말했잖아.”

세 명이서 서로 먼저 그녀를 안아보겠다고 싸우기 시작하자 유아가 피식 웃어버렸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니 잊혀졌던, 옛날 기억이 조각조각으로 떠오르는 거 같았다.

어렴풋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할아버지들은 예전에도 서로 그녀를 안아주겠다. 엎어주겠다고 싸우고는 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자. 자. 그만. 혼란스러워하잖아.”

아직도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 그들 사이에서 말릴 법도 한데 유아는 그저 웃고 있었다. 왠지 이 모든 것들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을 진정시키는 건 시하루의 목소리였다.

서로 먼저라고 싸우는 할아범들을 말리는가 싶던 시하루는 어느새 그곳에 함께 끼어 누가 첫 번째인지를 논하기 시작했다.

결국, 유아의 외침에 그들은 일동 얼음이 되었고, 그동안 못 나눈 이야기들을 아주 긴 시간 동안 나눈 뒤에야 그들은 내일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소월가로 향했다.

그제야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당장 설명해보라는 유아였고, 시하루는 할 수 없이 그녀가 이신에게 신입관리교육을 받으러 끌려가 있던 동안 일어난 일에 대해 모두 털어놓았다.

장로들에게 소월가에서 기다리라고 말했지만, 지금 당장에라도 유아를 보고 싶다는 그들을 말리기는 역부족이었다.

알겠으니 일단 진정하고 자신이 데리고 올 테니 아주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했는데. 그걸 못 참고!

저 할아범들 때문에 모든 일이 꼬이고 말았다.

유아에게 끼어들지 말라고 경고받아서 조심했었는데!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그녀가 알아버렸으니 혼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유아는 그가 자신의 문제에 개입한 것에 대해 화내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던 문제들이 갑자기 해결된 탓에 긴장이 풀려버린 탓일까.

그녀는 잠시 동안 그가 한 말을 믿지 못하겠는지 멍하니 있었고, 진유한에게서 받은 각서를 보여주자 그제야 현실이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천하의 진유한에게서 각서를 받아내는 일은 정말 힘들었지만 계속되는 시하루의 압박에 결국 그는 승복했다.

그 뒤로의 일은 일사천리로 해결되었다.

수도를 떠나 고향으로 내려가게 된 그는 다시는 그들의 앞에 나타나지 않으리라. 드디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가주권을 찾았다고 해도 소월가로 돌아갈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녀 자신은 왕후로서 궐 안에 있어야 했기 때문에 소월가의 경영은 장로들이 대리로 맡게 되었다.

유월가에서 물러난 하림 역시 그 장로들 틈에 나란히 서 소월가를 계속해서 지키기로 했다.

차라리 계획단계 때부터 미리 말해줄걸 그랬나? 하지만 그랬다면 그녀가 말렸을 게 분명한걸!

그는 꽤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던 일이었지만, 유아는 예상치도 못한 일들뿐.

폭풍처럼 휩쓸고 간 일들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쯤에서야 유아는 옆에 있는 시하루를 바라보았고, 그는 잔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급히 먼저 선수를 쳤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말했잖아. 단축하자고.”

뜬금없이 뭘 단축하자는 건지 고민에 빠진 유아의 머릿속에 일전에 그와 주고받았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네가 나에게 거리를 두는 이유는 내 입으로 말하기도 뭐하지만 네가 하고자 하는 것들이 나보다 우선순위이기 때문이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당연하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럼 네가 하고자 하는 것들을 모두 이룬 다음에는 나를 돌아볼 여유가 생기겠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내 꿈은 엄청 높아서 얼마나 걸릴지 몰라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최대한 단축해보자.’

의기양양해 보이는 그가 얄미운 유아가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짓궂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직 하나가 남은 거 같은데요? 제 장래희망은 어쩌고요.”

려화가 되고 싶다. 아니. 주위의 그 어떤 방해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다른 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싶다.

육에 있어서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 그것이 그녀의 꿈이다.

그녀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문 그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힘들 거라는 듯 유아는 미소 지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그것도 생각해봤는데…….”

그러나 시하루는 당황스러워하지 않았고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순간 긴장한 유아를 바라보던 그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정확히 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었지만 대충 그 방향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희안궁이 비어 있잖아.”

희안궁? 뜬금없이 희안궁이 여기서 왜 나오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곳을 제2의 서하연처럼 만들면 어떨까 싶어. 아. 려화에게는 허락받았어. 물론 궐 안이다 보니 기숙사제는 실천 못 하겠지만…….”

