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궁안에 잠들어 있는 꽃-21화 (21/44)

二十二花 * 꽃이라고 얕봤다가는 큰일 난다. (7)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러는 게 어디 있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게……. 오늘은 온종일 책만 읽고 싶으시다고……. 그래도 꼭 들어오셔야겠다면 강제로 호위무사들을 뚫고 들어오시든가 아니면 강압적인 태도로 명령해서 문을 열고 들어와도 좋다고 하시긴 했는데…….”

저게 들어오지 말라는 말이지. 어디 들어오라는 말인가?

약간은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꼭꼭 잠긴 희수궁의 문 앞에 서서 들어가지 못하고 있던 시하루가 이걸 뚫고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빠졌고 결국은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 안 들어가실 건가요?”

그를 따라왔던 이안이 조심스럽게 묻자 시하루는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물론 그의 명령 한 마디면 아무리 잠겨 있는 문이라도 바로 벌컥 하고 열렸겠지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나 이제 강압적으로 나가지 않기로 했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것 참 잘 생각하셨네요. 원래 사람이란 제 고집만 피우면…….”

안타깝게도 이안의 말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왜 본인이 으스대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설교를 하는 건지는 몰라도 그것이 시하루의 화를 불러일으키는 데에는 충분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깜빡하고 말 안 했네. 내가 말한 대상은 저기 안에 토라져 있는 꼬맹이지. 그 외에 놈들은 대상이 아니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무렴요.”

고개를 끄덕이며 잘 알겠다는 말과 함께 더 이상의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 이안이 슬슬 뒤로 물러섰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나저나 유시후가 없으면 없는 데로 이런 문제가 있었네. 내가 생각이 짧았어.”

갑작스러웠지만 분명 유시후의 사직은 시하루에게 있어서는 아주 좋은 일이었다.

가장 큰 방해꾼이 사라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왠지 이랑과 그 사이의 거리가 확 줄어든 것 같았고 전보다 아주 조금만 노력하면 그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뛰어난 파수꾼의 부재는 과도한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래도 쉽게 발걸음을 돌릴 수가 없었던 건지 꼴사납게 문 앞을 서성이던 시하루에게 누군가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반사적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뒤를 돌아본 시하루는 곧 조그마한 꼬마를 발견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 안녕.”

일단은 어색하게 인사를 받아줬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꼬여 있었다.

도대체 이 궐의 보안이 어떻기에 이런 아이가 궐 안을 돌아다니고 있단 말인가.

거기에 이 정체를 모를 아이의 걸음은 희수궁을 향하고 있었으니 더욱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나저나……너는 누구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제 이름은 수아라고 해요. 밖과 안을 오가면서 이랑님을 도와드리고 있어요. 전하 맞으시죠?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도 서화당의 편지를 이랑에게 전해주기 위해 궁을 찾은 수아가 우연히 마주친 시하루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상당히 어려 보이는데도 궐 안의 엄숙한 기운에 눌리지 않는 아이가 시하루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신기했다.

그리고 ‘이랑의 어렸을 때가 딱 이렇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어 왠지 정이 가는 거 같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안녕하세요. 수아예요. 문 열어주세요.”

문을 두드리면 될 것을 굳이 큰소리로 고래고래 외치고 있는 아이가 조금은 바보 같았지만, 그 역시 이랑을 닮은 거 같아서 계속 지켜보게 되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머, 오늘은 늦었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잠깐. 어째서 나는 안 되고, 이 아이는 되는 거야? 여기 출입 기준이 어떻게 되지?”

왕의 출입을 거부한 희수궁의 문이 왜인지 어린 꼬마에게는 망설임 없이 활짝 열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자꾸 그러면 이랑님에게 미움받으실지도 몰라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꼬맹이 2호. 넌 누구 편이야.”

희수궁의 문턱을 막 넘으려던 수아가 그의 유치한 질문에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고민에 빠졌다.

그게 뭐 어려운 질문이라고. 나름 긴 시간 동안 공을 들여 내놓은 결과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답변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음 굳이 말하자면 이랑님 편인데요. 개인적인 바람은 이랑님이랑 시하루님이랑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역시 총명해 보인다고 생각했어.”

금방 표정을 풀고는 ‘꼬맹이 2호’라는 별칭을 얻게 된 수아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 놓는 것으로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듯 인사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맞다 맞다. 그러고 보니까요.”

