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十花 * 이 세상에 한 송이밖에 없는 (3)
오늘도 불쌍한 이안은 겁먹은 표정으로 시하루 앞에 섰다.
“또 뭐냐?”
그의 표정을 읽은 시하루는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았다.
자신은 오늘 기분이 꽤 좋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화를 내지 않겠다는 말투였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린 이안은 그만 경계심을 풀어버리고 안도해버렸다.
“지금 밖에 유시후님께서 찾아오셨어요.”
유시후가 찾아왔다는 말을 듣기 무섭게 시하루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평소라면 바로 짜증을 냈겠지만, 오늘은 괜찮을 거라고 장담했기 때문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부터 뭔가 불안한 그는 터덜터덜 걸어 작은 탁자 앞에 앉았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곧 호랑이를 마주할 용기가 생긴 건지 이안을 향해 들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를 보던 이안이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다시 문이 열렸고, 이안과 함께 들어온 유시후는 뭐가 불만인지 모르게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뭐냐.”
하늘같은 왕의 앞에서 저런 표정으로 당당히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존재할까?
아무래도 유시후의 불만의 원인은 시하루와 관련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는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우물쭈물거리던 시하루가 위협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제야 시선을 거둔 유시후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곧 한숨을 내쉬며 그의 앞자리에 않았다.
그리고 앉기 무섭게 한다는 말이.
“저랑 한 판 하시죠.”
여기서 말하는 ‘한 판’이 무슨 판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아차리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곧 그것이 ‘장기’를 의미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시하루는 자신은 지금 그럴 생각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거절했다.
하지만 천하의 유시후가 어디 그의 말을 쉽게 듣겠는가.
가뜩이나 그의 등장만으로도 기분이 안 좋아진 시하루는 지금 이게 뭐하자는 건지 답답하기만 했다.
“더 이상 하기 싫다고 도중에 갈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왜?”
이 핑계 저 핑계를 생각하다 지난날 유시후가 도중에 돌아간 게 생각나 그것을 이유로 거절하고 있었지만, 사실 시하루는 전에 유시후와의 한 판으로 자신의 실력으로는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어차피 질 텐데 굳이 발버둥 치면서까지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의욕이 없어 보이는 시하루를 힐끔 하고 바라본 유시후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곧 엄청난 결심을 한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기시면 제가 전하의 신하가 되겠습니다. 꼬박꼬박 존댓말로 쓸게요.”
이걸 해? 말아? 그런 시하루의 고민을 싹둑 잘라버릴 정도로 유시후가 제안한 건 너무나 파격적이었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저 녀석을 마음껏 부려 먹을 수 있다니!’
왕에게 예의를 갖추는 건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그는 제정신이 아닌 겁 없는 호랑이였으니까.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그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다는 건 엄청난 일. 아니, 이건 사건과도 같았다.
도대체 이 장기가 뭐라고?
“……대신에 제가 이기면 ‘그걸’ 저에게 주세요.”
그럼 그렇지. 뭔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그거’라니? 도대체 뭘 말하는 거지?
대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 채 ‘그거’라고 지칭한 유시후 때문에 시하루는 눈만 끔뻑거릴 뿐. 쉽게 하겠다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원하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아까부터 그의 눈치를 보던 유시후가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무슨 종이 한 장 갖고 계시지 않으세요?”
“종이? 종이가 필요한가?”
뜬금없이 ‘종이’를 요구하기 시작한 유시후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시하루가 정확히 어떤 종이를 갖고 싶은지 말해보라 말하며 서랍을 열었다.
하지만 유시후가 원하는 ‘종이’는 이 세상에 널려 있는 흔한 종이와는 다른 종이인 게 틀림없었다.
“아니요. 평범한 종이는 아닌데요. 예를 들면……. 달랑 이름 석 자가 적힌 오래된 종이라던가…….”
“아……. 그걸 네가 어디에 쓰려…….”
유시후의 말에 그의 머릿속에 어떤 종이 한 장이 떠올랐다.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말을 움직이던 시하루가 멈칫했다.
그리고 들고 있던 말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로 굳어, 놀란 표정으로 유시후를 바라봤다.
“……내가 너한테 그 종이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가?”
아니. 절대 한 적이 없었다.
그와 길게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을뿐더러, 함께 있으면 불편해 미칠 거 같은데 굳이 그에게 이런 비밀스러운 이야기까지 해줬을 리가 없었으니까.
그럼 누가? 이신이 말해준 건가?
“이신이 말해줬나?”
“아……. 이신공께서도 알고 계시나 보죠?”
이신이 알려준 건 아닌 거 같았다.
한 가지밖에 없던 가정이 무너지자 시하루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꼬여버렸다.
시하루. 그에게는 부적처럼 항상 품 안에 넣고 다니는 것이 있었다.
