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궁안에 잠들어 있는 꽃-35화 (35/44)

三十六花 * 꽃의 이름을 아는 자 (3)

“월향 님. 월향 님!”

방 안의 인물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아무리 밖에서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결국, 시녀는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냐!”

밖에서 몇 번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대답이 없을 때는 언제고. 갑자기 시녀가 방에 들어오니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한 여인은 더욱 짜증을 내며 반응했다.

“아……. 월향 님 앞으로 편지가 와서…….”

“편지?”

‘편지’라는 단어에 자동으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잠시 방 안의 한쪽 구석에 시선을 주던 월향이 시녀의 손에서 편지를 낚아채었다.

편지의 겉봉을 살펴봤지만 역시나 보낸 이의 이름 따위 적혀 있지 않았다.

“도대체 뭐냐고!!”

거칠게 편지의 겉봉을 뜯어낸 월향이 안에 있던 새하얀 종이를 꺼냈다. 이제는 질렸다는 듯 한숨과 함께 편지를 펼친 그녀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누구야. 도대체 누가 계속 이런 장난을 치는 거지?!!”

그녀의 손에 들린 하얀 편지에는 ‘내용’이 없었다.

새하얀 종이 위에 적힌 것은 오직 맨 윗부분의 ‘월향 님께.’라는 글자와 보통 편지를 다 쓴 후에 아래쪽에 찍는 인장이 전부. 다른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마치 상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목적이 담겨 있는 듯. 누군가의 장난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편지였다.

“감히 나를 상대로 이런 장난질을 벌이다니……. 아직도 못 찾았어?!”

이미 그러한 편지를 한두 통 받은 게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심기가 불편한 그녀는 손에 들린 편지를 꾸기는 것으로도 모자라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아니, 매일 한 통씩 오는데 범인 찾는데 왜 이리 오래 걸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들 하지만 월향에게 내용 없는 편지를 보내는 이의 정체는 여전히 미궁 속에 빠져 있었다.

이미 그러한 편지들이 하나둘 모여 어느새 구석에 수북하게 쌓여가고 있었다.

한편. 나날이 짜증이 더해가는 월향을 제외한 다른 궁들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요즘 들어 궐 안이 조용했다.

문제라면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 게 문제였다.

치이는 삶에 익숙해져 버린 이안은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가 당황스러웠다.

웬일로 시하루는 자리에 앉아 일에 몰두했고 그런 그의 모습에 자신은 어찌해야 하는지 난감하기만 한 이안은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안.”

“예?!”

조용한 분위기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데 갑자기 말을 걸어오니 놀란 모양이다.

놀라는 그와 달리 여전히 제 일에 몰입 중이던 시하루가 잠깐 고개를 들고 말했다.

“피곤해 보이는 데 그만 들어가서 쉬지?”

“예에?!”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정리할 테니까. 그만 나가 봐.”

감사하다는 말을 늘어놓아도 모자랄 판에 이안은 고민에 빠졌다.

과연 저 말이 장난 삼아 하는 말인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그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 시선에 시하루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무례하다고 꾸짖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최근 들어 그는 상태가 이상했다.

“왜. 혼자 할 수 있다니까? 못 믿겠어?”

“아, 아니요…….”

불쌍하게도 이안. 그는 이런 호의가 오히려 무서웠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가까워진 거라던데…….

혼자 다 하겠다니 굳이 도와줄 필요가 없었다. 제 할 일이 줄어드니 딱히 할 일도 없었고 그저 멍하니 서 있던 이안은 주군의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왔다.

밖이 아직 어둡지 않은 게, 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이른 퇴궐 시간이다.

이대로 그냥 돌아가는 건 역시 걱정된다는 듯 미련을 못 버린 이안은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 문틈 너머로 시하루를 관찰했다.

“…….”

자신이 나오기 전과 변함없는 자세로 앉아, 묵묵히 서류들을 읽으며 제 할 일에 충실한 그가 보였다.

“……정신을 차리신 건가…….”

역시 세상은 오래 살아봐야 한다더니.

그동안 상사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포기했다면 오늘날 저 인간이 이렇게 바뀌는 모습을 보지 못했을 테니까.

자신이 속해 있던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이안은 갑자기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한편. 이안이 나가기 무섭게 방 안에 남아 있던 시하루는 전보다 더한 집중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오직 시선은 서류와 책들에 고정되었고 붓을 쥔 그의 손은 쉴 새 없이 종이 위를 움직였다.

아마 이신이 그런 그를 본다면 어릴 적 자신의 교육 효과라고 자화자찬을 했겠지만, 그것과는 달라 보였다.

“오늘도 빨리 끝내고 같이 놀아야지…….”