그것이 이제 쓸모가 없어진 희안궁을 어떻게 처리할지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어쩌면 ‘희수궁 새 단장 하는 김에.’라는 건 변명.

자신의 부인이 될 여인에게 주기 위한 깜짝 선물이었으니 시선을 돌려놓은 무언가가 필요했을지도 몰랐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라히연과 명예 삼화들이 아이들을 가르치게 할 생각이야. 너도 명예 삼화니까 당연히 선생에 포함되고. 넌 능력자니까 이 나라의 왕후이면서 일국의 대신이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할 수 있을 거야.”

할 수 있냐는 질문도 아닌. 할 수 있을 거라는 그의 말에는 믿음이 있었다.

순간. 할 말을 잃은 유아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한 건지, 이 남자?

오늘 여러 번. 멍한 표정을 보여주는 그녀를 바라보던 시하루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자. 이제 모든 일들이 끝난 거 맞지? 날 좀 볼 여유가 생겼겠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런 거 같네요.”

뭔가 더 남았을 거라고 고집을 부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바로 받아들이는 그녀이다.

모든 것을 비밀리에 한 것도 크게 작용한 듯했다. 이미 너무 많은 일로 그녀는 정신이 없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럼 이제 얌전히 나랑 혼인 올리는 거지? 그렇지?”

쐐기를 박겠다는 듯 시하루가 물어왔다.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한 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좋아요.”

싱긋 웃던 유아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주위에 놓여 있는 붓을 집어 들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 어차피 예전에 줘서 상관없겠지만. 의미라는 게 있으니까.”

뭐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시하루의 눈앞에 유아가 붓을 들어 보이며 다시 한 번 웃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자. 어디에 써줄까요?”

곧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알겠다는 듯 따라 웃던 그가 고민하자 못 기다리겠다는 듯 유아가 그의 손을 끌어다가 자신의 앞에 놓았다.

그리고는 그 손에 떡하니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다시 생각해보니 조금 억울하네요.”

그의 손바닥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가 중얼거리자 시하루가 발끈해서는 물어왔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가 또 억울한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내가 보낸 십 년……. 십 년이라는 시간은 무시 못 해요. 엄청나다고요.”

십 년이란 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인가.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그녀의 존재를 모르고 있던 그 역시 억울한 감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가장 억울한 건 유아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럼 앞으로 십 년이 더 지나면 되겠네.”

위로해도 모자랄 판에 눈치가 없는 건지 그가 얄밉게 말했다. 유아가 인상을 쓰며 잡고 있던 그의 손을 확 꼬집어 버렸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말이 쉽지.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시간이네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앞으로의 십 년은 같이 있어 줄게.”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유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말이 좀 이상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그의 손을 괴롭히던 유아가 손등을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말은 십 년 뒤에는 갈라서자는 말?”

자신의 손을 괴롭히는 유아를 뿌리칠 수가 없으니. 그대로 꾹 참아봤지만, 빨갛게 부어오른 자신의 손을 감싸 쥐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걸 보면 역시 아픈 모양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까 네가 말하고도 잊었나 본데. 십 년이란 시간은 엄청나. 혹시 알아? 지금으로부터 십 년 후에는 네가 날 못 떠날지.”

그의 말에 유아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꿈이 참 야무지시네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건 말도 안 돼.’

설마. 설마 했는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게 말이 돼? 예전이라면 모를까 이제는 다르잖아.’

쿵쾅쿵쾅.

분노가 가득 실린 그의 걸음이 복도 안에 울려 펴졌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전하! 이곳까지는 어쩐 일로…….”

그가 왔다는 이야기는 이미 이곳저곳에 퍼졌고, 당황한 이들이 밖으로 나와 그에게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하루의 귀에 그들의 인사는 들리지 않았다.

자신들을 그냥 스쳐 지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들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휴. 매일 아침마다 피가 말리는 거 같습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거 이신공께 말씀을 드리던가 해야…….”

얼마 전.

드디어 시하루가 원하고 원했던 대로 유아와 그의 공식적인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궁인들이 온종일 ‘이제 궐 안에 평화가 돌아왔다!’라고 외치고 다닐 정도로. 그들의 눈앞에 펼치진 미래는 따사로울 것만 같았는데…….

문제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냥 말로만 그런 줄 알았는데……. 정말 유아가 희수궁 보수기간 동안 기숙사에서 지내겠다고 말한 것이 현실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강력하게 항의를 하며 말렸지만. 안타깝게도 둘이 싸우면 7할은 유아가 이기는 게 현실이었다.

특기인 장기시합을 내세워 그녀의 의지를 꺾어보려고도 했지만, 이제는 그것 역시 그녀를 이길 수가 없었다.

