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十五花 * 서하연의 꽃 (3)
“요즘 너 살찐 거 같다?”
숙녀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에 인식되어 있는 ‘숙녀’에 이랑은 없었다.
눈앞의 무례한 남자는 바로 몇 주 전만 해도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신세가 역전되어버리니 이랑은 억울하기까지 했다.
아까워 미치겠네! 그때 좀 더 괴롭히는 거였는데!
여성이라면 누구나 민감하게 반응했겠지만, 요즘 들어 본인도 느끼고 있었던 터라 그 반응은 배가 되었고 결국에는 보이지 않는 제삼자를 탓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요즘 들어 누가 자꾸 간식거리를 선물로 보내잖아.”
좋다고 먹을 때는 언제고 이제는 불만.
투덜거리는 이랑을 바라보던 유시후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멍하니 다른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살찔까 봐 걱정되면 다 갖다 버리든가.”
먹을 걸 버리라는 말에 이랑이 펄쩍 뛰었다.
어디서 감히 저런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건지…….
그녀에게 있어서 ‘음식’이란, 생(生)과 사(死)를 뛰어넘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고 있는 유시후의 입을 찢어놓고 싶을 정도였다.
‘음식에 대한 소중함’이라는 주제로 열띤 강의를 펼쳐줄 생각이었는데, 아까부터 산만한 태도를 보이는 그는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포기할 이랑은 아니었으니, 마치 허수아비 앞에서 연설하는 사람 같았지만, 자신이 할 말은 끝까지 하고야 마는 그녀였다.
“어. 알았어. 알았어.”
누가 들어도 대충 대꾸해주고 있는 티가 팍팍 풍겨왔다.
결국, 그녀의 잔소리에 가까운 연설을 못 들어주겠는지 그래도 앉아 자리를 지켰던 유시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십 년 동안 자신의 투정이나 푸념을 잘 들어줬던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니 이랑은 당황스러울 따름이다.
“어디 가?”
단순히 자신의 말을 듣기 싫어서 피하는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자리를 뜬 그는 멀리 가지 못하고, 그들이 있던 찻집의 문가로 걸어가더니 나가지는 않고 딱 그 자리에 멈춰 고개만 내밀어 밖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
문제는 그 행동이 이랑과 찻집에 들어올 때부터 지금까지 무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충 그것이 뭐하는 짓인지 예상되는 이랑은 그 이상한 행동에 대해 묻지 않았다.
괜히 물어가며까지 한심한 답변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운동 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앉아 있던 자리부터 문가 사이를 약 스무 번째 오가고 있을 즈음.
지치지도 않는지 방금 자리에 앉아놓고 또다시 일어서려는 그에게 이랑이 말했다.
“……히연 언니, 오늘 좀 늦는데. 서하연에 처리할 일이 남아서.”
이랑이 찻집 주인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처음에는 그의 외모에 괜히 얼굴을 붉히며 차를 내오더니, 이제는 왔다 갔다 하는 그 때문에 여러 번 ‘어서 오세요.’와 ‘감사합니다.’를 혼동하자 짜증이 나 보였다.
괜히 약이 올라서 말을 안 하려고 했지만, 정신 사나워하는 주인과 그 눈치를 보는 나 그리고 히연을 기다리는 유시후 셋 모두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말에 유시후가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바로 자리에 앉아 일어나지 않는 걸로 보아 효과는 좋았다.
“오라버니……. 의외로 귀엽다.”
사랑을 하면 바보가 된다더니.
설마 이 인간도 해당될 줄이야.
괜히 민망해서 이미 식어버린 차를 단숨에 들이키며 그가 다시 발끈했다.
“이게 어디서.”
쓸데없는 발언을 한 죄로 이마에 작은 혹이 난 것을 빼고는, 나름 평온한 하루가 시작될 거 같았다. 아마도.
이랑의 이마에 분풀이하고 조금은 미안했던 건지, 슬쩍 그녀를 바라보던 유시후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너 그거 배정 받았냐?”
