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十九花 * 꽃의 이름을 아는 자 (6)
“마마. 벌써 일어나셨어요?”
“응……. 아까.”
아침. 아침이지만 아직 주위가 어두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능으로 아침이란 것을 느낀 유아는 이미 혼자의 힘으로 일어나 있었다.
기상한 것도 모자라 그녀의 손에는 서류들이 들려 있었고, 아침부터 고된 노동을 한 듯 피곤해 보였다.
“큰일 났다……. 아직 다 못 했는데…….”
천유국의 어린 왕후님은 너무나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셨다.
“피곤하다……. 이런 말이 안 되는 경합을 벌여서 처음으로 안 해본 일을 했기 때문에 이리 지친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손이 이렇게 아플 리가 없잖아?”
유아의 준비를 돕던 궁녀들이 그 말에 발끈했지만,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을 감히 입 밖으로 낼 용기는 없었다. 그저 저들끼리 눈치 보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겨우 3개 하셨으면서…….’
일찍 일어난 유아 덕분에 준비가 여유로웠다.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도 시간이 꽤 남아, 새벽 공기를 쐬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멍하니 앞장서던 유아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그녀의 뒤를 따르던 이들 역시 걸음이 멈춰 섰다.
“……어디라고 했더라……. 아. 조회…….”
한 발자국 움직이는가 싶더니 다시 멈춰 서 버린다. 덕분에 궁녀들 역시 갔다 섰다를 반복하고 있다.
“……왜 그러세요? 무슨 문제 있으세요?”
“음…….”
복도 중간에 떡 하니 멈춰 버린 유아는 아직 잠이 덜 깬 건지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다가 무슨 생각이 든 건지 몸을 돌렸다.
아무리 시간이 여유롭다고는 하나 이렇게 지체할 정도의 시간은 없었다.
자신들이 모시는 왕후님께서는 늘 예상치도 못한 행동과 생각을 하시기 때문에 궁녀들은 잔뜩 긴장하고 다음의 행동을 기다렸다.
“조회실.”
곧 결심한 듯 그녀의 걸음이 빨라졌다.
* *
“일찍 일어났네?”
질문하는 대상이야말로 이 시각에 깨어 있다는 게 기적이었다. 평상시라면 꿈나라에 있을 그였지만 오늘은 웬일로 이 이른 시각부터 두 눈이 초롱초롱 빛이 났다.
“저야 뭐 항상 그러니까요. 꽃따리 오빠야말로 일찍 일어나셨네요?”
인사를 주고받으며 유아가 어느 작은 방에 들어섰다.
문을 여는 순간 시하루의 잔뜩 긴장한 표정이 그녀를 알아보기 무섭게 안도로 바뀌었다는 건 기분 탓일까?
“잘 찾아왔네.”
“매일 아침 오는 곳인데요. 뭐. 아, 그러고 보니, 밖에 이안이 돌아다니던데요?”
기특하다는 듯 웃으며 말하는 그에게 그게 뭐 어려운 일이냐는 듯 유아가 대답했다.
그러다 방금 전. 이곳으로 오면서 목격한 이상한 장면을 떠올리고는 그것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하하. ‘돌아다닌다.’라……. 제대로 하고 있나 보네.”
유아의 ‘돌아다닌다.’는 말에 시하루가 웃었다.
말이 살짝 이상했지만, 그녀가 그렇게 표현을 한 이유는 이안의 행보가 마치 목적지 없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멍하니 계속 같은 자리를 돌고 있던데요?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평상시에도 이상한 이안이었지만 그동안의 이상함을 뛰어넘는 행동에 유아가 걱정된다는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그거 내가 시킨 거야.”
아니. 이제는 시킬 게 없어서 그런 쓸데없는 짓까지 시키다니.
이안의 편리함을 최근에서야 알게 된 그녀였지만, 그것은 너무했다고 생각했다.
“어제 도대체 언제 잔 거야?”
