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十七花 * 서하연의 꽃 (5)
“아주 대승으로 이기셨더군요. 평소답지 않게 노력을 좀 하셨나 봅니다.”
“일단은 칭찬으로 듣도록 하지.”
현재 여러 가지가 시하루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의 성격상 여기서 한바탕 버럭! 해야 하는 게 정상이었지만, 머릿속이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조용히 넘어가고 있었다.
“너무했나…….”
물론 이랑에게 이겨야 한다는 생각은 어느 정도 있었지만, 거기에 의욕을 돋워줄 목적이 생기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눈앞에 앉아 있는 이랑은 이미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고, 판을 끝낸 뒤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생각해보니 너무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감이 없잖아 있어 더욱더 찝찝한 그였다.
어차피 이길 생각이었기 때문에, 이겼다는 사실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지만. 이기는 것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 않은가.
‘좀 더 신경을 써서 기분이 나쁘지 않도록 끝을 냈었어야 했는데!’
거기에 그 황금 같은 기회.
그 황금과도 같은 시간에 한 마디라도 더 나누어 마음의 거리를 좁혔어야 했는데 이랑을 이기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해버렸다.
오직 이기기 위해서 시간을 쓴 것이다!
“아……!”
머리를 감싸고 있던 시하루가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서 그가 괴로워하고 있었지만 이신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시하루와 이랑의 대결을 적어놓은 기록에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아무리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어도 상대가 그걸 봐주지 않으니, 어찌할까 고민에 빠진 그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스승님.”
물론 시하루가 어렸을 때부터 그를 가르친 게 이신인 건 사실이었지만, ‘스승님’이라는 호칭은 그가 딱 십 대를 벗어나면서부터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지 난 십수 년간 들어보지 못한,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들어볼 생각조차 못 했던 말.
그런 어마어마한 말을 지금 그가 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하게 불안한 일이다.
존경과 가르침이 오가야 할 사제지간에 겨우 호칭 하나로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무엇입니까?”
결국,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 하나에 이신이 넘어가 버렸다.
보기 드문 진지한 표정으로 어디 말해보라고 하니, 이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이 부탁이 스승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꼬맹이 녀석을 탈락시켜주세요.”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이신이 피식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이랑의 시험 보고서를 탁자의 한구석 쪽에 살포시 내려놓으며.
“고맙습니다.”
밖으로 나가려는 이신을 향해 시하루가 감사의 인사를 하자, 이신이 잠시 멈칫하더니 돌아섰다.
“별말씀을요. 제가 뭘 했다고요.”
이런 게 스승과 제자 사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참으로 훈훈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 *
“망할 영감 어디 있어?!”
아침부터 난리법석이었다.
조용할 날이 없는 궁 안이었지만 며칠 전의 ‘스승님’이라는 단어는 이 소음 속에 묻혔고, 이미 꿈나라 속의 단어였다.
뭔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오고 있는데, 정작 그가 향하고 있던 목표물은 너무나도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나 보다.
“이신!!”
예의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그가 씩씩거리며 앉아 있는 이신을 찾았다.
그리고 앉지도 않고 다짜고짜 앞으로 다가와 외치듯 물었다.
“그 꼬맹이 왜 합격시킨 건데?!”
이미 아침 인사 따위 안 주고받은 지 오래된 사이였다.
어쩜 저렇게 예의가 없을 수 있는지. 그래도 어렸을 때 그를 가르친 게 자신인데…….
“불합격시키겠다고 약조 드린 적은 없습니다만.”
수험결과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시하루는 당장 그 명단을 입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입수된 명단을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이름들을 확인했고, 문제의 그 이름을 확인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며칠 전에 그렇게 고개까지 숙여가며 부탁을 했건만!
그런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위에서 세 번째에 떡 하니 있는 이랑의 이름에 시하루는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도대체 이 시험 합격 기준이 뭐야!
