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十四花 * 서하연의 꽃 (2)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간택령?”
시하루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취향을 이 어미에게 말씀해보시죠. 제가 특별히 아주 딱 맞는 이상형을 찾아드리겠습니다.”
다급히 자신을 찾는 어머니의 부름에 한달음에 달려왔건만, 이게 무슨 소리인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일도 제쳐놓고 온 자신이 한심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저 부인 있습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디요.”
입 다물라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차마 반박을 못 하겠는지 그가 한숨으로 답을 대신했다. 대비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사실 ‘간택령’은 핑계였다. 대비가 그를 부른 이유는 단순히 ‘걱정’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랑이 궐 밖으로 나간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는데 그동안의 시하루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이는 외면이 아니라 내면적인 문제였다. 그는 온종일 방이나 서재에 박혀서는 미친 듯이 일만 했다.
일하는 게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겠지만, 주위 사람들이 볼 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정말 일밖에 하지 않았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가끔은 그 좋은 머리 한번 굴려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결국, 오늘도 또 다른 잔소리를 듣고 나온 시하루가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안이 바짝 긴장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가서 붓과 종이를 가지고 오거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네? 아……네.
지난 일주일 동안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아니, 넓은 궐 안에서 한 명이 나갔다고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나?
평상시라면 이안에게 화풀이를 한다거나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쳤겠지만, 이것은 평상시와는 다른 문제였다.
누가 봐도 기분이 안 좋아 보였지만 대놓고 티를 내지 않으려는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다른 이들로 하여금 안쓰러움을 느끼게 했다. 물론 시하루 본인은 몰랐지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답답해. 오늘도 편지나 보내야겠다.”
머리며 마음속이 복잡했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있다면 그게 바로 ‘서화당.’
그동안 잠잠했던 편지주고받기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 *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랑님. 이, 이제 그만 쉬시는 게 어떠세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마, 맞아요. 벌써 삼 일째…….”
온종일 일만 하는 시하루가 있다면 서하연에는 온종일 공부만 하는 이랑이있었다.
궐에 있을 때는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다람쥐’라는 별명까지 불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서하연에 오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거 같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예? 아……. 하하.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전 괜찮습니다.”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는 얼굴로 책을 고집하는 여인이 여기에 있다.
비틀거리면서도 책장을 넘기고 있는 이랑의 의지에 두 손 두 발 다 든 이들.
결국, 이랑을 말리기 위해 동원되었던 서하연의 꽃들은 오늘도 아무 보람 없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서하연에는 졸업할 수 있는 단계에 오르기까지 많은 시험이 있었고, 한번 입학하면 적어도 십 년은 지내는 제2의 집 같은 장소였다.
그렇기 때문에 서하연의 꽃들은 모두 가족같이 지냈고 매년 초는 새로운 가족, 신입생들이 들어와 시끌벅적했다.
도중 입학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더욱 들떠 있었다.
거기에 새로운 신입생이 마지막 삼화로 발탁된 천재라는 말에 그 관심은 배가되었다.
그래서인지 밖을 돌아다닐 때는 여기저기서 인사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랑?”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히연 언니.”
결국, 최후의 수단이 동원되었다.
같은 서하연의 꽃이기도 했지만, 같은 삼화이기도 했고 전부터 이랑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바로 옆방으로 배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쉽게 오고 갈 수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공부가 좋기는 하지만 너무 과하면 몸에 무리를 줄 수 있어. 체력관리도 해야지.”
말을 안 들을 수가 없는 상대. 유시후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능력뿐 아니라 눈빛 하나로 이랑의 손에 들린 책을 덮어버리는 능력자.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말 잘 들어서 좋아. 그런데 무슨 공부를 그렇게 필사적으로 하는 거야? 삼화(三花) 진급시험 끝난 지 얼마 안 됐잖아. 벌써 다음 공부야?”
이랑의 장래희망이 ‘려화’라는 걸 잘 알고 있던 히연이 쌓여있던 책을 집어 들었다.