“해시(오후 9~11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듣자하니 남들은 이 궐에 남기 위해 밤을 세웠다던데…….
시하루는 너무도 당당히 일찍 취침했다는 걸 밝히는 그녀가 야속했다. 이 경합을 할 마음이 정말 없는 거 아니야?
“너무하네.”
상처받았다는 연기를 펼치는 시하루 덕분에 일찍 온 유아는 심심치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더 흐르자. 늘 그렇듯 아침 조회를 위해 찾아온 대신들이 하나둘 방 안으로 들어왔고, 각자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서서히 자리들이 채워져 가고 있는데 희한하게도 간택전에 참가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해 놓았던 자리에 앉아 있는 건 여전히 유아 하나뿐이다.
이번 간택전에 참가하는 여인들은 모두 지금 이 방 안에 있는 대신들의 딸이다. 계속 시간이 가고 있음에도 방문이 열릴 생각을 않자, 그들도 긴장된다는 듯 표정이 굳어갔다.
“이제 시간이 되었습니다.”
“잠시만요 전하. 제 딸아이가 안 올 리가 없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면…….”
“시간은 지키라고 있는 거다. 약속하지 않았나.”
하나도 아니고 전원이 지각이라니. 이건 좀 수상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얌전히 자리에 앉아 제 할 일을 하고 있던 유아 역시 뭔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다들 너무 밤늦게까지 해서 늦잠이라도 잤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물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원 늦잠이라니 이건 말이 안 됐다.
게다가 다른 이라면 모를까. 월향의 성격이라면 아마 잠을 한숨도 자지 않았을 테니 늦잠 잘 리가 없었다.
“다른 분들은 왜 안 오시는 거예요?”
그녀의 질문에 시하루는 그저 미소로만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가지고는 유아가 궁금해하는 것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되지 못했다.
“그럼 이제 이 경합은 어떻게 되는 건데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포기한 그녀가 다른 질문을 했다.
“다른 이들은 심사조차 할 수가 없잖아. 할 수 없지 뭐.”
뭔가 억지 같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다 맞는 말이라 대신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일단 도대체 다른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유아는 문가로 다가갔다.
그러자 문밖. 그들이 있는 장소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엄청나게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거리가 거리인지라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대충 여성의 높은 고함소리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간간이 ‘비켜!’ 라던가 ‘어디야!’ 등의 대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그것들 가지고 밖의 상황을 예측하기는 힘들었다.
“밖이 왜 저렇게 소란스러워요?”
“글쎄.”
이미 이유를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그는 끝까지 대답을 해주지 않으려 했다.
할 수 없이 혼자의 힘으로 그 소음의 원인을 찾고자 나선 유아가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말했다.
“익숙한 비명도 들려오는 거 같은 데요?”
“익숙한 비명이라니?”
“이안이 꽃따리 오빠한테 혼날 때 내는 우는 소리라던가.”
어렴풋이 이안의 비명(?)이 들려오는 것이 아무래도 문밖의 상황은 희안궁의 여인들과 이안의 접전이 펼쳐지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왜 아무 관계 없는 이안과 그들이?
“이신. 이제 되었으니 그만 들어오라고 해.”
이신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가 다시 조회실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의 뒤에는 씩씩거리는 여인들이 줄줄이 따라 들어왔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저들이 늦어놓고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각자 그들의 손에는 팔에 몇 번을 휘감아도 남을 만큼의 엄청난 길이를 자랑하는 새끼줄이 들려 있었지만, 제대로 치장을 한 걸 보면 늦잠을 잔 거 같지는 않아 보였다.
“저희는 분명 제시간에 말씀하신 장소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어디에서 기다렸지?”
겁을 상실한 건지 다짜고짜 따지기부터 시작한 여인들에게 시하루는 여유롭게 질문했다.
“어디긴요! 중앙궁의 편전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내가 언제 거기서 모이라고 했나?”
