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十一花 * 이 세상에 한 송이밖에 없는 (4)
소이랑 소유아. 소이랑 소유아.
몇 번을 생각해 봐도 왜 자신이 바로 떠올리지 못했는지……. 너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물론 의심을 아예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 할 근거가 없었으니 그냥 흐지부지된 듯.
아니. 일단 자기후회와 반성의 시간은 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은 좀 기뻐하자.
생각해 보면 그거잖아?
이랑이 자신이 찾고 있던 ‘소유아’였고, 그것이 그녀의 본명! 그리고 이랑은 서하연의 꽃…….
서하연에는 궁극의 규칙이란 게 있다! 본명을 아는 자가 꽃의 주인이 된다는 특이한 청혼방법!
필요한 것 중 자신은 그녀의 본명을 알고 있으니 이거 유리한 상황이 아닌가!
게다가 꼬맹이 성격이라면 절대 규칙을 깨는 일 따위 상상조차 못 할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 절대 무를 수 없다는 청혼을 위해 필요한 건 단 하나.
그 ‘증표’인가 뭔가 하는 것.
“도대체 뭐지…….”
결론에 거의 도달한 거 같았지만, 정작 중요한 정보까지 손에 넣지는 못했고, 아무리 어제 대비마마께 부탁을 해봐도 그 대답까지 얻을 수는 없었다.
도대체 그 증표라는 게 뭐기에? 도대체 어떻게 생긴 거지?
더 이상 대비마마께 여쭤 봐도 그에 대한 해답을 얻기는 힘들 거 같고……. 그럼 또 누구에게 의논을 해봐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소이랑. 소유아. 소이랑. 소유아. 이랑. 유아. 이랑. 유…….”
혼자 앉아 뭐라 중얼거리던 시하루는 또 다른 무언가를 떠올린 건지 잠시 말없이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 이신을 불러와라!”
* *
이신과 시하루가 열 번을 싸운다면, 아홉 번은 이신이 이기고는 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안이 자신의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 열 번 중 한 번 일어날까 말까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왜인지 모르게 다짜고짜 화부터 내고 있던 시하루는 명단으로 추정되는 종이를 이신의 앞에 내밀었다.
“제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이신. 이게 마지막 기회다.”
‘그때 왜 제대로 보지 않았던 거지?!’
물론 성이 ‘소월가(家)’의 성씨와 같아 신기했지만, 딱히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천유국에는 같은 성씨 사용이 법적으로 금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귀족들과 같은 성씨라고는 해도 집안이나 기타 부수적인 계열로 봤을 때는 다른 경우도 있으니까.
하지만 한 번쯤 의심해볼 필요는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서화당의 유아와 자신이 찾고 있던 소유아란 인물이 동일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본 거지?
“큰일 났네…….”
하루 종일 ‘소유아’라는 이름을 머릿속으로 되새기다 보니 또 다른 익숙한 이름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바로, ‘서화당의 유아.’
물론 ‘우연’이라는 경우도 있겠지만, 분명 국시 참가자 명단을 확인할 때 들었었다.
서화당의 유아가 이제 막 18살이 되어 호패를 받았다고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랑 역시 올해로 18살이 되지 않았던가!
과연 이걸 그냥 우연으로 받아넘길 수 있을까?
현재는 그저 ‘의심’의 단계. 좀 더 확실한 ‘증거’나 이 가정을 뒷받침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니 문득 누군가의 어느 대사 하나가 그의 머릿속을 스쳤고, 그 즉시 명단을 뒤지던 그는 자신이 원하던 이름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랑은 국시를 보러 왔었다.
하지만 분명 명단에는 ‘소이랑’이라는 이름이 없었다. 명단에 적혀 있는 이들 중 그녀와 성별과 나이가 같은 여성은 오직 ‘서화당의 유아’.
그런데 어떻게……. 이신은 그녀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자신을 감독관으로 넣은 거지?
가능성은 단 하나.
‘이신은 서화당의 유아가 이랑이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확신이 필요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이신을 앞에 불러다 놓고 심문하듯 묻고 있었다.
“내 질문에 한 치의 거짓 없이 대답하는 게 좋을 거다. 이신.”
자신이 불리한 상황, 또는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가끔 존댓말을 사용하기도 하는 그였지만, 이렇게 처음부터 술술 반말로 나오는 경우는 이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소이랑이 서화당의 유아라는 걸 너는 미리 알고 있었던 건가?”