수아를 들이기 위해 잠시 열렸던 희수궁의 문이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다시 닫히고 있던 도중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편지 항상 잘 읽고 있어요. 앞으로도 힘내세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응?”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남기고 손을 흔드는 수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희수궁의 문이 닫혔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응원을 받게 된 시하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옆에 서 있던 이안을 향해 물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무슨 소리래?”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냥 시하루님 응원한다는 거 아니겠어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런가?”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이며 별거 아니라는 듯 넘어가려는 이안과는 달리 시하루는 뭔가 자신이 놓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게 뭔지 딱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 *

여기도 책. 저기도 책.

이랑이 이곳을 ‘천국’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오직 학습에 몰입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갖추고 있는 장소.

[ 서하연(曙荷娟) ]

화려하지만, 너무 과하지는 않고. 그렇다고 투박하지 않은 적절한 미(美)가 곁들어져 있는 장소. 그곳의 넓은 방에서부터 경쾌한 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삼화(三花)님.”

앞서 가는 여인을 뒤쫓는 다른 여인들이 ‘삼화’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름 같지는 않아도 용케 자신을 부르는 것으로 알아들은 여인은 뒤를 돌며 맨앞에 다가오는 여인을 향해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안녕하세요.”

두 여인은 하얀색과 검은색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는 단정하면서도 품위 있는 옷을 입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게 하나 있었다.

‘삼화’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여인의 노리개 색깔은 자주색이지만, 그녀를 불러 세운 여인이 지니고 있던 노리개의 색은 녹색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삼화님 앞으로 온 겁니다.”

작은 봉투를 들어 보이며 녹색 노리개의 여인이 말하자 삼화라는 여인이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함박웃음을 띠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왔네요.”

차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잔뜩 들떠 봉투 안 내용을 확인하는 여인. 그녀를 바라보던 다른 여인이 궁금해졌는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게 뭔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봉투에서 꺼낸 종이를 펼칠 때 손이 살짝 떨렸던 거 같은데, 그냥 기분 탓일까?

봉투를 뜯을 때와는 달리 안에 있는 종이를 펼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조금 길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일종의 무기죠.”

곧 만족스러운 내용이라도 담겨 있는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그 작은 종이 한 장을 ‘무기’로 표현하는 여인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무기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히연. 좋은 아침입니다.”

그때,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히연’이라는 호칭에 반응을 보이는 이는 이번 역시 조금 전 ‘삼화’라 불린 자주색 노리개를 지닌 여인이었고, 그녀를 부른 또 다른 여인 역시 자주색의 노리개를 달고 있었다.

반대편 복도에서 많은 책을 품에 안은 채 걷고 있던 여인이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하자, ‘히연’이라는 여인 역시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그 여인 역시 편지에 관심을 보이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란히 옆에 서서 편지의 내용을 훑던 여인이 곧 히연의 입에 걸린 미소와 비슷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들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방 하나 미리 준비해둬야겠네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네. 아. 방 구도나 장식은 저에게 맡겨주세요. 저랑 취향이 아주 비슷하거든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네. 미리 말해두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은 이만 정리할 게 있다고 말한 그녀가 자리 먼저 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방이요? 방은 왜 필요하세요?”

그때까지도 있던 다른 여인 한 명이 히연에게 묻자 그녀가 싱긋 웃으며 돌아섰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곧 있으면 막내가 올 예정이거든요.”

‘막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여인이 곧 그 말의 뜻을 이해했는지 덩달아 즐거워 보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오랜만이네요! 당장 다른 서하연의 꽃들에게도 이 소식을 알려야겠어요!”

원래 서하연에서는 뛰어다니면 안 됐지만 이미 훈계를 할 수 없을 만한 거리까지 뛰어가 버렸기 때문에 그저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이건 이 잠잠한 서하연에 몇 안 되는 행사와도 같았다. 다른 서하연의 꽃들이 들뜨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가만히 서서 서하연의 문이 있는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던 히연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듯 다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서하연 밖으로 나들이를 가야겠군요.”

* *

“이랑님. 이랑님.”

“응, 왜?”

이랑이 서화당의 편지에 답장을 쓰고 있는 사이, 따듯한 차를 마시고 있던 수아가 궁금한 게 있는지 질문을 하기 위해 이랑을 불렀다.

“이랑님은 전하를 싫어하세요?”

본격적으로 이랑과 시하루의 사이를 이어주겠노라 결심한 건지, 평상시라면 묻지 않을 질문을 하는 그녀였다.