자신을 아프게 했다는 것에 원망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이랑이 ‘뜬금없이 무슨 배정?’이라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잠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곧 그의 말을 이해한 듯 ‘아.’라는 짧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세 번째 조.”
“어? 내가 먼저 들어가네. 난 두 번째 조에 배정받았거든. 어쩌냐? 긴장해야겠다? 자리 하나 줄어들 테니.”
“웃기시네.”
부어오른 이랑의 이마를 보며 반성할 때는 언제고, 히연도 자리에 없겠다. 이랑의 온 신경을 긁어보기라도 결심한 건지 끝도 없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자신의 비단결 같은 심성이 구겨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이랑이 할 수 없이 최후의 수단인 ‘눈물’ 방법을 사용하려는 순간, 때마침 다행히도 그녀의 구세주께서 납시었다.
“미안, 늦어서. 이랑이 외출 건도 마무리 짓느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좋다고 이랑을 괴롭힐 때는 언제고.
어쩜 사람이 저렇게까지 바뀔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잘 됐어?”
나불거리던 유시후가 어느새 입을 꽉 다물고 자신의 옆에 앉은 히연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싱긋 웃는 얼굴로 그의 손을 꽈악 쥐고 있던 히연이 이랑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옮겼다.
“응. 오늘부터 사흘 동안.”
소음의 원인이 되었던 사람이 입을 다물고 얌전해지니, 찻집에는 고요한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영원히 잠들었으면 싶었던 그 입은 다시 살아나 눈치 없게 두 여인의 대화에 끼어들고 있었다.
“국시 때문이니 딱히 뭐라 할 수 없겠지.”
“뭐, 그렇지.”
건성으로 대답해주며 자신은 아직도 이마에 고통을 잊지 않았다는 눈빛이었다.
“내일모레. 국시……. 다시 궁에 들어가는 거네.”
생각에 잠긴 듯 중얼거리고 있는 이랑을 바라보던 히연이 그녀 앞에 놓인 양갱을 콕 집어먹으며 말했다.
“원서 접수할 때 ‘서화당의 유아’라는 이름으로 했으니, 그쪽에서는 너라는 걸 모를 거야. 조용히 다녀올 수 있겠어.”
“그게 무슨 말이야?”
왠지 조심스러워 보이는 히연과 유시후였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이랑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녀가 걱정된 히연이 마지막이라는 듯 충고했다.
“절대. 절대로 왕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는 말이야. 시험만 보고 빨리 나오라는 거야. 알았지?”
“걱정하지 말래도. 꽃따리 오빠가 시험 보는 데 나타날 리가 없잖아.”
* *
“시하루님.”
어머니의 호출로 인해 가뜩이나 기분이 안 좋았던 시하루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신을 발견하고는 표정이 더더욱 안 좋아졌다.
“나 방금 어머니께 된통 깨지고 왔으니 너까지 그러지 마라.”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궐에 볼일도 없는 주제에 입궐한 그가 더욱 더 보기 싫었다.
굳이 자신의 앞에 자리 잡고 앉아, 종이뭉치들을 팔랑이며 일을 하는 이신을 마음에 안 든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 없이 입궐한 것도 모자라 이렇게 앞에 앉아 있다는 말은 분명,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의 생각이 맞은 건지, 먼저 방어막을 친 시하루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신이 중간 정도까지 검토가 끝난 서류뭉치를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이렇게 가만히 계실 여유가 없다는 걸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묻지 않아도 그가 지금 말하고 있는 대상이 ‘꼬맹이’라는 건 지나가던 어린아이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곁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궁 밖으로 나가버린 녀석을 어쩌라는 건지.
물론 언젠가는 어떻게 해서라도 궐 안으로 데리고 올 생각이기는 했지만, 그게 어디 간단한 일인가.
안 그래도 요즘 그것에 대해 생각하느라 머리가 터질 거 같은 그인데, 대비와 이신. 양쪽에서 안달이니 답답해서 미칠 거 같았다.