공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무섭게 이랑의 눈이 반짝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그건 이번에 있는 국시(國試) 공부예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국시(國試)? 그 궁에 또 들어가겠다는 거야? 그렇게 힘들게 나왔는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려화가 되기 전에 꼭 한번 궁에 들어가 일 해보고 싶었어요.”
이랑의 입에서 ‘려화’라는 말이 나오자 그녀의 책을 관찰하던 히연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정말 려화가 될 생각이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래서 삼화(三花)가 되었죠. 제 꿈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어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흔들림 없는 그녀의 대답에 오히려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히연이 재차 묻기 시작했다.
“려화가 되면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을 테고.”
“려화는 삼화(三花) 중 한 명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죠.”
방금 히연이 중요한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랑이 그것은 자신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하며 다시 책을 펼쳤다.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히연의 시선이 다시 방 한쪽 구석에 쌓인 책더미에 고정되었다.
“내가 만일 왕이었고, 너를 사랑했다면 난 절대 너를 궁 밖으로 나가게 두지는 않았을 거야.”
왕이 바보지. 히연은 생각했다.
이 나라의 왕께서는 두 가지의 실수를 하셨다.
첫째로. 이랑이 궁 안에 있는 십 년 동안 그녀를 영희궁이라는 반 폐쇄적인 공간에 내버려둔 것.
십 년이면 충분했다. 아니, 이랑에게는 어쩌면 필요 이상의 시간이었을지도.
이랑의 폐위를 막고자 했다면 처음부터 삼화(三花)를 목표로 한 그녀에게 그 아주 ‘잠시’의 시간도 줘서는 안 됐다.
서하연의 입학시험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삼화(三花)의 진급 시험 문제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입학시험이 귀엽게 보일 정도로 그 난이도는 매우 최강. 고난도.
그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둘째로. 이렇게 다시 한 번 이랑에게 시간을 줬다는 것이다.
삼화(三花) 정도면 귀엽지. 아니 오히려 지금쯤 그 바보 왕은 마음을 놓고 있을 게 뻔했다.
서하연이 초기에 도입되었을 시기. 서로 우열을 다투던 비슷한 가문 세 개가 있었다.
삼화(三花)들은 각각 그 세 가문에 시집을 갔고, 뛰어난 지식을 지니고 있는 그녀들을 이용해 자신들의 가문을 불리려던 가주들에 의해 다툼과 분쟁이 일어났다.
문제는 그 세 가문의 다툼이 너무도 컸기에 그들의 다툼은 평민들의 삶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서서히 삼화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어 갔다.
그녀들은 원래 특별했던 서하연의 꽃 중에서도 더욱 특별한 존재.
심지어는 왕의 가까운 친척이 서하연의 삼화(三花)와 혼인하게 되어, 왕권에 도전을 한 일도 있었다.
서하연을 이용해 왕권이 위협을 받는 일이 일어나자 이를 두려워했던 당시 왕은 서하연의 수장, 려화에게 서하연의 법도를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법이 서하연 법도 7조 5항.
‘서하연의 삼화(三花)는 국가와 서하연 중 한 가지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
바로 삼화(三花)는 ‘왕’ 이외의 남자와는 혼인할 수 없다, 라는 법.
즉 이랑이 삼화로 있는 이상, 다른 남자들과 눈이 맞을 일은 걱정 안 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녀가 전부터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거라는 말로 시하루를 겁주기는 했지만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왕이 아닌 사랑하는 남자와 혼인을 할 수 없다는 제약이 있어 다들 삼화의 자리를 꺼릴 거 같았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는 명예의 전당이었고, 딱 세 개밖에 없는 자리에 오르기 위한 경쟁은 희소성 때문인지 치열했다.
사랑 대신 서하연이나 국가(왕)를 선택해야 했지만, 그런 그녀들에게도 한 가지 이점은 있었다.
바로 삼화(三花)에 대한 예의.