“어디 이유나 한번 들어보자. 분명히 내가 이겼는데, 어째서 꼬맹이가 합격이지?!”
지금 이 현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이기라고 해서 미움받을 각오까지 해가며 승리를 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가?
불합격시키려고 했지만, 그것도 실패, 게다가 자신에게 졌을 당시 보았던 그녀의 표정으로 보아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을 것이다.
분개하는 시하루를 바라보던 이신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옆에 쌓여 있던 문서 중 이랑의 시험 보고서로 추정되는 종이를 빼내어 시하루의 앞에 내밀었다.
시험 당시의 과정에 대한 기록이 적혀 있는 보고서에는 친절하게도 그림설명까지 그려져 있었다.
“네. 시하루님이 이기셨죠. 거의 다 빼앗기고 말입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결과가 중요한 거 아니야?”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신은 자신의 의도한 것을 눈치채지 못한 시하루에게 제자를 대할 때의 엄한 표정을 지으며 훈계하는 자세로 말했다.
“전 ‘이기면 합격’이라고 말한 적 한 번도 없습니다. 그리고 시험 시작할 때 말씀드렸을 텐데요. ‘장기판은 하나의 나라와도 같습니다.’라고요. 생각해 보세요. 병사들이며 신하들이 다 죽고 왕만 살아남으면 그게 나라입니까?”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희생은 당연한 거다. 내가 틀렸나?”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제 생각을 토해내는 시하루를 보며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던 이신이 그만 되었다는 듯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치기 시작했다.
덕분에 입장부터 흥분에 있던 그가 잠시 멈칫하더니 곧 진정하며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았다.
“전하의 말씀이 옳기 때문에 이랑님은 합격이신 겁니다. 제가 뭐 때문에 전하를 시험감독이라는 핑계 삼아 함께 시험에 참가시켰다고 생각하십니까?”
핑계인 줄은 알고 있었나 보다. 스스로 ‘핑계’라고 인정을 하고 있었다.
그의 질문에 시하루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앞으로 쭉 빼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랑 그 꼬맹이랑 차분히 대화 나누라고 그런 거 아니었어?”
“제가 그렇게 마음이 넓어 보이셨습니까? 의외군요.”
오히려 자신을 그렇게 봤다는 그의 말에 더 놀랐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질문하는 이신이었다.
혼자 기회라고 생각했던 시하루가 잠시나마 속으로 이신에게 감사했던 것을 후회했다.
“이 시험에는 두 개의 답이 있죠. 승리하는 자와 패배를 하는 자. 완벽하게 승리한 자는 전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말할 겁니다. 승리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희생은 당연하다고. 그리고 완벽하게 패배를 한 자도 말하겠죠. 무리한 희생은 옳지 못하다고 말입니다. 각자 생각은 모두 다르니 둘 중 무엇이 답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둘 중 누가 답인지는 몰라도 어느 답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알 수 있죠.”
뭐가 답인지도 모르면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안다고 말하고 있었다.
차근차근 설명하던 이신이 또 다른 일이 생각난 건지 갑자기 탁자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말은 점점 빨라졌다.
“바로 이 나라 왕이신 시하루님께서 두 가지 선택 사항 중 승리하는 자의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하루님이 왕이시기 때문에 왕을 보필하는 대신 중에는 반드시 다른 시선을 갖고 있는 이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왕이라고 무조건 명령 내리면 다인 게 아니라고 분명히 옛날부터 말씀드렸던 거 같은데요? 대화! 그리고 절충!”
차마 대꾸를 못 하겠는지 머리를 감싸고 있던 시하루가 시선을 피하는 것으로 이신의 잔소리에서 벗어나는 노련함을 보였다.
잠시 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첫 번째 문제에서는 패배를 인정한 듯 보였다.
그러나 곧 두 번째 문제를 떠올리며 탁자 위의 명단을 이신의 앞에 내밀었다.
“그럼 이건 뭐지?”
사실은 이랑의 합격 일보다도 더 신경이 쓰였던 문제가 있었다.
