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궁안에 잠들어 있는 꽃-36화 (36/44)

三十七花 * 꽃의 이름을 아는 자 (4)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얼마 전에 희안궁의 인간 중 하나와 만났다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네.”

기센 희안궁의 여인들이 한 번 더 궐 안을 뒤집어 놓을 거라는 시하루의 예상이 빗겨갔다. 빗나갔다.

요즘 들어 희안궁은 너무나 조용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너 요즘 무슨 일을 꾸미는 거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보통은 ‘괜찮아? 무슨 일 안 당했어?’라고 묻는 게 정상 아니에요?”

조금은 자신도 걱정해 달라는 듯 이랑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나 시하루. 그는 그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네가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성격이 아니잖아.”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잘 알고 계시네. 재미없게.”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한 이랑은 그에게 ‘그날’을 설명하기 위해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그 상황에 맞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건지 결국 그녀는 약간의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일은 무슨. 그냥 점잖게 ‘대화’ 정도만 나누었어요.”

그 말에 궁인들이 눈치를 보며 작게 웃기 시작했다.

월향과 이랑의 만남은 잠잠했던 궐 안의 최고의 화젯거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만남을 처음부터 끝까지 경기 관람하듯 지켜본 그들은 알고 있었다.

‘점잖은 대화’가 아닌, 그것은 이랑이 일방적으로 상대를 괴롭히고 있다는 걸.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이제는 못 이기겠네.”

장기판을 내려다보던 시하루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둘은 틈틈이 장기를 두었고, 결국 이랑이 그를 거뜬히 이겨버리는 날이 오고야 만 것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게 내가 너한테 이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거였는데…….”

기가 죽은 그의 목소리와 함께 이랑의 쾌활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래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데…….”

상황이 역전됐다.

이제 시하루가 이랑에게 ‘도전’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오늘만 해도 이미 세 판을 내리 진 그였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네 번째 판이 시작되었고 다시 아까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음……. 제가 좀 장난 같은 걸 쳤어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

좋아하는 것은 책과 공부. 그렇다 보니 애늙은이라는 소리까지 듣는 그녀가 장난이라니.

매우 신선했지만, 왠지 무섭기도 했다.

보통 ‘장난’이라고 하면 살짝 기분이 나쁜 정도이며 귀엽게 봐주는 것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그게 소이랑 이라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구체적으로 듣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무섭다.”

그의 말에 이랑은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 씨익 웃고 넘어갔다.

그리고 이번 판 역시 자신이 이길 거라는 확신이 들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제 슬슬 화를 참지 못 하려나…….”

지금 그녀는 어디 사는 누군가의 화가 폭발하기를 아주 여유롭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래서. 이제부터는 뭘 할 건데?”

시하루는 예전부터 자신도 계획에 포함시켜 달라 그녀를 졸랐지만, 그의 바람은 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여, 이번에는 미리 계획이라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이랑이 말하기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픈 척을 하려고요.”

* *

과연 그녀의 예상대로. 폭풍전야의 고요함이라고 했던가.

그동안 조용했던 희안궁이 누군가의 등장으로 인해 시끄러워졌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오셨습니까. 아버지.”

방에서 나온 월향이 자신을 찾아온 진유한을 맞이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듣자하니 너만 따로 희수궁에 불려갔다고 하던데. 왕후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느냐.”

그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그동안 딸의 안부보다 중요한 문제를 묻기 시작했다.

그런 아버지의 야속함에 서운할 만도 했지만 이미 익숙해 보이는 월향은 표정 변화 없이 시녀가 내어 온 차를 따랐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별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 말이 맞았다. 사실 둘 사이에는 많은 이야기가 오가지 않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좀 더 자세히 말해 보거라.”

시원치 않은 대답에 진유한이 답답하다는 듯 닦달을 했지만, 월향의 말은 사실이다.

