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十八花 * 이 세상에 한 송이밖에 없는 (1)
“아~. 요즘 너무 힘들어서 미치겠다니까. 틈만 나면 이신이 나 괴롭혀. 너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으니까 네가 따끔하게 한 마디 해주면 안 돼?”
“어떻게요? 좀 더 괴롭혀 달라고요?”
“말을 해도.”
전력을 다해 장기판이라는 또 다른 세계에서 펼쳐지는 전쟁에 몰입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랑이만. 끙끙대며 집중하는 그녀와는 달리 여유롭다는 듯 큭큭 웃으며 대답과 함께 일일이 반응을 보이는 시하루였고, 그의 여유에 이랑은 더욱 열이 받아 들고 있던 말을 탕!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저번에 대신 부탁드렸었잖아요.”
“맞다. 8연패 때 해줬었지. 그럼 오늘은 오후 일정 좀 줄여달라고 해주라.”
한 판 질 때마다 부탁 하나씩. 이것이 그가 제시한 조건.
어쩌면 그 부탁이 악용되어 이 나라를 망칠 수도 있었지만 이랑은 이 경합을 그만둘 수 없었다. 승부에서 물러설 수는 없으니까!
아직 장기를 둔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다 이긴 사람처럼 말하는 그의 태도는 뒤에서 보좌 목적으로 서 있는 이안의 짜증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잘 안 되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와 함께 자라온 유시후는 그녀의 그러한 집착을 칭찬하기도 했지만, 자주 경고하고는 했었다.
‘네 그 집착과도 같은 승부욕은 네 발전에 도움이 되겠지만 분명 독이 되는 부분도 있을 거야.’
아마 그가 염려했던 건 이런 상황이 아니었나 싶다.
오죽하면 이신공께서 특별히 자신이 장기 과외라도 해줄 테니, 제발 한 판이라도 이기라는 말까지 해주시며 그녀 혼자만의 승부의 종지부를 찍고 싶어 하실까.
“왠지 이번 판도 내가 이길 거 같네.”
“아직 모르는 거예요.”
이미 목소리에서 여유는 사라지고 없었다.
지난 며칠 동안 그렇게 관련 서적들을 찾아가며 연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한 번도 못 이기는 건지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노력하면 뭐든지 이룰 수 있을 거라 믿어왔건만, 그 신조에 금이 가고 있었다.
‘나 정말 이쪽 방면에는 소질이 없는 걸까?’
전의 팽이도 그렇고 조금이라도 ‘놀이’가 포함되는 일이라면 일단 서툰 그녀이다.
‘그렇다고 오라버니에게 개인지도를 부탁하기는 자존심이 상하고!’
안 그래도 며칠 전에 유시후에게 ‘어떻게 오라버니가 1등을 할 수 있어?!’라고 따졌는데, 그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없었던 ‘한계’라는 벽이 내면에서 불쑥 하고 나타나는 거 같아 조금은 침울해져 버렸다.
“우리 무슨 말이라도 하면서 하자. 나까지 우울해지겠어.”
“무슨 말이요.”
분명 자신의 집중력을 떨어뜨리려는 꼼수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승부에 대한 집착이 자리 잡아 버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으로 변하였다.
“……혹시 중간에 이름을 바꿨다던가, 집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던가 그런 거 있어?”
“없는데요.”
대화를 하자고 한 그가 갑자기 아주 생뚱맞은 질문을 해왔다. 오죽하면 대결에만 집중하고 있던 이랑이 눈을 떼고 그를 뚫어져라 바라볼 정도였다.
아주 잠깐 그를 보고 다시 장기판으로 시선을 내렸기 때문에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보았다. 방금 그녀의 대답에 왠지 ‘실망’한 듯한 그의 표정을.
‘뭐지? 내가 그 말도 안 되는 질문에 ‘네’라고 대답하길 바란 건가?’
“역시 그렇지?”
‘역시. 아쉬워하고 있어. 그런데 왜?’
“제 이름이 거슬려요? 마음에 안 들어요? 이상해요?”
얌전히 있는 사람의 이름을 왜 건드리냐는 말투였다.
아무리 사람마다 취향이란 게 있다고 해도 사람 이름을 건드리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녀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런데 너 외동딸 맞지? 숨겨진 언니라던가 여동생 같은 거 없지?”
“지금 돌아가신 제 아버지에게 숨겨둔 자식이라도 있다고 말하고 싶으세요?”