온 정신을 서화당의 편지에 몰입하고 있던 이랑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뜬금없이 왜?”

“아니 그냥요.”

만약 유시후가 같은 질문을 했다면 민감하게 반응하며 신경 끄라는 말과 함께 버럭!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르겠지만, 상대가 수아인 만큼 그럴 수가 없었다.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은 이랑이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하고 고민하는가 싶더니 곧 생각이 정리된 건지 다시 붓을 집어 들며 답했다.

“싫지 않아. 굳이 좋고 싫음을 답하라면 오히려 좋은 편이야. 단지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내팽개칠 정도가 아닌 것뿐이야.”

“전하께서는 이랑님에게 마음이 있으신 거 같은데요?”

기특하게도 시하루가 점수를 받을 수 있도록 아주 조심스러운 노력을 해보는 수아였다.

얼굴을 붉힌다든지 그것이 아니라 해도 살짝 동요하면서 ‘그래 보여?’라던가 부끄러워하면서 ‘에이~ 그럴 리가~.’라고 하는 게 보통 생각해 볼 수 있는 반응이건만 이랑은 박장대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아니. 그건 아니야.”

“예? 아니라니요?”

제 일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일에서는 엄청난 눈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수아가 하고 있는 게 뭔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른 궁인들과 마찬가지로 수아 역시 자신을 그 꽃따리 오빠랑 이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눈앞에 앉아 있는 그녀는 나름 들키지 않기 위해 무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아까부터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거나 불안한 듯 몸을 좌우로 움직이고 있는 등의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 거슬렸고 별로 관심 없다는 무심한 표정과는 상반되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굳어버린 수아를 바라보며 실컷 웃은 이랑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는지 숨을 돌렸고 차분히 설명했다.

“그건 단순한 관심이야. 내가 죽은 첫사랑과 닮아서 그런 거야.”

그 말을 들은 수아가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냐는 듯 두 눈이 커지고 입을 딱 다물어버렸다.

“그러니까. 꽃따리 오빠가 예전에 좋아하던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가 불의의 사고인지 뭔지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데. 그런데 내가 그 여자와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고 그것 때문에 미련을 두는 거라는 말이지. 왜, 몰랐어? 꽤 놀란 모양이네.”

“아니요. 제가 놀란 건 그것 때문이 아니라 이랑님께서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다는 거에 놀란 거예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거 말고 또 이유가 있나?”

대화를 나누면서도 편지쓰기를 멈추지 않던 이랑이 답장 쓰기를 완료한 편지들을 하나하나 접어 다시 봉투에 넣고 마무리로 수아가 들고 왔던 보따리에 넣어 꽁꽁 묶었다.

왠지 모르게 다급해 보이는 이랑의 행동에 잠자코 있던 수아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볼 때 이랑님은요. 그냥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시려는 거 같아요.”

“내가 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이랑님에게는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요.”

* *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이랑님에게는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요.’

방 안에 혼자 남아 있던 이랑이 며칠 안 남은 국시에 대비해 공부하고 있었지만,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조금 전 수아가 남기고 간 말만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맞아. 누군가를 좋아하려면 난 꿈을 전부 버려야 하거든. 그렇게 되면 그 꿈을 위해 지금까지 내가 노력해왔던 모든 것들이 헛수고가 되어버려.”

자신이 지난 십 년 동안 영희궁에서 얌전하게 살아온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나.

오직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다른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죽어라 공부만 했고,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 궐에 들어오게 되는 바람에 갈 수 없던 서하연.

하지만 서하연의 배려로 특별히 영희궁에서 진급 시험을 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영희궁은 공부에 집중하기 최적의 장소였고, 실제로 빠른 속도로 진급해 이번에 드디어 삼화(三花)진급 시험을 치르게 된 것이었다.

이 시험만 합격하면 서하연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아무리 서류상이라지만 자신의 남편이었던 이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는 것.

상냥한 표정이나 온화한 얼굴이 아니어도 좋으니 어떻게 생겼는지 만이라도 알고 싶은 이랑이었기에 그동안 계속해서 자진 폐위 희망서를 써서 보냈다.

혹시라도 그 편지를 읽고는 화가 나서 제 발로 찾아오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결과는 묵묵부답이었고, 결국 이 궐을 나갈 즈음이 돼서야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직접 길을 나선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만났다.

하지만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그 뒤부터였다.

이랑은 계속해서 밖으로 나갔고, 그 역시 계속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아마 그때부터 유시후가 예민하게 반응한 것으로 보아 그는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던 거 같다.