꽤 오랜 시간 동안 희수궁에 있었지만, 그중 4할 정도는 자신이 늦은 것이고 5할은 이랑이 독서를 한 시간이었으니. 실질적으로 그들이 ‘대화’라고 나눈 것은 1할도 채 되지 않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왕후……. 저번에 봤을 때 묘하게 신경 쓰인다 했는데. 확실히 처리해야 했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러고 보니…….”

자신의 불찰이라며 진유한이 중얼거리자 뭔가 생각난 듯 월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갑자기 분노가 밀려오면서 그녀는 구석에서 어느 상자를 가져와 탁자 위에 쏟아 부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게 다 무엇이냐?”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왕후! 그 계집이! 감히 저에게 이런 장난을 치지 뭡니까!”

월향이 내놓은 종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진유한이 ‘장난’이라는 말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종이 다발 중 한 장을 펼쳐보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편지를! 매일 같이 저에게 보내지 않습니까!”

그녀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만 진정하거라. 많고 많은 후궁 중. 그 왕후가 너에게만 이러는 것은 신경이 쓰이기 때문…….”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하던 진유한의 말이 멈추었다. 그의 시선은 종이의 아랫부분에 고정되어 있었고. 손은 눈에 보일 정도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버지? 왜 그러세…….”

아버지의 반응이 걱정된 건지 월향이 물어왔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여전히 시선은 종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 하하…….”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버지?”

웃고 있었지만, 그것은 즐거워서가 아니었다. 무언가를 향한 두려움이 겉으로 새어나오는 웃음과도 같았다.

가만히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은 진유한은 여전히 얼이 빠진 듯 보였다.

그는 종이의 아랫부분에 선명하게 찍힌 어느 부분을 손으로 쓸며 중얼거렸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소월가의 인장(印章)이다……. ‘그날’ 내가 찾지 못한 인장이야…….”

아버지의 중얼거림에 월향은 여전히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

자신의 가문인 소월가를 상징하는 인장이 왜 그 종이에 찍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 하지만 아버지. 그동안 소월가와 관련된 모든 곳을 뒤져도 찾지 못한 인장이 아닙니까? 그게 어떻게 여기에…….”

긴 침묵이 시작됐다.

진유한. 그는 지금 머리가 복잡했다. 그에게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는 문제가 있다.

“소유아가 살아있다.”

소월가의 정통 후계자가 살아 있다는 문제는 그에게 있어서 잊고 싶은 문제.

언젠가는 그 문제가 자신을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작은 가능성에 불과했다.

설마 그날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 아이가 살아있다는 게 세상에 알려지면 우리는 소월가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어!”

지금까지 누려왔던 모든 것을 잃을지 모른다는 말에 월향은 혼란에 빠졌다.

그동안 소월가의 성을 물려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얼마나 무시를 당했던가. 십 년. 이제야 주위 시선이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성을 물려받지 못한 정통 후계자가 아니라고 해도. 자신은 현존하는 소월가를 이을 마지막 후계자였다.

자신의 뒤에 있는 ‘소월가’ 그 이름 하나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 인장을 찾아야 한다. 이 편지를 왕후에게서 받은 게 틀림없겠지?!”

“네.”

인장(印章)의 의미는 아주 크다.

왕에게 옥새가 있다면 귀족 가문에는 인장이 있다.

소월가의 성을 물려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몰아내려는 세력들을 막으려면 그것에 맞게 소월가를 바꾸면 되는 것이었다.

그는 현재 가주인 자신에게 맞게 소월가의 이름을 ‘진월가’로 바꾸는 시도를 여러 차례 했었지만, 이는 늘 무산되었다.

하지만 인장이 있으면 말이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진유한. 그는 지난 십 년 동안 소월가의 인장을 찾아다녔다.

“왕후가 보낸 편지에 이 인장이 찍혀 있다는 건 분명 그 어린 왕후가 소유아와 관계가 있다는 거다. 뒤에서 그 아이를 돕고 있는 게 분명해.”