이럴 때는 그냥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
“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그 아이가 궁에 들어오기도 전부터 전 그 아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애를 예뻐하시던 대비마마의 곁에서 쭉 보고 있었으니까요.”
“그럼…… 내가 알고 있는 ‘소유아’와 동일 인물이 맞는 건가?”
시하루가 아주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고, 그 질문에 이신이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주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저 이름이 나왔다는 건 다 알고 자신을 찾았다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이다. 잠시 밖의 상황에 귀를 기울이던 이신은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자 안심한 건지 입을 열었다.
“……예. 맞습니다. 이랑님은 소월가(家)의 후계자. 소유아님이십니다.”
기껏 들려달라는 대답을 해주었으니 기뻐할 만도 한데 어째서인지 시하루는 평소보다도 더 조용해졌다.
닫혀버린 그의 입에 의해 방 안에는 무서운 침묵이 맴돌았고 눈치 없는 이안이 그 잠깐을 못 참고 침묵을 깨려고 했지만, 그의 아버지에 의해 저지당했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조용하던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따지듯 물었다.
아주 잠시 고민하던 이신은 인상을 찌푸렸다. 괜히 말을 꺼냈나. 그러나 이미 말 다해놓고 이제 와서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명하려면 끝까지. 모든 걸 말해야만 했다.
과연 이게 옳은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으니까요.”
잠시 고민하던 이신은 그냥 모든 것을 말해버리는 게 나을 거라 판단했다.
시하루 성격에 그냥 물러설 리가 없었고, 차라리 입단속을 시켜 그를 같은 편으로 끌어드리는 게 나을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게다가 그는 이랑에게 마음이 있었고 일단은 왕이니 든든한 존재가 될 테니까.
“설마 소월가의 전 가주부부를 해한 건…….”
“그건 아닐 겁니다. 두 분은 볼일이 있어 지방에 내려가시다 사고로 돌아가신 게 맞습니다. 산사태에 의한 사고라고 들었습니다.”
“소유아도 그 여행에 함께 갔다고 들었는데? 사고를 당했다고.”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와는 너무도 다른 이야기였다.
당황한 듯 보이는 시하루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신없이 방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사실을 알게 되니 정신이 없었다.
“아니요. 여행을 떠나는 날. 그녀는 갑자기 몸이 좋지 않아 이웃집인 유월가(家)에 맡겨졌습니다.”
“그런데 왜 죽었다고 한 거지? 다들 그렇게 알고 있잖아. 소월가(家)의 후계자도 그 자리에서 함께 죽었다고.”
시하루는 이미 정신을 놓아버린 상태나 다름없었다.
늘 하던 표정관리는 이미 소용이 없었다. 얼이 빠진 표정으로 계속 이신에게 질문을 했고, 대답 하나하나에 놀라워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시하루는 살아 있는 사람을 왜 죽은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냐고 따져 물었다.
그녀가 소유아라는 걸 알았다면 이렇게 돌아오지 않아도 되었고, 바로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을 테니까.
원망이 섞인 그의 질문에 이신은 이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었고, 지금부터 자신은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할 거라는 말로 일단 그를 진정시켰다.
“소월가(家)의 전 가주이신 소유란님에게는 형제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친척들도 없었죠. 이를 기회로 그 소월가의 가주 자리를 넘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소유란님의 부인이셨던 진유희님의 오라버니 되시는 분이셨죠. 그가 바로 진유한입니다. 그분은 더 이상 소월가를 이을 후계자가 없으니 그나마 가까운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하며 소월가를 차지했습니다.”
“잠깐. 정식 후계자인 유아가 있잖아. 그녀가 살아 있다는 걸 밝히면 그 자리를 되찾을 수 있었을 텐데?”
가만히 이신의 이야기를 듣던 시하루는 예전에 이랑이 자신은 궐 밖에 나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했던 걸 떠올렸다. 이제야 그때의 그 말이 이해가 갔다.
그녀는 궐 밖에 나가 원래 자신의 자리였던 소월가(家)를 되찾으려고 했던 것.
‘혼자서 뭘 할 수 있다고. 그 애는 좀 주위의 도움을 받는 방법을 배워야 해!’
“아니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으니까요. 유아님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그들은 그녀가 여행에 동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 역시 사고사라 공표한 것은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자신들이 소월가(家)를 차지하는 데 있어 그녀는 걸림돌이었겠군.”
“네. 그 뒤로 진유한은 유아님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제야 이야기가 통하는 거 같았다.