이랑의 마음속에 이상한 감정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진급 시험은 결과가 나오는 데 절차상 시간이 꽤 걸렸기 때문에 궐을 나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불합격이라면 다시 공부해야겠지만 왠지 떨어질 거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를 공부에만 소비했던 그녀에게 갑자기 찾아온 여유로움은 어색하기만 했다.

그래서 더더욱 밖으로 나갔는지도 몰랐다. 시간이 천천히 가는 작은 영희궁과는 달리 넓은 궐 안은 그나마 나았으니까.

분명 본인은 ‘합격증이 나올 때까지만.’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합격증이 발급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예상보다 길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체되면 지체될수록 정은 더욱더 깊어지기만 했다.

그렇게 이랑이 우물거리는 사이에 이 모든 일이 터진 것이었다.

“하아…….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대낮부터 웬 한숨? 그래서 땅이 꺼지겠냐?”

멍하니 앉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에 빠져 있던 이랑의 정신을 번쩍 돌아오게 만드는 목소리가 문가에서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던 이랑의 얼굴에 조금 전까지 ‘고민’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면 이번에는 ‘해결’이라는 글자가 새롭게 쓰여졌다.

문가에 서 있던 남자는 그동안 봐왔던 옷이 아닌 딱 봐도 부잣집 도련님임을 알 수 있는 고급스러운 의상과 장신구를 달고 있었고 그런 그를 바라보던 이랑은 어딘가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뻗친 머리가 신경 쓰이는 건지 짜증을 내는 걸 보아 자다 온 게 분명했다.

정리되지 않은 머리를 결국 마구 헝클어놓던 그가 천천히 이랑의 앞으로 다가왔다.

정말……. 호위무사로 있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모습이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이랑이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손을 뻗은 남자는 ‘감히’ 그녀의 볼을 꼬집더니 그것도 모자라 쭈욱 늘리기 시작했다.

이제야 짜증이 난다는 표정을 짓는 이랑과 달리 본인은 즐겁다는 듯 웃고 있던 남자가 피식 웃으며 인사를 건네었다.

“뭐야. 그 표정. 오랜만이어서 반갑냐? 표정 완전 웃기네.”

“반갑지. 미치도록 반갑지.”

그의 손에서 벗어날 기회를 노리던 이랑이 틈을 봐서 손등을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때려주었다.

일단 벗어나기는 했지만, 볼에서 열이 나는 게 아무래도 부을 거 같았다.

하여간에 힘만 무식하게 세서는……. 가뜩이나 힘이 센데 그동안 본인 의사는 아니었다 해도 무인을 해서 그런지 더욱 세진 거 같았다.

마음속에서는 그를 욕하느라 정신이 없는 이랑이었지만, 그래도 늘 곁에 있던 사람과 떨어져 있다 보니 쓸쓸하긴 했던 모양.

그녀의 표정에는 실실거리는 웃음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오랜만이야. 유시후.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자신을 반기는 이랑의 환영을 받으며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은 유시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궐을 떠난 지 고작 며칠밖에 안 지났음에도 그립긴 한 모양이었다.

“어. 그냥 그랬지 뭐. 잠깐.”

“응?”

건성으로 대답하던 그가 다시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이랑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방금 들은 그녀의 말에서 무언가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은근슬쩍 말 놓는다 너? 이렇게 되었으니 호칭을 바꿔야 하지 않겠어?”

사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지만 너무 오래간만에 불러보는 호칭이다 보니 망설이고 있던 이랑이었다.

지난 십 년 동안 자신의 호위무사였던 그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놓고 명령을 하던 편한 시간이 다 지나가 버려 아쉽다는 표정.

그러나 위아래 구분이 확실한 꽉 막힌 유시후에게 그 표정은 먹히지 않았다.

“오라버니.”

“그래. 그동안 네가 나 부려 먹었던 거 다 기억하고 있다.”

십 년 만에 호칭을 되찾은 게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속 좁은 유시후가 그동안의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분이 안 풀린다는 듯, 이까지 갈더니 웬만해서는 자신의 성격을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은 거라고 경고했다.

“전부터 말해왔지만, 넌 정말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이런 남자 세상에 둘도 없을 테니까.”

이번에는 자화자찬에 빠져 있는 과거에 잠시 호위무사였던 남자를 바라보는 이랑의 눈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부려 먹을 수 있을 때 제대로 부려 먹었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뭐가 바뀌겠는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인다는 듯 킥킥 웃고 있던 유시후가 뜬금없이 어느 봉투를 이랑의 앞에 내밀었다.

