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十六花 * 서하연의 꽃 (4)
“감독관이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이신은 아주 작정이라도 한 듯 치밀해 보였다. 마치 모든 걸 계획이라도 한 것마냥.
일손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으면서 남아도는 인력을 무시하고 굳이 저를 필요로 하는 이신의 뜻을 알 수 없었지만, 최근에 얌전하게 살아보자 마음먹었으니 실천에 옮길 수밖에.
‘시험감독관? 그런 걸 내가 해도 되나?’
감독관 대리로 들어가라는 이신의 말에 인재등용에 자신의 안목을 믿느냐는 투로 그가 던진 말이었다.
‘아마 상관없을걸요? 아니, 오히려 더 좋을지도.’
오직 원칙만을 우선시하는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걱정된달까. 평소와 다른 이신의 반응과 행동은 시하루의 정신을 뒤흔들어 놓을 만했다.
“나 정말 그냥 앉아만 있다가 올 거야.”
마지막으로 이신에게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경고하는 그였지만, 상대에게 그리 큰 효과를 준 거 같지는 않았다.
이미 이신은 마음은 굳혔고, 이제 그는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럼 힘내세요. 아마 전력을 다하셔야 할 거예요.”
일단 그가 알려준 방에 도착하긴 했지만, 도대체 뭘 전력을 다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직 이신에게 이 시험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들어가 보시면 아실 겁니다. 뭘 해야 하는지 말이죠.”
도대체 뭐냔 말이야! 그 망할 영감의 의미심장한 미소란!
뭔가 꾸밀 때 이외에는 나오지 않는 표정이라는 거 잘 알고 있는데!
문 앞에 선 시하루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곧 자신이 이 나라의 왕이라는 사실과 기왕 이렇게 된 마당에 인재등용에 힘써 보자는 기특한 생각을 하고는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잔뜩 무게를 잡고 안으로 들어선 그는…….
“이번에 처음 국시를 치르게 된 소이랑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환영을 받게 된다.
동시에 이신에게 툴툴거렸던 지난날의 자신에 대한 반성과 앞으로도 그의 조언은 하나도 빼먹지 않을 거라는 다짐과 함께.
* *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은 이들이 둘.
서로의 상황을 모르는 그들 사이에는 그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고 있었다.
먼저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인은 국시를 치르기 위해 이 자리에 있었다.
시험 규정에 따라 자신의 순서가 되어 미리 배정받은 수험장에 들어와 감독관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결코, 그녀가 이 궁에 들어오기 전에 몇 번이나 주의를 받고, 몇 번이나 다짐을 한.
절대 만나지 말아야 하는 인간을 만나고자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이런…… 이 무슨 최악의 상황이란 말인가!
문을 열고 들어 온 남자는 한때 자신의 스승이었던 남자의 부탁을 받고, 황금 같은 휴가를 국가를 위해 반납하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불쌍한 수험생을 만나기 위해 방에 들어온 것이었다.
지난날 내내 보고 싶었고 늘 생각났던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는. 더군다나 이렇게 만나리라는 건 상상조차 못 했었다.
이런……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겠는가!
순간 이 자리에서 튀어 버릴까 하고 고민을 한 이랑이었다. 도대체 뭐지 이 상황?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며 일어나고 싶었지만, 그녀에게는 지금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누구나 다 알고 있을 이유가 있었다.
그와 마주하고 있는 이 자리가 사적인 자리라던가, 서로의 동의 하에 결정된 만남. 하다못해 그가 만들어낸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었다고 해도 얼마든지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 만남의 장소가 궐의 밖이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국시다.
그녀는 현재 시험을 보러 온 입장이었다. 수험생이 수험장을 이탈하는 걸 막지 않지만, 그리되면 실격처리가 되었다.
국시 합격은 물 건너간 일. 그리고 1년이라는 시간을 더 기다려 다음 시험을 봐야 했다.
거기에 지금 이 자리를 피하고 다음에 재도전한다고 해도 바뀔 것은 없었다.
그녀가 국시를 본다는 걸 알았으니 아마 시하루의 성격이라면 내년에도 그녀의 앞에 앉아 있었을 테니까.
피할 수 없다면 즐기란 말이 있지 않았는가.
“아……. 안녕하세요.”
목소리에서 완벽하게 ‘당황스러움’을 감추는 것은 어려웠다.
살짝 떨리고 있는 이랑의 목소리였고, 그것은 본인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또 다른 당황한 이 역시, 그 사이에 상황파악이 끝난 거 같았다. 상황파악이 끝났으니 다음은 선택과 해결이었다.
이랑의 앞자리에 앉은 시하루는 일단은 시작을 어떤 말로 하면 좋을지 고민에 빠졌다.
“그동안…….”
