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十三花 * 이 세상에 한 송이밖에 없는 (6)
“곧 있으면 려화 승격 시험이라면서?”
슬슬 이랑이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자 아까부터 계속 시간을 확인하며 건성으로 책을 읽고 있던 시하루가 나름의 용기를 내어 물었다.
“네.”
“볼 거야? 아니, 너무 당연한 질문이었나? 볼 거지?”
그녀에게서 시험을 포기한다는 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거.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이랑에게는 실력이 있었으니 의지만 있으면 승격 시험 따위 아무것도 아닌 마당에 포기할 리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인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시하루의 귀에 시험을 보겠다는 시원스러운 대답이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설마 고민하는 건가? 이제 와서? 왜?
“꽃따리 오빠는 아직도 날 좋아하나요?”
조금 길고 무거웠던 침묵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그런데 왜 내가 시험 보기를 원하는 거 같죠?”
자신을 좋아한다면 려화 시험을 못 보게 막는 게 정상이 아니냐는 질문. 실제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래 왔던 사람이 며칠 만에 이렇게 태도가 바뀌니 그 이유가 궁금하다는 눈치였다.
태도가 바뀌다 못해 아예 적극적으로 시험을 권장하고 있지 않은가?
이랑은 그런 시하루가 너무도 수상했다.
“나 역시 네가 꿈을 잃고 좌절하는 게 싫으니까.”
“…….”
“며칠 동안 많이 생각해봤는데, 억지로 려화 시험을 보지 말라거나 그런 말은 하지 않을게. 그게 네 오랜 꿈이었다는 거 이제는 잘 아니까 막지 않을 거야. 방해도 하지 않고.”
웬일로 기특한 말을 하며 이랑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던 시하루의 손을 ‘애 취급하지 마세요.’라 말하며 매정하게 쳐낸 그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째 그건 또 조금 서운하게 들리네요.”
“그래도 난 너를 포기하는 일이 없을 거라는 말이지. 변하는 건 없어. 넌 네 꿈을 이루는 거뿐이야.”
“려화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해요.”
몇 번을 말했는데 설마 아직도 못 알아들었느냐는 말투였다.
“이봐 꼬맹아. 이래봬도 나도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라고. 나라고 가만히 있는 줄 알아?”
그런 이랑의 말에 살짝 자존심이 상한 건지 시하루가 툴툴거렸다. 이번에는 정말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건지 웬일로 그녀의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다.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믿어도 괜찮을 사람이라고 판단을 내린 것인지 입을 열었다.
“좋아요. 속는 셈 치고 한번 믿어볼게요. 지금 시간 되시면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실래요?”
“얼마든지.”
사실 시하루는 며칠 전부터 ‘적화유’로서 그녀가 갖고 있는 고민을 들어주고 있었지만, 확실히 완벽하게 모르는 사람이다 보니 이야기가 빙 돌아가는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편지의 특성상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과 다르다 보니 일방적으로 그녀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속이 좀 시원할 뿐. 그녀의 고민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요. 꿈을 이루지 못하는 거예요. 그동안 노력해왔던 것들이 전부 물거품이 되어 버리니까요.”
그 말 그대로. 그녀가 ‘려화’를 포기한다면 지난 십 년이란 세월을 영희궁에서 조용히 공부만 해왔던 시간이 쓸모없어졌다.
그렇다면 그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려화를 선택하는 게 당연할 텐데 어째서인지 그녀는 고민이 됐다.
“그럼 근본적인 질문으로 바꿔볼게. 넌 항상 려화가 될 거라고 했지.”
“그게 제 꿈이었으니까요.”
“그럼 려화가 된 다음에는? 려화가 된 다음에 넌 뭘 하고 싶은 건데?”
* *
“어머, 이랑이. 오랜만이네~. 어쩐 일이니? 아. 오늘도 장기? 오늘은 누가 이겼어?”
멍하니 궁을 나서던 이랑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곧 위쪽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꽃……. 아니, 전하께서 이기셨어요.”
습관적으로 ‘꽃따리 오빠’라고 말할 뻔한 이랑이 재빠르게 ‘전하’라는 호칭으로 바꿨지만,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걸 보면 이미 대비는 그것을 눈치를 챈 거 같았다.
