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十一花 * 꽃이라고 얕봤다가는 큰일 난다. (6)
“야, 야! 잠깐만. 어이!”
희수궁 안에 당황한 어느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랑은 여러 종류의 반응을 봐왔지만, 지금과 같은 반응은 처음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너 뭐야, 너 뭐야!”
아까부터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는 시하루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이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부터 자리를 비운 유시후가 오늘따라 너무 그리웠다.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는 말을 남기고 희수궁을 나간 그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혼자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너 당장 안 내려와?! 지금 뭐하는 거야?!”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나무 위에 올라 친환경적인 하루의 시작을 즐기고 있던 이랑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청객에 의해 그 행복을 방해받았다.
항상 나무 위에 올라가면 늘 두 가지의 반응이 그녀를 기다렸다.
자신을 찾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리지만 찾는 내내 시끄러운 궁녀들.
그리고 찾는 속도가 엄청 빠르고 시끄럽지는 않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협박 비슷한 말을 하는 유시후.
현재 그녀는 새로운 적을 만난 기분이었다. 시하루를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딱 궁녀들과 유시후를 섞어놓은 최악의 조합이었다.
유시후처럼 찾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아주 짧았고, 궁녀 못지않게 아주 시끄러웠다.
밑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소리를 질러대는 그를 바라보던 이랑이 스스로 내려올 정도로 그 강도는 심각했다.
“너 뭐야. 저기 어떻게 올라간 거야? 뭐하러 올라간 건데? 떨어지면 어쩌려고? 위험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어?”
그리고 내려오기 무섭게 시작된 건 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끝없이 질문을 해대는 특이한 방식의 심문이었다.
이랑이 스스로 내려오기까지의 과정을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던 궁인들은 그녀의 약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과잉보호!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이랑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내려올 수밖에 없었고,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에게 화를 낼 수 없는 노릇.
이른 아침부터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까.”
“…….”
“너 사실은 그렇게 나가려고 했지.”
“말 나온 김에 꽃따리 오빠나 나가주세요. 나가는 문은 저쪽입니다.”
친절하게 나가는 문을 설명해주는 이랑이었지만 여기저기에 널려 있던 책을 하나하나 들춰보고 있던 시하루는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무 위를 포기한 이랑은 할 수 없이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고, 편안하게 앉아 책을 읽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편치 않았다.
책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은 방 안을 돌아다니는 침입자를 향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
도대체 뭐가 문제지? 시작은 평소와 같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유시후에 의해 거의 습관이 된 간단한 운동을 끝내고, 아침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식욕을 보이며 식사를 끝냈다.
그리고 괜히 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소음으로 인한 두통을 얻어 지금 이렇게 방으로 돌아와 오후까지 독서삼매경.
평상시와 다름없는 지루한 일정이었지만 다른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바로 주변을 맴도는 사람이 하나가 더 늘었다는 것이다.
“다 큰 여자아이 방에 이렇게 불쑥불쑥 들어오시는 건 예의가 아니죠.”
가뜩이나 유시후 하나가 따라다니는 것도 불편한 이랑이었는데 혹이 하나 더 붙으니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도 유시후는 밖에서만 쫓아다녔지 방 안에까지 따라 들어오는 일은 적었는데 새로 붙은 혹은 밖이건 방 안이건 상관하지 않고 귀찮을 정도로 쫓아다니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짜증이 나려는 걸 꾹 참고 대화로 풀어보려는 시도도 해봤지만, 상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네 방이 어디 있어, 이 궐 안에 있는 모든 장소는 다 내 거야. 불만이면 네가 나가던가.”
“고맙습니다. 그럼…….”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어.”
말 한마디 잘못하면 이 지경이 나는 것이다.
나갈 수 없어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노라.
이랑이 수십 번도 이야기했지만, 정신을 못 차린 시하루는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말로는 ‘나갈 수 없어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다.’라는 협박과도 같은 말을 하는 이랑이었지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왜 진작에 나가지 않았겠는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랑, 그녀가 지금 당장은 나갈 수가 없다는 걸 눈치챈 시하루에게는 이 시간이 아주 중요했다.
전에 이신이 그랬듯, 이것은 ‘기회’와도 같았다. 다시 주어진 이 시간에 그녀가 궐 안에 남아 있어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정성을 들인다고 아침 일찍 일어나 곧바로 희수궁으로 온 건데 반겨주기는커녕, 오히려 침입자 취급을 하고 있으니 약간 마음이 상한 그였다.