이신이 망을 보라고 세워놓은 이안 역시 어느새 이야기에 빠져든 건지 탁자까지 다가와 있었고, 이미 그 비밀스러운 대화에 몰입해 있었다.
“소월가(家)의 가주에게는 대대로 내려오는 인장이 있습니다. 왕가(家)에서 옥새를 사용하듯, 귀족가문에서도 비슷한 게 있지요. 하지만 진유한에게 그 인장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찾을 수가 없었던 거겠지요. 소유란님이 숨겨뒀거나, 다른 사람에게 맡겼거나.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어쨌든 진유한의 계획을 눈치챈 유월가(家)의 가주는 유아님의 존재가 밖으로 나가면 그녀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것을 염려했고, 대비마마께 도움을 요청한 겁니다. 당시에 저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고요.”
“왜 어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한 거지?”
“전 소월가의 가주의 부인이신 진유희님께서는 서하연의 삼화(三花) 셨습니다. 하지만 소유란님과의 혼인을 위해 삼화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죠. 당시 삼화의 동기였던 이가 전하의 어머니이신 대비마마와 현재의 려화이십니다. 유아님이 태어나던 날. 그녀의 대리 보호자를 대비마마와 려화님으로 정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만 모르게 주위에서는 똘똘 뭉쳐 일을 꾸미고 있었다니. 시하루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어떻게 자신에게는 말 한마디 안 해줄 수 있는가! 이신은 그렇다고 쳐도 설마 자신의 어머니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이신은 슬슬 시하루가 짜증을 낼 거라는 예상을 할 수 있었다.
그가 궁시렁거릴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바로 말을 이었다. 될 수 있으면 그의 관심을 바로 끌 수 있을 정도의 말을.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십 년이라는 기간이 거기서 나온 겁니다.”
항상 그가 투덜거리며 물어오지 않았던가. ‘왜 나만 소이랑의 존재를 몰랐던 거야?’, ‘왜 십 년이라는 제한을 둔 거지?’, ‘어째서 왕후로 올린 거야?’ 기타 등등.
과연 이신이 의도한 대로 그 말이 나오기 무섭게 시하루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고정했고, 슬슬 발동이 걸리려던 그의 짜증은 단숨에 잦아들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대비마마와 려화님께서 서로 유아님을 데려가려고 하셨거든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하지만 당장 서하연에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먼저 대비마마께서 십 년 동안 유아님을 돌보는 것으로 합의를 본 겁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처음부터 서하연으로 갈 수도 있었다는 말이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예.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죠. 최대한 타인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하는데 서하연 최연소 합격생이라는 명예를 갖고 있던 유아님이 입학하시면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을 테니까요. 최대한의 눈을 피하고자 대비마마께서는 유아님을 영희궁에 보내신 겁니다.”
아무리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였다고는 해도, 그냥 영희궁에 보내면 되지 왜 굳이 ‘왕후’로 들인 건지는 의문이었다.
시하루는 왜 그녀를 왕후로 영희궁에 들인 거냐는 질문을 할까 말까 고민했다. 다행히도 이신이 그의 생각을 읽은 건지 그가 묻기도 전에 먼저 대답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궐 안에 궁녀도 아닌 어린 아가씨가 돌아다니면 눈에 띄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후궁으로서 희안궁에 넣을 수도 없으니 말입니다. 할 수 없이 대비마마께서 점찍어 둔 왕후라는 이름으로 궐에 들어오시게 된 겁니다. 희수궁에서 지냈다면 희안궁의 아가씨들의 시선이 주목되었겠지만, 영희궁에서 지냈기 때문에 왕에게 관심을 받지 못한 비운의 왕후가 됨으로써 다른 이들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요. 전하께서 유아님의 존재를 모르고 계셨던 게 오히려 무관심이라는 말로 잘 포장되어 더 좋은 효과를 주었죠.”
시하루는 허탈하다는 듯 한숨을 토해냈다. 그가 이랑을 모르고 지내는 것 역시 대비마마를 포함한 모든 이들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말.
이신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그의 눈이 다시 찌푸려졌다.
알고 있었다면 미리 알려 주던가. 게다가 저번에 분명히 이신은 그가 갖고 있던 이름 적힌 종이에 대해서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때 미리 말해줬다면 됐을 텐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때 하루님께서 갖고 계신 종이를 보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궁금하시다면…….”
역시 이신은 눈치가 백단이었다.
이신은 시하루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다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저 역시 그 아이가 왕후의 자리에 올라, 시간 낭비하는 건 반대였거든요. 그분은 더 크게 될 인재니까요. 려화와 왕후. 두 자리에 모두 오를 수는 없습니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포기해야 합니다.”