“져서 그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시간 있으면 좀 들러서 자신과도 이야기 좀 나누어 달라는 대비의 부탁에 이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자에 올랐다.
그녀의 표정을 가만히 관찰하던 대비가 묻자 이랑이 말했다.
“대비마마께서는 제 어머니와 오랜 벗이라고 하셨죠? 같은 서하연 동기생이기도 하셨다고요.”
“그랬지.”
“그럼 제 어머니가 삼화와 아버지와의 혼인 사이에서 갈등할 당시 곁에 계셨겠네요? 어땠나요? 솔직히 그렇게 쉬운 결정은 아니잖아요…….”
순간 그녀의 무거운 분위기에 휩쓸려 덩달아 우울해진 대비였지만 역시 연륜이란 게 있는지 바로 분위기에서 벗어나 싱긋 웃어 보였다.
복잡할 것만 같은 문제였지만 의외로 대비는 간단히 대답했다.
“려화가 되는 것보다 더욱더 자신이 기뻐할 만한 일을 찾았으니까. 글쎄, 어쩌면 너한테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일 있다고 하면 저도 그걸 선택해야 할까요?”
대비의 말을 아직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이랑은 진지했다. 그 표정을 본 대비는 다시 한 번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당연히 그래야죠.’ 같은 대답을 들을 줄 알았던 이랑은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방금 대비가 한 말이 더욱더 그녀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대비마마 역시 그런 이랑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는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툭툭 쳐 주는 것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의 복잡한 생각들을 어느 정도 지워주었다.
“일단 너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게 우선이겠구나. 그런 다음에 문제를 마주해. 그럼 분명히 우선순위가 보일 거야.”
‘되고 싶다.’에서 그치지 말고, 된 후에 뭘 하고 싶은 건지 생각해.
“꼭 한 가지를 선택하라는 법은 없어. 둘 다 가지려면 네가 두 배로 노력하면 되는 거야.”
마지막 조언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이랑이었다.
아무 반응이 없기에 대비는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은 건지 불안했지만 아무래도 끝까지 듣고 있던 것도 모자라 그녀의 마음속에서 뭔가가 해결된 듯 보였다.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속이 좀 시원해진 거 같아요.”
확실히 전과는 비교될 정도로 표정이 밝았다.
“그것참 다행이구나.”
결심한 일은 바로 행동으로 옮기고야 마는 이랑이 그만 가봐야겠다는 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감사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정자에서 벗어났다.
정문으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대비는 잠시 정자의 아래 기둥에 눈길을 주다 말했다.
“이제 좀 안심이 되십니까?”
“역시 어머니세요.”
언제부터 기둥 뒤에 서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시하루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비의 앞으로 다가왔다. 웃고 있는 그와는 달리, 대비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 더운 날 정자에 나와 책을 읽으라고 하나 했더니.”
‘아들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더니.’라고 중얼거리는 자신의 어머니를 보며 자리에 앉은 시하루는 웃고 넘겨보려는 듯 실실 웃기 시작했다. 그의 미소에 어이가 없어진 대비가 피식 웃어버렸다.
“그래서, 제가 도움이 됐나요?”
“매우요. 지금 꼬맹이한테 필요한 건 제가 아닌, 부모님 같은 사람의 조언일 테니까요.”
어머니의 시선으로 아들을 바라보던 대비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좀 달라지신 거 같네요. 여러 가지로 말이죠. 아, 언제든지 제가 필요하다면 말씀해주세요.”
“아……. 그럼 바로 부탁해볼까요?”
미안하다는 말투가 아니었다. 배실 배실 웃기까지 하고 있는 시하루는 곧 자신의 주머니에서 편지 같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대비에게 내밀었다.
“제가 이번에는 좀 큰일을 벌여서요.”
“……큰일?”
아들의 사랑을 응원하는 어머니의 입장으로서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하라고 당당히 말한 대비였지만, 막상 이렇게 바로 부탁이 들어오니 불안했다.
“도와주실 거죠? 예쁜 아들이 이렇게 부탁하는데.”
