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十五花 * 꽃의 이름을 아는 자 (2)
“바, 반찬이 정말 맛있네요. 하하.”
어색한 웃음이 오가는 가운데 ‘밥은 꼭 온 가족이 다 함께.’라는 정신을 갖고 있는 어느 가족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가족구성원 외의 인간 한 명도 덤으로 끼어서.
이랑은 아침 댓바람부터 왜 ‘이분’을 밥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해야 하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 괴롭힘을 많이 당하는 ‘불쌍한’ 사람이었으니 대놓고 물어보기 뭐했다. 괜히 상처라도 받을까 봐.
“정말 죄송합니다. 하루도 아니고 이틀을 이렇게…….”
“알면 됐고요.”
호랑이 한 마리가 아까부터 눈치를 주고 있었지만, 이안은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제 밥그릇을 놓지 않았다.
그 호랑이 한 마리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구성원들은 그런 이안을 바라보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희한한 아침 식사 풍경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안녕하십니까! 이랑마마!”
이안은 이미 이 천유국에서 시하루의 ‘불쌍한’ 오른팔로 유명했다.
갑작스러웠지만 그 오른팔이 현재 이랑이 머물고 있는 유월가에 기세 좋게 등장한 건 불과 이틀 전의 일이다.
그것도 제대로 된 몰골이 아닌, 대문에 넙죽 엎드려 벌 받는 인상 깊은 자세로.
“전 이제 ‘마마’가 아닌데요. 그나저나 무슨 일로 오셨어요?”
이랑은 스스로 평범한 신하의 위치이니 더는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 말하며 그를 일으켰다.
하지만 어디 사는 누군가의 주입식 교육 탓에 ‘한 번 마마는 영원한 마마이십니다!’를 외치는 그의 귀에 그녀의 말이 들릴 리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주군이 내린 지시 하나뿐.
“이랑님에게 단자를 받지 못하면 돌아올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전하께서! 이랑님.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사람 하나 살리신다 생각하시고 제발!”
얼마 전. 간택 문제 때문에 금혼령이 선포된 건 요즘 들어 불어난 누군가의 짜증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단자를 내놓으라는 식으로 찾아오다니. 어이가 없었다.
이랑은 단자를 내어 줄 생각이 없고, 이안은 차마 빈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으니 이렇게 얼결에 유월가에 얹혀사는 객식구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야. 너 그냥 시집가라. 제발 가라.”
이안이 온 지 이틀째가 되던 아침.
웬일로 밥상에서의 타박 없이 조용히 밥을 먹던 유시후가 끼니마다 마주하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괜히 이랑의 밥 위에 얹어진 고기반찬을 빼앗아 먹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언니…….”
먹을 거에 있어 항상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그녀가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그녀는 바로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불렀고, 그 부름에 바로 나타난 히연이 유시후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한 소리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랑이 먹을 걸 뺏어 먹으면 어떡해? 자자. 이랑아, 내 거 먹어.”
“야. 그렇다고 왜 네 걸 줘?!”
돌고 도는 고기반찬 속에 피어나는 가족애(愛)가 익숙하지 않은 이안은 그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관찰했다. ‘이런 게 제대로 된 가족이구나.’라는 어긋난 감동을 하며.
“짜증 나.”
가뜩이나 성질이 나쁜 유시후는 요즘 들어 더 예민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금혼령’이 공표되었을 때부터 더 신경질적으로. 그런 그의 눈에 객식구가 예쁘게 보일 리 없었다.
아무리 간택이라지만 그것 역시 일종의 형식일 뿐. 이미 간택하겠다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하니 굳이 금혼령을 선포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이틀 동안 많은 생각을 했지만 결국 유시후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이랑이 시집을 가야 이 금혼령이 풀린다!’
이미 이랑을 생각하는 마음 따위 버린 지 오래였다.
그의 마음이 이렇게 바뀐 대에는 얼마 전. 이랑의 ‘방해꾼’ 취급이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유시후 그도 나름대로 필사적이었으니, 이를 역으로 이용하고자 한 시하루의 의도가 분명했다.
히연도 서하연의 삼화(三花)에서 내려오지 않아도 되는 마당에 혼사를 미룰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금혼령이라니!
그 의도가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그 역시 눈치채고 있었지만…….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야. 솔직히 생각해봐라. 아무리 바보라지만 이 나라 왕인데, 네가 그런 남자한테 시집갈 수 있는 기회가 또 올 거 같아?”
“음. 이랑아. 내가 생각해도 그분. 너 생각하시는 것도 그렇고. 나름 괜찮은 남자 같아. 아, 물론 우리 낭군님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히연의 말의 결론은 유시후가 가장 멋진 남자라는 깨알 같은 자랑이다.