그동안 찾지 못했던 단서가 나왔으니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좋게 생각하면 이 문제만 해결하면 앞으로 소월가는 자신의 것이었으니. 이는 마지막 전쟁이었다.

“그 왕후를 만나러 희수궁으로 가야겠다.”

“네……. 아버지?”

배웅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던 월향이 자리에 굳은 진유한을 불렀다.

그의 표정은 아주 창백해 보였다. 이는 소유아의 생존에 관련된 단서가 나왔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소유아. 그 아이가 살아 있을 거라는 건 늘 염두해뒀기 때문에 이제 와서 나타난다 해도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 어린 왕후가 소유아를 돕고 있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일부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최악의 경우를 예상할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왕후. 그녀가 소유아의 본인일 경우!’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맞아 떨어지는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냥 무시할 수 없는 가능성이었다. 아니. 어쩌면 현존하는 가능성 중 가장 큰 가능성.

궐 안에 있으면 손을 댈 수가 없다. 물론 그 밖에도 문제가 많았지만.

* *

“희수궁에 출입이 잦은 여인이 있는가? 왕후가 자주 찾는 이라든지…….”

진유한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희수궁의 정문을 지키는 병사에게 물었다.

질문을 받은 병사는 생각에 잠기더니 곧 누군가를 떠올린 듯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네. 두 분이 계십니다.”

그제야 그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펴졌다.

그는 소유아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서를 지니고 있을 이랑을 만나러 희수궁을 찾아왔었다.

하지만 왕후께서 몸이 좋지 않으시기 때문에 누구도 만날 수 없다는 말을 들을 뿐. 열릴 생각을 않고 꽁꽁 잠겨버린 희수궁의 정문 앞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대로 돌아가기는 그렇고. 혹시 몰라서 희수궁의 정문을 지키는 병사에게 물어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명은 어린아이였고. 한 명은 왕후마마와 비슷한 연령대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분명 소유아가 왕후와 관련된 인물이라면 희수궁에 자주 출입을 했을 거라 예상했다.

두 명의 여인이 해당되었지만 한 명은 어린아이라고 하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터.

그렇다면!

“아. 그분이라면 서하연의 꽃이라고 들었습니다.”

“맞다. 유월가 도련님의 약혼녀라고도 했던 거 같은데?”

진유한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그 어린 왕후도 서하연의 꽃이라고 했다. 희수궁을 자주 찾는 여인 역시 서하연의 꽃이니. 둘은 잘 알고 있는 사이일 것이다.

결정적으로 유월가 도련님의 약혼녀. 소월가와 유월가가 얼마나 긴밀한 사이였나! 유월가라면 소월가의 후계자를 도와주고도 남았다.

“서하연이라…….”

지난 십 년 동안 서하연에 숨어 있었다면 못 찾는 게 당연했다. 서하연에는 접근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서하연에 들어갈 수 없을뿐더러. 접근조차 어려워 보였다.

소월가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자신의 뒤를 따르는 검은 복장의 심복을 바라보며 명령했다.

“모든 인원을 동원해 서하연을 감시해라. 누가 서하연에서 나왔고. 누구를 만났는지 전부.”

“예. 가주님.”

‘절대 그 아이가 소월가의 장로들을 만나,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알리지 못하도록!’

자신의 손에 소월가의 인장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소유아는 죽은 사람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먼 지방에 머물고 있던 장로의 편지에 의해 단 삼 일 만에 무너졌다.

‘소유아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곧 찾아뵙겠습니다.’

[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 두 눈으로 그 아이의 시신을 확인했습니다. ]

일단은 찾아오겠다는 장로들을 진정시켜야 했다. 재빨리 답장을 보냈지만 그들의 성격이라면 분명 오고도 남을 것이다.

