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궁안에 잠들어 있는 꽃-22화 (22/44)

二十三花 * 서하연의 꽃 (1)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유월 가(家)의 후계자?”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네. 며칠 동안 안 보이신다 했더니 후계자가 대리로 일 처리를 하는 모양이더라고요.”

그림자도 보기 힘든 유월 가의 가주가 아예 안 보인다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맞다. 아들이 있다고 하긴 했었어.”

보통 귀족들은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미리 궐 안 분위기에 적응할 수 있도록 왕과 다른 대신들이 모이는 조촐한 자리에서 그들을 소개하고는 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그러나 후계자는커녕 본인조차 그런 자리를 싫어하는 유월가의 가주였기에 유일한 유월 가의 후계자의 정체를 아는 이는 없었다.

연회는 물론이요 심지어 궐에서 열리는 귀족 자제들의 학업의 장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유월 가의 후계자라는 존재는 귀족들 사이에서 소문으로만 맴돌고 있었다.

그런 그가 궐 안에 나타났다니. 그것도 제 발로 자신을 찾아서.

솔직히 왕인 그에게 개인적으로 인사를 드리고 싶어 하는 귀족들은 많았기 때문에 한 명의 인사를 받아주면 다른 사람들까지 연쇄적으로 귀찮게 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 보니 그는 되도록이면 귀족들과 개인적인 만남만은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유월가(家)라…….”

선왕 때는 천유국의 두 개의 기둥으로 유명한 유월가와 소월가가 하나가 되어 다른 대신들과 대립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권력에 균형이 잡혀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소월가의 새로운 가주는 오히려 다른 대신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모아 유월가를 견제했다.

아무리 잠잠하다지만 정치적으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지닌 가문이었기에 시하루는 왕으로서 곧 가주 권을 물려받을 후계자에 대해서 알아 둬야 했다.

가능하다면 친분을 쌓는 것도 좋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야. 아직 안 온 건가?”

그쪽에서 먼저 찾아뵙겠다는 말을 남겨놨는데 먼저 도착한 건 시하루였다.

시간 약속을 못 지킨다느니 등의 불만을 늘어놓으며 약속 장소 안으로 들어선 그가 자리에 앉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슬슬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시하루가 막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무렵, 문이 열리며 매우 익숙한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늦어서 죄송합니다. 전하.”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시하루는 자신을 기다리게 했다는 분노보다 황당하기만 했다.

그가 기다리고 있던 이는 어떤 사람인지조차 모르는 인물이었지만 방금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그가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유시후? 왜 네가 궐 안에 있는 거지? 사직서를 내고 궁을 나갔다 들었는데?”

왠지 비꼬는 시하루의 말투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실실 웃던 유시후가 빈자리에 털썩 앉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는 데 백수인 채로 놀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나는 네가 무슨 자격으로 이곳에 앉아있느냐고 물은 거였어.”

눈앞에 앉아있는 그가 마치 천적이라도 되는 마냥 예민한 반응을 보이던 시하루가 다시 묻자, 오히려 유시후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유월가의 가주 대리자격으로 왔습니다.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나요? 분명 여기서 만나기로 했다던데…….”

방금 자신이 헛것을 들은 건 아닌지 확인이 필요했다.

그렇게 쫑알거리며 유시후를 경계할 때는 언제고. 한 방 먹은 듯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만의 판단으로 결정 내리기에는 너무 어려운 내용이니 주위의 도움을 받자.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뒤에 서 있던 이안이 그의 부름을 받기 무섭게 표정이 울상으로 바뀌었다.

주군이 자신을 필요할 때마다 불안감이 먼저 엄습해 오는 게 이런 걸 두고 조건반사라고 하는구나 싶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저게 무슨 소리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러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보통 분이 아니시라고. 저번에 서재에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전하께서 중요한 게 아니라고 그냥 넘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말을 했어야지! 내가 안 듣는다고 해도 했어야지!”

본인이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멋대로 말을 끊어놓고는 이제 와서 화를 내고 있으니 이안은 억울하기만 했다. 하긴, 언제는 안 억울한 상황이 있었던가.

결국, 이렇게 한 소리 또 듣고 다시 뒤로 물러서는 이안이었고, 그의 처량한 뒷모습을 유시후가 불쌍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시하루의 머릿속은 아직도 정리가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조금 전 유시후의 폭탄발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당황할 만도 했다.