이제는 이름으로도 모자라, 아예 한 가정을 파탄 낼 작정이라도 한 건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랑이 더는 가만히 못 있겠다는 듯 눈에 힘을 주어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랑의 매서운 반응에 시하루는 바로 꼬리를 내리며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제 이름은 소이랑. 분명히 외동딸 맞아요.”
“응……. 그랬지. 그럼! 어렸을 때 촐랑대며 돌아다니다가 사고나 그런 거로 머리를 다쳐서 기억을 잃었다거나 그런 적이…….”
“도대체 저를 얼마나 무시하고 계신 거죠?”
기억을 잃어버리는 게 그렇게 간단한 일인 줄 아나. 거기에 ‘촐랑대며 돌아다니다가’라니?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우습지만 그녀는 예나 지금이나 자신은 정숙한 여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 드디어!”
처음으로 제대로 말을 빼앗은 이랑이 환호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고, 활짝 피었던 그녀의 표정에는 다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웬만해서는 자신에게서 말을 빼앗기지 않는 그가 이렇게 간단하게 하나를 놓칠 리가 없었다.
비록 정당하게 따온 말이었지만, 기분이 찝찝한 게, 이래서는 이기고서도 마음이 편치 않을 텐데.
‘아니면 방금 그건 버린 건가?’
다음이 자기 차례인지도 까먹은 건지 탁자 위에 놓인 그의 손은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잠시 기다려주던 이랑이 꽤 시간이 걸릴 거 같다는 판단을 내리고 시간을 보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역시 왕이 머무는 곳이어서 그런지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예술이었다. 한 시간 정도는 거뜬히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질문’ 하니까 떠오른 건데요. 나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어요.”
“뭔데?”
이번에는 이랑 쪽에서 질문이 시작됐다.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시하루가 고개를 들더니, 궁금한 게 있으면 어려워 말고 물어보라는 듯 바라봤다.
“지금은 못 만나게 되었다는 그 첫 사랑은 어떤 분이셨어요?”
“뭐야. 드디어 나한테 관심이 생긴 거야?”
“꽃따리 오빠가 아니라 그 여자한테 관심이 생긴 거겠죠.”
보통 첫사랑 이야기가 나오면 당황해하거나 옛 추억을 회상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어째서인지 그는 즐거워 보였다. 그것도 아주.
“예뻤겠죠?
남자는 평생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고 들었기 때문에 괜히 물어본 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됐지만, 그것은 괜한 기우였다.
걱정과는 달리 의외의 공통 주제로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 같았다.
“아마 그럴걸.”
탁자에 몸을 바짝 붙이고 이랑이 묻자, 시하루 역시 삐딱하게 앉아 있던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예쁘고, 머리도 좋고, 상냥하고. 마음씨도 좋을 거야. 분명.”
가만히 듣고 있자니 이상했다. 그는 자신의 첫사랑을 마치 모르는 사람을 설명하는 것처럼 하고 있었다.
“왜 말에서 확신이 느껴지지 않는 걸까요?”
“그야 당시 나도 그 애도 어렸으니까.”
첫 사랑에 기준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는 시기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렸으니까.’라니. 얼마나? 도대체 몇 살의 이야기인 거지?
“……어떻게 헤어졌는데요?”
더는 못 만날 사람이라고 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이랑은 그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물었다.
“그걸 묻기 전에 먼저 ‘어떻게 만났는데요?’가 우선 아니야?”
“순서가 뭐 그렇게 중요한가.”
그녀 역시 어렸을 때 부모님을 잃었기 때문에 ‘헤어짐’이라는 단어가 가진 슬픔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말하기 힘들겠지…….
대답하는 것을 피해가기 위함인지 그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말을 돌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기에 ‘아마 말하기 싫은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한 이랑이 그에게서 대답 듣는 것을 포기할 즈음이었다.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동안 궐에 왔었어.”
“그 여자애가요?”
“응. 그리고 다음날 또 왔어. 다음날도 또 그 다음 날도. 계속.”
“그리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면 어린 날의 어느 멋진 만남. 정도로 미화시킬 수 있었겠지만, 이미 마지막을 아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이것은 슬픈 이야기였다.
“그리고 끝났어. 어느 날부터 오지 않았어. 나중에 알아보니까, 일가족이 사고를 당했대. 그렇게 끝났어.”
“그것참……. 슬픈 이야기네요.”
순식간에 방 안의 분위기가 우울해졌다.