* *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야. 오늘은 왜 이래요?”
이랑은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시하루에게 장기 도전을 하러 온 그녀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평소보다 집중을 못 하고 있었다. 자신의 실력을 이리도 무시해도 되는 건지……. 그녀는 자존심이 상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제대로 안 하실 거예요?”
자신을 무시하지 말아 달라고 충고했지만, 지금 시하루의 머릿속에는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난 네가 서화당의 유아라는 거 알고 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난 네 본명이 소유아라는 걸 알고 있다.’
자신이 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걸 그녀가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시하루는 고민에 빠졌다. 지금이라도 당장 말하고 싶어서 미칠 거 같았다.
하지만 괜히 말을 꺼냈다가 오히려 거리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 그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모른 척하기에는 너무 큰 문제이기도 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신중하게…… 아악! 하지만 말하고 싶어서 미치겠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잠깐. 오늘 정말 왜 그러시는 거예요? 어디 아프세요?”
겉으로 다 드러나는 시하루의 갈등을 관찰하던 이랑은 약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문제가 심각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도 정신없긴 했지만 오늘따라 계속 시선을 돌린다든지, 탁자를 손으로 친다든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뭐라 대답을 하려던 시하루는 곧 생각을 바꾼 건지 혼자 고개를 젓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결국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나름의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그 진정도 잠시.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 그럼 다행이고요. 후후. 어찌 되었든 어쩌면 오늘 저의 첫 승리가 되겠네요.”
이런.
내적 갈등과 고뇌의 시간이 예상보다 더 길었던 모양이다.
초반부터 집중하지 못한 시하루가 흐트러진 정신 줄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 이랑은 여전히 집중력과 승부에 대한 집념을 발휘했다.
그가 방심한 것도 있었지만, 요즘 들어 유시후의 훈련 덕분인지 이랑의 장기 실력은 확실히 늘어가고 있었다.
시하루가 이대로 가다가는 언제가 그녀에게 패배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 정도로.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잠깐잠깐. 너도 봤듯이 내 상태가 좀 안 좋잖아? 이건 무효…….”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 안 되죠~. 자기 정신과 건강 챙기는 것도 능력이에요.”
이제부터 노력한다고 해도 뒤집을 수 없을 흐름이 돼서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우는소리를 해봤지만 이랑은 절대 봐줄 생각이 없다는 듯 고개를 완강하게 저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저번에도 제가 한 번 봐 드린 거 같은데요.”
두 번은 없다는 말이었다. 그만큼 승부의 세계는 냉혹했다.
* *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냥 확 말해 버릴걸 그랬어.”
시하루는 또다시 폭풍 후회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곁에는 이번에도 역시 천유국에서 남일 참견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국민 부자(父子)가 앉아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왜 저러신데요?”
이안은 아직 상황파악을 못 했고, 눈치 없이 자신의 옆에 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는 이신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들의 질문에 앉아 있던 이신이 잠시 씩씩거리는 시하루의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다른 생각 하시느라 집중을 못 해서 이랑님에게 지셨다는구나.”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장기요.”
고작 장기 대결 하나 때문에 늘 기고만장한 인간이 저렇게 풀이 죽어 있다는 건가.
이안은 겨우 한 판 졌다는 이유로 풀이 죽어 있는 시하루를 뚫어져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 시하루의 모습 때문인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난 건지 모를 그는 또다시 그 입을 놀리고 말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겨우 한 판 지신 거 가지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겨우 한 판?!”
이안 나름대로 위로를 할 생각이었지만, 시하루는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그 말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제서야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이미 늦은 상황. 이안은 아버지를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신은 그 눈빛을 매정하게 무시해버렸다.
아무리 아들이라지만 혼날 만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그동안 계속 이기셨잖아요……. 한 번쯤은 질 수도…….”
혼자 자신의 몸을 지켜야만 하는 이안이 눈물을 글썽이며 변명을 해봤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어 보였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으로 다가온 시하루는 상당히 화가 나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한 번? 그 한 번이 문제라고!”
지금까지 이랑이 그를 찾아왔던 게 무엇 때문이었던가. 그 바보 같은 승부욕 때문이 아니었나!
슬프지만 그에게 관심이나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 매일 같이 찾아온 게 아니라, 그를 이기려는 그 도전정신 하나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어제.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잠깐. 설마 너 한 번 이긴 거 가지고 만족한다든가 뭐 그런 거 아니겠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왜요, 충분히 만족했는데요?”