보통의 천유국은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지만 왕족들은 왕실의 번영이라는 이유로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가 허용되었다.
당시 려화는 왕의 조건을 받아들여 서하연의 법도를 수정했다. 그리고 대가로 한 가지를 제안했고 왕실은 그 조건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왕은 삼화(三花)를 후궁으로 들일 수 없으며, 삼화(三花)를 왕후로 들였을 때 다른 후궁이나 다른 기타 여인들을 곁에 둘 수가 없었다.
평범한 99개의 행복을 포기하는 대신 1개는 제대로 보장해 달라는 의미에서였다.
하지만 문제라면 이랑이 려화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경우.
려화는 서하연을 위한 존재. 평생 독신은 물론이고, 웬만한 일이 아니면 서하연 밖으로 나가는 일도 적었다.
여기서 ‘독신’이라는 말은 왕도 포함되었다.
‘교육’이 ‘정치’에서 독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온 서하연은 그 위치를 고수하기 위해 혼사로 묶이는 관계를 피했다.
서하연의 수장인 려화가 왕실과 혼사를 맺을 경우 서하연 역시 왕실에 넘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바보 왕이라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히연이 벽에 등을 기대고 혼자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항상 얼굴에 미소를 달고 사는 그녀였지만, 그녀를 잘 알고 있는 이랑은 그것이 다른 의미의 미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침부터 붙들고 있던 책을 다 뗀 건지 바로 다음 권으로 넘어가려던 이랑이 이번에는 질문했다.
“난 언니가 더 궁금해요. 왜 삼화(三花)가 된 거예요? 곧 직위 때려치울 거죠?”
“유시후랑 혼인하려면 당연히 그래야겠지.”
그녀 역시 삼화(三花)였지만 이미 유시후의 약혼녀였기 때문에 히연은 혼인과 동시에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괜한 말을 꺼낸 건가 싶어 조심스러워진 이랑이 어색하게 책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글쎄, 사람마다 가치관이라는 게 다 달라. 학업을 우선순위로 두고 있는 너와는 달리, 나는 사랑을 우선순위로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이랑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 때문에 꿈을 포기하다니.”
지금까지 꿈만 생각해왔고, 그것만을 향해 달려온 이랑에게 포기란 없었다.
오직 앞을 향해 나아갈 뿐. 그밖의 감정들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히연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반면에 히연은 어렸을 때야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여전히 일직선인 이랑의 사고방식이 이제는 답답했다.
그녀에게 다른 길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은 히연이 나름대로 노력해보고 있었지만 큰 효과는 없어 보였다.
“포기한 게 아니야. 다만 내가 바라보고 있던 세계가 바뀌게 된 거지.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 네가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남자는.”
“……언니가 아까워요.”
유시후를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 말하고 있는 히연을 바라보는 이랑의 눈빛이 불쌍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 내가 좀 많이 아깝긴 하지?”
그 말에 동의하는 건지 히연이 ‘호호호’도 아닌 ‘푸하하’ 정도로 과한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언니의 목표는 뭔데요?”
이랑이 자신에게 장래희망을 물어오자 웃고 있던 히연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더니 금세 눈빛이 진지해졌다.
이랑과 히연. 둘은 닮은 부분이 많았다.
‘꿈’과 ‘공부’ 이야기만 나오면 눈을 빛내며 이리 진지한 태도로 임하니 말이다.
“첫째로 나는 삼화에 있으면서 좀 더 공부할 거야. 그러다가 곧 졸업시험을 보겠지. 그리고 서하연을 졸업하게 된 후에는 서하연의 교수직을 맡을 생각이야.”
“맞아요. 언니 가르치는 거 잘해요. 잘 맞을 거 같아요. 그럼 두 번째는요?”
‘첫 번째’라는 것은 다음이 있다는 말.
두 번째가 언급되자 방금 전까지의 진지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히연이 신이 난다는 듯 방실방실 웃기 시작했다.
“두 번째는 우리 시후를 천유국 역사상 최고의 공처가로 만드는 게 목표지.”