게다가 일단 일을 벌인 후에 통보한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 *
“늦었네?”
우당탕탕.
평소라면 집에 들어올 때 최대한 유시후의 눈을 피하기 위해 조용한 입장을 해왔던 이랑이 오늘은 아주 요란하게 입장했다.
엄청난 발걸음 소리를 내며 유시후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이닥친 그녀의 눈은 한 마리의 호랑이를 찾고 있었다.
더욱 신기한 건 이미 그녀의 그런 행동이 익숙하다는 듯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고개만 들어 인사를 하는 유시후의 반응이었다.
“오라버니.”
“왜.”
잠깐. ‘오라버니?’
무슨 중요한 말을 하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이랑이 이렇게 정중하게 나오니 유시후는 불안해졌다.
히연에게 잔소리를 들어가며 글씨 또박또박 예쁘게 쓰기 연습을 하고 있던 그는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고 이랑을 올려다봤다.
무슨 중요한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녀는 앉을 생각도 하지 않고 뜬금없이 말을 던졌다.
“저번에 나한테 물어본 거.”
“뭐?”
뜬금없는 대화의 시작에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직접 인상 쓴 유시후와 마주하고 있으니 그제야 자신이 하려는 말이 엄청난 말이라는 걸 깨달은 이랑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곧 결심한 듯 심호흡을 했다.
“나 려화 안 할래. 미리 말하는데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야.”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시후의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다.
표정은 ‘지금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라고 말하고 있었고, 아주 당황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오늘에서야 알았어. 내 꿈은 려화가 아니라는 걸.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주위의 그 어떤 방해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다른 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싶어.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 그게 내 꿈이야. 려화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길 중 하나일 뿐. 다른 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뭐야. 왕후라도 되겠다는 말이야?!”
그냥 듣고 넘길 말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건지 유시후가 버럭 외치며 말했다. 하지만 이랑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따지듯 대화를 이어갔다.
“그건 아직 모르겠어. 하지만 그 역시 내 꿈을 위한 길 중 하나인 건 확실해. 려화가 밖에서부터 시작하는 변화라면 왕후는 아마 내부에서부터 시작하는 변화일 테니까.”
“……말이 나온 김에 묻자. 너 그 왕 좋아하는 거야? 마음 있어? 꿈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감정 따위 상관없다느니 그런 말은 하지 않겠지?”
“그건…….”
여전히 확신이 없어 보였다.
잠시 머뭇거리는 그녀를 바라보던 유시후는 ‘그럴 줄 알았어.’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하던 일에 몰입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의 여유로웠던 표정은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일그러졌다.
“이 세상에 ‘좋다’와 ‘싫다.’ 이렇게 딱 두 가지 선택사항밖에 없다면 내 대답은 ‘좋다’ 야! 아니……. 그래, 그게 아니어도 좋다. 왜? 안 돼?”
전혀 예상치 못한 대화의 흐름에 유시후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잠시 아무 말도 못 하던 그는 일의 심각성을 그제야 눈치챘다.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너 지금까지 엄청 싫어했었잖아.”
“뭐 그건 그때고. 서로 오해가 있었잖아?”
“……직접 가서 말하지 그러냐? 아주 좋아하겠네.”
더는 설득 할 수 없다고 판단을 내린 유시후가 비꼬기 시작했다.
옆에서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히연이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는 것으로 주의를 줬지만, 그는 여전히 툴툴거렸다.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 내가 먼저 고백할 리가 없잖아.”
그러나 눈치 없는 이랑은 그것이 자신을 비꼬는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진심으로 하는 조언으로 받아들인 건지 고개를 저으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오히려 그것이 유시후의 짜증을 배로 불러일으켜 결국 그는 폭발하고 말았다.
“그럼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건데?!”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는 상당히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오해였다지만 십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저를 보좌한 게 누구인데 그렇게 나오기 위해 필사적일 때는 언제고 이렇게 막상 나오니 다시 들어가는 것도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가.
하지만 그를 더욱더 어이없게 하는 발언이 바로 이어졌다.