희수궁의 보수기간을 느긋하게 잡아놓은 시하루는 오히려 제 꾀에 자기가 빠지고 만 것이다.

유아가 기숙사에 들어갔다는 소식에 그와 처소 문제로 싸웠던 대비는 고소하다는 듯 시하루를 비웃어 주기까지 했다.

사실 유아가 기숙사를 선택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슬슬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신입관리교육 때문에 그 문제에만 온전히 집중하고 싶던 그녀는 자신이 기숙사에서 머물면 그가 쉽게 방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오히려 그녀의 선택은 아침 댓바람부터 여러 사람의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정말 매일 아침. 그 짧은 시간이라도 얼굴 좀 보겠다고 같은 시간에 출근도장을 찍는 것마냥 기숙사를 찾아오는 인물 때문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마마. 이제 그만 일어나실 시간…….”

문밖에서는 당황한 듯 보이는 궁녀들이 안절부절못하며 외쳐대었다.

많은 사람이 머무는 곳이다 보니 많은 방이 있는 기숙사였지만 시하루는 익숙하게 어느 방을 찾아갔다.

이미 그 방을 찾아온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꼬맹이 아직 안 일어났어?”

시하루의 등장에 깜짝 놀란 궁녀들이 재빨리 인사를 올리며 옆으로 물러났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예……. 교육시간이 20분밖에 안 남았는데…….”

궁녀들도 불쌍하지. 공부하겠다는 왕후 모시느라 이렇게 힘든 하루를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꼬맹이. 지각이래. 얼른 일어나.”

방 안은 늘 그렇듯 난장판이었다.

그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온종일 공부만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방 안에는 엄청난 책들이 여기저기에 쌓여 있었고, 아직 다 끝내지 못한 문서들 역시 그 높이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는 들어올 때마다 이게 사람 사는 방이 맞나 감탄하고는 했다.

도대체 몇 시까지 책을 본 건지 모를 유아는 침대가 아닌 낮은 탁자에 엎드린 채로 잠들어 있었고, 손에는 아직 책이 붙들려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것 봐라.”

조심스럽게 탁자에서 그녀를 끌어내는 데 성공한 그는 두 번째로 책을 빼내려고 시도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확 그냥 이대로 내 궁에 데려다 놓을까?”

밖에서는 지각이라고 궁녀들이 난리인데, 그 난리를 잠재우고자 들어온 이 남자는 색다른 고민에 빠져 계셨다.

잠시 뒤. 고민을 해결하겠다고 들어갔던 남자가 혼자 방 밖으로 나오자 모두 그럴 줄 알았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그가 마마님을 깨우는 데에 실패할 거라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는 못되게 굴지 몰라도. 제 부인의 앞에서는 꼼짝도 못 하는 그였으니까.

‘좀 더 자게 내버려 둬요.’ 그 한 마디면 끝이었다. 아무리 그것이 제정신이 아닌 잠결에 내뱉은 말이라도.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쩌죠? 지금 준비하셔도 교육시간에 늦을 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그들은 할 수 없다는 비장한 표정으로 팔을 걷어붙였다. 아무래도 강제로라도 그녀를 깨울 생각인 듯했다.

하지만 그들은 문을 막아선 시하루에 의해 방 안에 들어서지도 못했다.

도와주겠다고 찾아온 이가 오히려 이제는 방해되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꼬맹이 깨우지 마. 교육시간이라면 내가 뒤로 미룰 테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

그리하여 발생한 두 번째 후폭풍이 이것이었다.

방 안에는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긴 탁자에는 많은 사람이 앉아 있었지만, 그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중앙에 앉아 있던 이들의 시선은 방 안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사람과 방금 새롭게 방 안에 등장한 새로운 세력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오랜 침묵을 깬 것은 방 안에 앉아 있던 노인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지금 뭐하자는 거죠?”

낮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기가 막힌다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방금 방 안에 들어온 이는 그러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신입관리 교육일정 뒤로 미뤄 줘.”

시하루의 표정이 ‘못 들었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를 따라왔던 이안은 두 남자 사이에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폭풍전야의 고요함마냥. 그의 아버지께서는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허. 이 스승에게 너무 어려운 부탁을 하십니다. 그래요. 어디 이유나 들어봅시다.”

이유를 대보라는 말에 가만히 서 있던 시하루가 대답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꼬맹이 녀석. 아직 자고 있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겨우……그것 때문인가요?”

이신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얇은 붓이 박살이 났다. 순간 방 안의 모두가 긴장했다.