얼마 전에 이신이 그에게 이제 그만 잊고 깔끔하게 버리라는 충고를 했던 물건이 그것이다.
그것은 첫사랑이었던 그 여인과 관련이 있는 유일한 증표. 방금 유시후가 말한 대로 달랑 석 자의 이름이 적혀 있는 종이.
이신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었고, 그것에 대해 말한 적도 없었는데 그걸 그가 알고 있다는 것은…….
“너……. 역시 뭔가 알고 있는 거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기력해 보이는 시하루였지만 이제는 달랐다.
표정부터가 진지해진 그는 으르렁거리듯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해라.’라고 말했지만 유시후는 그것을 능숙하게 무시했다.
“글쎄요. 그나저나 어쩌실래요? 저랑 한 판 두실 마음이 생기셨나요?”
* *
“분명 그 자식.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해.”
“이렇게 궁금해하실 거면 그냥 하시지 그러셨어요?”
“남자가 되어서 배짱이 없으시네요.”
일 따위 다 미룬 지 오래. 아니, 일할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주군을 상대로 있는 대로 한마디씩 하고 있는 이신 부자(父子)였다.
한숨을 내쉬던 시하루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이신의 말대로 차라리 도전하는 게 나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이미 지난 일.
벌써 하루가 지나고 있었지만, 불과 24시간 전의 일은 아직까지도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안 해.”
“……의외로 포기가 빠르시네요.”
유시후가 당황해할 정도로 시하루의 대답은 너무나 빨랐다. 그리고 대답이 빠른 만큼, 그 뒤를 따르는 후회 역시도 빨랐다.
“하지만 해봤자 내가 질 게 분명한걸.”
어설픈 마음으로 도전해봤자, 정보를 얻을 수도 없을뿐더러 괜히 마음에 패배의 상처만이 남을 게 분명했다.
그는 피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자신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었다.
“만약 정말 살아 있다면 어쩌시게요?”
“음……. 사실 생각해봤는데. 이제는 괜찮을 거 같아. 하지만 살아 있다면 정말 기쁠 거야.”
그의 시원스러운 대답에 옆에 앉아 있던 이신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늘 고민만 하고 대답하기를 어려워하던 시하루의 마음이 아무래도 정리가 된 듯했다.
“전하.”
다시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서, 과연 24시간 전의 자신의 선택이 옳았던 것일까? 하고 계속 머리를 굴리고 있던 시하루가 갑자기 문밖에서 들어가겠다는 양해를 구하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들어와라. 무슨 일이지?”
“시무형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시무형?”
뜬금없이 등장한 누군가의 이름에 시하루는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 되물었다.
그런 그에게 방금 전의 정보가 확실하다는 걸 알리기 위해 대신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시무형이라면 소월가(家)의 전 대리가 아닙니까?”
“전 소월가(家)의 대리라면 가주가 바뀔 때 물러났잖아요.”
현 소월가(家)의 가주는 진유한이었고 시무형은 전 소월가 가주의 대리인 자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유한이 소월가의 가주권을 갖게 되자 그는 내쫓기듯 그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의 행방은 알 수 없었지만 천유국을 떠나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었다.
“말이 물러난 거지. 그냥 못된 인간들에게 쫓겨난 거나 다름없어.”
시하루 못지않게, 이 부자(父子)들 역시 시무형이란 존재에 관심이 있어 보였다.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며 말하는 그들 사이로. 시하루는 퉁명스럽게 말을 잘랐다.
“……전하께서는 왜 그렇게 진유한님을 싫어하세요?”
이안의 눈치 없는 질문에 옆에 앉아 있던 이신이 그의 옆구리를 툭툭 치는 것으로 눈치를 주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이미 불쾌하다는 시하루의 표정을 봐버린 이안은 다시 얼어붙었고,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그 인간은 원래 가주의 빈자리를 차지한 늙은 도둑이니까.”
* *
“전 소월가(家)의 대리. 시무형이라…….”
천유국에서는 귀족가문의 가주의 이름 앞에 그 가문에 맞는 두 개의 성을 붙였다.
이는 뼈대 있는 가문과 일반 가문에 속해 있는 이들을 구별 짖기 위함이었다.
천유국 귀족 권력의 양대 산맥. 소월가(家)와 유월가(家).
전 소월가의 가주. ‘소휴 시오란’과 현재 유월가의 가주인 ‘유월 하림’의 친분은 어릴 적부터 두터웠다고 한다.
이 양대 산맥은 가치관까지 맞는 바람에 왕에게 어떤 안건에 대한 발언할 때 그 힘이 두 배가 되었고, 이는 왕에게 상당한 피로를 줄 정도였다.
솔직히 둘이 힘을 합쳐 반역을 일으켜 왕권에 도전했다면 이 천유국의 주인은 누가 됐을지 모르는 일.