그새 또 조용해진 시하루가 신경 쓰이는 건지 이랑이 책 너머로 흘끗 그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한숨을 내쉬며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책 덮는 소리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든 그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이랑과 눈과 마주쳤다.
“……왜? 집중 안 돼?”
관심 좀 가져달라는 듯 아침부터 그녀의 뒤를 쫓아다닐 때는 언제고 이제 좀 관심이 생긴다니까 괜히 불안한 모양이었다.
신기하게도 이랑이 제발 좀 나가달라는 부탁을 할 때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아예 책을 덮어버리자 오히려 뻣뻣하게 굳은 그가 그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냥 좀 쉬려고요.”
자신이 너무 정신 사납게 굴어 그녀가 화가 난 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었던 건지 이랑의 말에 그제야 표정이 풀리는 시하루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반응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랑이 역시 피식 웃어버렸다.
아침 식사 후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독서에 몰입한 탓인지 막상 책에서 눈을 떼니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어지러움을 달래고자 책상에 엎드리듯 뻗어버린 그녀의 앞으로 다가온 시하루가 잠시 아무런 말이 없더니 입을 열었다.
“넌 내가 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어?”
“그냥 그랬는데요.”
정말 별생각이 없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목소리는 무미건조했고 답변 역시 빨랐다.
“솔직하게.”
그러나 뭔가 더 있을 거라 생각을 한 건지 만족하지 못한 시하루가 제대로 된 대답을 요구했다.
엎드린 상태에서 고개만 살짝 돌려 그를 올려다보고 있던 이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좀 안심했어요.”
“왜?”
“나쁜 사람 같지 않았으니까.”
칭찬 같았지만, 그는 자신이 나쁜 사람 같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뒤에 말만 생각해 봤을 때 칭찬이지 앞의 말과 이어서 생각해 본다면 ‘나쁜 사람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서 안심되었다.’라는 말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첫인상이 괜찮았나 보네. 다행이다.”
“첫인상. 아주 멋졌죠.”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랑을 가만히 바라보던 시하루가 오히려 자신이 더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물러났다.
“우와. 오히려 듣는 내가 다 부끄럽다.”
“몰랐어요? 나 솔직해요.”
“알아. 그래서 더 좋아.”
아쯤 되면 계속되는 일방적인 질문공세에 이랑이 짜증을 낼 법도 했지만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고 순순히 모든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기회라고 생각한 시하루는 이 참에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럼 내가 왕이라는 걸 확신한 시점에서, 왜 바로 나한테 폐위를 요구하지 않은 거야?”
“그냥 궁금했으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이랑은 스스로도 그 이유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옥에 갇혀 있던 지난 며칠 동안 남아도는 시간을 이용해 생각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답은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저 ‘될 대로 돼라.’라는 마음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뭐가 궁금했는데?”
“그동안 나를 정신적으로 괴롭힌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거든요.”
“괴롭힌 기억은 없다만.”
시하루가 소심하게 반박해보았지만, 이랑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최근 들어 억울하다는 감정이 뭔지 제대로 느끼고 있는 그였다.
이랑이 자신의 존재를 알고 지낸 건 십 년. 그가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된 건 한 달 정도였기 때문에 따지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그녀에게 왠지 미안한 감정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상상했던 거와 다르게 좋은 사람이에요. 미워하면서 떠나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굳이 나가지 않고 이대로 편히 궐 안에서 살 수도 있는데 그렇게 싫어?”
사실 이랑의 마음이 바뀌지는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바람대로는 되지 않을 모양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나는 나가서 해야 하는 일이 있어요.”
가만히 엎드려 있기가 심심한 건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톡. 박자를 맞춰가며 치던 이랑이 이것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는 듯 미리 주의를 시켰다.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시하루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은 더 설득하려 들 줄 알았는데 의외로 포기가 빨랐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이랑은 시원하면서도 섭섭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좋아. 더는 내 의견만 주장할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것 참. 그거 하나 배우시는데 엄청나게 오래 걸리셨네요.”
저도 모르게 약간은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이랑이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시하루가 어디선가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그냥 잠자코 들으라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게……. 지금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을 발표하려는데.”
그가 내민 종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랑이 이게 뭐냐는 듯 바라보았다.
하얀 종이를 채우고 있는 검은 글씨들을 대충 보니 그가 내민 것이 ‘각서’ 같은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경합 같은 거야. 자력으로 나갈 수 있다면 얌전히 보내줄게. 어때?”
