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十花 * 꽃이라고 얕봤다가는 큰일 난다. (5)
“아 진짜…….”
차라리 어제의 말도 안 되는 재판이 더 나을 거 같았다. 어제는 책이라도 읽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누군가의 눈치를 보느라 책 읽을 시간 따위 없었으니까.
또다시 방 안에 갇혀 있는 입장이 된 이랑이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궁리 중이었다.
하지만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막막하기만 했고, 항상 들고 다니던 책이나 읽으며 시간을 보내 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이미 책을 압수당한 상태였다.
“차라리 책이라도 주시던가요.”
“시끄럽다.”
이랑이 자신의 공부를 방해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문가에 앉아 있는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녀에게서 빼앗은 책을 펼쳐 들었다.
그러나 곧바로 인상을 찌푸리는 게 그리 재미있는 내용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가 책에 정신이 팔려 있다는 걸 확인한 이랑이 조심스럽게 탈출을 시도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떡하니 문을 등지고 자리 잡은 고집불통 왕 때문에 쓸데없이 아까운 시간만 죽이는 꼴이었다.
“지금 뭐하자는 걸까요?”
“……하도 생각이 많아서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름대로 책장을 넘기고 있었지만, 글자들을 머릿속에 새기고 있던 건 아닌지 곧바로 고개를 들고 답하는 시하루에게 이랑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 먼저 말해도 돼요?”
“아니, 그건 안 돼.”
표정까지 굳혀가며 안 된다고 말하는 그가 얄미워, 무심코 평상시 유시후를 대할 때의 말투로 소리를 지를 뻔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이 방에서 탈출하는 일이 더 늦춰질 게 분명했으니 힘들지만 참아보기로 했다.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고자 심호흡을 한 뒤 어느 정도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폐위시켜달라고 할 거잖아.”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 게 절대 ‘폐위’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 거라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의 말대로 이참에 자신의 ‘폐위’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을 시작해보려던 이랑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선수를 빼앗기니 다시 말을 꺼내기도 좀 그랬다.
“과연, 똑똑하시네요.”
“그것 참. 칭찬 고맙네.”
아직 말하지도 않았는데 그 전에 미리 자기 생각을 읽은 것이 신기하다는 눈치였지만 오히려 이랑의 그런 모습이 시하루는 눈에는 귀엽게 보이고 있었다.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이는데.’
“내가 생각 다 정리하고 먼저 말 걸기 전에는 한마디도 하지 마.”
“시간이 가고 있어……. 내 소중한 시간이 의미 없이 가고 있다고요!”
“의미가 왜 없어?!”
발 빠른 이랑이 도망가기 전에 잡아다 놓은 거까지는 좋았지만, 막상 앞에 놓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는지 시하루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 이 꼬맹이를…….”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 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이런 어색한 대치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좋았어.”
“뭐야. 그 마음의 정리라는 거 다 되셨나요?”
“거의.”
드디어 마음을 정리한 건지 전과는 달라 보이는 시하루의 ‘결심’이라는 눈빛에 이랑은 이제 슬슬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될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어제…….”
그때였다.
“왕후 여기 있나요?”
갑자기 문이 열리며 간신히 시작될 뻔한 대화를 무참히 끊어버리는 목소리에 둘은 자동으로 새롭게 등장한 인물을 바라보았다.
“어머, 함께 있었군요.”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건지 난데 없이 등장한 대비마마는 잔뜩 들떠 있었고 곧 종종걸음으로 이랑의 옆까지 다가와 옆자리에 앉아버렸다.
“왜 오셨어요?”
“아드님 보러 온 거 아닙니다.”
불만 가득한 제 아들 얼굴은 보이지 않는 건지 연신 즐겁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던 대비는 눈치 없게 자신도 대화에 끼워달라는 말을 하며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의지를 보였다.
“저도 끼워주세요.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나요?”
“일방적인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어요.”
대비마마의 등장이 마치 구세주의 등장인 마냥 이랑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시하루의 악행을 고자질하기 시작했다.
“아니, 누가 우리 예쁜 이랑이를.”
“저기 문을 턱 하니 막고 있는 얼굴만 잘생긴 사람이요.”
