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十九花 * 이 세상에 한 송이밖에 없는 (2)
아까부터 심기 불편한 유시후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괜히 왔나? 어차피 집에 가서 기다리면 볼 수 있었을 텐데.’
“여전하시네요. 이 인기.”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은 늘 무표정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 도련님의 심기 불편하다는 표정은 보기 드문 일이었기에 보필은커녕, ‘감히’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킥킥거리고 있던 하인이다.
하지만 그는 곧 심기가 불편하다는 유시후에 의해 뒤통수가 강한 고통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 수 없게 되었다.
“도련님……. 아가씨 나오시면 이를 거예요.”
“화해하자 우리. 자, 웃어.”
바로 태도를 고치고 화해를 하자며 손을 내미는 유시후의 반응에 한 번 더 웃어버리는 그였다.
“그런데 아가씨 아직 일 끝나지 않으신 거 같은데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거 아시면…….”
“알아. 분명 화내겠지.”
안 그래도 그게 걱정이라는 듯 표정이 별로였던 유시후가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그렇게 좋아한다니 뭐라니 떠들고 다닐 때는 언제고, 이렇게 미리 밖에서 기다려주거나 하면 화를 내니. 정말 이상한 여자야.
‘난 우리 낭군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낭군님 역시 나를 사랑해주는 건 정말 고맙지만, 쓸데없는 데에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의 미래를 위해!’
우리의 미래는 또 무슨 말이고. 쓸데없는 시간이라니.
자신을 기다리는 시간을 ‘쓸데없다.’라고 정의해 버린 일말의 순정조차 없는 여인이 바로 그녀였다.
남들 눈에는 그녀의 거의 일방적인 애정표현에 유시후가 끌려다니며 차가운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히연은 워낙 솔직한데다 내숭 따위는 쌀알만큼도 갖고 있지 않아 자기 감정을 아무렇지 않게 고백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유시후가 그녀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고만 하면 제 몸은 제가 챙길 테니 쓸데없는 일에 시간 낭비하지 말라는 이유까지 달아 두 배로 혼내고는 했다.
제딴에는 오직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라는 이름의 무슨 ‘내조’라는 데 어이가 없어서 따로 뭐라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게 화근이었다.
예를 들면 그녀가 유시후를 배려하는 건 사랑하기 때문에 되지만, 반대의 경우는 쓸데없는 짓이므로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자기는 장시간 동안 밖에 서서 나를 기다리는 주제에 나는 하면 안 된다니.’
이건 불공평했다.
어쩌다 자신은 이런 여자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는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절대 그가 무뚝뚝한 게 아니었다. 절대!
‘그냥 이 바보가 애정표현을 할 틈을 안 주는 거지.’
그럴 필요가 없는데 바보 같은 라히연은 혼자서 짝사랑을 시도 중이었다.
“안녕. 유 낭군! 뭐야? 그 표정은 아리따운 부인을 향한 사랑스럽다는 눈빛이 아닌데, 누구야? 우리 낭군님 기분을 상하게 만든 사람이?”
지금 그녀가 말하고 있는 유시후의 표정은 ‘그래. 이렇게 내 기분도 모르고 웃고 있는 바보가 드디어 나왔네.’라고 말하는 표정.
문을 열고 나오던 히연이 그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동시에 문이며 할 거 없이 주변에서 유시후를 힐끔거리던 서하연의 꽃들의 시선들이 하나둘 거두어졌고, 그제야 숨통이 좀 트인다는 듯 유시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소란스러웠던 주위가 서서히 잠잠해지자 그의 옆에 있던 히연이 이제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남자 보기 힘든 서하연이니까 다들 유시후 보려고 난리였겠다. 이런, 좀 더 빨리 나올걸.”
막상 서하연에 왔지만, 그는 정문을 지키고 있는 이들에게 막혀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저 밖에 서서 히연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미안. 오늘 려화님이 외출하셔서 들여보낼 수 없었나 보다.”
“뭐……. 워낙 출입이 엄격한 곳이니까.”
서하연은 금남의 구역.
하지만 몇몇은 예외로 통과되었다. 예를 들면 이미 혼인을 한 남자이거나, 어린아이.
그 바보 같은 왕이 걸음 하셔도 쉽게 열리지 않는 게 서하연의 문.