“시험! 시험을 보러 왔으니, 일단은 시험에 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그동안 잘 지냈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먼저 말을 잘라버린 이랑이 시험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출했다.
“어…….”
자신의 말을 자른 것에 대해 짜증나거나 서운할 수 있었지만, 눈을 반짝이고 있는 이랑이 그저 귀여운 시하루는 쉽게 대꾸하지 못했다.
이는 이미 이랑에게 푹 빠져 있다는 증거와도 같았다.
‘좋아…….’
일단 시험 시간이 곧 그녀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라는 걸 떠올린 그는 천천히 대화를 나눠보겠다 마음먹고 있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해준 이신에게 나중에 감사의 인사를 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말이다.
그와는 달리 ‘시험’ 때문에 그런지 잔뜩 긴장해 있는 이랑이었다.
예전이라면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시하루가 벌써 질문을 했겠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럼 일단은 시험을 시작하자…….”
일단 시험을 시작하고 조금은 이 분위기에 익숙해진 후에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다는 여유 있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그였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앞서 말했듯 그는 아직 이신에게 시험에 관해서 제대로 설명을 듣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떤 시험인지.
그리고 그 시험에서 자신의 역할은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난감한 상황. 분명 이신은 들어가면 뭘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다고 했는데.
당황한 시하루가 괜히 시선을 이곳저곳에 두고 있을 때, 아까는 보이지 않던 탁자 위 어두운 천을 뒤집어쓴 무언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건가…….”
빠른 시험을 위해 별다른 긴장감 없이 천을 제거한 그였다.
천 아래의 드러난 물체는 아주 조금이나마 긴장을 하고 있던 이랑을 또 다른 당황함으로 이끌고 갔다.
“장기?”
어이없다는 목소리였다.
국시를 보는 시험장에 장기판과 장기 말이 웬 말인가.
잠시 넋 놓고 있던 시하루가 장시기 판 위에 놓인 하얀 종이를 펼쳐 들었다.
종이 안에는 누군가의 필체로 글씨가 쓰여 있었고, 그 필체가 이신의 것이라는 걸 확인한 그는 궁금하다는 이랑을 위해 웅얼거리듯 읽어 내려갔다.
“어……. 시험 시작 전에, 올해 응시해준 수험생분들께 알려드립니다. 이번 시험은 보시는 바와 같이 ‘장기’입니다……. 뭐야? 지금 장난하는 거야?!”
이신이 선택한 시험 내용에 어이없다는 듯 시하루가 버럭 외쳤다.
그러나 그의 그런 반응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는 이랑은 진지하게 반응했다.
“아. 얼른 마저 읽어봐요!”
경청하고 있던 이랑이 눈살을 찌푸리며 주의를 주었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는 시험에 관한 생각밖에 없었다.
“음……. 눈앞에 앉아 있는 감독관들은 제가 특별히 엄선하고 엄선한 장기의 달인들입니다. 이들과 시합하는 게 제가 선택한 시험입니다. 장기판은 하나의 나라와도 같습니다. 최선을 다해 눈앞의 감독관들을 상대하세요. 그럼 행운을 빕니다.”
종이에 적힌 글들을 다 읽은 시하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기판을 내려다봤다.
뭐 이런 국시가 다 있냐는 표정이었고, 그동안 이신을 너무 과대평가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밖에서 여러 종류의 반응이 들려오는 게, 아무래도 다른 방 안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쪽지가 공개된 뒤 유난히 긴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이랑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던 시하루는 깜짝 놀랐다.
“안 돼…….”
시험 내용이 공개되기 무섭게 하늘이라도 무너진 듯. 뭔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랑이었다.
“하지만……죽어도……. 포기 못 해!”
조금 전의 절망적인 표정은 어디 가고, 금세 살아나 반드시 이기고 말 거라고 다짐하는 그녀를 보며 시하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이 시합에서 이랑이 이긴다면, 그녀는 곧 궁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녀가 궁에 들어오는 거 자체를 생각해보면 합격시키는 게 좋았다. 그러나 ‘대신’의 입장으로 들어오는 것이므로 즉, ‘일’을 하러 들어오는 것이다.
목적이 달랐으므로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합격시키지 않는 편이 나았다.
‘아마 다음에 만날 때는 다른 위치로 만나게 될 거예요.’
지난번 이랑이 남기고 간 말이 이제야 이해를 할 수 있었다.
필사적으로 이기겠다고 덤비는 이랑과 자신이 이겨야 하나 져야 하나 고민에 빠져 있는 시하루.
이미 기세로 보면 승부는 정해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좋아. 일단 해보자.”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고, 빨리 시작하라는 듯 노려보고 있는 이랑의 시선을 피할 용기도 없었다.