방 안에서 여유로워 보이는 건 오직 시하루뿐이었고, 이신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아……. 알겠습니다. 그럼 특별히. 오후로 옮기겠습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오후도 안 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인가.

이미 이신이 한 발자국 물러난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오후는 또 왜 안 됩니까.”

이신의 인내심은 의외로 대단했다.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던 그가 마지막이라는 듯 침착하게 물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오후에는 같이 희안궁에 가보기로 약속했거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시하루님!!!”

얼마나 화가 났으면.

이신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방 안의 인물들은 서로 눈치 보기 바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나이도 드신 분이 혈압 오르시면 어쩌려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너 때문이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앞으로는 밀리는 일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유아는 교육자 명단에서 제외해 주세요.”

반말에서 갑자기 존댓말로 넘어와서 그런가?

순간 화를 내며 자리에서 막 일어나려던 이신은 어정쩡한 자세에서 멈췄고, 그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아……알겠습니다. 단. 오늘만입니다.”

의외로 흔쾌히 수락했다.

이신의 위에 시하루가 있었고, 시하루의 위에 유아가 있으니 실질적으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유아였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을 이끌었지만 어쩐지 방에서 나오는 시하루의 표정은 밝아 보이지 만은 않았다. 어딘가 찝찝하다는 표정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전하? 왜 그러세요?”

그의 뒤를 따라 나온 이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왠지 평생 이렇게 끌려 다닐 거 같은 불안한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그 말을 정확하게 들은 이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뭘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그러세요.’

시하루는 모르고 있었지만, 이미 그는 천유국 사람들이 인정하는 공처가 중 한 명이었다.

四十二花 * 유시후 이야기

이것은 아주 옛날. 아니, 옛날까지는 아니고.

십 년도 더 전의 이야기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시후야. 네가 가장 큰 오빠니까 잘 지켜줘야 한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

처음으로 드는 생각은 ‘귀찮다.’였다.

뒤에 매달려 있는 꼬맹이 하나로도 힘들어 죽겠는데, 또 하나가 늘게 되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오빠’라니? 듣자하니 나이도 나랑 같다던데. 고작 며칠 빨리 태어난 걸로 오빠 취급을 하다니…….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름은 ‘라히연’이라고 한단다.”

두 번째로 생각난 단어는 ‘구슬’이다.

눈이 동그란 게 마치 구슬과도 같았다.

이 장소에 처음 온 건 그녀인데. 전혀 기죽지 않은 모습. 오히려 당당히 우리를 스쳐지나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호기심이 가득한 그 구슬 같은 눈을 굴려가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라히연과 처음 만난 그 날. 나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녀에게서 잠시라도 눈을 떼면 큰일이 나고 말 거라는. 그런 불안감을.

그리고 그것은 곧 현실이 되었다.

* *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오라버니∼.”

또 왔다. 인상부터 쓰인다.

읽고 있던 책을 덮어 옆으로 밀어낸 나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몰래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러한 시도는 곧 물거품이 되었다.

조그마한 게 또 눈썰미는 좋아가지고.

넘어질까 불안한 걸음으로 잘도 달려오는 저 작은 아이의 등장에 나는 자동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잘 되지도 않는 발음으로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게 귀엽기는커녕, 그냥 귀찮다.

의사소통도 잘되지 않으니 답답하기까지 하다. 차라리 아무 말도 안 하는 라히연이 낫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야. 나 어디 안 가. 뛰지 마. 뛰지 마.”

눈에서 끝까지 쫓아오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할 수 없이 항복 선언을 하고만 나는 자리에서 멈춰. 그 아이가 나를 붙잡을 수 있을 때까지 가만히 서서 기다려 주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오라버니가 업어줄까? 응? 자.”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나 혼자 걸을 수 있어.”

아니.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게 아니라 내가 불안해서 그러니까 그냥 업히란 말이야!

꼬맹이 주제에 자존심은 세 가지고! 나중에 뭐가 되려고 그러는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유아는 이 오라버니 좋아하지? 그렇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좋아해. 그런데 많이 좋아하지는 않아.”

그렇게까지 세세하게 말 안 해도 되거든 이 꼬맹아!

뭐지? 보통 이 나잇대면 ‘좋다’와 ‘싫다.’ 이렇게 사고방식이 딱 두 가지로 나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래. 그러면 많이는 아니지만, 꽤 좋아하는 이 오라버니의 공부를 방해하면 안 되겠지? 그렇지? 그게 착한 어린이겠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음……. 그런 거 같아.”

그런 거 같다는 또 무슨 말이야. 어찌 되었든. 이제 좀 조용해지겠지.

밖에 있고 싶다는 녀석 때문에 굳이 나와서 공부해야 하는 이 불쌍한 신세.