하지만 그들은 권력 욕심 따위 전혀 없었다.
그래도 만약이라는 경우를 생각 안 할 수가 없던 다른 대신들이 딸이 있는 소월가(家)와 국혼으로 연을 맺는 것을 추진했지만, 당시 시오란은 태어난지 얼마 안 되는 딸과 떨어질 수 없다는 말로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그런 시오란이 곁에 두고 항상 조언을 구했기로 유명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시무형이다.
그런 그가 만일 궐에 들어온다면…….
“가뜩이나 유월가의 가주하나 상대하는 것도 벅 차는데…….”
게다가 최근에 그 호랑이 유시후가 유월 하림의 아들이자 차기 유월가(家)의 후계자였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으니 현재보다 미래가 더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하아……. 그것뿐만이 아니야…….”
어두워 보이는 자신의 미래에 한숨을 내쉬던 시하루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중얼거렸다.
“……그 얼굴로 어떻게 48세야…….”
48년을 살았지만, 아직도 밖에 나가면 30대 중반으로 오해를 받는 비정상적인 외모를 지닌 유월 하림. 단순히 그의 동안 외모를 부러워하는 거 같았다.
“……이신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시무형 말이야.”
한참을 유월 하림의 동안에 대해 질투와 불만을 늘어놓는가 싶던 시하루가 약간의 침묵 끝에 조심스럽게 이신에게 물었다.
“음……. 시무형 그도 나이에 비하면 젊어 보이죠.”
“아니, 그거 말고. 시무형이 갑자기 이 시점에 등장한 거 말이야. 뭔가 있다는 생각 들지 않아?”
이신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건성으로 맞장구를 쳐주려다가 멈추었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은 일에 너무 깊게 생각하는 건 건강에 해롭다는 듯 말했다.
“전 그냥……전하께서 너무 깊게 생각하시는 거 같은데요. 쓸데없는 일까지 너무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 *
“왜 또 부르셨습니까…….”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와 자리에 앉기까지. 다 죽어가는 시하루의 모습에 앞에 앉아 있던 대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랜만에 바쁜 아들 녀석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불렀는데, 어째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자리에 앉았지만, 똑바로 앉지 않았고 비스듬하게 앉아 당장에라도 방에서 벗어날 준비를 하던 그는 입을 닫아 버렸다.
계속되는 자신의 안부 인사를 무시하는 시하루 때문에 대비가 서서히 짜증이 나기 시작할 즈음.
결국, 그 순간을 못 참은 그녀는 시하루가 방에 불려 오는 동안 몇 번이고 예상했던 질문을 내뱉었다.
“그래서, 이랑이와의 관계는 나아지고 있나요?”
이럴 줄 알았지.
‘자신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는 무슨. 그냥 현재 상황 보고를 받기 위해 부른 거면서!
요즘 들어 그는 하루에 한 번씩 자신을 불러다 놓고 이렇게 현재 상황을 보고 하라 잔소리하는 대비의 기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던 그는 뭔가 즐거워 보이는 자신의 어머니의 표정을 보고 대충 어떤 대화가 오갈지 예상이 갔다.
물론 매일같이 이랑이 찾아오기는 했지만, ‘화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는 그랬다.
그녀가 궐을 찾는 이유는 자신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승부욕에 불타오른 그녀가 도전자 정신으로 찾아오는 거니까.
“……그나저나 이것들은 뭐예요?”
끝이 보이지 않는 대화에서 피하고자, 재빠르게 다른 쪽으로 대화의 주제를 바꾸려던 그의 눈에 대비마마의 탁자 위에 잔뜩 올려져 있는 종이 뭉치들이 들어왔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종이 중 한 장을 집어 들어 대충 훑어보니, 글자들이 빼곡하게 쓰인 그것이 편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 그건 이 어미가 서하연을 다녔을 때 받은 연서들이랍니다. 후후.”
대비의 말에 시하루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 종이를 들어 올리며 마음에 안 든다는 투로 말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아마 찢어버리셨을 거예요.”
다른 남자(들)에게 받은 연서를 지금까지 고이 모셔놓고 있었다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이 일을 아신다면 두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을 정도였다.
“그럴 리가요. 호호. 그 아버지란 인간이 쓴 연서랍니다~.”
아버지가 어머니께 쓴 연서라고?
천유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닭살 부부로 유명했다는 어머니와 아버지 이야기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로만 들었지 이렇게 직접 증거물을 접하는 건 처음인 그는 기분이 꺼림칙했다.
“보고 싶지 않나요? 사실 궁금하죠?”
대비의 눈이 ‘안 궁금하다.’라는 말이 나오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네……. 갑자기 궁금해졌네요.”
사실 자기 사랑 지키느라 정신없는 그는 남들 사랑 이야기 따위 관심도 없었지만 어찌하겠는가.