일개 호위무사와 한 가문. 그것도 양대 산맥이라 불리 울 정도의 엄청난 집안의 후계자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거기에 평생 엮일 일 없기를 그렇게 바라왔건만, 오히려 친하게 지내야만 하는 존재였다니.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잠깐. 유월의 후계자가 왜 호위 따위를 한 거야?”

아무래도 여전히 믿기지가 않는가보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쪽으로 몰아가려는 시하루가 다급히 물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랑이 혼자 궁에 보낼 수는 없었으니 말입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랑?’

다시 한 번 시하루의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유월의 후계자가 맞건 아니 건, 이제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감히 이랑의 이름을 저리도 자연스럽게 부르다니. 아직 자신도 그렇게 편하게 불러 본 적 없는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도대체 너희 둘은 무슨 사이냐.”

위협적인 질문에 금방 일어날 생각이던 유시후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오라버니.”

너무나도 쉽게 얻은 해답은 오히려 조금씩이나마 움직이고 있던 시하루의 사고를 완벽하게 마비시켜버렸다.

오라버니라니? 연적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싹 날아가 좋아해야 하는 데 어째 기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큰 사고를 친 기분.

이랑의 오라버니라면 자신에게는 ‘처남’과도 같은 존재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존대를 써야 하나?”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쌓였던 분노가 눈 녹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바로 꼬리를 내린 시하루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 반응이 재밌는 건지 웃는 유시후였다.

그동안 자신이 그에게 해왔던 악행(?)들이 하나하나 떠오를 때마다 시하루의 표정은 굳어갔다.

그렇게 점점 어둠의 나락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그가 순간 매우 기초적인 모순을 떠올리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잠깐. 너희 ‘성(姓)’이 다르잖아.”

딱 봐도 소이랑과 유시후는 성이 다른데 어떻게 둘이 남매라고 주장하는 거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꼭 피를 나눠야만 형제는 아니지요.”

피를 나눈 친남매는 아니어도 그만큼 가족 같은 관계란 뜻.

친남매가 아니라는 사실에 아까보다는 마음이 좀 나아졌는지 시하루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지금도 위험하지만 만일 정말 가족이었다면 가뜩이나 없는 점수가 더 깎일 뻔했으니.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나저나 정말 나한테 ‘인사’만 하러 온 건가?”

그가 알고 있는 유시후는 고작 인사 따위를 하러 여기까지 찾아올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옳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럴 리가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럼?”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

점점 대화가 길어지자 원래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금방 돌아갈 생각이었던 유시후의 시선이 계속 문가를 향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랑이를 데려가겠다는 말을 하러 왔습니다.”

시하루의 눈이 대답하기 전에는 나갈 생각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쉽게 나갈 수 없겠다는 판단을 내린 유시후는 결국 말을 빨리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듣지 못했나 본데, 지금 경합 중이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죄송하지만 그 경합은 오늘 중으로 끝날 거 같네요.”

밖이 약간 소란스러워 진 거 같았고, 소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유시후의 입가에는 미소가 드리워졌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게 무슨 소리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무래도 벌써 도착한 모양이군요. 오늘 이랑이는 궐 밖으로 나갑니다. 폐위는 알아서 진행해주세요.”

소란은 곧 시끄러움으로 번졌고, 소음을 싫어하는 주군께서 괜히 자신에게 화풀이할까 두려워 밖에 나갔던 이안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무슨 일이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밖에 어느 여자 분이 찾아오셨는데요…….”

‘어느 여자’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유시후가 움찔하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절부절못하던 움직임은 곧 안정되어 이번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는 ‘이제 끝났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누군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왕후님을 모시러 온 사람이라고 하시던데요…….”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눈앞의 호랑이 한 마리로도 벅찬데 새롭게 등장한 여인은 또 뭐란 말인가?

혼란스러워 보이는 그를 바라보던 유시후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맞다. 선물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한 가지 충고를 해드리겠습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충고? 네가? 나한테? 왜?”

문을 열고 밖을 나가려던 유시후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저와 비슷한 상황인 거 같아서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나와 네가 비슷하다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건 이랑의 오라버니가 아니라, 남자 대 남자로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저는 개인적으로 전하께서 이랑을 생각하는 마음이 단순한 호기심이셨으면 좋겠어요.”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의 말을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평상시 유시후라면 인상부터 찌푸리는 시하루였다.