“여유? 내가 여유가 있어 보이나?”
재촉도 모자라서 이제는 협박에 가까운 말에 시하루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기분이 나쁘면 나쁠수록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이신이었다.
아무래도 남은 삶을 자신을 괴롭히며 살겠다고 밝힌 그의 어머니와 한통속인 모양이었다.
무슨 생각인 것인지 즐거워 보이는 이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시하루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피했다.
그리고 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나가보겠다는 듯 간단히 인사를 한 이신은 인자하기는커녕, 그 나이에도 사악해 보이기까지 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꾸 그렇게 여유 부리다가는 누가 먼저 채어 갈지도 모릅니다.”
“누가?!”
시하루를 부추기려는 계획은 성공한 듯 보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이신이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효과는 배가 되었으니까.
“이안!”
문 앞에 기대어 이안을 우렁차게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아직 가지 않은 이신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정말 돌아갈 생각인지 문에 기대고 있던 몸을 뗀 그가 들고 있던 종이뭉치 중 표시를 하기 위해 살짝 접어둔 부분을 펼쳐보며 중얼거렸다.
“시하루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아이를 아무것도 아닌 왕후의 자리에 앉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재랍니다.”
그가 들고 있던 이번 국시 참가자들의 이름이 적힌 명단. 그리고 접힌 부분에는 어느 한 사람의 인적사항이 적혀져 있었다.
[ 서화당의 유아 ]
잠시 그 이름을 바라보던 이신이 고민에 빠진 듯 보였다.
“흐음……. 제가 도와드려야 할까요, 말까요.”
그 종이 한 장에 온 정신을 빼앗긴 이신이 몇 마디를 더 중얼거리더니 바로 접혀 있는 또 다른 종이를 꺼내 들었다.
“맞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눈여겨본 인재가 둘이었죠.”
두 번째로 꺼내 든 종이에는 다른 이가 실려 있었다.
“다행히도 올해는 합격자 없이 넘어가지는 않겠군요.”
* *
“누가 또 간식을 보내왔네.”
“그러다가 너 살찐다. 적당히 먹어.”
안 그래도 저번 일도 있고 해서 신경 써가며 먹고 있었는데…….
하루에 한 번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라도 돋나? 차라리 책을 읽어!……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 없는 게 이랑이 처한 현실이었다.
국시 때문에 장기 외출 허가를 받은 그녀는 현재 제2의 집과도 같은 유시후의 집에 머물고 있었고, 갖은 구박을 견디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머물 곳이 그곳밖에 없었으니. 그렇다고 다시 궐 안 영희궁이나 희수궁으로 찾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하나만 더 먹을게.”
계속해서 격려 차원으로 과자 선물을 보내는 이는 아직 그녀가 서하연에 없다는 정보를 얻지 못한 듯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들어오는 선물에 서하연은 다시 이랑이 있는 곳으로 전달해주었고, 그렇다 보니 유시후의 눈치를 안 볼 수 없었다.
그녀가 옆에 쌓인 과자를 힐끔거릴 때마다 들고 있던 책을 툭툭 치는 것이, 공부에 집중하라는 압박이었다.
‘수험으로 인한 긴장과 기타 복잡한 심경을 날 괴롭히는 걸로 푸는 거 아니야?’
천하의 유시후도 긴장이라는 걸 하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누굴까?”
“글쎄.”
자신에게 선물을 보내오는 이 착한 사람의 정체에 대해 궁금하다는 눈치였다.
그런 이랑의 말에 유시후는 관심 없다는 듯 책장을 넘기고만 있었다.
“설마 해서 물어보는 건데, 오라버니는 아니지?”
“라히연이 있는데, 내가 왜 너한테 주냐?”
하긴. 바랄 걸 바라야지.
게다가 간식 같은 거 줄 생각이 있다면 그냥 건네줬겠지 이런 불편한 배송수단을 사용할 리가 없었다.