처음에는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눈에 헛것이 보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명단의 제일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어느 익숙한 이름을 툭툭 치며, 그가 불량스럽게 물었다.
또 무슨 문제가 있나 하고 시하루가 지적한 부분을 흘끗 바라보던 이신이 안 좋은 기억이라도 떠오른 듯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 녀석은 왜 합격인 건데, 그것도 1등? 뽑을 사람이 그렇게 없었나? 천하의 이신의 안목이 이 정도밖에 안 돼?”
처음에 논의한 이랑의 문제처럼 엄청난 반응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아니, 조용한 게 아니라 자존심이 상한다는 표정이었다.
이 침묵을 깨고 누가 먼저 말을 꺼낼까 대회를 하는 것도 아니고, 입을 딱 다물어 버린 이신을 주시하고 있던 시하루의 머릿속에 ‘설마…….’로 시작하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더니 곧 결론을 내린 건지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나마 있는 눈치를 발휘해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졌어?”
“……아주 일방적으로 당했죠.”
말도 안 돼. 천하의 이신이 누군가에게 장기를 지다니.
그 말을 끝으로 아연실색한 시하루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가려는 이신을 붙잡아놓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자세히 이야기해 보라는 말까지 하는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이랑의 합격소식과 관련되었던 짜증이 사라진 듯 보였다.
“최단시간. 최소의 희생으로 졌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딱 전하와 이랑님의 중간. 가장 이상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더는 반항을 할 기운이 없어 보이는 시하루가 이제는 거의 절망 상태에 도달한 듯했다.
‘합격하면 안 되는데…….’란 말을 중얼거리며, 탁자 위에 뻗어버린 그였고, 그런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이신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답지 않은 한 가지 제안했다.
“그렇게 신경이 쓰이시면 교지를 내리면 될 일. 하지만 그러지 않으신다는 건…… 아직도 확신이 없으신 겁니까?”
“무슨 확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유시후 합격. 그것도 1등으로 합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면서 왜 뜬금없이 다시 이랑의 이야기로 돌아가느냐는 반응이었다.
호랑이가 궐에 다시 출몰한다는 사실 때문인지 목소리가 살짝 위협적으로 느껴져 함부로 건들면 안 된다는 경고음이 들리는 거 같았지만, 그냥 이대로 보고 넘어갈 일도 아니었다.
“이랑님을 사랑할 자신이요.”
전에도 이와 비슷한 질문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시하루의 반응은 잠시 동안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고, 곧 길다면 길다 할 수 있는 그 침묵 끝에 그가 내린 대답은 ‘그럴 리가 없다.’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고민하는 듯했던 반응 역시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입가에는 어렴풋이 미소도 짓고 있는 거 같았다.
새로운 반응에 전과는 다른 대답을 기대해보는 이신이었다.
“확신은 아니야. 하지만 아주 작은 가능성도 아니지.”
“그럼 뭔데요?”
이미 가능성에 대해서는 서화당의 유아와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확인한 그였다.
“확신에 가까운 가능성과 희망이야.”
자신이 말해놓고도 발전한 스스로 유치하다고 생각한 건지 웃어넘기려는 시하루였다.
순간 그런 그의 변화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한 이신이었지만 걸리는 게 있는지 잠시 말할까 말까를 고민하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그럼 확실하게 잊으세요. 제 눈은 못 속입니다. 아직도 ‘그거’ 갖고 계시죠?”
경고하는 듯한 태도에 시하루가 움찔거리며 반응해버렸다.
그의 반응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이신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신의 말에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던 시하루가 그에게는 못 당하겠다는 듯 한숨 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곧 품 안에서 뭔가 작고 오래되어 보이는 낡은 종잇조각을 꺼내 들었다.
“아직 갖고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전에 한 번 봤거든요. 그만 버리세요.”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저 웃던 시하루가 소중한 물건이라는 듯 그 작은 종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다시 주머니에 고이 접어 넣었다.