하지만 이렇게 따로 자신을 찾아와서 나름의 충고라는 말을 남겨두고 떠나는 그를 보니 아직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와 유시후 사이에 무언가 공통점이 있는 게 분명했지만 그게 뭔지는 아직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사랑하니까 곁에 있어달라고 하면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평생 미안한 감정을 갖고 살아야 할 거에요.”

* *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리오~너라!”

침입자로 밖에 보이지 않는 여인이 희수궁의 정문 앞에 떡 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감히 왕후의 거처 희수궁 앞에서 ‘이리 오너라’를 외쳐댔다.

큰소리로 한바탕 외쳐대던 여인이 곧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중얼거렸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음……. 이런 느낌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뭔가 더 무게감 있는 그런 느낌이었는데…….”

이상한 여자의 등장에 겁을 먹은 희수궁의 궁인들은 문을 꼭꼭 걸어 잠근 채 유시후의 귀환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도대체 저 여자 뭐에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나도 몰라요, 그런데 무서워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죠?”

문틈으로 내다보던 궁인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고 있었다.

많은 눈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 여인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리 오너라~? 이리~오너라? 이리오너~라?”

많은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주변 상황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별 볼 일 없는 고민해결에만 몰두하는 여자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라히연!”

희수궁의 궁인들이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던 이가 등장했다.

급하게 달려온 듯 머리는 매우 헝클어져 있었고, 숨이 찬 듯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유시후.”

척 봐도 자신을 말리기 위해 달려오고 있는 유시후였지만 여인은 도망가기는커녕, 여유롭게 인사를 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내가 정문 앞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래서 기다리고 있잖아. 지금.”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희수궁의 정문 말고 ‘궐’의 정문!”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별 차이 없잖아? 어차피 들어와야 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그녀의 표정이 사소한 것은 그냥 넘어가자 말하고 있었다.

상대가 이랑이었다면 봐주지 않고 훈계를 시작했겠지만, 눈앞의 여인은 유시후에게 있어서 거의 유일한 약점과도 같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나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말에 유시후의 머릿속에 잠시 떠올랐던 훈계에 대한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리오너~라. 이리~오너라. 이리 오너라~ 어떤 거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리 오너라!! 아니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뭘 같이 놀고 있어!”

희수궁 앞에 어떤 여인이 등장했다는 신고를 받고 걱정이 된 건지 뒤따라 온 시하루가 버럭 외쳤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너는 누구냐.”

처음 보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별로 좋지 않았다.

상대가 여자이건 남자이건 성별은 상관없었고, 오직 이랑을 데리러 온 사람이라는 설명 하나만으로도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안녕하세요. 저는 서하연에서 대표로 나온 ‘라히연’이라고 합니다. 소이랑님께 볼일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단순한 제 호기심으로 인해 소란스러웠던 점 사과드립니다.”

아까 그렇게 시끌벅적할 때는 언제고 순식간에 차분해진 그녀가 예를 갖춰 인사를 하자 시하루는 혼란스러웠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서하연에서 왜 사람을 보낸 거지?”

하늘 같은 왕이 기분 안 좋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어도 기가 꺾이기는커녕, 표정변화 하나 없었다.

그저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듯 희수궁의 문을 바라볼 뿐이었고, 곧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기다림의 대상이 활짝 웃으며 나오는 게 보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다들 모였네요!”

먼 길 떠날 예정인지 평상시와 다른 옷을 입고 있던 이랑이 시하루를 발견하고는 마침 잘 됐다는 듯 다가갔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마침 잘 됐어요. 안 그래도 나가기 전에 한 번 찾아가려고 했는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진짜 나가는 거야? 어떻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서하연 입학생 소이랑은 서하연의 삼화 진급 시험에 합격함과 동시에 마지막 삼화로 선정되었음을 공표합니다.”

질문은 이랑에게 했지만, 답은 히연에게서 나왔다.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는 없었지만, 이랑이 ‘삼화’라는 것에 선정되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삼화? 그게 무슨 말이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서하연의 규칙 8조 3항에 따라 선정되었습니다.”

*[서하연의 규칙 8조]

1. 서하연은 교육을 위해 존재하며, 학생들은 그러한 정신을 받아 학업에 집중한다.

2. 이는 서하연의 꽃들에게만 내려오는 기밀 조항이다.

3. 서하연의 꽃 중 최고 3명을 뽑아 그들을 ‘삼화(三花)’라고 칭한다.