이럴 수가. 시하루가 놓치고 있는 게 있었다.
승부욕만 높았지,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바로 흥미가 떨어지는 녀석이었다니!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니지. 아니야. 이런 건 승률로 따져야 하는 거라고. 다시 앉아. 한 판 더해!”
상황이 역전됐다. 하루 한 판으로 규칙을 정해둔 건 그였으면서 싫다는 이랑을 붙잡고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번 굳은 결심을 바꾸지 않겠노라 선언한 그녀는 그를 본체만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겼으니까 이제 이곳에 올 이유는 사라졌네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잠깐만!”
이랑은 아주 작은 미련조차 없다는 듯 매정하게 말했다.
눈앞에 깜깜하진 시하루가 그녀가 방에서 나설 때부터 궐의 정문에 도달하는 데까지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호소를 한 덕분에 다행히 한 번의 도전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런데 겨우 한 판이라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한 번만 더 지면 끝이라는 뜻이야.”
시하루는 불안했다.
왠지 가까운 시일 안에 더는 자신이 실력으로 그녀를 이길 수 없게 될 거 같은 예감이 들었으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녀석이 학습능력이 빠른 녀석이라는 걸 잊고 있었어…….”
* *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소이랑.”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이랑은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안 그래도 저녁 시간이 가까워져 배가 고팠기 때문에 신경이 예민한 상태였는데 자신을 가로막는 존재에 의해 그녀의 짜증은 배가 되었다.
사정상 유시후의 집에 얹혀살고 있는 그녀가 밥을 먹기 위해서 지나야 하는 관문.
그나저나 그가 저렇게 위협적인 목소리로 자신을 부른다는 건 분명 무슨 잘못을 했다던가 아니면 지금 기분이 안 좋은데 그 짜증을 풀 상대가 없었고 하필 자신이 희생양으로 지목된 것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듣자하니 너 이겼다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응. 순식간에……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이겼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이랑이 승리했을 당시의 기쁨을 떠올린 듯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이 기쁜 소식을 듣고도 어째서인지 유시후의 표정은 어두웠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지? 지금 이기게 해줬으니까 그 과외비라도 달라는 건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런데 왜 한 번 더 기회를 준거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냥?”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불확실한 대답.
이랑 본인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오라버니라고 만족스러웠을까.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힘들 거 같았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 누군가가 현재 부재중인 게 틀림없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너 설마 마음이 있는 건 아니겠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없을걸?”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야 그 어정쩡한 대답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지만 나도 잘 모르겠는걸.”
진심이었다.
최근에 이랑은 지금까지 해본 적 없는 색다른 고민에 빠졌다. 며칠 동안 그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해봤지만, 결국 그녀가 내린 답은 고작 ‘모르겠다.’였다.
‘마음’이 있다는 말의 의미가 단순히 ‘좋아한다.’라고 생각하면 확실히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물론 처음에 얼굴도 모르고 살아왔던 때에는 막연히 싫어했지만 꽃따리 오빠와 어울리다 보니 그렇게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같이 있으면 즐거웠으니까. 그렇다면 좋아하는 건가? 싫어하지 않으면 무조건 좋아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너무 어려워. 이런 건 책에서 본 적이 없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소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머, 이랑이 왔니? 잠깐 시후야. 너 또 이랑이 괴롭히고 있던 건 아니겠지? 아, 저녁 다 되었다던데 다 같이 나와서 먹을까?”
또다시 이랑을 꾸짖으려던 유시후는 누군가의 등장에 입을 다물었다.
하필이면 이때 등장하신 그의 어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갔고, 곧 이랑의 손을 잡아끌며 그에게서 구출해냈다.
이랑은 자신의 구원자이신 유월가(家)의 안주인이자 유시후의 어머니인 여인을 바라보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어떻게 이런 인자한 아주머니에게서 저런 오라버니 탄생한 건지.
아주머니에 의해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이랑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물론 식사 후에 또 자신을 괴롭혀 오겠지만, 그 안에 히연이 돌아올 테니 문제없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유시후! 너도 빨리 오렴!”
자신의 어머니의 말에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난 유시후가 별말 없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불만이 있어 보였고 혼자 멀찍이 떨어져서는 중얼거렸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렇게 될까 봐 내가 거리를 두라고 경고했던 건데…….”
워낙 눈치가 빠른 유시후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누군가의 얼어붙었던 마음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는 거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