‘그럼 도대체 누굴까……. 왠지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은데 말이야…….’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 이랑을 바라보던 유시후가 짜증이 난다는 듯 탁자 밑에서 어느새 쌓여가는 작은 편지 뭉치를 살짝 꺼내 들었다.
그리고 종이에 하나같이 찍혀 있는 도장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이놈의 왕……. 신경 끄라니까 말 진짜 안 듣네.’
이 모든 것들을 가장 먼저 예상한 히연에게서 첫 번째 편지를 건네받은 그는, 단번에 그 선물을 보내는 이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그 뒤부터 안전을 위해(?) 1차 적으로 확인 작업에 들어간 그였고, 덕분에 상자 안에 들어 있던 시하루의 편지가 이랑에게 까지 전달될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내일이 국시인데 이렇게 한가롭게 있어도 되겠어?”
“이래봬도 진지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진지’라는 단어가 들으면 억울할 정도였다.
“뭐가 또 그렇게 불만이지?”
실실거리며 과자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을 때는 언제고, 순식간에 표정이 싹 바뀌어 자신을 바라보는 이랑의 태도에 유시후가 눈을 찌푸렸다.
“칭호가 바뀌니까 이상해.”
그녀의 말에 책장을 넘기며 피식 웃던 유시후가 짐짓 엄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큰 손으로 이랑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며 웃었다.
“그럼. 내가 오라버니인데 궁까지 나온 김에 제대로 돌아가야지. 나한테 반말 쓸 때가 좋았나 봐?”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사옵니다. 오라버니.”
궁 밖. 이제 아무런 힘이 없는 그녀였기에 바로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런 그녀를 불쌍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여인이 방금 도착했다는 것.
“유시후. 적당히 해.”
이쯤에서 주의를 받는 게 당연했다.
도가 지나칠 때마다 이렇게 끊어주는 게 바로 히연의 역할이었다.
엄청난 자료량에 한 번 놀라고, 그녀의 진지함에 두 번 놀랄 정도로 히연은 평소의 싱글벙글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녀가 들고 온 문서들을 힐끗 바라본 이랑은 이제 지겹다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 국시의 감독관은 예전에 전하의 교육관까지 맡으셨던 실력파야. 덕분에 뒷돈을 받은 일은 없겠지. 이번에는 항상 있던 부정합격자가 없을 거야. 게다가 국시는 1차로 지적능력 판단 후에 이루어지는 감독관과 응시생의 1대 1 면담 승부. 조사한 바로는 6년 전쯤에도 한 번 감독관은 맡으셨다는데, 그해에는 단 한 명의 합격자도 배출하지 않은 걸로 유명해. 즉, 완벽하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탈락이란 뜻이야.”
“역시 이신공…….”
히연이 긴장하라는 의미에서 말했지만, 유시후와 이랑은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도 남을 분이시지.’
“기왕이면 둘 다 가볍게 붙자고.”
“유시후는 그렇다 치고, 이랑 너는 진짜 조심해. 넌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가는 것과 같으니까.”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많은 시험을 봤는데 왜 이번 시험에만 이렇게들 신경을 쓰는 건지.
분명 별 볼 일 없는 또 하나의 시험에 불과할 텐데.
* *
국시의 시험 내용이나 방식. 그리고 주제는 그 해에 맡은 감독관의 고유권한이며, 왕은 그것에 관여할 수 없었다.
또 하나. 국시의 이점을 들자면, 이는 두 번째 서하연의 입학 기회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 치르는 서하연의 입학시험에서 떨어지거나 어떠한 이유로 시험을 보지 못한 이들이 국시에 합격하면 서하연의 *청화(靑花)로 편입이 가능했다.
“우와. 사람 많다.”
아침부터 들떠 있는 이랑이 덕분에 괜히 두 시간이나 일찍 일어난 유시후는 기분이 나빠 보였다.
원래 아침잠이 많기로 유명한 그였다. 십 년 동안 어떻게 궐 안의 빡빡한 일정을 견디어 냈는지 모두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올해 지원자들의 남녀비율은 6대 4라더군.”