4. 서하연의 려화는 반드시 삼화(三花)중 한 명으로 선출한다.

5. 서하연의 삼화(三花)는 국가와 서하연 중 한 가지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

6. 서하연의 려화는 평생을 독신으로서 서하연에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7. 삼화들은 적응기간까지 절대 서하연에서 나갈 수가 없다.

8. 서하연의 꽃들에게 있어, 그 신분이 무엇이든 간에 서하연의 법도는 하늘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자력으로 나갈 수 있으면 보내주기로 했잖아요.”

이제 와서 말을 바꾸거나 하지 않겠죠? 라는 눈빛이었다.

믿고 있다는 이랑의 표정이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물론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그 날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 그랬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역시. 꽃따리 오빠는 멋진 사람이에요. 한번 말한 건 반드시 지키는!”

마지막 쐐기를 박는 말.

여기서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먼저 각서를 쓰자고 한 사람도 본인이었으니 꼼짝없이 그는 이랑이 나가는 걸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안 된다고 막 우길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침착하게 이랑의 폐위를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에 잠자코 있던 유시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뭔가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 기분인데?”

솔직히 각서라고는 해도 국가문서도 아니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 그런데 지금 시하루는 아무 노력도 하고 있지 않았다.

과연 순수하게 이랑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마음 때문인 건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건가.

* *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솔직히 이렇게 손수 배웅까지 해주실 줄은 몰랐어요.”

의외라는 듯 이랑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불만 가득한 표정의 시하루에게 말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이랑의 뒤에 쌓여있는 짐들을 향해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약속했으니까 받아드리는 거뿐이야. 하지만 끝난 건 아니니까 명심해.”

이제 궐을 나가는 마당에 또 명심해야 하는 게 있다니.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책은 너무 많아서 한꺼번에 못 가져가니까 나중에 조금씩 가져갈게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됐어. 어차피 저긴 아무도 안 들어갈 거니까 굳이 비울 필요 없어. 그냥 내버려둬도 돼.”

어떻게 보면 ‘난 이미 너 이외의 왕후를 들일 생각이 없다.’라는 의미와도 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 유일하게 그 말의 뜻을 이해 못 한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이랑이었다.

그저 드디어 이 궐에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다른 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차피 아주 잠깐이겠지만, 잘 있어요.”

이랑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질문을 하려던 시하루였지만 빨리 나가자고 재촉하는 이에 의해 말이 끊겨버렸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빨리 가자.”

‘다음’이라는 단어에 마냥 밝았던 시하루의 얼굴에 다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이랑을 데리고 나가는 히연이라는 여인의 정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상황.

그래도 한때 왕후였던 이랑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걸치고 있는 것도 모자라 평상시라면 엄청나게 으르렁거렸을 호랑이 유시후 마저 하룻강아지로 만들어 버리는 능력자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그대는 분명 서하연의 삼화(三花)라고 했었지? 대단하네. 그 나이에. 게다가 미인(美人)이고.”

다른 건 몰라도 호랑이를 다루는 능력이 탁월했으니 존경심이 생긴 듯했다.

그 비법을 듣기 위해 일단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지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시하루를 빤히 바라보던 히연이 고개를 홱 하고 돌리며 완벽하게 무시를 했다.

이안의 말에 의하면 여인들은 예쁘다는 소리를 들으면 다 좋아한다고 하던데. 그 말대로 했을 뿐인데 왜 그녀의 반응이 저 모양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유……. 아니, 이랑이는 저보다 더 어린대도 ‘삼화(三花)’가 되었잖아요? 그러니 대단한 건 이랑이죠. 그리고 모든 여자들이 ‘예쁘다’는 말에 기뻐한다는 편견은 버리세요. 다른 남자한테 들어서는 기쁘지 않다고요. 그런 의미에서 유시후! 잠깐, 너 왜 도망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도망은 무슨.”

누가 봐도 명백히 도망치고 있는 주제에 본인은 그런 적 없다고 우기고 있었다.

이 몇 시간 동안 지켜본 유시후의 모습은 그동안 알고 있던 호랑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눈치를 보는 강아지. 아니, 고양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제 와서 이야기하는 거지만,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따로 말 안 해도 잘 알고 있겠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그럼.”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는 걸 보아 아마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닌 거 같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한참이나 남은 삼화(三花) 진급 시험 발표 날짜를 앞당겨달라니. 그것도 달랑 편지 한 통에 적어서. 원래대로라면 아직 두 달은 남은 거 알지? 덕분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다고.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란 거 잘 알아두도록.”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물론이지. 네 덕분에 이랑이를 무사히 밖으로 데리고 갈 수 있게 되었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한마디로 네가 이 문제의 주범이었냐!’