이미 장기판 위의 긴장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이랑 역시 더는 그 작은 전쟁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포기란 없다! 어떻게든 집중해보려고 노력하는 그녀였다.
“그 뒤로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안 주려고 했군요. 그래서 날 그렇게 싫어한 거였어.”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어색한 침묵이 지속될까 두려워, 이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에 건성으로 장기 말을 옮기던 그가 피식 웃더니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듯 정정을 요구했다.
“안 싫어했어.”
“아니. 싫어했어요.”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하는 그였지만, 그동안 고독함 속에 살아왔던 이랑은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억울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시하루였지만, 이랑은 ‘내가 그렇게 느꼈으니, 내 말이 옳다.’라는 눈빛으로 절대 자신의 말을 번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의 의지에 얼마 버티는가 싶던 그는 더는 할 말이 없는 건지, 먼저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진짜 싫어한 거 아닌데…….”
계속 중얼거리며, 자신은 싫어하지 않았노라 말하는 것 보니 어느 정도까지는 진심인 게 틀림없었다.
왠지 의기소침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랑이 곧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더니 바짝 붙어 물었다.
“솔직히 말해 봐요. 얼굴 보고 반한 거죠?”
“넌 도대체 날 어떤 인간으로 생각하는 거야?”
“나랑 닮았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럼 예뻤을 거 아니에요.”
좋았어.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 명쾌한 해답이야.
“큭……. 은근히 뻔뻔한 꼬맹이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웃기 시작하는 그였다.
그런 그의 반응에 이랑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을 했는지, 약간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내 말이 틀려요?”
“아니, 네 말 맞아. 너 예뻐.”
아니. 그걸 물어본 게 아니었는데. 외모지상주의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건데.
추리력은커녕, 이해력까지 떨어지는 그를 보던 이랑은 걱정이 됐다.
이런 남자에게 어찌 이 나라를 맡길꼬.
“제가 추리하나 해볼게요.”
그녀의 말에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그 여자의 이름도 ‘소’로 시작되었군요? 그래서 제 이름 갖고 뭐라 하신 거죠?”
그녀의 말에 약간은 놀란 눈치였다.
“내가 그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거죠?”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계속 이랑과 그 어린 날 만났던 여자애와 왜 겹쳐 보였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눈치챈 이랑은 미안하지만, 현실을 알려주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아닐 거예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이름을 바꾼 적도 고친 적도 없으니까요. 심지어는 친언니나 동생도 없죠.”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그는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눈치였다.
“……그런데 잠깐만. 생각해보니 반응이 이상하네? 나 방금 첫사랑 이야기했는데 기분이 불쾌하거나 그렇지 않아?”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말하는 그를 향해 우리는 현재 장기대결 중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이랑이 장기판을 톡톡 두드리며 경고했다.
“제대로 된 대답을 들으니까. 오히려 상쾌한데요? 그나저나 조심하시죠? 이러다가 제 첫 승이 되겠어요.”
그제야 판으로 고개를 내린 그가 현재 상황을 한 번 쓰윽 훑어보더니 절망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무하다 너.”
저 ‘너무하다’라는 말이 방금 그녀의 대답이 너무하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자신이 정신적으로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봐주지 않고 전력을 다해 덤볐다는 사실이 너무하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확실한 건 이렇게 이겨도 홀가분한 기분이 들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오늘은 이만 갈게요. 전투의욕 없는 상대한테 이겨봤자 기분이 좋을 거 같지도 않고. 아. 가기 전에 하나 말해두는데요. 만약 그분을 정말 좋아했다면 포기하지 마요. 혹시 알아요? 살아 있을지도.”
여기서 포기하지 말라는 말의 의미는 마음속에서 그녀를 지우지 말라는 의미였다.
연애를 해 본 적이 없는 그녀가 이런 충고를 한다는 건 좀 웃기는 일었지만, 만약 자신이 그 첫 사랑의 대상이었다면 자신을 잊으려고 하는 그를 보면서 슬퍼할 거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미 십 년 전의 이야기거든.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 그리고 원래 첫 사랑은 이뤄지는 게 아니래. 그러니까 이번에는 놓치지 않고 붙잡을 생각이야.”
“힘내세요.”
“힘 나게 하고 싶으면 내일도 와.”
* *
“싫어.”
나 소이랑.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정중하게 부탁을 하는 일은 말이다. 그것도 저 오라버니 상대로!
그런데 뭐?
“싫다고.”