오직 여인들의 여인들만을 위한 배움의 장소이니 학습 이외에 다른 쓸데없는 감정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도 그 이유 중 하나였지만, 서하연이 금남의 구역이 된 가장 큰 이유는 서하연의 꽃들을 며느리 삼으려는 귀족들의 다툼 때문이기도 했다.
이미 결혼을 한 남자나 10살 미만의 어린아이는 금남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서하연을 출입할 수 있었다.
물론 그들 역시 자유로운 출입은 불가능했지만.
남자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서하연의 학생들에게는 이렇게 히연을 찾아오는 유시후나 다른 손님들이 매번 관심의 대상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해야 하는 일은 모두 끝내고 온 거야? 난 책임감 없는 남자 싫어.”
잘 걷던 히연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는 엄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던 유시후가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곧 왜 그걸 안 물어보나 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당연하지.”
“그럼 좋아.”
그의 방문이 불만이었던 히연이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눈을 빛내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런 그녀에게 끌려가면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물었다.
“뭐야. 평소보다 더 기분 좋아 보여.”
“어떻게 알았어?”
“넌 기분 좋은 일 있으면 오히려 더 침착해지니까.”
사실은 아까부터 ‘나 엄청 좋은 일 있는데 내가 먼저 말하기는 좀 그러니까 그쪽에서 먼저 물어봐.’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으면서.
그녀가 계속해서 눈치를 주고 있는데, 어찌 그가 무시할 수 있었겠는가.
“사실은 이번에 삼화에서 1등으로 올라갔어! 그래서 할당받은 일이 더 늘어났다? 결론, 나 내일부터 당분간 집에 못 들어가. 끝내주지?”
“미안. 앞부분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갔는데, 그 뒤부터는 도대체 어느 부분이 어떻게 좋은 일인지 잡아내질 못하겠다.”
이랑 못지않게 일을 좋아하는 유시후였지만, 단순히 그는 ‘일’이라는 존재에 대해 거부감이 없는 것뿐이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일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반대였다. 이랑이에게 ‘밥’과 ‘잠’이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것이라면 그녀에게는 ‘일’과 ‘공부’가 그러했다.
이랑이 궐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가 따라가 그녀를 지켜주었으면 좋겠다고 설득시키기도 했다.
가끔 그는 히연이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초반에는 이랑을 따라 궐에 들어가면 밖에 혼자 남을 그녀 걱정 때문에 쉽게 결정을 하지 못했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이랑이 궐에 들어갈 날짜가 가까워졌을 무렵, 히연이 서하연 합격 통지서를 들고 와 입학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고.
결국, 그녀는 그가 입궐하는 날에 맞추어 서하연에 들어갔다.
서하연은 절대 금남의 구역이었으니 그쪽에서 다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돼서 좋았고, 그녀의 입장에서는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었으니 서로에게 좋은 일.
평일에는 각자 서로의 일에 집중하고 주말이 되면 잠깐 시간을 내어 만난다. 그것이 그들의 연애방식.
문제가 있다면 히연은 머리가 좋기도 했지만, 워낙에 노력파다 보니 ‘삼화(三花)’에 올라가는 건 순식간.
삼화는 왕 이외의 남자와는 혼인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 굳이 물러나야 하는 자리까지 올라가려고 하는 거지?
그녀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히연의 뜻을 존중해주기로 한 그는 따로 참견하지 않았다.
하지만 삼화를 목표로 하겠다는 말을 듣고, 동요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평생을 실체 없는 연적과 마주할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히연. 서하연의 규칙 중에 그게 있었지?”
“그거라니?”
폴짝폴짝 뛰며 걷고 있는 그녀를 진땀을 빼가며 진정시키고 있던 그가 왠지 조심스럽게 질문을 해오기 시작하자 그제야 그녀는 걸음을 늦추었다.
“왜 그거 있잖아. 려화님이 자주 들려주셨던 이야기. ‘꽃’이 들어갔던 규칙. 서하연의 규칙 8조 중 두 번째. 꽃들에게만 내려오는 기밀 조항.”
“아아. ‘꽃의 이야기?’ 그런데 그건 나랑은 상관없는걸?”