“그래요. 이랑님! 왕후가 되시면 좀 더 직접적으로! 그리고 현장에서 살아 있는 사회공부를 하실 수 있어서 좋고! 망할 시하루님……. 아니, 제 하늘 같은 주군께서는 정신을 차릴 수 있어서 좋고! 그렇게 되면 이 나라가 평안해지고! 저도 살고! 우리 모두 다 함께. 좋은 세상 우리 세상!”
간만에 이랑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이안은 의미 불명의 말까지 늘어놓으며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게 만든 것인가.
사실 이 모든 소란은 시하루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는 일이었다.
“하아…….”
안 그래도 이랑은 며칠 전에 이 문제의 원인 되시는 분께서 내세운 어떤 조건 때문에 흔들리고 있었는데 주위에서 이렇게 압박해오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이미 그녀의 마음은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었다.
* *
“잠깐. 아무 말도 하지 말아주세요. ‘차라리 여기가 조용해서 좋아!’라고 외치려던 참이었으니까요.”
“찍소리도 안 할게.”
집 안에 있는 숨은 적들을 피해 도망쳐 온 곳이 결국 이 모든 문제의 제공자 곁이라니.
이 얼마나 슬픈 상황인가.
“역시 여기가 가장 마음이 안정되는 거 같다고나 할까…….”
물론 서재도 좋았지만, 이랑이 궐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이기도 한 곳이 바로 집무실로 사용되는 장소였다.
실제로 이곳에서 매일 대신들의 열띤 토론이 벌어진다는 사실이 이랑을 더욱 흥분시켰다.
자리를 잡고 앉은 이랑이 지난 이틀간의 피로가 몰려와 그대로 엎드려버렸다.
“이안. 그 녀석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기는 하지. 정신적으로 말이야. 아 그건 됐고. 먼저 여기에 서명 좀 하자.”
안 그래도 분풀이 대상인 이안이 유월가에 눌러앉아 하루하루가 심심하던 시하루는 그녀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이 매우 기뻤다.
엎드려 있는 그녀의 손에 붓을 쥐여주고 어느 종이 한 장을 내밀자 그제야 고개를 들은 이랑이 종이를 바라보다 물었다.
“이게 뭔데요?”
사실 몇 번의 경험으로 그녀는 이미 그 종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어디 한 번 네 입으로 말해보렴.’이라는 의미에서 물었다.
“혼인신고서라고 하는 건데.”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던 이랑은 싱긋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 종이를 반으로 곱게 접어버렸다.
“이제 좀 그만해요.”
아주 잠시라도 방심하면 계속 이랬다.
장난인지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며칠 전부터 틈만 나면 이렇게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고는 했다.
다시 엎드린 그녀의 눈에 곱게 접어 옆으로 밀어놓은 종이가 들어왔다.
한참을 그 자세로 멍하니 종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그녀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조용히 말했다.
“……한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더니.
예상치 못한 그녀의 대답에 시하루는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들고 있던 책이 바닥에 떨어졌는데도 모를 정도로.
열 번을 찍은 나무가 넘어가는 이유는 더 이상 버틸 기운이 없기 때문이다.
이랑은 집이면 집. 궐이면 궐. 양쪽에서 이렇게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으니 백기를 들고 싶었다. 거기에 더는 싫어하는 마음이 아니었으니 괜히 버틸 이유가 없었다.
문제라면 자존심 문제였지.
“……뭐죠, 그 반응은.”
어쩌면 시하루가 원하는 그런 날은 의외로 머지않은 미래일 거 같았다.
* *
“가문을 되찾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시하루가 원하던 그런 날이 갑자기 멀어졌다.
집에 돌아오기 무섭게 이랑은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인물을 만났다. 어렸을 때부터 소월가(家)에서 함께 한 시무형은 이랑에게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진유한 때문에 그는 소월가를 떠나야 했고, 이랑이 후계자 자리를 되찾을 시기까지 천유국을 떠나 있다가 얼마 전에 돌아왔다.
아니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그래서 이게 뭔데요. 혼담제의?”
종이 위에 그려져 있는 여러 초상화에 이랑은 인상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며칠 전부터 청혼도 아닌 혼인 신고서를 받고 있는데 이제는 혼담이라니. 그것도 이렇게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유아님. 혼사라는 건 집안과 집안이 관계로 묶이는 일. 이는 큰 힘이 되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만나서 한다는 말이 여러 초상화와 함께 ‘이들 중 어느 남자가 취향이세요?’였다.
“자리를 되찾으셔야죠.”
“맞는 말이기는 한데…….”
이랑도 항상 자신의 것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방식은 그녀가 원하는 것과 달랐다.
자신의 힘이 아닌 관계로 묶여 타인의 힘에 기대는 것 따위…….