이랑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매달리며 부탁하는데도 매정하게 고게 한 번 돌리지 않는 유시후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평소라면 노려보는 것도 모자라 고개를 번쩍 들고 뭐라 뭐라 대들었겠지만, 지금 입장이 입장인지라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눈치를 보는 일뿐이었다.
고개를 바짝 숙이고 뭔가를 부탁하고 있던 이랑이 자신의 앞에 앉아 책을 잃고 있을 유시후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책에 집중하기는커녕, 그런 그녀를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장기 좀 가르쳐줘! 부탁할게. 오라버니!”
“귀찮아.”
말은 귀찮다고 하지만 아마 그는 웃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동안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매달린 적 없는 그녀였으니,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고소하겠는가.
하지만…….
“자꾸 이렇게 나오면…….”
“왜. 어쩔 건데?”
하지만 상대도 상대인 만큼, 장난을 치려면 적당한 선까지 쳐야 했다.
이랑에게는 유시후의 코를 단번에 눌러버릴 엄청난 무기가 있었으니까.
“히연언니한테 이를 거야.”
“……하여간에 귀염성이 없는 녀석이라니까! 그만 징징대고 얼른 와 앉아!”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들고 있던 책을 내던지다시피 내려놓은 그가 짜증을 내며 책상 앞으로 오라는 지시를 했다.
그런 그를 보며 이랑은 승자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에게는 약점이 딱 하나밖에 없었지만, 그 약점이 너무 치명적인 게 문제였다.
“잘 봐둬. 일단 상대가 여기서 이렇게 공격을 해오면 여기를…….”
이랑의 눈이 반짝거렸다.
‘좋았어. 두고 보라고 꽃따리 오빠. 내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장기의 고수에게 가르침을 받아 반드시 이겨줄 테니까!’
* *
“넌 또 뭐냐.”
문에 기댄 시하루가 자신을 찾아온 눈앞의 상대에게 있는 짜증, 없는 짜증을 내고 있었다.
대놓고 상대에 대한 거부감과 거북함을 보이던 그를 찾아온 손님은 뻔뻔할 정도로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긴요. 예쁜 여동생 괴롭히는 나쁜 사람한테 복수하러 왔습니다. 참고로 오늘 이랑이는 이신 공께 붙잡혀서 오지 못할 겁니다.”
이랑이 그렇게 붙잡고 가르쳐 달라고 졸랐을 때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거절하던 그였다.
물론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는 이랑의 장기 스승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실은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 천하의 유시후가 일이 일찍 끝났으면 그냥 돌아가면 되는데 굳이 이렇게 서재에 들려 대결을 신청할 리가 없으니까.
운이 좋은 건지, 오늘 이랑은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의 일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쉽게 자리를 뜰 수 없었다.
“폭력은 좋지 않은데?”
“폭력이라니요. 당한 대로 갚아 드려야죠. 이걸로.”
‘복수’라는 단어가 살짝 신경이 쓰인 모양인지 미리 짚고 넘어가는 시하루에게 벌써 자리에 앉은 유시후가 지금 장난 하냐는 식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가 들고 왔던 장기판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너까지 나랑 장기를 두자는 거냐.’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시하루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하던가, 아니면 표정에 변화라도 좀 줘보는 게 어때? 이런 무거운 분위기 속에 장기를 두니 더는 무서워서 못 해먹겠네.”
“지금 본인의 실력 탓을 분위기 탓으로 돌리시는 건가요?”
대결이 시작되기 무섭게 눈빛부터 달라진 유시후가 초반부터 시하루의 기를 누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말을 딸 생각은커녕 피해 다니기 바쁜 시하루가 한숨을 내쉬며 숨이 막힌다는 투로 말했다.
“……말이라고 하니까 생각 난 건데.”
과연 이신을 이긴 만큼의 실력이었다.
그에 반면해 만만한 상대였던 이랑이 절실해지는 가운데.
그래도 배려인지는 모르겠어도 이러한 분위기를 깨고 ‘대화’를 시도하는 유시후의 태도에 그가 귀를 쫑긋 세웠다.
“그 여자 이름이 뭐예요?”
“뭐?”
“이랑에게 들었거든요. 전하의 이야기.”
“그것 참 잘 세어나가네. 비밀 보장 따위는 없는 건가? 그나저나 이름 물어서 뭐하게?”