약간은 비꼬는 목소리다. 그에 더 발끈하는 그들이다.
“하지만 전하께서 어제 분명히 조회하는 곳이라고……!”
“난 ‘매일 아침조회가 열리는 곳’이라고 했지 편전이라고 한 적은 없는걸?”
별생각 없이 들으면 같은 말 같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어딘가 다른 말이었다.
중앙궁의 편전이 조회가 열리는 곳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옳았다.
애당초 그곳은 조회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였기 때문에 궐 안의 각 기관의 설명을 봐도 중앙궁의 편전에 조회실이라는 부가설명이 따랐다.
하지만 실제로 편전은 사용되지 않았다. 가뜩이나 시하루가 조회를 싫어하는데 굳이 자신의 방에서 멀리 떨어진 편전까지 갈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주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 거리는 핑곗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것을 없애고자 이신은 굳이 편전이 아닌 시하루의 방에서 가장 가까운 방을 고쳐 그곳을 조회실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 편전은 ‘조회를 하는 곳’이었지만, 실제로 ‘조회가 열리는 곳’은 아니었다.
“완전 치사하네…….”
유아의 입에서 비겁한 수를 쓰고도 즐거워하는 시하루를 향한 비판이 흘러나왔다.
그러다 너무 일이 그의 의도대로 흘러간 것에 대해 미심쩍다는 듯 그녀가 질문하기 시작했다.
“잠깐. 이분들의 아버지들은 전부 고위 대신들이신데 조회실이 편전이 아니라 이 방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주의사항에서 말하고 있잖아. 경합기간 동안 외부인 출입금지라고. 사실 부정은 핑계였어. 괜히 찾아와서 위치 일러주면 곤란하니까.”
평상시에는 그저 무능하고 멍청하게만 보였는데, 이리 머리를 굴리는 그를 보니 또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약간 무섭게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다려도 사람들이 오지 않는데, 돌아다니는 궁녀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일부로 이안을 편전 주위를 맴돌게 시킨 거 아니야. 그 녀석이 보인다면 당연히 쫓아가겠지.”
“사기다. 이건 사기야.”
이신 역시 유아의 말에 동의하는지 곁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물론 시하루의 의도대로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었지만 스승의 입장으로 볼 때는 공정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지금 공정이 문제야?!”
언젠가 한 번 들어본 적 있는 대사를 외치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이들도 한마디씩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거 같았지만 시하루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듣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자. 이제 됐으니. 경합과 관련 없는 이들은 나가보아라. 아, 그리고 일단은.”
다른 이들은 찝찝함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저 혼자만 마무리 짓고 되었다 말하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하랴.
그나저나. 일단은? 또 뭐가 있는데?
“혼례부터 잡자.”
그 말에 유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지금 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오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안 나오나 했다. 앙칼진 목소리가 방 안을 가르고 들어왔다. 물론 그 목소리의 주인은 월향이었다.
평소 그녀가 난리를 부릴 때면 눈치를 보던 다른 이들도 오늘은 웬일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그 뜻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나갈 수는 없습니다!”
“약속하지 않았나? 설마 지금 왕과의 약속을 없던 일로 하자는 건 아닐 테고. 분명히 경합 전에 지면 곱게 나가기로 했는데?”
다 된 마당에 왜 재를 뿌리는 행동을 하느냐는 반응이다.
자신이 이기면 된다 생각해서 일단 무작정 약속을 했지만, 그것이 이렇게 적용될 줄 몰랐던 그들은 말문을 잃었다.
“월향. 만일 그대가 이겼다고 해도, 이 약속을 없던 것으로 했을까?”
시하루의 말에 월향이 움찔하더니 살살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전하. 만일 제가 이 같은 상황이었다면 전 전하의 마음을 혼자 독점할 수는 있더라도 아마 불편해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은 잘하는군.
그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닌지 월향의 뒤에 있던 이들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얘가 왜 이래?!’ 이런 시선이 월향에게 쏠려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에 굴하지 않았다.