그나마 다행인 건. 책을 쥐어주면 얌전해진다는 거 정도일까. 정말 글을 읽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 히연 언니다.”

라히연.

그 이름에 나는 책에 고정하던 시선을 떼고 유아의 옆으로 다가갔다.

혼자 정원을 헤매고 있는 건지. 산책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넋 놓고 있는 건 분명하다.

나랑 나이도 같은데. 왜 굳이 내가 돌봐 줘야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집이 애들 맡기는 집도 아니고. 나도 보모가 아니니 말이다. 내 일 하나 신경 쓰기 힘든데…….

요 며칠 가만히 그녀를 관찰한 결과. 그녀는 매우 특이하다.

유아처럼 항상 나에게 달라붙지도 않고. 늘 혼자 돌아다닌다. 다시 생각해보면 제대로 말을 나눠본 적이 없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네.”

지금도 뒤에서 내 목을 조를 정도로 끌어안고 있는 유아가 귀찮아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차라리 이게 낫다는 생각이 들 줄이야.

눈에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그것이 더 불안하다.

웬만해서는 말을 하지 않아 의사소통도 잘되지 않거니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언젠가 갑자기 그녀가 소나기가 내리는 날에는 정원에서 낮잠을 자다가 쫄딱 젖어서 나타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날 어머니에게 엄청나게 혼이 났고, 그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분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왜 내가 혼나야 하는 거야. 이건 불공평해.’

솔직히 말하면 불편했다. 어른들은 친하게 지내라느니 잘 대해주라느니 말했지만. 도저히 내 눈에 예쁘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아를 데리러 나오던 길에 나는 그녀가 연못에 들어가 있는 걸 발견하게 됐다.

저건 또 무슨 짓인가 싶은 것보다도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그녀가 잘못되면 또 내가 혼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고, 나는 그 길로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여기서 뭐하냐?”

일단 끌어내야 할 텐데.

어른들에게는 얼마 되지 않을 깊이의 연못이었지만, 우리들의 신장을 생각해봤을 때 그리 얕지만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것인지!

허리 정도까지 오는 연못을 휘적휘적 걷고 있는 그녀를 보니 한숨이 먼저 나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가만 보니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채로 연못을 쓱 훑고 있는 거 같았다.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낫겠지.

살에 달라붙는 감촉이 싫어, 평소 물놀이를 싫어하는 나였지만 어쩌겠는가. 나에게는 저 아이를 돌봐야 하는 사명이 있는걸.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해? 뭔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찾아 줄 테니 유아가 오기 전에 빨리 찾자. 우리가 이러고 있으면 노는 건 줄 알고 뛰어들게 분명하니까.”

내가 물속에 들어가자 뭐가 놀라운지 고개를 들고 가만히 나를 바라본다.

도와주겠다는 데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무엇을 찾는 건지 모르는 나로서는 난감한 상황이다.

말이라도 해주던가!

몇십 분을 정체 모를 무언가를 찾아다니던 내 눈에 투명한 연못의 바닥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야. 여기에 뭐가 있는 거 같은데?”

반짝이는 걸 보니 장신구다. 찾은 거까지는 좋았지만…….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줍지…….

안 그래도 물 높이가 허리까지 오는데, 저 물건을 줍기 위해 숙인다는 건 말 그대로 잠수였다.

내가 잠시 그렇게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내 부름을 듣고 온 건지 어느새 그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저 물건을 건져 올리기 위한 몇 가지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데…….

순식간에. 정말 순식간에 그녀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숨을 들이쉬고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어 올렸다.

머리카락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게 오늘은 어머니께 반 죽었다는 생각보다는 그 무모함에 화가 밀려 올라왔다.

한 마디 해주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난 그녀에게 어떠한 잔소리도 할 수가 없었다.

정말 처음으로.

처음으로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봤기 때문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도와줘서 고마워.”

그녀의 손에 들린 건 작은 비녀였다.

고작 그것을 찾겠다고 이 난리를 친 것은 아직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나는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만 것이다. 고작 그 작은 미소하나 때문에.

뭐지? 유아는 항상 웃으며 말을 거는데?

하지만 놀라움 때문에 미뤄진 잔소리는 해야 직성이 풀릴 거 같았다.

하여 다시 그녀를 바라봤지만, 어느새 나를 지나친 그녀는 연못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연못가의 누군가를 향해.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유아 정도 되는 작은 아이에게 다가갔고. 고생고생해서 찾아낸 비녀는 그 아이의 손으로 넘어갔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찾는 게 이거 맞지?”