안 그래도 진유한. 그가 소월가의 가주자리에 오를 때도 못마땅하게 여기던 이들이었으니 말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이야! 서하연을 출입하는 여인들은 모두 감시했는데! 장로들 쪽은 어떻게 된 건가! 그쪽 역시 감시를 붙이지 않았나!”

“장로 쪽에도 눈에 띄는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계속 18살 정도 되는 여인의 출입을 감시했지만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 말에 진유한이 멈칫했다.

“잠깐. 18살 정도의 여인?”

“예. 그 후계자가 살아 있다면 올해로 18살일 거라고 하셔서…….”

“……그럼 그밖의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은 없었느냐는 질문에 심복이 눈을 질끈 감고 생각에 잠겼다. 곧 떠오른 이가 있는 건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손녀딸로 추정되는 어린아이 한 명은 있었지만, 그 외에는 없었습니다.”

“손녀라니.”

“분명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봤다고 합니다.”

손녀? 장로에게 손자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손녀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순간. 진유한의 머릿속에는 전에 들은 어떤 말이 스쳐 지나갔다.

‘네. 두 분이 계십니다.’

‘한 명은 어린아이였고. 한 명은 왕후마마와 비슷한 연령대의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멍청한 것들!”

그 아이가 분명했다. 왕후가 희수궁에 그 아이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벌을 각오하고 희수궁에 들어갈 수밖에 없어.”

* *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미 전에도 한 번 막무가내로 희수궁의 정문을 뚫은 적이 있던 그에게 두 번은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저번에는 호랑이로 불렸던 유시후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으니 누워서 떡 먹기였다.

“이곳은 왕후마마께서 머무시는 궁. 희수궁입니다!”

“급한 일로 왕후마마를 뵈러 왔으니 비키거라!”

궁녀들이 진유한의 앞을 막아서며 필사적으로 그의 출입을 막았지만, 역시 여인들에게는 무리였다.

자신을 막는 이들을 모두 뿌리친 그는 어느새 정원을 지나 희수궁 안으로 들어섰다.

순식간에 왕후의 방 앞까지 당도한 그는 차마 그곳까지 그냥 들어갈 수는 없었는지 문 앞의 궁녀들에게 말했다.

“고하거라.”

“하, 하오나…….”

“내가 뵙기를 청하고 있다고 어서 고하거라!”

궁녀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문을 열 수 없는 사정이라도 있는 건지 그들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것은 아니…….”

“안 된다니! 마마께서 몸이 좋지 않으시다는 건 들어 알고 있다. 몇 가지만 여쭙고 바로 돌아갈 것이니…….”

다시 정문에서의 상황이 반복되는 듯했다.

이대로라면 방문까지 그냥 뚫고 들어올 기세였고, 그 사실이 시하루의 귀에 들어가면 분명 큰 문제가 되어 그에게 돌아가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물러설 수 없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확인하고 넘어가야 했다.

두 궁녀를 뿌리친 그의 손이 닫혀 있는 문을 향했다. 그리고 그 문을 열기 위해 있는 힘껏 옆으로 당기려는데, 때마침 안쪽에서 누군가에 의해 문이 열렸다.

“왜 이리 밖이 시끄럽나.”

희수궁의 주인. 왕후인 이랑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어째서인지 그 방에서 시하루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나오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진유한이 놀라면서도 열린 문틈으로 재빨리 안을 들여다보았다.

텅 빈 방.

‘도대체 왕후는 어디에 있는 거야?!’

“내가 분명 희수궁에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진유한. 그대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

화가 난 듯 보이는 시하루의 눈이 진유한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그제야 지금 이 상황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진유한은 그럴싸한 변명거리를 생각해 내기 위해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와, 왕후마마께서 몸이 좋지 않으시다 하여. 걱정되어 왔사옵니다.”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감히 왕후의 궁을 이리 멋대로 들어오다니.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구나.”

“저, 전하…….”