“아직은 안 돼.”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낡은 종이에는 검은 글씨가 적혀 있었고 그것은 세 글자였는데, 마치 누군가의 이름 같았다.
* *
“마음에 안 들어…….”
말에 오를 때부터. 아니, 집을 나설 때부터 시작된 그녀의 중얼거림은 궁에 도착해서까지 멈추지 않고 있었다.
옆에서 가만히 들어주고 있던 유시후도 더 이상은 못 들어주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언제 끼어들까를 고민하는 듯 보였다.
“좋게 3위 안에 합격해놓으시고 왜 그렇게 뚱한 표정이신 건데.”
얼마 전에 나온 시험 결과 발표에서 ‘합격’의 기쁨보다도 ‘3위’를 했다는 소식에 더 침울해하던 이랑이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짚어보면 유시후가 ‘1위’를 했다는 말을 먼저 들은 뒤부터였다.
오죽 기분이 안 좋았으면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려가며 직접 말에 올랐겠는가.
“내가 1등인 건 당연한 거고.”
당연하다는 말과 함께 유시후는 여유로워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괜히 말에 타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고생하고 있는 이랑이 재미있다는 의미도 포함해서.
“내가 오라버니의 발판이 되다니…….”
“그러게 평소에 공부 좀 더 하지.”
징징거리는 그녀를 이끌고 어느새 커다란 궐의 정문에 도착한 유시후가 먼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이랑을 향해 얼른 내리라는 눈으로 재촉하기 시작했다.
국시에 합격한 것은 좋았지만, 간신히 나온 이 궐에 다시 들어가야 한다는 사소한 사실 하나가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합격자 명단이 나왔다는 건 이미 그 꽃따리 오빠도 봤을 텐데!’
빨리 내려오라 중얼거리며 말의 고삐를 잡고, 이랑을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유시후와 말에 찰싹 달라붙어 무슨 고집인지 내리기 싫다고 버티고 있는 이랑의 모습은 다른 합격생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하였다.
그들의 표정은 마치 ‘어떻게 저런 사람들이 합격할 수 있는 거지?’라고 하는 듯했다.
엄숙한 궐의 밖이라고는 해도 소란스러움의 중간에 있는 그들이 설마 이번 국시에서 1위와 3위를 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상상조차 못 했겠지만.
“우리나라의 기대주들이군.”
그런 그들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존재가 더는 기다려주지 못하고 납시었다.
“아. 안녕하세요…….”
이신의 등장에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순간 경직되더니 그를 향해 인사를 했다.
이번 국시를 통과한 사람은 그녀와 유시후를 포함해서 단 6명.
그것도 원래는 더 적었었는데, 막판에 대신들의 수가 적어 너무 힘들다는 시하루의 불만에 결국 이신이 내린 선택이었다.
“오늘 부른 건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천유국의 오랜 전통 ‘과제 뽑기’ 때문입니다.”
천유국에는 오랜 전통이 있었다.
새로 뽑힌 대신들을 각자 맞는 기관에 배정하기 위해, 그들의 적성이나 일 처리 능력을 확인하는 자리. 그것이 바로 ‘과제 뽑기’였다.
말 그대로 국시에 합격한 예비 대신들은 원형의 통 안에 있는 나무패 중 하나를 뽑아, 그 패에 적힌 일을 수행한다. 이것이 그들이 궁에 들어와 하는 첫 번째 일이었다.
나무패들에는 현재 천유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단 몇 시간 만에 해결할 수 있을 문제부터 며칠이 걸릴지 모를 고난도의 문제까지.
그리고 그 무수히 많은 패 중. 특이한 두 개의 패가 숨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오직 관계자들뿐.
한 가지 색으로 통일되어 있는 평범한 패들에 숨어 있는, 각각 한 개씩만 존재하는 백(白)과 흑(黑)의 패.