그 한마디로 순간 나는 깨달았다.

저 아이가 이상한 게 아니라는 걸. 단지 생각이 많은 것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또 혼나겠다.”

놀란 얼굴로 연못에서 나온 나와 그녀를 향해 달려오는 시종들을 바라보며 내가 내뱉은 말이다.

정말. 그녀가 오고서부터 혼나지 않은 날을 세는 것이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날은 혼나지 않고 넘어갔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그저 우리를 보고 뭐가 웃긴 건지 웃고 넘어가셨다.

그 날의 일을 계기로 나는 히연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유아랑은 다르다. 유아의 경우, 제 생각을 타인에게 쉽게 이야기하는 반면. 그녀는 절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답을 내리고. 먼저 움직인다.

늘 혼자서 모든 것을 알아서 해버리는 녀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늘 그녀가 불안해서 몇 걸음 뒤에서 쫓아간다.

그렇게 따라가고. 따라가고. 그러다 보면 그녀는 이따금 뒤를 돌아보며 웃어준다.

서서히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게 되었다. 말이 늘어남과 동시에 우리의 대화가 늘어났다.

곧 시끄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그것이 싫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해서 함께 하는 시간이 흐르고 흘러.

‘오늘’이라는 날이 되었다.

*

눈을 뜨기 무섭게 그를 반기는 건 히연의 미소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잘 잤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음…….”

딱딱한 바닥에 누워 있던 유시후가 불편함 탓인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서서히 일어났다.

그의 앞에 앉아 있던 히연은 바쁜 건지 다시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대화를 지속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웬일로 낮잠? 간밤에 못 잤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못 잤어. 생각 좀 하느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왜? 아니, 그 전에 바닥도 차가운데 들어가서 자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짐은 다 챙겼어?”

정말 졸린 건지 목소리는 아직도 웅얼거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걱정을 해주는 그에게 히연이 고맙다는 의미로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하지만 표정을 그리 밝지 않아 보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대충.”

자리에서 일어난 유시후가 그녀에게 다가가. 따로 빼놓은 물건들을 들어 한쪽에 옮겨놓으며 중얼거렸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왕도 참 이상해. 갑자기 무슨 합숙이야. 아니, 정한 건 유아인가? 그 왕에 그 왕후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왜 난 좋은데.”

반년에서 길게는 일 년까지 예정되어 있던 희수궁과 희안궁의 보수가 삼 개월 만에 끝나는 데에는 시하루의 압력이 있었다고 한다.

아니. 그것까지는 좋은데! 희안궁 교육장 개설은 좋은데! 뜬금없이 왜 합숙?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솔직하게 말해. 그냥 둘이 놀려고 그러는 거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머. 어떻게 아셨을까? 사실은 밤샘 대화가 목적이긴 해.”

히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짓 없는 얼굴로 바로 인정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너는 짐 다 챙겼어? 아니. 그 전에 정말 괜찮겠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안 괜찮아. 너 때문에 나도 당분간은 기숙사행이야.”

곧 죽어도 불편한 기숙사는 들어가기 싫다고 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고 하면, 원래 유아가 쓰던 기숙사 방을 그가 쓰게 될 거라는 걸까?

시하루와 이신이 보안문제로 그녀가 쓸 방을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멀리 떨어진 조용한 곳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오라고 한 적도 없는데 굳이 따라 들어오겠다고 한 건 본인이면서!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큭큭…….”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왜?”

히연의 정리를 도와주던 유시후가 갑자기 웃자 신경이 쓰인 것인지 그녀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책장에 기대어 수많은 책 중 어느 한 권을 뽑던 그가 그 사이에서 떨어진 종이를 내밀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니. 이거. 네가 예전에 나라고 그린 거였지?”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히연이 그가 들고 있던 종이를 바라보더니 곧 얼굴을 붉히며 그것을 빼앗아 버렸다.

본인이 생각해도 못 그렸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옛날 생각나네~. 라히연. 그림도 못 그리면서 화백이 되겠다고 난리였잖아.”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린 날의 상처를 네가 또 들춰놓는구나.”

이제는 우는 연기까지 펼치는 히연을 바라보며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그의 말은 계속됐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다음은 뭐였더라? 요리도 못 하면서 가게를 내겠다고 하질 않았나. 꼭 못 하는 것만 하겠다고 난리여서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네가 고생을 왜 해? 매번 한계라는 벽에 부딪혀 좌절의 눈물을 흘리는 건 나인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나도 마음의 준비라는 걸 해야 할 거 아니야. 화백이 되면 나도 그림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야 할 테고. 요리를 하면 의학 공부도 해야지.”