“그래 맞아. 너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규칙이었기 때문에 내가 바로 못 떠올렸던 걸지도. 너는 상관없어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상관있을 거 아니야? 예를 들면…….”
“이랑이는 상관이 있겠지. 게다가 그 애는 규칙이라면 엄청 매달리니까.”
가만히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고 있던 그녀는 더 이상 맞장구 못 쳐주겠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설마. 그럴 리가 없어. 이랑이가 말했을 리가 없어. 그 애는 려화를 꿈꾸고 있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네 말대로. 그 녀석은 무슨 일이 생겨도 규칙을 어기는 일 따위 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만일’이란 이야기가 있잖아. 내가 알고 싶은 건 그 규칙에서 필요한 ‘증표’에 관해서야.”
“좋아. 나도 도울게. 하지만 조사에 따른 초과수당이 필요하겠는데? 답례는 장터에서 가장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한 찹쌀떡이 좋겠어.”
“알았어.”
그들의 뒤를 따르던 하인이 잘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유시후와 히연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못 참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도련님. 서하연의 ‘꽃의 이야기’가 뭐예요? 거기에 히연님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이랑님에게는 적용되는 규칙이라니요? 이해가 안 가는데요?”
“서하연에는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오래된 전통이 있어. ‘이 세상에 딱 한 송이인 꽃이 존재한다면, 그 이름을 아는 자가 그 꽃의 주인이다.’ 여기서 ‘한 송이의 꽃’은 서하연의 꽃을 의미하지.”
웬일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는 유시후의 말에 하인이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에이……. 그건 좀 아니죠. 고작 이름 하나 안다고? 히연 아가씨만 해도 보세요. 아가씨 이름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귀찮아서 이걸 설명해줘 말아,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런 유시후와는 반대로 오히려 뭔가 재미있다는 표정인 히연이 방실방실 웃더니 친절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죠. 얼핏 들으면 정신 나간 규칙 같죠. 감정 따위 집어치우고 무조건 자신의 이름을 아는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한다는 걸로 해석을 한다면 말이죠. 사실 이건 ‘전통’에서 시작돼서 어느새 규칙처럼 굳어져 버린 서하연의 ‘자존심’ 같은 거예요. 과거 서하연 설립 초창기에는 아직 남녀평등 정신이 대중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인들만 모아놓은 서하연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한 상태였죠. 심지어 서하연의 학생들을 기생으로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았어요. 그런 시선들 때문에 그녀들은 자유로운 연애를 할 수 없었고. 혼인은 더욱더 엄중하게 치러졌어요. 지금과는 매우 달랐죠. 주위 시선을 신경 써야 하는 당시 여인들이 대놓고 사랑 고백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전달 방식이 생긴 거예요. 자신의 ‘이름’을 상대에게 주는 것으로.”
“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악용되기 시작했지. 귀족들이 예비 서하연의 꽃들의 이름들을 입학 전에 알아내 모으기 시작했거든. 수집하듯이.”
“그래서 서하연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어요. ‘서하연의 호(號)’(=이름)를 받아 졸업해 서하연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본명으로 살 수가 없게 된 거죠.”
히연과 유시후가 번갈아가며 설명했지만, 여전히 하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말이 안 돼요. 본명이라는 게 알려고 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증표’라는 게 생긴 거야. 이름만 알고 있다고 그 서하연의 꽃을 가질 수 없어. ‘이름을 넘긴다.’라는 어떤 특정한 ‘행동’과 그 ‘이름을 받았다’는 ‘증표’가 필요해. 문제는 우리는 그게 뭔지 모른다는 거지. 히연은 입학하기 전부터 내 약혼녀였기 때문에 따로 서하연의 호(號)를 받거나 할 필요가 없었거든.”
그제야 왜 아까부터 엄청나게 등장했던 ‘서하연의 규칙’이라는 말들과 왜 히연은 그 규칙과 상관이 없다고 말했던 건지 이해가 조금 가는 거 같다는 표정.
“그런데 그 ‘증표’란 것에 왜 그렇게 매달리는 건데요?”
다 이해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주제에 아직까지도 결정적인 무언가를 이해 못 하고 있는 그를 보며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한 유시후는 한 번 더 끓어오르는 짜증을 참다가 입을 열었다.
“서하연의 꽃이 어떤 남자에게 자신의 증표. 즉 이름을 준다는 건…….”