“저 녀석 은근히 얼굴 따진다니까…….”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들어왔기도 했고, 주위에서 시도 때도 없이 들은 칭찬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자신의 외모에 자신을 갖고 있는 그였다.
평상시라면 그냥 ‘허허…….’ 웃고는 넘어갔겠지만 그런 칭찬을 한 이가 무려 이랑이었으니 퉁명스럽게 반응을 해도 실실거리는 얼굴이 제어되지 않았다.
“그만 표정관리 좀 해주시겠습니까?”
아들의 행복에 눈을 찌푸리던 대비가 보다 못해 그의 약을 올렸다.
“도대체 어머니는 왜 오신 겁니까?”
왜 꼭 중요한 순간에만 이리 나타나 방해를 하는 건지.
제 자식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는 게 부모의 마음이라지만 이건 아니었다.
오직 아들을 ‘놀리는’ 재미와 아들의 ‘굴욕’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함께 하고 싶지 않은 자리였는데!
“그러고 보니 어제…….”
시하루의 눈치를 보던 대비가 최후의 수단이라는 듯 ‘어제’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합석하게 된 대비마마의 입에서 ‘어제’라는 단어가 나오기 무섭게 움찔하는 시하루였다.
그가 뻣뻣하게 굳어 가면 굳어갈수록 대비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드리워졌다.
“전 엄청나게 놀랐답니다. 설마 거기서……. 이랑이도 많이 놀랐지?”
“하하……저는……. 네. 웃겼죠. 엄청 웃겼죠.”
“이제 그만 좀 하세요! 너도 이제 그만해!”
그 자리가 불편한 건지 얼굴이 빨갛게 물든 그가 결국 빽! 하고 소리를 질렀고 그의 외침에 어느새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있던 두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잠깐. 저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듣고만 있었는데요.”
은근슬쩍 자신은 죄가 없다는 말과 함께 발을 빼려는 이랑에게 시하루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공범이야! 아으……. 다시 생각해보니까 열 받네. 웃지 마! 아직 네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
눈앞에서 시하루가 난리를 부리고 있었지만 그새를 못 참고 오래간만에 만난 대비와 이야기꽃을 피워내던 이랑이 킥킥 웃다가 오히려 방해하지 말아 달라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식한 게 죄지요.”
“뭐?”
표정부터가 진지한 게 분명 진심이었다.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할 의도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런 무심함이 한 남자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있었다.
“이 꼬맹이가 점점…….”
“왜요. 뭐요. 귀엽다고요?”
때리기라도 할 거냐는 듯 오히려 당당하게 대들기 시작한 이랑의 태도에 잠시 주춤거리던 시하루가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꾹 참고 있던 웃음을 피식 터트렸다.
“귀엽기는 하지만 꼬맹이 주제에 자꾸 기어올라.”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넘어가는 솔직한 왕이시다.
“자꾸 꼬맹이 취급할 거예요?”
귀엽다고 솔직하게 칭찬을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뭐가 불만인 건지 이랑이 발끈하며 외쳤다.
그녀가 화를 내면 낼수록 시하루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졌고, 오히려 그런 반응이 이랑의 화를 돋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과연 그 어미에 그 아들이었다.
“……꼬맹이한테 한 방 먹었으면서.”
“그만, 또 생각나잖아!”
지금 이 상황을 계속 부정해보는 시하루지만 현실이 그렇게 쉽게 바뀌겠는가.
옆자리에 앉아 투덜거리고 있는 그를 보던 이랑은 어느새 인상을 풀고 그저 재미있다는 듯 웃고만 있었다.
모든 문제의 시작은 바로 어제.
이랑의 문제로 열린 재판이 끝날 즈음에서였다.
좀 더 정확히는 이랑의 신분을 보증하겠다고 나선 보증인들의 문서가 하나둘 모이다가 ‘서하연의 려화’의 친필 보증서가 공개될 즈음.
“서하연의 꽃이 되면 그 학생의 과거 기록들이 모두 서하연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백지상태인 게 당연합니다.”
과거 귀족 가에서 며느리 후보감으로 서하연의 졸업생들을 선호하는 현상이 발생했을 때, 졸업도 하지 않은 학생을 미리 점찍어두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돈이 많은 귀족은 서하연 학생들의 정보를 거액을 내고 사들였고 이 틈을 노린 장사치들은 너도나도 할 거 없이 그녀들의 정보를 모았다.