백(白)의 패를 뽑은 이가 있다면, 그는 과제를 하지 않고도 통과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반대로 흑(黑)의 패는 현재의 사회문제 중 가장 중요하고, 어려워서 현 대신들도 해결하지 못한 현재 미해결의 엄청난 난이도의 문제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이는 거의 100대1의 확률.
지금까지 백(白)과 흑(黑)을 뽑은 이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한 마디로 운도 실력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직 과제 뽑기 기간이 아니지 않나요?”
모두가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차마 물을 용기가 없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별다른 고민이 없어 보이는 유시후가 번쩍 손을 들고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질문했다.
“네. 그래서 그때까지 우리 젊은 인재들이랑 차나 마시면서 좀 친해 두려고 말입니다.”
차를 좋아한다는 말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마치 동네 아저씨 같은 느낌이었다.
“아들놈이 있기는 하지만, 상사를 잘못 만난 탓에 얼굴 보기도 힘들다죠.”
합격자들이 술렁거리며 그가 말하고 있는 ‘상사’가 누군지 머리를 맞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이랑과 유시후만이 이미 그게 누군지 알겠다는 듯 구석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우리 어여쁜 일등! 이리 오시죠.”
분명히 자신을 부르고 있는 건데, 어째 미동도 하지 않는 유시후였다.
죽어도 따라 들어가기 싫다는 표정의 그의 옆구리를 이랑이 툭툭 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신과 유시후의 웃는 얼굴로 하는 눈치 보기는 계속 이어졌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여전히 우물쭈물거리는 유시후 때문에 계속해서 웃는 얼굴로 재촉하고 있는 이신이 서서히 불쌍해진 이랑은 유시후의 등을 짝! 소리 나게 치며 강제로 밀어버렸다.
“……야!”
그런 이랑을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잠시 바라보던 그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존경하는 이신과의 즐겁고 행복할(?) 다과 시간을 가지기 위해 무거운 발걸음으로 방을 따라 나섰다.
설마 일대일 면접 형 다과회일 줄이야.
“아. 나머지 분들은 차례를 기다리시는 동안 궐 안을 마음껏 둘러보셔도 됩니다. 따로 질문 있으신 분 계세요?”
질문이 있냐는 이신의 말에 가만히 앉아 죽을상의 유시후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 있던 이랑이 벌떡 일어났다.
“아. 저요. 여쭤볼 게 있는데요…….”
안 그래도 빨리 결판을 지어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
“뭐, 뭐……뭐야…….”
사람이 당황하면 말도 잘 못한다는 게 사실인 모양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전하.”
이랑이 궁에서 나가고서부터 일을 제외하고는 늘 서재에 박혀 지내고 있던 시하루였다.
오늘 역시 서재에 들어가 나올 생각을 않고 있던 그는 자신을 설득시키기 위해 동원되었던 이안을 실컷 괴롭혀 준 뒤, 이 책 저 책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문제의 그녀가 들어오기 전까지.
“지금 바쁘십니까?”
“아, 아니. 안 바쁜데…….”
제 발로 들어와 시간 있냐고 물어오는 이랑의 태도에 오히려 시하루는 색다른 두려움을 느꼈다.
“그럼 제게 시간 좀 내주세요.”
아무렇지 않게 서재 안에 들어와 자신이 앉아있는 탁자, 바로 맞은편에 털썩 앉은 이랑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던 시하루가 곧 제정신을 차린 건지 들고 있던 책들을 내려놓고 그녀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나……. 나 만나러 온 거야?”
“네.”
그러고 보니 들어올 때부터 뭔가를 손에 쥐고 들어온 그녀였다.
곧 짙은 갈색의 보자기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 매듭을 풀려나가던 이랑의 눈이 반짝이면 반짝일수록 시하루의 기대감은 높아지고 있었다.
“……이게 뭘 까나?”
“보면 몰라요?”
“사람은 가끔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하고 싶을 때가 있는 거야.”
“빨리 시작하기나 하세요.”