아직 제정신 못 차리고 있는지 옆에 서 있는 유시후가 몽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점점 비슷해져 가는 비율에 이랑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앞으로 닥칠 시험이란 존재에 위축되지도 않는 건지, 앞서 잘 걸어가고 있는 유시후의 어깨를 툭 하고 치기 시작했다.
“좋았어. 열심히 해보자고. 오라버니! 난 이미 어떤 시험문제든 간단히 받아칠 준비가 되어있어.”
주위에는 긴장한 사람들이 가득한데, 긴장은커녕. 오히려 즐거워 보이기까지 한 여인과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남자는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많은 사람 틈에서도 눈에 띄는 그들을 위층의 난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과연, 시하루님이 빠지실 만하네요.”
혼자 중얼거리며 올해 수험자들을 몰래 바라보고 있던 이신이었다. 옆에 서 있던 다른 대신이 내민 계획서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그가 중얼거렸다.
“이번 시험에서는 붓과 연필이 필요 없겠군요.”
자신이 계획한 올해 시험이 매우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가 그렇게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긴장해 있는 수험생들을 관찰하고 있을 즈음.
또다시 누군가가 그 장소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이신. 무슨 일이냐. 날 부르다니. 오늘은 국시잖아. 즉 나 쉬는 날이라고.”
좀처럼 없는 왕의 업무휴일에 왜 사람을 오라 가라 해서 귀찮게 하느냐는 의미였다.
그의 불만 가득한 표정을 힐끗 본 이신이 재미있을 일을 꾸밀 때 짓는 특유의 미소를 보이며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 가장 불만이 많을 주군을 향해 돌아섰다.
“오늘은 특별히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이리 모셨습니다.”
곧. 시험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고,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마냥 이신의 눈빛이 사냥감을 찾는 사냥꾼의 눈빛처럼 번뜩였다.
그의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다는 듯, 시하루가 시선을 내려 희망과 꿈을 가득 품은 채 수험장을 향하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굉장히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올해는 고집 좀 꺾지?”
“인재를 찾는 데,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두고 보시죠.”
간만에 의욕이 생긴 이신에게서 벗어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시하루는 체념이라도 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럼 난 오늘 뭘 하면 되는데?”
그의 항복 선언에 잠시 사라졌던 이신의 미소가 돌아왔다.
“시하루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아, 그렇게 싫다는 표정 짓지 말아 주세요. 분명 곧 있으면 저에게 고맙다고 하실 테니까요.”
그의 말에 시하루가 ‘그게 무슨 소리야?’라고 중얼거렸지만 이신은 그 말을 무시했다.
그리고는 따라오라는 듯 앞장을 서며 말했다.
“시험감독관 한 번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꽤 재미있는 경험이 될 거 같은데.”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던 시하루가 아래에서 거대한 행렬을 이루고 있는 수험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많은 인원을?”
“물론 아니죠. 아주 극소수만 부탁드릴게요.”
그럴 리가 있겠냐는 말과 함께 빠르게 명단을 넘기던 이신이 곧 자신이 찾던 것은 찾은 듯했다.
“내가 왜 이걸 해야 하는데.”
“원래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 가장 인상 깊게 남는데요.”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이신은 매우 즐거워 보였다.
반면 시하루는 꿈만 같은 휴일에 이게 무슨 일인지, 마치 악몽이라도 꾸는 듯 보였지만.
“그게 무슨 말이야.”
“일단 가보시면 알아요.”
“가서 난 뭘 하면 되는데?”
“그것도 가보시면 알아요.”
놀리는 듯한 이신의 말투에 기분이 상해 보이는 시하루였다.
일단 이신에게 못 이겨 참가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못마땅한 듯 걸음이 점점 뒤처졌다.
“미리 말해두는데, 나 아무것도 안 할 거야. 그냥 지켜보다가 나올 거야.”
그의 말에 이신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의미심장한 미소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아마 들어가시면 필사적으로 시험 감독에 응하시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