문서화 된 학생들의 신상정보는 비싼 가격에 팔려나갔고, 심지어는 책처럼 묶여 공개되기도 했다.
여성들의 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서하연이, 대중들에게 마치 귀족들이 신부 후보감을 고르는 장소처럼 여겨지게 된 것이었다.
당시의 려화는 그것을 막기 위해 서하연 내의 몇 가지 새로운 법안을 공표했다.
첫째는 서하연 입학생들의 신상을 포함한 과거 기록들 모두 백지화시키는 것이었으며, 둘째는 그녀들에게 서하연에서의 새로운 인생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랑 역시 서하연의 꽃이었다면, 그녀의 과거 기록이 백지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랑이 서하연의 꽃이었다는 말에 진유한과 그쪽 대신들이 그토록 놀란 것이었다. 즉 이 문제는 그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에 종료된 사건이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예상조차 하지 못한 변수였다.
하지만 효력은 어마어마했기에 더는 그 누구도 이랑의 폐위를 지지하고 나서지 않았고, 큰소리치던 대신들 역시 소극적으로 변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렇게 이 재판이 훈훈하게 마무리가 되려는 순간.
갑자기 문이 열리며 그가 등장한 것이다.
그냥 대충 결과를 들으러 온 건가 싶었던 이들의 예상을 깨는 대사를 날리며.
‘그 신분 내가 보장하도록 하지.’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된 마당에 씩씩거리며 등장해서는 뜬금없이 옥새를 찍어대는 그의 행동에 모두가 황당했다.
‘하지만…….’
일단은 말려보겠다고 몇몇 대신들이 나섰지만 흥분한 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 역시 천유국의 국민이고 발언권도 갖고 있으니 이 정도면 자격이 충분하지 않는가?’
물론 그 말이 모두 옳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는 설명을 하기 위해 둘로 나뉘어 있던 대신들은 어느새 하나가 되어 그를 막기 시작했다.
‘그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이랑과 대비. 그리고 유시후는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재미있는 상황이라는 듯 두 눈을 반짝거리며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큭…….”
어제의 일을 떠올리던 이랑이 아직도 나올 웃음이 남았는지 조용히 웃기 시작했다.
“그래서……. 너는 도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건데?”
약간은 억울하다는 목소리였다.
몰래 웃고 있던 이랑이 그제야 잠시 웃던 것을 멈추는가 싶더니 뭐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반응으로 바뀌었다.
“나 머리 좋아요.”
애처럼 실컷 웃을 때는 언제고 갑자기 정색하는 그녀의 반응으로 보아 아무래도 조금 전의 질문이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예전 같으면 ‘나 머리 좋아요.’라고 말하는 이랑에게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피식하고 웃어줬겠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왠지 그 말이 사실인 거 같으니까!
“그래, 너 머리 좋은 건 알겠어.”
“아무리 내가 눈치가 없다지만 그 정도도 눈치 못 챌 줄 알았어요?”
정말 실망이라는 표정.
도대체 자신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었으면 저런 자신감마저 보이고 있을까 고민하던 이랑은 보이지 않는 건지 오히려 자신이 더 충격받았다는 듯 시하루가 따지고 들었다.
“아니 잠깐. 나름대로 숨긴다고 숨긴 건데, 도대체 어디서 눈치를 챈 건데?”
자신의 연기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걸 쉽게 받아드릴 수 없다는 말투였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명색의 호위무사인데 매일 놀러 다니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유시후를 보세요. 귀찮을 정도로 항상 제 곁을 맴돌잖아요.”
“나 유능하다고 했잖아.”
전부터 계속 그가 주장하는 ‘유능’이라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이랑이 유능과 근무에 임하는 성실하지 못한 태도의 연관성을 찾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 그때만 해도 긴가민가했는데 가장 확신이 들기 시작한 때는 제가 말을 놓아도 된다고 했을 때부터였어요.”