까짓거 일단 부딪혀보자는 생각으로 먼저 말을 옮긴 시하루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공부하고. 책 읽고. 공부하고. 책 읽고…….”
그녀의 지루한 대답에도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사실 그녀의 입에서 ‘연애’나 ‘남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까 싶어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이랑의 관심사는 여전히 한 가지였다.
좋게 말해서 다행이지, 어찌 보면 슬픈 일이기도 했다.
자신은 쓸쓸한 궐 생활을 보내고 있을 때, 그녀는 책에 빠져 매우 신나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니. 왠지 억울하기도 했다.
“그런데 놀랐어요. 왜 감독관으로 들어오셨어요?…… 나 보려고 왔어요?”
“하여간에 은근히 공주병 기가 있다니까.”
“뭐야! 아니었어요?”
대화하면서도 여유롭게 장기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시하루와는 달리 이랑은 안절부절못하며 벼랑으로 내몰렸다.
또 하나의 말이 그의 손에 넘어가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져 버렸다. 이대로 가면 정말 질지도…….
“사실 난 네가 시험 보러 올 줄도 몰랐어.”
웃는 얼굴로 이랑의 말을 하나하나 가져가고 있는 그야말로 진정한 악마였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우연적인 만남인가요?”
“아……. 그건 아마 아닐걸. 이신이 갑자기 들어가라고 했으니까.”
그 말에 그녀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겁도 없이 담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던 이랑을 내려오게 하기 위해 그가 했던 말이었다.
‘그 뭐냐……. 차라도 한잔 할래?’
‘책에서 읽었어요. 남자가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작업을 걸기 위해 하는 가장 흔한 대사라고요.’
도대체…… 주로 어떤 책을 읽는 거지?
“아~. 연애소설에 있을 법한 조력자의 등장 부분이었군요.”
그녀가 다시 궐 안에 들어오면 방을 뒤져서라도 평소 즐겨 읽는 책에 대해 알아 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몰래.
나름대로 여유로움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보였지만 그들 중앙에 놓인 작은 전쟁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여유로워 보여야 할 인물은 이랑이 아니었고 시하루였지만 그는 오히려 불안해 보였다.
감정적인 부분에서는 주도권을 잡았을지 몰라도 시험에서는 끌려가는 분위기였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랑은 결국 눈앞의 그를 상대하는 것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는 것을 선택했고, 말없이 시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역시 궐 안이 더 좋지?”
“…….”
그때부터 이랑의 입은 열릴 생각을 않았다.
열심히 대화를 시도해보는 시하루였지만, 이미 집중상태에 들어간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오직 신중히. 아주 신중하게 말을 옮기는 데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중이었다.
“서하연 삼화까지 하면서 국시까지 보러오다니. 욕심쟁이네.”
시험 종목이 ‘장기’라는 말을 듣기 무섭게 그녀가 보인 반응이 살짝 신경 쓰였기 때문에 나중에 물어보겠다. 다짐한 그였다.
“그냥 이참에 궐 안으로 들어오지 그래?”
“아. 국시를 보는 이유는 가산점 때문이에요.”
“……가산점이라니?”
전에도 말했듯, 서하연의 단 세 송이의 꽃. 삼화(三花).
그리고 그녀들 중 서하연의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건 단 한 명. 그녀가 바로 ‘려화’였다.
려화는 삼화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여인이 가질 수 있는 자리.
하지만 삼화들도 서하연의 수석들이었다.
시험이라고 하면 보통 만점을 받는 그녀들이었으니, 그런 그녀들 틈에서 한 명을 단순히 시험으로 가려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동점이 될 경우 우열을 가리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가산점.
가산점을 버는 방법은 주로 과외 활동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큰 점수가 바로 ‘국시’였다.
“제 꿈은 삼화가 아니라 ‘려화’거든요.”
“음……. 려화면 서하연의 수장? 꿈이 크네. 일국의 왕후이면서 서하연의 수장이기도 한 여인이라. 역사에 길이 남겠어.”
“…….”
“왜?”
집중하고 있던 장기판에서 거두어진 시선은 시하루를 향하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고 있던 시하루가 뭐가 잘못되기라도 했냐는 듯 어색하게 미소를 거두었다.
“몰랐어요? 서하연의 려화는 그 인생을 서하연에 바쳐야 해요. 우리는 그걸 희생정신이라고 말하죠.”
“그런데?”
그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있었다. 그녀가 왜 아까 ‘장기’라는 말에 발끈하며 과민반응을 보였는지 이제야 알 거 같았다.
이랑은 장기를 못 뒀다. 그냥도 아니고 엄청나게.
이대로 가다가는 그의 승리로 끝날 게 뻔했지만, 나름대로 신경 써서 균형을 맞춰주고 있는 그였다.