워낙에 장기를 둘 때면 말이 많아지는 이랑이었기 때문에 최근 들어 그녀의 스승이 된 유시후는 아주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왠지 이번 판은 이랑보다야 길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끝낼 수 있을 거란 즐거운 생각에 유시후가 자신 있게 말을 옮기며 대답했다.
“뭐하긴요. 찾아드리려고 그러죠. 혹시 알아요? 어딘가 살아 있을지. 궁 밖 출입이 그다지 자유롭지 못한 전하와 자유로운 몸인 저. 찾는다면 둘 중 누가 더 찾기 쉽겠어요?”
오라버니 여동생 하는 사이이긴 한 모양이다. 어쩜 하는 생각들이 이렇게 똑같을까.
“찾아서 어쩌려고?”
이미 그녀에게 어느 정도 유시후의 실력을 들었지만, 말을 옮기거나 잃을 때마다 얼굴에 인상을 쓰는 걸 보면, 막상 직접 대결을 해보니 더욱더 그 차이를 실감하고 있는 듯했다.
여유롭게 분위기를 잡고 있는 유시후와는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전하께 알려드리려고요.”
“네놈이 그리 기특한 녀석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방금 또 하나의 말을 잃은 시하루가 서서히 보이는 패배에 한숨을 내쉬며 더는 잃을 수 없다는 듯 이를 악물고 버텨봤지만, 여전히 여유로워 보이는 유시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저도 딱히 전하 좋은 일 하는 건 유쾌하지 않지만, 어쩌겠어요. 그렇게라도 해야 우리 이랑이를 놓아 주실 테니까요.”
“아니. 그럴 일은 절대 없거든.”
말을 내려놓는데 장기 말에 금이 가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자신은 그럴 생각이 없다는 의지를 보이는 그였다.
“그래도 일단 알려주기라도 해보세요. 혹시 알아요? 제가 알고 있는 사람일지도. 저 발 넓어요.”
장기는 이미 진 거 같았고, 이 말도 안 되는 기 싸움에서라도 이기려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불가능해 보였다.
앞으로 유시후가 딱 한 번만 움직이면 그가 지게 되는 상황.
스스로도 알아차린 지 오래지만 빠져나갈 길이 없기에 포기한 상태였고, 분명히 이 정도의 실력인 유시후 그가 자신의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로 전혀 관계없는 말을 움직여가면서까지 자신의 기회와 차례를 버린다는 건 지금 이 판을 끝내지 않기 위함이고, 자신에게서 대답을 들은 심산이었다.
무섭다. 무서워. 그리고 짜증이 난다. 지금이 아니라도 결국에는 이길 수 있다는 저 자신감이!
이미 어느 곳에 두던 그에게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대충 말을 내려놓던 시하루가 자포자기한 듯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기 싸움에서까지 승복하고 말았다.
“‘소유아’라고 한다.”
“…….”
이름 알려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막상 알려주니 입에 풀이라도 붙은 사람처럼 말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상해 보였다. 자신의 차례임에도 불구하고 손을 아래로 내린 채, 움직일 생각조차 않고 있다.
“……‘소’ 뭐라고요?”
“소유아.”
잠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던 그가 제정신으로 돌아온 건지 다시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지금까지 그에게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니, ‘이 인간도 ‘동요’란 걸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반응.
“……혹시 들어본 이름인가?”
“……그럴 리가요. 그나저나 역시 재미없어서 못 하겠네요. 아, 그만 이랑이 마중을 나가봐야겠어요.”
승패가 결정되지도 않은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에게 시하루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쏜살같이 나가버렸다.
마치 도망이라도 치듯.
그런 그의 퇴장을 바라보던 시하루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저놈이 알고 있을 리가 없잖아.”
한편, 이랑을 마중하러 간다는 이유로 방에서 나온 유시후는 빠른 걸음으로 궐을 나왔다.
그대로 시장골목을 지나 집으로 향하던 걸음이 중간에서 딱 멈췄다. 그리고는 짜증이 난다는 듯 인상을 팍 쓰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젠장. 저 인간이 소유아는 또 언제 만난 거야!”
솔직히 만난 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가 있다면……. 어쩌면 일이 더 꼬일지도 모르겠어.
어딘가 안절부절못하는 듯 보이는 유시후가 한숨을 내쉬며 방향을 틀더니 어딘가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도련님! 어디 가세요?”
아까부터 유시후의 뒤를 따르고 있던 그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하인 하나가 다급히 그의 걸음을 쫓으며 묻자, 됐으니 너는 따라오지 말라는 듯 그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라히연을 만나러 다녀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