씩씩거리던 이랑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은 봉투는 곧 그녀의 손에 들려졌고 ‘드디어’라는 눈빛을 받으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서하연의 편지야. 입학허가서. 그리고……. 삼화 진급 시험 통과문서도 왔어.”

대충 ‘축하합니다’로 시작하는 편지에 시선이 고정된 그녀의 귀에, 더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유시후가 그 사이에 궁녀가 갖다 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합격 축하해. 드디어 궐을 나갈 모든 조건을 갖추었네.”

“응. 고마워.”

“어머, 유시후님 오셨다는 말이 정말이었네요!”

아까부터 문가가 소란스럽다 했더니 언제부터 몰려 있었던 건지 궁녀들이 슬그머니 들어왔다.

하나로 시작된 입장은 어느새 여섯 정도로 늘어났다.

아마도 아까 차를 내온 궁녀가 반가운 손님이 왔다는 소식을 여기저기에 퍼트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 다들 오랜만이네요.”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진 상황에 적응 못 하고 있는 이랑과는 달리 익숙하다는 듯 여유롭게 인사를 받아주는 유시후였다.

“그런데 그 짐은 다 뭐예요?”

오래간만에 본 유시후에게 안부를 묻던 궁녀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에 있는 작은 짐에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당분간 여기서 지낼 생각이에요.”

아무리 남는 방이 많다 해도 그렇지 이곳이 무슨 여관도 아니고 무려 왕후가 머무는 거처인데 제멋대로 결정하는 유시후. 하지만 방 안에 있는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그동안 함께 지낸 가족이기도 했고 또 그가 있으면 희수궁의 방어 전력이 훌쩍 올라가니 감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가 너 나올 때까지 같이 있다가 데리고 오래. 혹시 모르니까.”

“그러고 보니 같은 궐 안에 있으면서도 잘 못 뵈었네. 바쁘셔?”

“바쁘긴. 완전 신이 나셨지 뭐. 벌써 노후계획 짜고 계시더라.

“하하. 오라버니가 다시 돌아가니까 좋으신가 보다.”

이랑과 어렸을 때부터 함께 해 온 궁인들은 혼자 밥 먹는 걸 싫어하는 그녀를 위해 넓은 곳에서 다 같이 모여 밥을 먹고는 했었다.

유시후도 돌아왔겠다. 오랜만에 가족대형 점심식사를 즐기고 있는 그들이었다.

사람이 많으니 그만큼 시끌벅적한 밥상이었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적절히 대꾸를 해주던 유시후가 깜빡했다는 듯 다른 이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도록 옆자리에 앉은 이랑에게 몸을 숙이며 물었다.

“그나저나 그 왕이 그냥 보내준다고 한 게 사실이야?”

“자력으로 나간다는 조건 하에.”

특별히 궐 밖에서 여러 간식거리를 사온 유시후 덕분에 더욱더 풍성해진 식탁은 그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걸어주었다.

“그 왕이 완전히 정신이 나갔네.”

굳이 앞에 있는 반찬을 내버려두고 멀리 있는 그릇을 탐내는 그녀의 식탐에 못 이긴다는 표정으로 그릇을 대신 집어주던 유시후가 작게 중얼거렸다.

“너도 참 독하다.”

“칭찬 고마워.”

칭찬이 아니었지만 멋대로 칭찬으로 받아들인 이랑이 자신의 앞으로 온 그릇에 담긴 음식들을 순식간에 비워냈다.

“지난 십 년 동안 영희궁 안에서 공부만 했어. 이제 삼화가 되었으니 한 발짝만 내딛으면 정상이야. 내가 왜 지금까지 내 목표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안 했는데…… 말하면 주위에서 반대하고 나설 게 불 보듯 뻔하잖아.”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의 이랑은 자신의 미래 목표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 적이 없었다. 그건 그녀의 스승과도 같은 이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시하루가 이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상황이지만, 이신조차 모르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난 다음대의 려화가 될 거야.”

포부를 말하는 이랑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유시후가 시하루에게 별로 좋은 감정은 없었지만, 그래도 마냥 남 일 같지가 않은지 조금 딱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왠지 전하가 살짝 불쌍해지기 시작했어. 안 그래도 한번 만나러 가야 했는데, 조언 하나 정도 해주고 와야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