자신은 할 말을 다했으니 이제 그만 가보겠다는 듯 걸음을 옮기려던 이랑이 갑자기 돌아서 유시후를 향해 짧고 굵은 경고를 했다.
“방해하지 마. 알았어? 생각해보면 오라버니가 가장 큰 문제야.”
갑작스러운 여동생의 반항에 자리에 앉을 채로 굳어버린 유시후를 향해 씨익 웃는 것으로 쐐기를 박은 이랑은 저녁 먹으러 나오라는 아주머니의 말에 쌩하니 퇴장해버렸다.
방 안에 남겨진 유시후는 아직도 여러 가지 충격 상태에서 정신을 못 차리겠는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기다려줘야 할 텐데 눈치 없는 방 안의 다른 인물이 슬며시 그에게 다가오더니 뒤에서 와락 안아버리며 유쾌하게 말했다.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유시후~.”
정신 줄을 놓고 있던 상태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다가오면 놀랄 만도 했지만, 이미 그녀의 이런 접근에는 도가 터서 그런지 아니면 방금 전의 충격으로 인해 반응 속도가 느려진 건지 아무 말 없이 정신을 놓고 있던 유시후가 고개를 돌려 히연을 바라봤다.
“……히연. 나 지금까지 방해꾼이었던 거야?”
아무래도 많은 말 중에서도 ‘방해’라는 단어가 가장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셈이지, 뭐.”
약간 쓸쓸해 보이는 그의 등을 툭툭 치던 히연이 자신들도 그만 밥을 먹으러 나가자는 말을 하며 그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아. 하지만 넌 나름대로 오라버니 역할을 잘해 온 거야. 나보다 너에게 먼저 말했다는 게 그 이유지.”
그제야 미소를 보이는 유시후였지만 역시 그 표정에는 어딘가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어느 정도 진정돼 보이는 그였지만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그는 다시 폭발했다.
“당연하지. 내가 그동안 그 녀석 뒷바라지하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아 진짜!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인간은 아니지 않아? 우리 이랑이가 어떤 애인데! 아깝잖아!”
“유시후. 너 지금 딸 시집보내는 아저씨 같아. 그만해.”
* *
어느 방 안에 들어가기를 주저하고 있던 시하루가 심호흡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곧 결심한 듯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처음 뵙겠습니다…….로 시작하고 싶지만 사실 처음은 아니겠죠? 물론 전 기억이 나지 않지만요.”
일단 앉기 전에 나름의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지만, 눈앞에 앉아 있는 여인의 귀에는 약간 건방지게 들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상대는 이미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건지 여유롭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태어나실 때랑 좀 더 자라셨을 때도 뵈었답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것이 기쁜 건지 시하루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그와 눈높이가 비슷해진 여인이 계속 그를 올려다보느라 아팠을 목을 몇 번 가볍게 돌리더니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함부로 말 걸기가 어려울 정도의 분위기를 가진 여인이었다.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 시하루가 삐질삐질 땀을 흘리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겠지만, 무게 잡고 있던 여인은 그의 옆에 앉아있던 중년의 여인을 바라보며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큭. 수령. 과연 네 아들이다. 나를 협박할 생각을 다 하다니. 배짱이 아주 두둑해.”
“미안. 나도 어제 알았어.”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대비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 여자를 따라 피식 웃어버렸다.
과연. 둘이 오랜 벗이라고 하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별다른 말이 오가지 않았음에도 그저 눈이 마주친 거 하나로도 웃는 그녀들이었다.
“오랜만이네.”
“나는 궁 안에서. 너는 서하연 안에서. 서로 밖에 나오기 힘든 존재니까.”
순식간에 동창회 모임으로 변해버린 이 만남 속에 정작 주최자가 끼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아. 우리 하늘 같은 주군을 잊고 있었군요.”
얼마간 자신들만의 이야기에 빠져 있던 두 여인이 그제야 시하루의 존재를 깨달은 건지 대화의 주제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저를 부른 이유가 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서하연의 려화를 함부로 오라 가라 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이라는 거 알고 벌이신 일이시겠죠?”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보통 부탁이라는 건 아쉬운 쪽이 직접 찾아와서 예의를 갖추고 하는 거지, 이렇게 상대를 협박하듯 불러다 놓은 다음에 하는 게 아니랍니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려화가 약간은 짓궂게 불만을 토로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자신에게 넘어왔다고 생각을 한 건지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지만, 그녀를 상대하고 있는 이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괜찮아요. 전 말씀하신 대로 하늘 같은 주군이니까요.”