보자기 안에서 와르르하고 떨어진 건 다름 아닌 며칠 전에 대전을 펼친 장기판과 장기 말.
갑작스럽게 찾아와서는 그것들을 내미는 이랑 때문에 얼결에 참여하게 된 시하루였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건 뭔가가 이상했다.
현재 그녀에게 있어서 시하루를 피해야 한다는 경고보다, 그에게 졌다는 사실이 더 고민거리이자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나저나 입궐할 때부터 들고 온 거야?”
“아뇨. 이신공께 빌렸어요.”
이씨 집안 부자(父子)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 이랑이 있는 탓에 대놓고는 못 하겠고, 속으로 열심히 이신을 욕을 하고 있던 덕분인지 그 분노에 의해 그의 집중력은 상승했다.
결과, 전의 대전보다 더 빠르게 이랑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도 이번 건 간발의 차였어.”
늘 위로는 일이 벌어진 다음에 하는 그였다.
저번 한 판은 ‘우연’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편히 먹고 자리한 이랑이었는데, 이번 역시 지다니.
그렇다면 이것은 우연에 가까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 정말 시하루의 실력이 그녀의 위라는 건가!
하지만 그것만큼은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랑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에게만큼은 절대 지고 싶지 않으니까.
“한 판 더 해요.”
말들을 정리하며, 중얼거리던 이랑이 툭 하고 내뱉은 말에 시하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더 이상 하기 싫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너 나 못 이겨.”
무조건 칭찬하는 건 희망고문이라고 생각한 시하루가 나름의 배려가 담긴 말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이랑의 승부욕에 기름을 부은 거 같은 효과를 발휘하는 말이었다.
“이길 때까지 할 거예요! 아, 하지만 일부러 져주면 안 돼요!”
씩씩거리면서 자신의 말들을 정리하는 그녀를 보던 시하루가 쿡 하고 웃어버렸다.
‘너무 귀여워…….’
“네 승부욕은 좋은데, 상대도 생각해 줘야지. 난 너무 피곤해.”
갑자기 찾아와서는 연달아 세 판 이상의 대결을 해 연달아지고도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랑과 달리 지금 상황이 너무나도 피곤한 시하루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설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의외로 효과가 있었던 건지, 그녀는 더 이상 계속하자고는 못 하고 그저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만 몇 번 끄덕였다.
사실 그는 장기를 잘 두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오죽하면 오랜 시간을 가만히 앉아서 뭐하는 짓이냐고 말할 정도였다. 그녀가 하자고 해서 한 거지 그 외의 이유는 없었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절대 졌다는 걸 인정할 수 없어요. 그럼 하루에 한 번씩 어때요? 기한은 제가 이길 때까지.”
장기를 두는 것은 끔찍하게 싫었지만, 승부욕에 눈이 먼 이랑이 친히 궐까지 납시어주신다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승리’라는 단어 하나가 가득 채워져 있겠지만, 시하루에게 있어서 이것은 또 다른 기회임이 틀림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녀의 제안에 찬성표를 던진 시하루가 자신의 앞에 굴러다니는 말들을 정리했다.
오랜 두뇌 싸움 때문에 피곤해진 것인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던 그가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난 건지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잠깐. 생각해보니, 그냥은 못 해주겠네. 이건 정신노동과도 같은 거라고. 거기에 바쁘신 이 몸이 장기나 두자고 시간을 내줘야 하잖아. 안 그래?”
바쁘긴 무슨, 이렇게 서재에 박혀 있는 사람이. 게다가 정신적 노동?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왕’이라는 특이 직업상 평범한 이들은 모르는 정신적인 고통도 있기 마련이니까.
그 점은 인정하겠다는 듯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다행히도 거절은 들려오지 않았고, 그에 한숨을 내쉬던 시하루가 다시 한 번 씨익 웃었다.
“나도 조건이 있어.”
“불안해지는 데요…….”
“내가 이기면 내 요구조건 정도는 들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