하는 행동은 기특했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 ‘일’이 차지하는 순위는 두 번째였다.

* *

요즘 시하루는 기분이 좋았다.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이랑이 다시 희수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들떠 있었다.

평소라면 일을 미뤄버리고 제 할 일 하다 이신에게 혼나 한꺼번에 했겠지만, 이제는 심지어 ‘미리’ 해 두기까지 하며 궐 안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에게 당한 일이 많던 대신들과 무사들은 이랑이 자신들의 구원자라며 찬양을 했고, 평범한 일상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랑은 그녀 나름대로 직접 궐 안에서 일반 대신의 신분으로는 할 수 없을 나랏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설렘에 들떠 있었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시하루의 성질이 죽었다는 사실에 모두가 하하 호호 웃으며 세상 살 만하다 광고하고 다니는 요즘. 그들과는 다르게 유독 민감해져 있는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그 꼬맹이가 다시 왕후 자리로 돌아온다니요!!”

그동안 잊고 있던 그녀들의 존재. 왕후. 아니, 후궁이 되기 전의 여인들이 지내고 있는 희안궁.

“거기에 그 꼬맹인 서하연의 꽃인 것도 모자라 ‘삼화’이지 않습니까?!”

그래. 이것이 문제였다.

애당초 희안궁이라는 것이 시하루가 공석으로 내버려두고 있는 왕후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귀족들 간 다툼의 결과물.

그들은 공석인 왕후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저들끼리 싸웠지만 정작 시하루는 그들의 싸움을 알고도 방관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직접 왕후랍시고 희수궁을 내어주다니……. 그것도 하필 서하연의 삼화를!

반드시 ‘왕후’가 되지 않아도 됐었다. 다른 누군가가 희수궁을 차지하게 된다고 해도. 계속 희안궁에 머물며 조금이라도 왕의 눈에 들면 후궁자리라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서하연의 삼화가 왕후 자리에 오르면 말이 달라진다.

서하연의 삼화가 왕후가 되면 후궁은 물론이요, 왕은 다른 여인과 혼인을 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서하연의 꽃에 대한 배려라고 불리는 규칙. 과거 천유국의 왕이 삼화에 대한 법도를 요구할 때 서하연에서 대가로 내놓은 조건이었다.

즉. 그 꼬맹이 왕후. 소이랑이 왕후의 자리에 오르면 현재 희안궁에 있는 여인 모두 밖으로 내쫓기는 건 시간문제라는 말이다.

“뭔가 조치를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안 그러면 우리가 위험해져요!”

그러나 이 상황에서 그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그녀들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대비가 있었고, ‘무관심’으로 똘똘 뭉쳐 있던 시하루 역시 그들이 이랑에게 허튼짓하지 못하도록 주시하고 있을 테니까.

“그렇다고 이렇게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할 수 없죠.”

단체 생활이라는 게 그렇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으면, 순식간에 그들 사이에서 ‘서열’이라는 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서열의 가장 위에 있는 여인인 월향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다른 분개하던 여인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설마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아니겠지요. 월향?”

“그럴 리가요. 따지러 갈 생각입니다.”

따지러 가다니.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녀의 말에 몇몇 극소수의 여인들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머지는 서로 얼굴만 바라볼 뿐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는 여럿이고. 그쪽은 하나가 아닙니까.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버리는 게 이득이겠습니까?”

머릿수로 밀어붙여 보겠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뭐? 지금 누구랑 누구를 비교하는 거야. 잘됐네. 이참에 다들 나가라고 해라.”

돌아온 반응은 단호했다.

안 그래도 지금 시하루는 기분이 안 좋았다.

모든 일정을 앞당겨 빨리 끝내놓고 희수궁을 찾았는데, 정작 이랑이 본인이 해야 할 공부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전박대했기 때문.

그래서 얌전히 앞에 자리 잡고 앉아 기다리고 있는 그때. 하필 눈치 없는 이안이 그에게 말을 전했던 것이다.

“하, 하오나 그 아가씨들은 모두 고위 대신들의 따님이시고……. 한둘이라면 모를까 이를 다 무시할 수는…….”

“궐 안이 언제부터 쉼터가 되었지? 머물고 싶으면 방세라도 내라고 하던가. 그냥 숙식 제공해주는 것도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이제는 아주 기어오르지?”

“하오나…….”

“한 번만 더 ‘하오나’라고 해봐. 지금 내 손에 있는 이게 어떻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니까.”

그 협박을 들은 이안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 가더니 슬슬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게. 지금 시하루의 손에 들린 물건이 이랑이 서하연에서 공부 중이던 엄청난 두께의 책이었기 때문.