지금까지는.
“서하연의 려화는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게 규칙이에요.”
그가 봐준 덕분에 드디어 하나를 챙겨오게 된 이랑이 기쁜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꽃따리 오빠 차례에요.”
지금까지 고민 없이 말을 움직였던 그의 손이 멈추었다.
잠시 기다려주고 있던 이랑이 이길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눈을 빛내며 재촉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아직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순간, 굳어있던 그의 머릿속에는 방에 들어오기
전 보았던 이신의 의미심장한 미소나 말이 떠올랐다.
‘아마 들어가시면 필사적으로 시험에 응하시게 될 겁니다.’
이래서 이신이 그랬구나!
그제야 모든 걸 깨달은 시하루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직 잘 몰랐지만, 일단 말려야 했다. 말리고 봐야 했다.
삼화는 둘째 치고 이랑을 돌려받기 전에 려화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나도 질 수 없는 상황이네. 좋아. 전력을 다해 상대해주지.”
간단히 정리해보면. 지금 둘에게는 이 시험에서 이겨야 하는 서로 다른 이유와 목적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말이었다.
어느새 서로에 대한 사적인 감정이나 생각들은 잊은 지 오래였다. 아까와는 달리, 이제는 누가 이길지 모르는 일이 되어버렸다.
각자의 목적을 갖고 불타오르는 중인 다른 시험장들과는 달리 유난히 차분한 시험장도 있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탄성과 분을 못 이긴 외침에 이신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다들 즐거워 보이네요. 역시 이번 시험을 이걸로 정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험에 관련된 설명이 끝난 뒤부터 지금까지 지켜왔던 침묵을 깬 가장 첫 번째의 말이었다.
웬만해서는 긴장을 하지 않는 유시후였지만…….
설마 자신의 시험관이 이 모든 시험을 총괄하고 있는 그 악명 높은 이신일 줄이야.
하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전혀 질 거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 그였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유시후는 시험 도중에 실실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그런 반응을 이신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이랑님께서는 이 시합에서 이기실 거 같습니까?”
때마침 유시후에게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고 자신의 말을 빼앗긴 이신이 피식 웃으며 질문했다.
그의 말을 자신 쪽으로 들고 오던 유시후가 처음으로 장기판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리고는 싱긋 웃으며 답하길.
“아니요. 분명 질 거예요. 그 녀석은 이런 거에는 엄청나게 약하거든요.”
너무 단호한 대답이었다.
이미 유시후는 이랑의 시험관이 왕이라는 사실은 이신에게 들었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들어오기 전에 분명히 조심하라고 말했는데, 이건 오히려 호랑이 굴에 덥석 들어가는 꼴이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냥 피하면 아무 일도 없겠지만, 자신이 아는 이랑이라면 시험포기란 없었다.
감독관이 왕이든 누구든 간에 시험에만 몰두 중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유시후도 모르는 게 있다면, 이랑의 상대인 시하루의 실력이다.
물론 이랑의 장기 실력이 형편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이는 상대평가가 아닌가.
그녀보다 더 실력이 없으면 이길 수도 있으니까.
“이신공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유시후의 질문에 아주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이신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아마 이랑님께서 지시겠죠. 희한하게도 시하루님은 어렸을 때부터 유독 이런 거에만 강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럼 어째서 이랑의 감독관을 전하로 선택하신 겁니까? 분명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스스로 그 바보 왕을 ‘전하’라고 말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의 유시후의 마음을 눈치챈 건지 이신이 나이에 맞지 않게 씨익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전하께서는 바보이시니 분명 어떻게 해서라도 이기시려 들 게 뻔하니까요.”
이미 시하루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다는 그의 말에 유시후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가만히 그를 바라본다.
“그 말씀은……. 처음부터 그 녀석이 이기는 일 따위 생각도 안 하셨군요. 전하의 편에 서서 이랑의 불합격을 원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이랑의 기적 같은 승리를 원하시는 건가요?”
이랑의 일에 신경 쓰느라 제 일은 집중하지 못한 유시후의 틈을 노린 이신이 말 하나를 되찾아 오며 말했다.
“글쎄요. 결과는 두고 봐야죠.”
지금 시하루와 이랑의 대결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과연, 이신이 엄선해서 뽑은 이들이었다.
학문이 아닌 오직 ‘장기’ 하나만을 특기로 갖고 있는 이들이어서 그런지 엄청난 속도로 도전자가 되어버린 수험생들을 눌러버렸으며, 패배의 쓴맛을 알게 된 수험생들의 외침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여기저기서 시험이 끝났다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데, 오직 이 방 안에 감도는 긴장감은 여전했다.
한 마디로, 이 둘의 실력은 박빙(薄氷)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