“……한 번 생각해볼게요.”
이번에는 거짓말.
괜히 시무형에게 한 소리 들을까 싶은 이랑은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를 바라보며 그녀는 방에 돌아가면 즉시 그것들을 폐기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진유한에게 소월가의 후계자. 소유아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텐데요…….”
“하지만 직접 알리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이랑의 손에 있던 종이를 낚아채 초상화를 관심 있게 바라보던 유시후가 시무형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예전처럼 궐에 있었을 때면 모를까. 지금 그녀의 존재가 드러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시무형 역시 그의 말에 동의하는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궐 안이면 안전하다는 뜻이네요?”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랑은 누군가를 떠올리고 씨익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간접적으로 알리면 되는 거죠??”
이랑의 말에 유시후는 괜히 불안해졌다.
“저에게 생각이 있어요.”
이럴 줄 알았어.
사실 그녀의 계획은 늘 ‘계획’ 단계일 때는 괜찮아 보였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빛을 바라지 못했다. 이는 그가 십 년 동안 그녀를 곁에서 지키면서 지겹게 봐왔던 사실.
심지어 그녀의 계획 중에는 어이가 없는 것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벌써부터 걱정이 된 유시후와 시무형은 서로 말려보라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 *
“…….”
가시방석이다.
현재 그들이 마주하고 있는 장소가 평소 이랑이 좋아하던 집무실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편하지 않았다.
무거워 보일 정도로 양손에 짐을 들고 나타난 이랑은 기세등등하게 누군가를 찾아갔다.
앉기 무섭게 자신의 요구 사항을 밝히려던 그녀는 곧 그 누군가의 손에 들려 있던 아주 익숙한 종이뭉치에 모든 사고가 정지된다.
‘어디 갔나 했더니 저게 왜!’
얼마 전. 시무형의 반협박과도 같은 제의를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대충 넘어가려 했던 일에 대한 벌이 아닐까 싶었다.
시무형에게 받은 혼담 목록은 분명 방에 가기 무섭게 다른 것들과 함께 버렸었다.
그런데 그 물건이 지금 그의 손에 있다는 건 그 명단이 제 발로 그에게 걸어갔다던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넘어갔다는 이야기.
유월가와 궐. 양쪽에 출입이 가능한 인물이라 하면 딱 한 사람 외에는 떠올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유월가의 호랑이의 짜증이 금혼령에 의해 극에 달한 것이 분명했다.
일단 호랑이 유시후의 문제는 나중에 히연에게 부탁하면 됐으니 미뤄두고. 중요한 건 그가 아니었다.
“……음...... 저기……그걸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모르겠지만……아니, 경로는 대충 파악이 가능하지만…….”
“…….”
하지만 예상외로 쉽게 바뀔 분위기는 아닌 듯했다.
지금 이랑은 이 상황을 잘 마무리시켜야 했다.
안 그래도 ‘부탁’을 하러 온 건데 초반부터 이런 분위기였다가는 얻을 것도 못 얻고 대가로 내려던 것들만 빼앗길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미리 말하는데 그거 받자마자 버렸던 거예요.”
눈치 보던 이랑은 소심하게 자신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효력이 있는 건지 명단과 함께 있던 초상화들을 넘겨보고 있던 남자가 그녀의 말에 종이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랑은 그의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내 청혼은 그렇게 거절하더니.”
나쁜 놈의 호랑이. 다시는 오라버니라고 안 부르리라!
“아니. 그게…….”
잠깐만.
잔뜩 기가 죽어 있던 그녀는 문득 어떠한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왜 내가 이렇게 눈치를 봐야 하지?’
솔직히 약혼한 것도 아니고 결혼을 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청혼을 받아들인 적도 없는 그녀였다.
그런데 왜 자신이 바람 피운 죄인마냥 미안해하고 있어야 하는 건가?
당당해질 필요가 있었다. 생각이 정리되자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남자의 손에 들려 있던 명단을 낚아채 완벽하게 구겨서 아무 데나 던져버렸고 자신이 가져왔던 무언가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저 좀 도와주세요.”
아니,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툴툴거리며 자신이 삐쳤음을 표정이며 행동으로 표현하고 있던 시하루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이랑이 도움을 요청하고자 찾아간 이는 다름 아닌 꽃따리 오빠인 그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던 그는 뜬금없이 도와달라는 그녀의 말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의 시선은 이랑이 내민 물건에 고정되어 있었고 그 물건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이미 불쾌하기 짝이 없던 명단에 대해서는 잊은 듯했다. 바보같이 단순했지만 이랑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제야 다행이라는 미소를 머금은 이랑은 바뀐 분위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로 말했다. 아니, 말하려고 했다.
“그럼…….”
“단.”