‘잘못해서 맞기라도 하면 난 제정신 못 차릴지도!’

오늘도 불쌍한 이안은 울먹이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말로는 무서워서 표현 못 하겠고, 얌전히 있는 문에 화풀이할 수밖에 없는 이안에 의해 문은 엄청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봤지? 나 인기 많은 거.”

이안이 나가기 무섭게 시하루가 씨익 웃더니 말했다.

뜬금없이 무슨 자랑을 늘어놓는 건가 싶은 이랑은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곧바로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넌 내가 이렇게 많은 여인에게 인기가 많은데 불안하지도 않아? 계속 책만 보고 있잖아!”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시하루가 이랑의 손에 들린 책을 빼앗아 들고 따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 일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걸요.”

이랑은 시하루에게 지지 않고 오히려 따져 물으며 빼앗겼던 책을 되찾아왔다.

“그래그래. 네 일이나 먼저 빨리 해결해라. 그래야 혼인을 올리든 뭘 하든 하지.”

이들의 사소한 말다툼은 늘 시하루의 체념으로 끝이 났다.

목이 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왕인데 자신이 공부나 책 따위에게 밀린다고 생각하니 자존심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금세 풀이 죽어버린 시하루를 바라보던 이랑은 그제야 끝난 건지 책을 덮으며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걱정하지 마세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무슨 걱정.”

목소리가 퉁명스러운 게 삐친 게 분명했다.

그의 반응을 관찰할 뿐. 별다른 말 없이 옆에 준비되어 있던 새하얀 종이로 시선을 옮기던 이랑이 싱긋 웃더니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제가 할 일 다~ 정리된 후에는 귀찮을 정도로 관심 많이 가져줄게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렇게 나오면 내가 할 말이 없잖아.”

결국, 그 말에 또 넘어가고 마는 시하루였다.

그의 말에 이랑이 또 한 번 웃더니 손에 잡힌 그 종이를 곱게 접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무슨 생각인 것인지 그대로 봉투를 봉해버렸다.

* *

머릿수로 밀어붙이려던 이들은 계획이 틀어지자 희안궁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이안을 통해 단호하게 ‘당장 짐 싸서 나가.’라는 의사를 밝혀온 시하루 덕분에 그녀들은 지금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이미 포기한 몇몇 여인은 짐을 싸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고집이 센 몇 여인들은 아직도 눈치를 보며 희안궁에 남아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몇 남지 않은 여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다음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는 도중. 시녀 한 명이 이랑의 명을 받고 그들을 찾아왔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방금 희수궁에서 전갈이 왔사온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희수궁에서?”

항상 저들끼리 이랑을 말할 때 ‘꼬맹이 왕후’라고 부를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그녀들은 이랑을 무시하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왕후가 직접 말입니까?”

그들은 이랑을 본인은 원하지 않았지만, 주위의 부추김 때문에 왕후의 자리에 올랐고, 성격이 매우 소심해 나서지를 못해 어른들의 꼭두각시처럼 정치에 이용되는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먼저 반응을 보인 건 평소답지 않다는 생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니요. 오히려 잘된 겁니다. 전하가 넘어가지 않았으니 그 꼬맹이 왕후 쪽으로 목표를 바꾸는 것도 좋은 생각인 거 같습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렇습니다. 전하는 무리였으나 그 꼬맹이라면 우리들의 힘으로 얼마든지 끌어내릴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큰 착각이었다.

이랑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지 않았고, 소극적이지 않았으며 남들에 의해 정치에 이용당할 인물이 아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다들 뭐 하십니까? 당장 그 왕후를 만나러 갑시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니요.”

잠자코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시녀가 어느새 기세등등해진 희안궁의 여인의 말을 끊었다. 그러자 그 시녀에게로 시선들이 고정되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왕후님께서 말씀하시길. 만나고 싶은 건 희안궁의 ‘월향’님뿐이니 다른 분들은 오실 필요가 없다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던 몇 여인의 표정이 구겨졌다.

왕후가 후궁 될 여인을 직접 부른다는 것이 좋은 일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 꼬맹이 왕후에게 지목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자존심 상했기 때문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지금 이게 뭐하자는 거죠? 월향 혼자 부르다니요. 우리는 무시하는 겁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니요. 어쩌면 한 명이라면 혼자서라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착각하고 있는 걸지도.”

한 여인의 말에 저마다 분개하며 웅성거리던 방 안이 순식간에 웃음바다로 바뀌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상대요? 하하. 상대라니요. 그 쪼그마한 계집이 무슨 힘이 있다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전하가 뒤에 있다고 아주 기고만장해졌나 봅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게다가 하필이면…….”