“두 번째 목표는 이미 달성한 듯 보이네요.”
의외로 두 번째 목표는 그리 높지 않아 보였다.
* *
“오랜만이네. 수아야.”
“서하연에 들어가시니 만나기가 더 힘들어요. 저는 서하연 학생이 아니다 보니 매번 이렇게 밖에서 만나야 하잖아요.”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출입하곤 했던 희수궁과는 달리 서하연의 출입은 엄격했다.
덕분에 들어올 때마다 대기하는 시간이 길다는 단점은 수아의 불만을 샀고, 결국 이렇게 이랑이 나와 밖의 찻집에서 만나고는 했다.
희수궁에 있을 때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친절하게 안내도 해주고 언니나 오빠들이 간식 같은 것도 챙겨주고 그랬는데!
“그러니까 너도 아예 들어와서 살아.”
“저도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죠…….”
안 그래도 수아를 서하연에 입학시킬 목적으로 공부를 봐주고 있던 이랑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식으로 직접 눈으로 보며 자극을 받는 것도 좋겠지 싶었다.
“그것보다 그건? 그건!”
목마른 사람이 물을 원하듯. 뭔가를 간절히 원하는 이랑을 보며 미소 짓던 수아가 한 손에 꼭 쥐고 있던 금빛 문양이 새겨진 편지를 내밀었다.
“적화유! 적화유!”
이미 심각할 정도로 적화유의 추종자가 되어버린 이랑이었다.
수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찰싹 붙어 이랑이 어서 그 편지를 꺼내보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뒤. 편지가 펼쳐지고, 하얀 종이 위, 검은 글자들을 빠르게 훑어 내리는 두 여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어……어떡해……. 결국 여자가 떠나게 되었나 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녀를 포기 못……. 아 정말, 이 남자 너무 멋진 거 아니에요? 물론 초반에는 좀 심각하게 싸가지가 없었지만,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느껴져 오는 애틋함!”
조금은 과할 정도로 수아가 적화유를 찬양하며 이랑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내 말이! 아~. 진짜 왜 내 주위에는 이런 남자가 없지?”
서로 좋다고 난리를 치는 두 여인의 모습이란 참으로…… 보기 안쓰러웠다.
주위에서도 힐끔거리며 어느 정도 주의를 주기는 했지만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진 여인들이란 무서웠다.
“뭐야. 뭐야. 이랑! 아침부터 외출증 끊어서 나갔다고 들었는데 여기 있었네? 어? 그건 뭐야? 뭘 그렇게 킬킬거리면서들 읽는 건데~ 나도 좀 같이 보자!”
“어? 히연 언니!”
때마침 본인도 약속이 있어서 나왔다는 히연의 합석으로 날씨 좋은 어느 날 세 명의 여인의 본격 찻집 담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게 뭐야! 아니, 세상에 우리 낭군님만큼 멋진 남자가 있었단 말이야?!”
히연까지 단숨에 적화유 추종자 줄에 서자 찻집은 더욱 시끄러워졌고, 주인장이 주의를 줄까 말까를 수십 번도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찻집으로 들어서고 있던 유시후가 눈을 찌푸리며 그 시끌벅적한 여인들에게로 다가갔다.
“라히연. 여기서 뭐 해. 이 옆에서 만나기로 했었잖아.”
“유 낭군. 유 낭군. 이리 앉아서 이것 좀 봐봐. 여기 이 남자 완전…….”
우연한 만남 같지 않아 보이는 게 약속이 있다고 하더니 그와의 약속이었던 모양이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소음으로 신고 당하기 전에 본인이 먼저 주의를 주려했던 유시후가 ‘남자’ 이야기가 나오기 무섭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히연의 옆에 앉아, 그녀가 내미는 종이에 관심을 보이는 듯하다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는지 벌떡 일어나더니 종이를 빼앗아 가버렸다.
“이게 뭔……. 야. 너 이거 읽지 마!”