주눅이 들기는커녕 시하루는 오히려 지금 구성원 중 자신이 가장 나이가 어릴지는 몰라도 위치상으로 볼 때는 가장 높은 사람이니 이 사실을 잊지 말라는 식의 경고를 했다.
그 말의 의도는 알아차린 려화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대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수령. 어쩜 선왕과 성격이 이리 판박이니?”
“그러게 말이야.”
“도대체 하늘같은 주군께서 저에게 무슨 부탁을 하시려는 거죠? 빨리 볼일 끝내고 서하연으로 돌아가고 싶은데요.”
시하루를 상대하는 것이 지친다는 듯 갑자기 피곤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려화가 빨리 요점만을 말하라고 재촉했다.
“서하연의 어떤 법을 살짝 고쳐주셨으면 해서요.”
단도직입적인 그의 말에 순간 려화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시하루를 바라봤지만, 그의 표정은 방금 그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음을 강조했다.
“물론 제정신으로 하시는 말씀이시겠죠?”
“당연하죠.”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나 당당한 시하루의 야무진 대답에 려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곧 고개를 든 그녀의 눈빛은 ‘절대’라고 말하고 있었다.
“려화가 왜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려화가 왕후가 된다고 생각해보세요. 과연 지금의 서하연과 같이 독자적인 규율과 왕권에 휘둘리지 않는 독립성이 유지 될까요? 아니. 전혀요. 서하연의 수장이 혼인하면 려화 하나뿐이 아니라 서하연 전체가 묶이게 되는 겁니다. 더욱이 왕족은 안 됩니다. 서하연에는 서하연만의 교육목표와 이념이 있습니다. 나라에서 좌지우지하게 둘 수는 없습니다.”
아직 ‘부탁이 있다.’라고만 말했지 ‘이랑이 려화가 되어도 혼인을 할 수 있게 해 달라.’라고 말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흥분한 려화가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평온한 표정의 시하루가 곧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부탁하려는 건 려화의 혼인허가권이 아니니까요.”
“……려화의 법을 바꾸시려고 하신 게 아니셨나요? 전하라면 분명 그걸 어떻게 하려고 하실 줄 알았는데……. 그럼 뭐죠? 바꾸고자 하시는 법이?”
“ ‘삼화(三花)는 왕 이외의 다른 남자와 혼인을 할 수 없다.’ 이 규칙에서 제외되는 명예 삼화 직을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앞서 보였던 려화의 반응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반응이었다.
화를 내던 전의 반응과는 달리, 어리둥절해하며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과 그 이유가 궁금하다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 적절하게 섞여 있었다.
“그건 전하와는 상관없는 법이 아닙니까?”
“그래도 필요하니까요.”
그녀의 말대로, 방금 요구한 법은 그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법. 시하루 그는 왕이었기 때문에 삼화와 혼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굳이 왜?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 볼 필요가 있겠군요. 전하께서 원하시는 그 명예 삼화는 구체적으로 어떤 자리입니까?”
“삼화의 실력을 갖추고 있지만 려화에 도전하지 않는 자. 계속해서 서하연에 머물며 가르침을 받고 나누되, 그 위로는 올라갈 수 없는 자들. 대신에 자유로운 연애와 혼인허가권만 첨가해 주시면 됩니다.”
그의 요구에 려화는 잠시 고민에 빠진 듯 아무런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기를 수십 분. 곧 모든 생각을 정리한 듯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좋습니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데로, 서하연의 규칙을 바꿔드리죠. 명예 삼화 직. 새로운 시도라서 마음에 드는군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
제 뜻대로 되어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가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 반쯤 고개를 숙일 때였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대가’라는 게 필요하죠. 그래야 공평한 거 아니겠습니까?”