이쯤이면 공정하겠지 싶은 시하루의 제안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이랑은 속으로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정말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래. 네가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데 내가 멋대로 할 수는 없지.”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꽤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아니, 오히려 확실한 탈출 방법을 갖고 있는 그녀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좋아요.”
애써 승리의 미소를 감추고 있던 이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 위에 나름의 서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야. 보기 좀 그렇다. 혹시 도장 같은 거 없어? 아니, 그냥 보기 좋으라고.”
또박또박 적혀 있는 이랑의 서명 옆에 쓸데없이 화려한 옥쇄가 떡하니 찍혀 있었기 때문에 왠지 균형이 어긋나 보였다.
아무 도장이라도 좋으니 뭐라고 붉은 거 하나 찍어놓으라 주장하는 그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그녀가 잠시 고민에 빠진 듯 보이더니 곧 품 안에서 하얀 노리개를 꺼내었다.
노리개의 끝에는 정교하게 조각이 된 무언가가 매달려 있었는데, 그것의 끝에 붉은 인주를 묻혀 종이 위에 찍어내자 어떤 문양이 찍혀 나왔다.
양 여백에 균형 있게 찍힌 붉은 도장들을 바라보던 그가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좋아. 그럼. 이건 일종의 경합 같은 거야. 난 너를 내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할 거고, 너는 지금처럼 나가기 위해 노력해. 누구의 노력이 결실을 보더라도. 서로 안 좋은 감정은 갖지 않고 받아들이는 거야. 어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평화적이잖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좋다고 말하는 이랑이었다.
그래도 일종의 각서인데 제대로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건지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에 들어간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다 묻길.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만일에 제가 못 나가면 전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녀가 아무리 ‘폐위’를 입에 달고 살아왔어도 왕실의 법도 앞에서 한 명의 목소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지금 그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이랑이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없는 무언가를 그가 지니고 있다는 걸 간과하고 넘어가서는 안 됐다.
바로 ‘권력’이란 이름의 보이지 않는 무기를.
오히려 그가 먼저 이리 공식적인 절차를 밟을 길을 마련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하는 판이었다.
하지만…….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고 하지 않았던가.
무언가가 걸려 있는 ‘경합’이나 ‘내기’에서 상대가 내가 원하는 걸 제시할 때는 나 역시 그에 동등한 크기의 대가.
즉 상대가 나에게 원하는 무언가를 내놓아야 하는 게 당연.
일단 바로 제안을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이 지불해야 하는 대가의 크기를 아는 게 먼저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떻게 되긴, 계속 내 부인으로 있는 거지.”
이랑의 표정이 ‘그럴 줄 알았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결국, 담보로 여생을 걸라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되면 이랑의 그 십 년이라는 긴 시간이 물거품 되는 건 둘째 치고, 아직 그녀 자신도 모르는 앞으로의 시간까지 이 궐 안에 묶이는 꼴.
하지만 이랑은 왠지 질 거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만약 반대의 결과가 나오면 꽃따리 오빠는 포기하는 건가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니, 다른 방법을 선택하는 거뿐이야.”
고개를 젓는데 힘이 실려져 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네가 나에게 거리를 두는 이유는 내 입으로 말하기도 뭐하지만 네가 하고자 하는 것들이 나보다 우선순위가 높기 때문이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당연하죠.”
아주 잠시의 고민도 없이 바로 그렇다고 대답을 하는 이랑이었다.
그러나 이미 이랑이 그런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시하루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드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럼 네가 하고자 하는 것들을 모두 이룬 다음에는 나를 돌아볼 여유가 생기겠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내 꿈은 엄청 높아서 얼마나 걸릴지 몰라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최대한 단축해보자.”
지금까지 그가 내린 판단 중에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다.
무작정 이랑을 막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녀의 편에 서서 함께 우선순위들을 정리한 뒤를 노려보겠다는 말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정말 공정하게 하는 거예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물론이야.”
못 믿겠는지 이랑이 불신의 표정으로 연신 확인을 했다.
좀 믿어달라는 듯 불쌍한 표정까지 지어 보이는 시하루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랑이 한번 믿어보기로 한 건지 알겠다고 짧게 대답했다.
* *
“아, 지금 돌아가세요?”