“왜? 어째서? 잠깐, 나 아직 다 못 읽었어!”
갑자기 빼앗기게 된 종이를 되찾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히연과 그녀를 막아서던 유시후는 당장에라도 종이를 찢어버릴 기세였다.
결국, 말리러 왔다가 더 큰 소음의 원인이 되어버린 이 연인은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이랑과 수아는 오히려 그들을 말리는 입장이 되어 버렸다.
“유해문서야.”
“유해문서는 웃기고 앉아 있네! 유시후! 이리 딱 안 와?”
“이런 거 읽으면 네 정서발달에도 좋지 않아.”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대사에 오히려 이랑이 움찔거리더니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지 안절부절못했다.
“안 오지~?”
자기 할 말은 다 하면서도 말을 참 잘 듣는 유시후를 보며 이랑은 오라버니인 그가 살짝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거리는 어느새 반절로 줄어들어 있었으니. 그는 뛰어봤자 히연의 손바닥 안이었다.
“내놔.”
“싫어.”
“어허.”
어렸을 때부터 이랑의 존경대상 목록에 포함되어 있는 히연. 그녀는 가장 닮고 싶은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그 이유를 대라면 바로 저것 때문에.
천하의 유시후를 저렇게 짧은 몇 마디로 제압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대단하게만 느껴졌다.
결국, 그 문제의 편지는 다시 히연의 손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우리들의 유시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유시후의 작은 반항은 히연에게 맡겨놓고, 평화를 찾은 그들은 다시 그렇게 한마음으로 적화유의 편지에 푹 빠져버렸다.
아무리 책이랑 친구를 했다지만 그래도 사람인데 어찌 공부만 할 수 있겠는가, 이랑에게 있어서 적화유의 편지는 말 그대로 휴식이었다.
네 번째 정독에 들어간 이랑이 아직도 받을 감동이 남아있던 건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두 여인의 의미심장한 시선 교환이 오가는 사이에서.
* *
“이랑 님. 이랑 님. 잠시만 나와 보세요!”
서하연에서는 나이보다도 ‘실력’이 중요했기 때문에 아무리 어리다 해도 삼화 중 하나인 그녀에게 존댓말을 써야 했다.
평범한 삶을 살았다면 그 호칭이 어색했겠지만, 궐 안에서 생활해온 이랑이었기에 빠른 적응을 보였다.
“음…….”
자신의 여유로운 아침 독서시간을 방해하는 소음에 이랑은 그냥 문을 잠가버릴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대부분이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던 영희궁이나 희수궁과는 달리 공동체의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주변과 잘 어울려야 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할 수 없이 하고 있던 일들은 멈추고 밖으로 나간 이랑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무리에 겁을 먹고 물러섰다.
“무슨 일 있으세요?”
그녀를 반긴 건 다름 아닌 커다란 상자였다.
이게 뭐냐는 듯 가만히 내려다보던 이랑이 얼른 풀어보라는 서하연의 꽃들의 눈빛에 못 이기고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음…….”
“우와!”
다른 서하연의 꽃들의 실망했다는 반응과는 달리 이랑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역시 애…….”
“공부 열심히 하라고 보낸 격려 선물인가 보네.”
언제 온 건지 이랑의 뒤에서 나타난 히연이 상자 안 '선물‘ 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자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여러 종류의 과자들에 빠져버린 이랑이 미처 보지 못한 쪽지를 발견한 히연이 그것을 집어 들더니 내용을 읽어주었다.
“과자. 과자. 과자.”
“누가 보낸 걸까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마음씨 좋은 사람일 거야!”
누구든 상관없었다. 이랑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은 모두 착한 사람과도 같았다.
하지만 쪽지 따위 안중에도 없는 듯 화려한 과자 종류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이랑이었고,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히연은 무심코 뒤집은 종이의 뒷면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내 생각에는 너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인 거 같은데?”
종이 뒤에 찍혀 있는 익숙한 도장 자국에 히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지만, 이랑의 귀에 그 말은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