“……원하시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전하께서 이랑의 증표를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거면 충분하겠군요.”
숨도 안 쉬고 자신의 요구사항을 밝히는 려화의 재미있다는 표정과는 달리, 가만히 앉아 오랜 벗과 아들의 기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대비의 입은 다물어질 생각을 않았다.
“이랑이의 증표? 설마! 그걸 갖고 있는 겁니까? 어떻게? 아니, 그전에 내 아들 일을 내가 알기도 전에 어떻게 려화. 네가 먼저 안 거지?”
“나한테도 꽤 실력 있는 조력자가 있으니까.”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대비를 향해 려화가 싱긋 웃어 보였다.
“잠깐. 증표를 달라니?”
“이랑이가 태어나던 날 우리는 약속을 했었어. 그 아이. 그러니까 유아는 우리가 지키겠다고 말이야. 하지만 너와 나는 방식이 달랐지. 넌 네 아들과 혼인을 시켜서 궁이라는 울타리로 그 아이를 지키려고 했고, 난 서하연이라는 울타리로 그 아이를 지키려고 했어. 하지만 더 이상 유아는 애가 아니야. 울타리로 가두는 건 지키는 게 아니야. 이제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 선택을 위해서라도 그쪽에서 붙잡고 있는 이랑의 증표를 무효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그게 공평하잖아?”
대비와 려화의 기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주인공 중 하나인 시하루는 어쩌면 큰 무기로 작용할 지도 모를 증표를 놓고 별로 고민이 되지 않는 건지 미련 없는 표정으로 려화에게 낡은 종이를 내밀었다.
“어차피 제가 갖고 있어도 쓰지 못했을 테니까요.”
자신의 손에 넘어온 종이를 보며 거래가 성립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려화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볼일이 끝났으니 자신은 이만 돌아가 보겠다는 말과 함께 간단히 인사를 한 그녀는 궁녀가 열어주는 방문을 통해 밖으로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그러나 문득 뭔가가 떠오른 건지 배웅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시하루에게 물었다.
“……그냥 여쭤보는 건데, 이 종이를 전하께 건네준 게 아이였습니까?”
뜬금없어 보이는 려화의 질문에 어리둥절하던 시하루가 곧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함께 있던 건 아이가 맞지만, 그 종이를 저에게 준 건 그 아이와 함께 온 중년의 여인이었습니다만…….”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뭔가 알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가려던 려화가 또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한 가지 좋은 소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랑이……. 아직 려화 승격 시험에 접수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가망이 있어 보이시네요. 전하.”
당장에라도 신청할 줄 알았는데, 그녀가 아직도 려화 승격 시험에 신청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란 시하루의 눈이 커졌다.
천하의 소이랑이 시험을 마다하다니! 물론 아직 접수기간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평소의 그녀라면 분명 시작과 동시에 가장 먼저 접수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것 참 감사한 정보네요.”
* *
어딘가 가벼워 보이는 걸음으로 궁에서 나오는 려화가 문 앞에 서 있는 여인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어떠셨습니까?”
문 앞에 서 있던 여인이 햇빛을 가리기 위한 용도로 쓰이는 모자를 내밀자, 려화가 그것을 받아들며 말했다.
“네 생각이 맞았더구나. 히연.”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쳐보던 려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예상대로 이건 이랑이가 쓴 게 아니야. 유희의 서체다. 이미 예전부터 수령의 아들에게 제 딸을 맡기겠다고 생각한 거겠지. 유희, 그녀는 전부터 사람 보는 눈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정말 신기하네.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차린 거니?”
그녀의 질문에 앞서 가서 히연이 빙글 돌더니 활짝 웃었다.
“유시후한테 전하께서 이랑의 증표를 갖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요. 이랑이는 어렸을 때 유시후보다도 심한 악필이어서 제가 교정하는 데 고생 좀 했거든요. 그 애가 쓴 글을 다른 사람이 제대로 읽어낸다는 건 불가능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그 왕이 그 종이를 보고 딱 ‘소유아’를 읽어냈다는 게 믿어지지 않더라고요.”
앞서 가던 히연의 뒤에서 려화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하. 그것참 멋진 이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