“그대들이 모르나 본데. 이 경합이 목적은 유아가 나를 독점하려는 게 아니라, 내가 유아를 독점하려고 한 거야. 가뜩이나 잘 보여야 하는데 그대들 때문에 기본 점수가 깎이고 있잖아.”
“죄송하지만 이렇게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저희도 일단 이 나라의 후궁이란 말입니다.”
답답한 건지 시하루가 이신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신도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염려한 건지 살짝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한 명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한 번에 고위 대신들과의 마찰은 그에게도 좋지 않았다. 이를 알고 있는 월향이었기에 그녀는 물러설 생각이 더더욱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진유한이 있었다면 그녀와 함께 시하루를 더 몰아붙였을 테지만 얼마 전의 일로 인해 근신 중인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대들은 나랑 혼례를 올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지를 받은 것도 아니다. 궐에서 살면 다 후궁인가? 내가 언제 그것을 인정한 적이 있던가? 그게 그대들이 후궁이라 자칭하고 다니는 걸 귀찮아서 내버려둔 내 잘못이라 이거지? 쓸데없는 소리 말고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라.”
구구절절 옳은 말에 여기서 더 우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반 정도는 포기한 듯 보였고 반은 여전히 버틴다기보다 짜증이 나 보였다.
“그럼 왜 저희에게 이런 걸 시키신 겁니까?!”
한 여인이 자신의 손에 들린 새끼줄을 내보이며 외치자 다른 이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열심히 했다는 둥. 쓸데없는 일을 해서 손만 거칠어졌다는 둥. 이런 손으로 어떻게 시집을 가느냐는 둥. 또다시 시끄럽게 궁시렁 대는 그들이다.
“아. 그걸 하라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신. 그걸 가져와.”
그러고 보니 잊을 뻔했다는 말을 하며 시하루는 이신에게 준비해둔 무언가를 가져오라 지시했다.
곧 그들의 앞에 놓인 것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천이 덮인 바구니였고, 그들은 별 기대 않는 눈치로 내용물을 기다렸다.
어제의 일도 있고 하니, 바구니 안에 또 볏짚 따위가 들어 있지 않을까 했지만 의외로 그 안에는 네모난 금괴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래도 일단 만든 건데, 노력한 만큼의 가치는 해야지. 이렇게 하자. 각자가 열심히 만든 새끼줄의 중간마다 될 수 있는 한 많이 이 금괴를 묶어라. 딱 그만큼만 너희가 가져갈 수 있다. 뭐, 위자료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네.”
자. 이게 어떡할까.
계속 우기는 게 이익일까? 아니면 이쯤에서 물러서고 최대한 챙겨갈 수 있는 걸 챙겨가는 게 이익일까?
서로 눈치를 보는 여인들이다. 그러다 한 여인을 시작으로 그들은 곧 우르르 몰려나가더니 자신들이 만들어온 새끼줄에 열심히 금괴를 묶기 시작했다.
최대한 많은 금을 가져가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의 모습은 무서웠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시하루가 한심하다는 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래서 안 된다는 거야. 왕후 이전에 후궁이. 그저 욕심만 많아서 흥청망청 쓰고. 후궁은 뭐 백수인가? 그저 편하게 살 생각만 하고. 직책이 있으면 그에 맞게 행동하고 모범을 보여야지.”
“나중에 유아님께 방금 전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이신의 끼어듦에 시하루가 움찔했다.
분명 비웃겠지. 비웃을 거야!
“그럼 유아님께서 말씀하시겠죠. ‘시하루님이나 잘하세요.’라고.”
“시끄럽다 이신. 나 오늘 기분 좋은데 망치지 마.”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한 이들과 달리, 아까부터 미동조차 않는 여인이 있었다.
어째 조용한 게 오히려 불안한 월향이다.
“그대는 챙겨가지 않아도 괜찮겠나?”