순간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유시후가 멈칫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봐 남편? 요리는 왜 의학 공부랑 이어져?”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하……아무래도 살아야 하니까? 생존본능이랄까.”

나름의 이유를 대보는 유시후였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안 좋은 결과로 향하는 지름길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흥. 아침부터 찾아와서는 웬 시비야.”

분노가 담긴 몇 번의 주먹질(?)에 회복시간이라는 엄살을 피우며 바닥에 앉아 딴 짓을 하는 그에게 히연이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리고! 그때 엄청 못 그렸다고 했으면서, 왜 아직도 가지고 있는 거래?”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누가 그린 건데. 이건 내 보물 5호야.”

큭큭하고 웃던 유시후가 히연이 잠이 한눈을 판 사이. 그 종이를 몰래 빼오는 데 성공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우리 낭군님께서는 보물이라 불릴 만한 것이 그렇게나 없으신가 보죠?”

책 정리도 슬슬 마무리가 되는지 꽉 차 있던 책장이 어느새 텅텅 비었다.

한참을 비아냥거리며 다음으로 올 그의 반응을 대충 대여섯 가지 예상하고 있던 히연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유시후의 말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 고요함이 은근히 신경 쓰이는 그녀는 안 돌아볼 수가 없었다.

도와주다가 그냥 잠들어 버린 건 아닌가 했지만, 그는 깨어 있었고, 그의 시선은 히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다만 신경이 쓰이는 건. 늘 그녀 앞에서만은 시끄러웠던 그 입이 꾹 다물어져 있다는 것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뭡니까? 그 눈빛은? 우와. 완전히 두근거리는데요?”

히연이 다시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유시후는 이번에도 별다른 대꾸가 없었고, 그냥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겨버렸다.

그의 그러한 반응에 히연은 굳어버렸다.

뭐지? 내가 너무 심했나? 평소와 다름없었을 텐데? 머릿속이 혼돈 그 자체.

괜히 자신이 잘못한 건 아닌가 싶어 마음을 졸이던 히연의 머릿속에 어떠한 말이 스쳐지나 갔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가까워진 거라던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죽으면 안 돼. 차라리 화를 내.”

분명 그녀는 잘못한 게 하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에게 화를 내라 부추기고 있다.

어느새 유시후의 눈높이에 맞게 자리를 잡은 히연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사정없이 흔들며 정신을 차리라는 등. 네 원래 모습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등의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시후가 반응이 없자 몇 번을 더 시도해보던 히연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놓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진짜 무슨 일 있어? 나 때문이라면 꼭 궐에 안 들어가도 돼. 이번 합숙만 끝내고 올 테니까. 아니면 아예 합숙 일을 단축하자고 건의할까?”

최대한 달래보려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는 듯.

할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히연은 갑자기 책 한 권을 들고 오더니 그의 앞에 자리 잡고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최후의 수단. ‘그래, 네가 언제까지 말 안 하나 보자. 난 인내심이 강하거든.’라는 의미와도 같았다.

계속해서 말을 걸던 히연의 입까지 조용해지자 방 안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할 말이 있으면 확실히 해줬으면 좋겠는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흠……. 야. 라히연.”

유시후의 부름에 히연은 또 장난이라고 생각한 건지 이번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냥 말씀하세요~. 낭군님. 다 듣고 있사와요~.”

상대방과 대화할 때 꼭 시선을 맞춰야 한다고 누가 그러던가.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건 유아같이 말 잘 듣는 애가 지킬 문제겠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러니까……. 문제는 그 낭군님이라는 말인데…….”

그 말에 히연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야. 거슬렸어? 말하지 그랬어. 어렸을 때처럼 ‘시후야’라고 불러줄까?”

유시후가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불렀던 호칭이 더 편하냐고 물어오는 그녀의 질문에 대한 명백한 거절이다.

그럼 도대체 원하는 게 뭐냐는 그녀의 표정에 유시후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제 슬슬 말로만 말고 진짜 낭군님 시켜 줄 때도 되지 않았어?”

대답은 않고, 히연은 멍하니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설마 그거 때문에 삐친 건 아니겠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렇다면 이상한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상할 건 없지만.”

웃고 싶은 걸 참는 표정이다. 실제로 그녀는 그랬다.

아닌 척하고 있지만, 천하의 유시후가 쩔쩔매고 있으니 이 얼마나 놀랍고 재미있는 광경인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래서? 대답은?”

사실은 좀 더 대답을 질질 끌어 이 상황을 즐기고 싶었지만, 성질 급한 그는 계속해서 대답을 요구해왔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별로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데?”