시간이 없다는 듯 걸음을 재촉하던 히연이 잠시 뜸을 들이는 유시후보다 한 박자 빨리 끊긴 말의 뒤를 이었다.
“무를 수 없는 청혼을 의미하는 거예요.”
* *
“여기는 왜 온 거야?”
히연은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집으로 돌아가, 책을 읽거나 부족한 수면시간을 채우는 게 더 나을 거 같은데.
그러게 혼자 다녀오겠다니까 왜 따라나선 것인지…….
그나저나 바로 어제만 해도 도와주겠다고 약속해놓고 찹쌀떡까지 선급으로 받아놓은 주제에!
곧 배가 들어올 시간이어서 그런지 부둣가에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피곤한 건지 비틀비틀 걸어가는 히연의 모습은 많이 불안해 보였다.
무언가를 찾는 듯 주번을 두리번거리던 유시후가 한숨과 함께 빠른 걸음으로 그녀의 앞까지 쫓아가더니 손을 내밀었다.
“손. 지금 배 들어올 시간이어서 사람 많다.”
가뜩이나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이 많은 히연의 이곳저곳 ‘탐험’ 하고 다니는 취미란 이름의 버릇 때문에 안 좋은 결과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명 몇 시간 동안 찾아다니는 상황이 일어났을 테니까.
“있지. 유시후.”
아까부터 히연이 만두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가 피식 웃으며 하나를 사 건네주며 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이거 사줄 테니까.”
한 마디로 조용히 따라오라는 말.
“근데 정말 여기는 왜 온 거야?”
“낚시나 한번 해볼까 하고.”
그의 말이 끝나기 싱긋 웃으며 만두를 먹고 있던 히연이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먹던 것도 중단한 채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인상을 싹 지운 그녀가 애써 미소를 유지하며 물어왔다.
“새로운 취미라도 만들어보게?”
예전 같으면 그 웃음에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웃어줬을 유시후였겠지만, 이미 조금 전의 그녀의 찌푸린 얼굴을 봐 버린 뒤였다.
“왜. 나랑 안 어울리려나?”
“……뭐, 같이 하면 또 재밌을지도. 그럼 어느 자리가 좋을까? 기왕 하는 거 대어를…….”
하여간에……. 그녀는 농담이란 게 먹히지 않았다.
이쯤에서 장난은 그만두기로 하고.
조금만 더 있으면 아예 물에 들어가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아보겠다고 나설 정도로 자신의 취미생활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겠다 다짐하고 있는 히연의 정신을 물가에서 떨어뜨려 놓기 위해 유시후는 그녀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보통 여자들이라면 짜증을 낸다거나, 아니면 그 짜증을 철저히 숨긴 채 ‘애써’ 웃으며 머리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텐데…….
어째서인지 그저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히연의 반응에 오히려 그가 당황스러워했다.
“……뭔가 이상해.”
그녀가 원래부터 그런 여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보통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점을 발견할 때마다 그는 당황했다.
그리고 문제라면 그녀가 그런 그의 반응을 오히려 즐긴다는 게 더욱더 큰 문제였다.
“유 낭군! 여기 물이 맑아서 그런지 물고기가 잘 보여!”
“이제 그만 하자고. 농담이었어. 낚시 안 해.”
“뭐야.”
잠깐. 뭐지? 그 아쉽다는 표정은?
슬금슬금 물가 쪽으로 향하고 있는 그녀를 막느라 정신이 없는 데, 하필 그 사이에 배가 들어온 건지 아까보다 많은 사람이 몰려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누구 기다려?”
그 새 물가에 흥미를 잃은 건지 잘 놀고 있던 그녀가 두리번거리고 있던 자신에게 다가와 물었다.
“오늘 아저씨 돌아오신대.”
“시무형? 다음 달에 오시는 거 아니셨어?”
자신이 아는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관심을 보이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랑이 궁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신 거 같아. 일이 일찍 끝나서 바로 돌아오신대.”
“이랑이도 데리고 올걸 그랬다. 집에 가면 만나겠지만.”
그나저나 어디에 계신건지…….
대답을 해주면서도 그의 시선은 히연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 아저씨라면 분명히 눈에 띄…….”
“시후. 저 사람 좀 봐. 꽃 대박.”