“지금은 바삐 가야 할 곳이 있으니 지금 여기서 너를 벌하지는 않겠다. 소월가에서 대기하고 있거라.”

이렇게 딱 걸려버린 이상.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이번만큼은 물러설 수밖에…….

“……예. 전하.”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일은 계속해서 꼬여가기만 했다.

* *

“유아.”

시하루가 자신의 방에 들어섰다.

밝은 방 안과 달리 어두운 휘장으로 둘러싸인 침상으로 다가간 그는 약간 걱정스럽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꽃따리 오빠가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나요.”

“안 괜찮아 보이네.”

살짝 눈을 뜬 이랑이 잠긴 목소리로 힘겹게 말하자 시하루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들고 왔던 책을 침상 옆 탁자 위에 올려놓은 그가 바닥에 앉아 침상에 기대었다.

“아픈 척할 거라더니 진짜 아프면 어떡해?”

“그냥 약간 감기 기운이 있는 거뿐이니 괜찮아요. 내일이면 말끔하게 나을 거라고요.”

앓고 있으면서도 그냥 넘어가는 일 없이 하나하나 토를 다는 그녀였다.

“책 읽고 싶다고 해서 가져왔어.”

“이안 시키지 왜 직접 다녀왔어요?”

그세 시하루에게 물이 들어버린 건가. 이랑도 슬슬 이안의 편리함을 즐기고 있었다.

“희수궁이 소란스럽더라고. 네 말대로 진유한이 무리하게 희수궁으로 들어왔어.”

“지금쯤 나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을 테니까요.”

그 말에 이랑이 조용히 웃었다.

“이 천유국에서 가장 출입이 적고. 안전하고. 거기에 조용하기까지 한 곳이 어딘지 알아요?”

“음……. 출입이 적고. 조용하다……라. 영희궁? 아니지. 거긴 보안이 별로여서 안전과는 거리가 멀 텐데.”

혼자 고민에 빠진 그를 돕기 위해, 이랑은 바로 답을 알려주었다.

“정답은 중앙궁. 꽃따리 오빠의 방이에요. 등잔 밑이 어둡다고들 하죠.”

“하하. 희수궁에 네가 없다는 걸 알게 됐으니 실망이 크겠는걸.”

“그럴까 봐 미리 아주 중요한 선물을 보낸 거잖아요.”

이랑의 말에 시하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침상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그러네. 집에서 대기하라고 했으니 지금쯤이면 받지 않았을까?”

시하루. 그의 말대로.

곧바로 집으로 향한 진유한을 기다리고 있던 건 익숙한 작은 봉투였다.

가뜩이나 궐 안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소란스러운 집 안 분위기에 그는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화풀이할 대상을 찾던 그에게 한 하인이 다급히 다가왔고, 곧 어느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누가 보냈다고?”

“왕후마마를 모시는 궁녀라고 했습니다.”

희수궁에 없는 왕후가 보낸 편지라니.

일전에 자신의 딸. 월향에게도 장난 편지를 보낸 왕후였다. 자신에게도 그것을 보낸 건가?

의심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는 봉투를 열었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장난 편지가 들어있어야 했지만, 봉투 안 내용물은 처음 보는 종이었다.

“이게 뭐…….”

요즘 들어 편지만 보면 굳어버리는 진유한이다.

그의 손에 들린 종이의 맨 위에는 ‘각서’라는 글자가 당당히 편지가 아님을 증명해주었다.

장난 편지 때와는 달리 중간에는 글자들이 있었고, 아랫부분에는 익숙한 이름 두 개와 익숙한 두 개의 도장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왕의 이름 시하루와 왕후의 이름 소이랑. 그리고 각각 옆에 찍혀 있는 붉은 모양.

왕의 옥새와 최근에 많이 본 인장.

그렇다. 그것은 예전에 시하루와 이랑이 ‘경합’이라는 이름 아래 써둔 문서.

천유국의 왕과 왕후가 적은 각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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