모든 여인이 잠시 웃던 것을 멈추고 심기 불편해 보이는 월향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필이면 지목한 대상이 월향이라니.’

저들 중 가장 성질 나쁜 사람을 지목하라 하면 열 명이면 열 명 모두 월향을 지목하고도 남았다. 그것은 아마 본인도 부정하지 않으리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왕후께서 간이 배 밖으로 나오신 모양입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덤빌 상대를 잘못 고르셨지요.”

* *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왕후마마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소월가의 월향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월향이 표면적으로 움직인 적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이 얼굴을 마주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 꼬맹이가 왕후인가.’

희수궁은 왕후가 머무는 궁.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이 머물 곳. 그렇게만 여기고 있었지 사실 월향은 실제로 와 본 적 없는 장소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늦으셨네요.”

일부러 그러기도 했지만 월향은 희안궁보다 화려한 조경을 구경하느라 약속시각에 늦었다.

늦었다는 사실에 왕후의 짜증을 각오하고 왔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이랑은 너무나도 평온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사실 저도 이렇게 부르기 싫었습니다.”

자신도 싫으니 그렇게 인상 쓰지 말라는 말이었다.

월향이 앞에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의 시선은 책에 고정되어 있었다.

인상 쓰지 말라고 했지만 이런 식으로 대놓고 무시당하자 표정이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짙은 인상이 쓰여 졌다.

게다가 방이 아닌 정원의 탁자에서 마주하고 있으니. 햇빛에 피부가 탈까 걱정되기도 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지만.”

예상치 못한 이랑의 반응에 월향은 기가 꺾여버렸다.

먼저 말을 꺼내지도 못했고, 평소와 같이 불쾌감을 드러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지도 못했다.

덕분에 그들 사이에는 긴 시간 동안의 침묵이 있었고, 이랑이 읽고 있던 책이 수십 장 정도 넘겨졌을 즈음. 그 침묵이 깨졌다.

사람을 불러다 놓고 독서에만 집중하던 이랑이 말문을 열었다. 그제야 몇십 분째 고개를 숙이고 찻잔의 문양을 보던 월향이 고개를 들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오지 않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월향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무룩한 이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답장? 답장이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답장이 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불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마침 잘되었습니다.”

이랑은 예의상 아주 잠시. 월향이 스스로 생각해 낼 수 있도록 기다려주었다.

하지만 끝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한 듯 보이는 월향 때문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고. 곧 옆에 놓인 책 중 한 권의 사이에 끼어두었던 것을 꺼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안 그래도 오늘은 아직 보내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앞으로 내민 것은 월향에게도 매우 익숙한 작은 봉투였다.

과연. 그것을 본 월향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에야 손을 뻗어 자신의 앞으로 작은 편지봉투를 가져올 수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렇게까지 눈치 못 채실 줄은 몰랐습니다. 일부러 티나게 전해달라고 부탁했었는데. 시녀들의 눈치가 너무 없는 거 아닙니까?”

차를 마시는 이랑의 눈치를 보며 자연스럽게 겉봉을 뜯은 월향은 익숙한 봉투와 역시 익숙한 내용물에 이제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간 저에게 장난 편지를 보낸 게 왕후마마이셨습니까…….”

지금 월향은 심경이 복잡했다.

일단 기분이 나쁜 건 둘째 치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도대체 이 왕후는 자신과 뭘 하자는 거지?

그녀에게 있어 이랑이라는 존재는 도저히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존재였다. 이는 물론 시하루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장난 편지라니요……. 나름대로 정성을 들인 건데.”

서운하다는 듯 말하는 이랑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월향이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도 많이 참은 것이다. 결국, 월향의 선택은 따지는 게 아닌 한 발 물러서기였다.

시녀들이 최소한으로 있는 방 안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많은 눈이 보고 있는 탁 트인 정원에서 차마 왕후에게 목소리를 높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원래의 성격이라면 한 판 붙고도 남았지만, 꾹 참아낸 월향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정원에서 벗어나려 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그래도 축하해요.”

그녀가 돌아가든 말든 다시 책에 집중하던 이랑의 말이 없었다면 말이다.

이랑의 말에 고개를 돌린 월향이 물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축하한다니요. 무엇을 축하한다는 말씀이신지……?”

그 질문에 잠시 대답 없던 이랑은 곧 뭐가 웃긴 건지 피식 웃더니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편지는 아주. 아~주 욕심쟁이에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것을 탐내는 사람만 볼 수 있는 편지니까요.”

월향의 발이 바닥에 딱 붙은 것마냥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오랜 머뭇거림 끝에 그녀가 내뱉은 말은 아주 짧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예?”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당신은 아직 완벽하게 나쁜 사람이 아니란 뜻이에요.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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