오늘도 실컷 놀다가 드디어 본궁으로 돌아가고 있던 시하루에게 마침 희수궁에 들어서던 유시후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온종일 보이지 않았던 그의 빈자리를 떠올린 시하루가 있을 때는 뭐라 하면서 막상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자 잔소리를 퍼부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항상 당하기만 했으니 이런 기회는 놓치지 말아야지!’
“뭐냐. 호위무사 주제에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지?”
“아. 잠깐 다녀올 데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랑님께 허락받고 다녀온 겁니다.”
“……어딜 다녀왔는데.”
별로 궁금하지 않았지만 이대로 대화를 종료하기에는 밋밋함 감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관심을 보여야 했다.
“사직서를 제출하고 오는 길입니다.”
사직서란 말에 시하루가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반응을 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유시후였지만 곧 생각을 고쳤는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뜬금없지만 방해꾼이 사라져준다는 말에 들뜬 시하루는 미처 그 미소를 보지 못했다.
유시후의 미소는 마치 ‘어디 언제까지 좋아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라고 말하고 있는 듯 말하고 있었다.
“일을 그만둬서 섭섭하네. 마음에 안 들었지만 나름대로 책임감 있는 호위무사였는데. 그럼 잘 가라. 아마 다시 볼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마지막이라고 작별 인사를 해주시는 시하루였지만, 섭섭하다는 말과 달리 미소를 주체할 수 없었다.
미소뿐만 아니라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희수궁을 빠져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시후가 피식 웃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싫지만, 아마 계속 보게 될 겁니다.”
* *
‘정말 공정하게 하는 거예요.’
‘물론이야.’
중앙서재 안.
정체도 밝혀진 마당에 조심스러울 게 뭐가 있나, 이제는 대놓고 희수궁에 출입하는 시하루 덕분에 최근에는 피해를 보지 않았던 중앙서재였다.
그러나 그 중앙서재는 다시 위기에 놓여 있었고, 그 서재를 지키는 이들 역시 칼퇴근이 가능했던 지난 며칠간의 행복한 나날을 회상하며 다시 찾아온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책 싫어하는 시하루가 오후가 되기 무섭게 독서 좀 해보겠다고 서재에 나타났기 때문.
다행히 특별한 소음이 들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침묵은 오히려 다른 이들의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안.”
침묵 속에 곧 시하루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 상황에서 자신이 호명되자 그동안의 안 좋은 기억들을 새록새록 떠올리던 이안이 울상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부르셨습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가서 이신 불러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네?”
오늘은 또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날까? 잔뜩 겁을 먹고 방 안으로 들어선 이안은 자신이 아닌 아버지를 데려오라는 뜬금없는 명령을 듣게 되었다.
평상시라면 눈치 없게 왜 그러냐고 묻고는 한 방 먹었겠지만, 시하루가 희수궁에 갈 때마다 늘 동행했던 이안이었기에 이미 그 이유는 알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시하루님. 분명 ‘공정’하게. 라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지금 공정이 문제야? 지금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라고! 내가 어떻게 그 꼬맹이를 이겨?”
벌써부터 이길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아 버린 시하루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이안 역시 ‘아닙니다. 시하루님.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을 말린 끝에 결국 머리에 혹 하나를 단 후에야 이안은 도망 다니기 바쁜 자신의 아버지를 붙잡아 시하루의 앞에 대령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저……저를 왜 부르신 거죠?”
지은 죄가 있기에 시하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던 이신이 안절부절못하며 자리에 앉았다.
재판이 있던 날.
이랑이 서하연의 꽃이라는 증표를 제시하는 것까지 보고 나온 그였기 때문에 이미 거기서 모든 재판이 종료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일부러 밖에 나와 우물쭈물하고 있는 시하루를 부추겨 안으로 뛰어들어가게 한 장본인이었으니, 속 좁은 그가 평생은 괴롭힐 거리로 충분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동안 보이지 않던데. 무슨 일 있나?”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니요. 없습니다.”
그러나 이신의 걱정과는 반대로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던 시하루는 오히려 자신을 피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파고들면 계략과 자신에게 창피를 준 주범이 그였다는 걸 알 수도 있었지만 지금 시하루에게는 다른 일이 더 중요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저번에는 저 꼬맹이 도와줬으니까 이번에는 날 도와줘야지. 안 그래?”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예?”
이신에게 긴급 도움을 요청하는 건 평상시 그를 불편하게 여겼던 시하루에게는 큰 결심이었다. 그만큼 지금 상황이 절박하다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