……시하루의 시선 따위 안중에도 없는 그녀는 정말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한 여인임이 틀림없었다.

뚫어져라, 원망을 담은 눈빛으로 히연을 노려보고 있던 시하루였지만 그의 시선을 느낀 히연이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도망치듯 고개를 돌려 피해버렸다.

현재 시하루의 표정이 외치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저 여자 무서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혹시……. 둘이 무슨 관계라도?”

남의 관계에 눈치 빠른 시하루가 자신이나 이안을 바라볼 때 히연의 표정과 유시후를 바라볼 때의 표정이 다르다는 걸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것은 히연 뿐만 아니라 유시후도 그랬다.

얼핏 듣기로는 이 세 명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라고 했다.

이랑과 유시후의 관계에 대해 물었을 때 들려온 답은 ‘오라버니’였지만 그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시하루의 ‘둘’이란 말에 지목당한 ‘유시후’와 ‘라히연’. 그들 사이에 끼어있던 이랑이 멀뚱멀뚱 둘을 바라보더니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꽃따리 오빠 의외로 눈치가 빠르네요. 히연언니는 유시후의 약혼녀. 신부 수업받겠다고 어렸을 때부터 유월가(家)에서 같이 자랐어요.”

어느새 유시후를 잡아끌고 온 히연이 이랑을 향해 걱정스럽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우리 서방이 그동안 몹쓸 짓 하지는 않았지?”

정작 히연에게 붙잡힌 유시후는 그게 무슨 말이냐며 우겨대고 있었지만 그건 표정까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마음속 외침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좀 짜증이 나긴 했지만 나름 쓸 만했어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점이 우리 서방의 매력이지. 좀 사납고 깐깐하면서도 은근히 보살펴주는 느낌. 멋져.”

눈을 반짝이며 유시후의 장점을 설명하기 시작한 그녀를 보며, 시하루는 ‘이래서 여자들이 무서운 거라고 하는구나.’를 깨달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라히연. 진정해. 근데 이제 슬슬 서하연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아? 통금 시간 다 되어가.”

이리저리 히연에게 끌려다니던 유시후가 슬슬 불쌍해지기 시작한 이랑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지금 넌 나와 만나는 이 소중한 시간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거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나 걱정이 돼서 물어본 거뿐이야.”

시하루에게 있어서 ‘유시후’란 존재에 대해 짧게 설명을 해 보자면 일단 짜증나는 존재. 그리고 보이면 피하거나 무시하는 존재.

그런데 이번만큼은 ‘불쌍하다’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덧붙여 나는 나중에 저러지 말아야지. 라는 감정까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럼 이제 가 볼게요.”

막상 떠난다고 하니, 그동안 지내왔던 시간도 있는데 아쉬운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이랑의 상태를 눈치챈 것인지, 시하루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조만간 다시 보자.”

시하루의 마지막 인사를 들으며 이랑은 그토록 넘고 싶어 하던 궐의 정문을 넘어섰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마 다음에 만날 때는 다른 위치로 만나게 될 거에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겨놓고 활짝 웃으며 그녀가 나가자 궐의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아무렇지 않아 보였던 시하루였지만 문이 닫히기 무섭게 그 표정은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신. 일단 네 말대로 하기는 했는데 정말 이렇게 하는 게 좋은 거겠지?”

멀찍이 떨어져 그 모든 것들을 지켜보고 있던 이신이 버림받은 강아지 마냥 울상인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예. 지금은 그냥 보내시는 게 정답입니다.”

도움 요청을 해온 시하루에게 이신이 내린 답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냥 보내주세요.’

물론 그 답을 들은 시하루는 당시 엄청나게 화를 냈지만, 상대가 이신인 만큼 무슨 생각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고 이번만큼은 군소리 않고 말을 듣기로 마음먹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유나 좀 알자. 다시는 못 볼까 봐 엄청 불안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차피 다시 돌아오실 거예요. 아니 그럴 수밖에 없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확신해?”

그래도 여전히 불안하다는 시하루에게 제발 좀 믿어달라는 듯 이신이 한 치의 떨림 없는 눈으로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제 목숨을 걸고 맹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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