자신은 이렇게 열심히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정신이 없는데, 라히연 이 녀석은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거야…….
무심코 고개를 돌린 유시후의 눈에 히연 말고도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확실하게 받으며 배에서 내려오는 사람이 포착됐다.
도대체 어디서 사 모은 건지 모를 정도의 엄청난 꽃다발들을 들고 있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은지 휘청거리고 있는 화려한 비단옷의 남자.
자연스럽게 불길한 느낌이 든 유시후가 히연의 손을 잡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수많은 사람의 관심이 집중된 그를 향해 다가갔다.
“……역시.”
누가 그러지 않았나. 불길한 예감은 대부분 맞는다고.
지금 어디로 튈지 모르는 히연 하나로도 지치는 그는 고민에 빠졌다.
‘저 아저씨를 집까지 어떻게 모시고 돌아가지…….’
“아저씨.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일단 시각차단으로 인해 불안해 보이는 걸음을 제대로 하기 위해 인사를 하던 유시후가 몇 다발을 들어주자, 그제야 보이지 않던 이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 시후 도련님? 이게 몇 년 만인가요? 정말 많이 자라셨네요!”
잠시 멈칫하던 남자가 들고 있던 꽃들을 내팽개치지는 못하고 가지런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유시후를 끌어안더니 격한 환영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석 달 전에 봤잖아요.”
“원래 이런 상황에서는 극적인 만남을 연출해야 감동이 두 배가 되는 거랍니다.”
“저랑 아저씨 사이에 극적인 만남으로 인한 감동이 나와서 뭐에 쓰려고요.”
“여전히 까칠하시네요. 히연 아가씨가 고생이 많겠어요.”
‘아저씨’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외모와 입을 삐죽 내밀며 툴툴거리는 게 다 큰 어른이 맞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무식하게 대량구매를 한 꽃들을 한 아름 들고 낑낑거리면서 자신들의 뒤를 따라오는 남자를 힐끔 바라보던 유시후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묻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여전하시네요. 그나저나 이 꽃들은 다 뭐예요?”
“응? 아. 배에 오르는데 어느 소녀 가장이 불쌍하게도 꽃을 팔고 있더라고요. 사다 보니 이렇게 돼버렸지 뭐에요. 하하.”
‘하하’가 아니잖아요! 이 꽃들은 다 어디에 쓰려고!
“설마 도련님이 마중을 나올 줄이야. 그것도 히연 아가씨를 데리고. 아. 도련님. 아가씨 또 어디 가시네요.”
“제가 의외로 꽤 예의가 바른 청년인지라……. 이 녀석을 데리고 온 건 실수였고요.”
그런 말은 본인 입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눈빛을 짓고 있던 아저씨가 또다시 다른 길로 빠지려는 히연을 가리키며 주의를 주었다.
“사실은 뭐 여쭤볼 게 있어서 온 거기도 해요.”
한 가지 종류라면 모를까, 온갖 종류의 꽃들을 한꺼번에 안고 있으니 그 여러 향기가 뒤섞여 머리가 깨질 거 같았다.
거기에 히연은 또 다른 거에 빠져 혼자의 길을 걷고 있었으니. 더더욱 정신없는 상황이다.
“저에게 물어볼 거라고요? 뭔데요?”
한 아름 안고 있던 꽃 덕분에 옷은 물론이요. 머리까지 꽃잎 범벅이 된 그가 엄청난 손놀림으로 꽃들을 떼어내며 물었다.
“아주머니……도 서하연의 꽃이셨으니까. 아저씨도 알고 계시겠죠? 서하연의 꽃의 청혼방법이요.”
‘아주머니’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생글거리던 남자의 표정이 순간 굳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왔지만, 왠지 전과는 다른 쓸쓸함이 묻어 있는 표정.
“아. 당연히 알죠. 왜요? 아가씨한테 청혼받고 싶어서요? 둘은 상관없잖아요.”
“상관이 있는 녀석이 있거든요.”
이유는 아직 말할 수 없다는 듯 웅얼거리는 유시후를 가만히 바라보던 남자가 피식 웃더니 인심 썼다는 표정으로 그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좋아요! 이건 쉽게 발설하면 안 되는 내용이지만……. 사실 서하연의 꽃의 청혼방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