결국, 짓궂은 미소와 함께 대답을 회피하는 그녀였고, 그 말에 유시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래도 이런 놈인 걸 어쩌냐. 너라도 나 데리고 살아줘야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잘 알고 있네. 내가 아니면 누가 널 데리고 살겠어.”

웬일로 유시후가 꼬리를 내리고 있다.

바로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는데, 웃기만 할 뿐. 긍정이나 부정 따위의 그 어떤 대답도 않는 여인 때문에 유시후만 고생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결혼해도 서로 많이 바쁘겠지? 물론 교육자가 되고 싶었지만, 난 이제 누구한테 어리광부리지? 넌 궐 안 일만으로도 바쁠 테니까.”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던 유시후가 최후의 수단을 꺼내 들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직 확정되지 않아서 말 안 하고 있었는데, 나. 부서를 희안궁 교육자 선발에 지원했어.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

그 말에 히연이 벌떡 일어나더니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진짜? 궐 안에서도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응.”

지원은 했어도 아직 결과발표는 나지 않았지만, 사실은 확정과 다름없었다.

저번에 유아를 주의를 끄는 대가로 그가 들어달라는 부탁이 바로 이것.

하지만 그 왕의 말을 철썩 같이 믿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정식 발표가 나기 전까지는 말 안 하려고 했는데…….

표정이 밝은 히연을 바라보던 유시후는 생각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녀가 또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렇다면 나 역시 따라가야지. 넌 앞만 보고가. 난 항상 네 뒤를 따라갈 테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역시 나의 낭군님. 사랑합니다∼.”

히연이 밝게 웃으며 그에게 안겨들자 가만히 있던 유시후가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짓더니 천천히 그녀의 입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나도 사랑해.”

* *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말도 안 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요즘 젊은 애들은 참 낭만적이라니까.”

반응이 가지각색이다.

곧 있으면 문을 여는 ‘희안궁의 교육’에 대한 의견정리를 핑계로 모여 놓고, 어느새 여인들의 수다방이 되어 버렸다.

조금 전 히연이 어떻게 청혼을 받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무섭게, 함께 있던 유아와 대비는 부러움을 인상을 찌푸리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그중 가장 보기 흉할 정도로 인상을 쓰고 있던 유아가 들고 있던 찻잔을 탁 하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난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데? 오라버니가 정말 그랬단 말이야?!”

목소리는 그 인간이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히연에게는 그 어떠한 말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머. 네 앞에서나 그렇지. 그 녀석도 내 앞에서는 꽤 순정남이라고.”

믿을 수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런데 왜 계속 기분이 안 좋아 보였데? 아. 오라버니도 긴장 같은 거 하나? 히연언니가 청혼 안 받아 줄까 봐?”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유아가 조금이라도 오라버니의 흉을 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이 말 저 말 늘어놓자, 히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대답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네가 자기보다 먼저 시집간 게 짜증난다 하더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아를 포함한 방 안의 모두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여간에 남자가 속이 좁아.”

실컷 웃던 유아가 말하자 따라 웃던 히연이 다시 한 번 피식 웃더니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러니까. 내가 아니면 누가 그 녀석을 데리고 살겠어.”

말은 그렇게 해도 얼굴은 웃고 있으면서.

행복해 미치겠다는 그녀의 표정에 셈이 난 건지 유아가 입을 삐죽 내밀고 들고 있던 일정표에 시선을 옮기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것 참. 천생연분일세. 나는 청혼은 둘째 치고 바로 혼인신고서부터 작성하던데.”

이참에 자신이 모르는 오라버니의 비밀이나 약점 같은 게 더 없냐는 유아의 질문에 몇 가지가 있으니 큰 맘 먹고 이야기해주겠다는 말과 함께 히연이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밖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유아는 이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칠 거라는 걸 예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마마. 전하께서 도대체 언제 오시냐고 하시는 데요…….”

이안은 죄가 없다. 유아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지만, 왠지 얄미워 보이는 게 노려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갑자기 언니가 부러워졌어. 이만 가봐야겠다. 내일 봬요.”

자리에서 일어나 이안을 따라나서던 유아가 중얼거렸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확 며칠 동안 영희궁에 가버릴 거라고 협박해 볼까 하는데 이안은 어떻게 생각해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러셨다가는 제 목이 날아갈 텐데. 두 발 뻗고 편히 주무실 수 있으시겠어요?”

나름대로 진지하게 물어본 건데,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목숨이 중요하니 절대 그러지 말라 말하고 있는 이안이 얄미워지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왜 꽃따리 오빠가 이안을 괴롭히고 싶어 했는지 이제야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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