‘자, 어서 읽어봐. 이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야.’라는 듯 벌써 마음에 드는 순서대로 편지를 늘어놓고 있는 대비마마가 앞에 있는데.
처음으로 넘겨받은 편지를 대충 읽던 시하루가 어딘가 이상한 곳을 발견한 건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대비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잠시 말할까 말까를 고민하던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이 편지 조금 이상한 거 같은 데요…….”
“이상하다니요?”
별생각 없이 편지를 읽던 그가 이제는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뭔가 단단히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거……. 아무래도 아버지께서 다른 여성분께 쓰신 연서 같은 데요…….”
“그게 무슨 말이죠?!”
시하루 못지않게 깜짝 놀라며, 잽싸게 그의 손에 들린 종이를 빼앗은 대비가 매의 눈으로 편지를 훑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별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자, 곧 고개를 갸우뚱하며 어디가 문제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첫 문장을 보세요. ‘사랑하는 수령에게.’라고 쓰여 있잖아요. 어머니의 성함은 ‘세연’이잖아요.”
자신의 어머니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까 두려워, 아주 조심스러운 그의 말에 지적한 부분을 흘끗 보던 대비가 피식 웃었다.
“아~. 그거요? 그건 ‘서하연의 호(號)’라는 거예요.”
“서하연의 호(號)?”
표정에서부터 혼란스러움이 엿보였다.
그런 그에게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고민에 빠진 대비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음……. 서하연의 꽃들은 입학과 동시에 ‘서하연의 호(號)’라는 또 다른 이름을 받는답니다. 졸업하기 전까지는 본명이 아닌 그 이름으로 살아감으로써 서하연의 일원이 되는 거죠.”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까지 몰랐던 어머니의 또 다른 이름에 신기하다는 눈치였다.
순간 아버지가 어머니를 내버려두고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있던 건 아닌가 하고 심각하게 고민하던 그가 안도의 한숨과 함께 다음 종이를 넘기다가 멈칫했다.
“그런데 이다음에 주고받은 편지에는 어머니의 이름이 제대로 적혀 있는데요?”
“그때는 청혼을 수락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요. 짝이 생기면 그때부터는 본명으로 사는 거죠.”
조금 전만 해도 분명 서하연의 호(號)라는 다른 이름을 쓰다가 갑자기 지금부터는 본명으로! 라니.
여자들의 사고방식이 복잡한 건가, 아니면 서하연이라는 곳이 복잡한 건가.
“음……. ‘꽃의 이름’이라고. 서하연에서만 내려오는 궁극의 규칙이라는 게 하나 있어요. 이 세상에 단 한 송이만 존재하는 꽃이 있다면, 그 이름을 하는 자가 그 꽃의 주인이 된다. 서하연의 꽃이 자신이 본명을 상대에게 준다는 건 즉. 무를 수 없는 ‘청혼’을 의미하는 거랍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먼저 청혼을 한다는……어?”
중얼거리며 종이 뭉치를 대충 넘기던 그가 문득 어떠한 사실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꼬맹이도 서하연의 호가 있나요? 일단 그 아이도 서하연의 꽃이니…….”
그의 말에 여유로운 표정으로 차와 함께 나온 다과를 집어 먹던 대비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어머, 모르셨습니까? ‘소이랑’이란 이름이 서하연의 호예요.”
“잠깐. 그럼 어머니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계셨다는 말이네요?”
“당연히 알고 있었죠. 저도 서하연의 꽃이었으니까요.”
뭘 그런 당연한 걸 묻고 있냐는 대비의 대답은 더 이상 작은 여유조차 보이지 않는 시하루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갑자기 다급한 듯 목소리가 바뀐 그는 아마도 마지막일 질문을 했다.
“그럼 혹시……. 이랑이의 본명도 알고 계세요?”
“물론 알고 있죠. 저는 그 아이가 서하연에 들어가기 전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였으니까요.”
긴 말이 들려왔지만, 결론은 이러했다.
시하루. 그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꼬맹이의 이름은 ‘서하연의 호’라고 하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본명이 존재한다.
“이름! 그 꼬맹이……. 진짜 이름이 뭐죠?”
“서하연의 꽃의 본명은 함부로 발설하면 안 되는 거랍니다. 그것도 아직 짝이 결정되지 않은 아이라면 더더욱요.”
알려줄 생각이 없는 건지 대비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돌린 그녀의 표정은 약간 장난스러워 보였다.
“흐음……. 하지만……. 어차피 ‘서하연의 청혼’에 필요한 건 본명 외에도 ‘증표’가 있어야 하니 상관없을지도 모르겠네요.”
혼자 뭐라 중얼거리던 그녀가 이제 슬슬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쓸어 모아 상자 안에 집어넣고는 재촉하는 아들의 눈빛에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소유아. 예쁜 이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