활짝 웃으며 바로 도움의 내용을 자세히 말하려던 이랑의 말이 막혔다.
“도와줄 수야 있지만, 나에게도 모든 사실을 알려줘야 해.”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그녀가 눈치 못 챘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라는 것은 상당한 무게를 지닌 비밀이었기에 쉽게 말할 수 없었고 긴 고민 끝에 이랑은 결심했다.
“해야 할 말이 많은데……우선은……. 사실 제 이름은 소이랑이 아니에요. 많이 놀랐겠지만…….”
“알아. 네 이름은 소유아. 소월가의 마지막 후계자.”
시하루가 놀랄까 봐 걱정된 이랑은 나름대로 배려정신을 발휘해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그는 전혀 놀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놀란 건 이랑의 쪽.
“……다 알고 있었어요?”
“어느샌가부터.”
이랑은 싱긋 웃는 그가 오늘따라 무서웠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끝까지 모르는 척을 하다니! 아니, 지금은 그것보다…….
잠시 그의 말에 놀라던 그녀는 능숙하게 표정을 정리했다. 그리고 고백하듯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 하는 이 선택이 옳은 건지 모르겠지만…….”
잠시 중얼거리던 이랑은 곧 품에서 곱게 접힌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아주 잠깐 망설이더니 그녀는 그 종이를 시하루에게 내밀었다.
어쩐지 익숙해 보이는 종이에 긴가민가한 마음으로 종이를 펼쳐보던 시하루의 눈이 순식간에 휘둥그레졌다.
잘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자신의 손에 들어오게 될 줄은 그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덤으로 이랑은 그가 그렇게 노래를 불렀던 단자까지 그의 앞에 내밀었다.
“소이랑은 서하연의 호예요. 그게 내 본명이죠.”
이랑이 내민 종이에는 달랑 '소유아'라는 이름 하나가 적혀 있었지만, 이미 그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 종이는 보통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내 이름 누가 말해줬어요?”
그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꽤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녀에 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손에 꼽을 정도인데, 그들 중 누가 시하루에게 사실을 일러준 것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난 오래전부터 네 증표를 갖고 있었거든.”
“난 꽃따리 오빠에게 증표를 준 적이 없는데요?”
거짓말.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강하게 부정하는 그녀의 반응에 상처받았다는 연기를 펼치던 시하루가 피식 웃더니 확신한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만난 적이 있었어.”
“나 머리 좋아요. 기억력도 좋지요. 우리가 예전에 만났다면 내가 꽃따리 오빠를 처음 보던 그 날 분명 기억했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천재라고도 불리 울 정도로 뛰어난 머리를 갖고 있는 그녀가 사람을 못 알아봤을 리가 없었다. 그것도 자신의 증표를 건네준 이를 말이다.
더군다나 그 증표라는 것이 그냥 종이도 아니고 앞으로의 미래를 맡기겠다는 것과 같은데 그런 걸 함부로 줄 리도 없고.
하지만 무슨 자신감에서인지 이번만큼은 시하루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말이 맞다 우기기 시작했다.
“아마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닐 거야. 뭐, 굳이 말하자면 기억에 ‘없는’ 거겠지.”
“그건 또 무슨 말인데요?”
“비밀이야.”
혼자만의 비밀을 뚝딱 만들어낸 시하루였다.
궁금한 건 절대 못 참는 이랑은 어떻게 해서든 대답을 들으려고 했지만, 꽤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나서야 백기를 들었다.
“청혼을 받아들일게요. 어차피 주위에서 혼사 맺으려고 난리던데 그럴 거면 그나마 마음 있는 상대가 낫겠죠. 게다가 집안 따지는 시무형의 마음에도 들 테니까요.”
이대로 있다가는 그 잔소리꾼 시무형에 의해 어디로든 시집을 가게 될 판이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시하루가 낫겠지 싶은 이랑이었고, 동시에 그는 시무형이 노래를 부르던 ‘집안의 힘’을 갖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으니까.
“아. 하지만 혼사는 모든 일이 마무리된 다음에 했으면 좋겠는데요…….”
“좋아. 그 정도야 기다려 주지 뭐. 이렇게 직접 단자까지 가져와 줬으니까. 게다가 나에게는 제대로 된 네 증표도 있고 하니.”
그가 의외로 흔쾌히 조건을 받아들였다.
이랑은 그동안 무서울 정도로 혼인 신고서를 팔랑거리던 그에게 미리 서하연의 증표를 건네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뭘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시하루가 평상시와 다르게 꽤나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며 물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이랑은 곧 그녀가 들고 온 보따리를 손으로 탁탁 치더니 말했다.
“우선은 희수궁이 필요해요. 다시 그곳에 들어가야 하는 일이 생겼거든요.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