그냥 맨손으로 나가도 되냐는 질문에 월향이 마지막 수라는 듯 고개를 들어 말했다.
“송구하지만 저는 여전히 나갈 생각이 없습니다.”
“……강제로 내쫓기를 바라는 건가?”
“아버지께 들었습니다.”
아버지란 말에 시하루가 움찔거리는 것으로 반응을 보였다.
진유한. 그와 약속한 걸 월향 역시 아는 건가? 만일 그렇다면 더 물러서려고 하지 않을 텐데…….
“저희 소월가의 가주권을 대가로 이 일을 벌이셨다 들었습니다.”
“그랬지. 내가 이겼으니 그 소월가의 가주권 역시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이 약속이었다.”
“그렇게 큰 대가를 내놓으면서까지 제가 얻는 게 고작 이 금괴라니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인 진유한 못지않게 성가신 상대였다. 성격이 나쁜 건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요. 고집불통에 욕심까지 많았으니.
지금까지 자신에게 이렇게 막무가내로 덤빈 자가 없었기 때문에 시하루의 입장으로서는 난감했다.
대응방법을 찾기 위해 말이 없는 것을 몰아붙이는 데 성공했다고 착각한 월향이 싱긋 웃으며 한술 더 뜨기 시작했다.
“귀족회의에서 말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저희 소월가를 협박하셨고. 고작 금괴 몇 개로 억지로 가주권을 사려고 하셨다고 말입니다.”
“글쎄. 그 가주권이 원래 그대들 것이 아닌 걸로 아닌데?”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다른 귀족들이 겨우 그런 사소한 걸 중요시하겠습니까? 그들은 그저 전하께서 저희의 일에 개입하셨다는 그 사실 하나만이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나오면 나와의 약속이 다른데?”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과연 진유한의 딸.’이 아니라 월향. 그녀가 아버지보다도 더한 인간이라는 것을.
“대가에 합당한 걸 받아야겠습니다. 저는 왕후의 자리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후궁? 그 역시 못 한다고 해도 좋습니다. 이 궐에 남을 수 있게만 해주십시오.”
왕후도 아니고 후궁도 아닌데 굳이 궐에 남겠다는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지만, 아무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하루는 그 여자를 궐 안에 두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할 수 없지.
“할 수 없지. 약속을 지키지 않는 네 아비와 담판을 지어야겠다. 하지만. 그는 현재 근신 중이니 그 기간을 다 채운 뒤에 하겠다. 너는 그때까지 희안궁에서 대기하거라.”
시하루 나름대로 시간을 벌어보겠다는 말이다.
반면. 그의 생각을 모를 월향은 그저 자신의 말이 그에게 어느 정도 먹혔다는 생각에 표정이 밝아졌다.
바락바락 소리 높여 대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를 올렸다.
“하아……. 이제야 좀 조용하네.”
월향이 나가기 무섭게 시하루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씨 집안의 부녀가 양쪽에서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으니 정신을 제대로 차리기 힘들었다.
하지만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곧 있으면 진유한이 올 것이고 삼자. 아니, 사자대면이 일어날 테니 말이다.
이번이 마지막 단판 승부가 될지도 몰랐다. 그는 마음가짐을 단단히 해야 했다.
“아. 잘 됐다. 이신. 이 틈에…….”
시하루의 부름에 이신이 재빨리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시하루가 자신에게 다가온 그에게 말하기를.
“그러니까 일단 혼례 날부터 빨리 잡자.”
순간 얼이 빠져 그를 바라보던 이신이 유아를 바라보았다. 멍하니 서 있던 유아 역시 어이없다는 듯 또 한 번 한숨을 내쉰다.
아니 저 남자가 진짜……. 그러니까는 또 뭔데?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그를 한심하다는 듯 노려보는 시선이 많았지만, 지금 시하루에게 진유한과 진월향의 퇴출보다도 시급한 문제는 유아와의 혼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