“그게 왜? 네가 말 편히 놓으라며.”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
“물론 유시후도 예의가 바른 건 아니지만 그대로 항상 존댓말을 쓰잖아요? 그에 비해 꽃따리 오빠는 상대방에게 말을 놓는 게 너무 자연스러웠거든요.”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이랑에게 대꾸할 말이 없는 시하루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잊고 있던 새로운 분노(?)가 떠올렸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 내가 왕이라는 거 눈치를 채고 있었다면 왜 그동안 아무 말도 안 했던 거지?!”
스스로 ‘정체를 밝힐까?’에서부터 ‘언제 말하지?’까지 지난 24년간 해보지 않은 고민을 최근에 몰아서 한 기분이었다.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 그리고 하루에도 말할까 말까? 수십 번씩 바뀌었던 마음! 그동안 얼마나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는데!
게다가 나름대로 정체를 감춰보겠다고 호위무사인 척 매번 옷까지 갈아입고 찾아간다든가, 지난번 서재에서 이안을 동원한 친구놀이라던가 왕의 험담을 할 때 스스로 자신의 욕을 하는 데 맞장구를 쳐주는 기타 등등의 꼴사나운 짓까지 서슴지 않고 했는데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면서 가만히 지켜봤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애쓰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요.”
화낼 때는 언제고 보기 좋았다는 이랑의 말에 금세 또 기분이 좋아진 시하루였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가만히 바라보던 대비마마는 생각했다.
‘이 녀석, 분명히 이랑이한테 잡혀 살겠군.’
하지만 그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또 다른 의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잠깐잠깐. 서하연의 꽃이라는 증거를 갖고 있었으면 그걸 바로 제시하면 되는데 왜 가만히 옥에 갇혀 있었어?”
“아. 그건…….”
대답을 요구하는 시하루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이랑은 고민에 빠졌다.
‘이걸 말해 말아?’
* *
2일 전.
“설마 내가 폐위를 안 당하려고 노력하는 날이 올 줄이야.”
혹시 몰라서 유시후를 준비시킨 보람이 있었다.
일이 터지기 전에 궐 밖으로 내보냈기 때문에 감시를 받고 있는 다른 희수궁의 궁인들과는 달리 편하게 행동할 수 있었고 덕분에 서하연의 려화에게서 보증서를 획득했다는 전갈을 받은 상황.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이 옥에서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오랜만입니다. 이랑님.”
옥에 갇혀있던 그녀에게 정말 오랜만이라는 인사가 어울릴 정도의 인물이 찾아왔으니.
“오랜만에 뵙네요. 이신 공.”
당장에라도 사람을 불러서 이곳에서 나가야겠다고 하려던 참인데 이 칙칙한 감옥과는 어울리지 않은 온화한 미소를 띤 이신이 무슨 일인지 이랑을 찾아왔다.
그녀가 이 궐에 처음 들어올 때 그녀를 맞이해준 사람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이랑은 이신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 몇 번씩 영희궁에 들려 공부를 봐주기도 했기에 거의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 오랜만에 만난 스승님께서 ‘면회’라는 목적으로 찾아와 인사 따위 생략해두고 정말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하시길.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이미 이랑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죠? 전하에 대해서.”
“……그게 왜 중요한가요?”
대답을 회피하려는 이랑에게 제대로 된 답을 듣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이신이 말을 이었다.
“이미 모든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면 바로 폐위를 요구하면 될 것을. 그러지 못했다는 건 말을 할 때를 놓쳤기 때문이시죠? 그리고 때를 놓쳤다는 건…….”
“…….”
“그만 정이 들어버리신 모양이군요.”
이신. 그는 유시후나 꽃따리 오빠와는 다른 상대였다.
머리로 이길 수 있는 꽃따리 오빠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고, ‘어리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툴툴거리면서도 봐줄 건 봐주고 싸울 때 배려 같은 것도 해주는 유시후와는 다른 존재.
“하필이면 왜 시하루님같은 답답한 분께 정이 들어서. 쯧쯧.”
아이라고 봐주는 일 없고, 자신의 생각보다도 더 앞을 내다보는 사람.
여기서 아니라고 우겨봤자, 결국에는 모든 것은 인정할 게 분명했으니 괜히 힘 빼지 말고 시간 낭비하지 말자는 것이 이랑의 생각이었다.
그녀의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이신이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이랑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그래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재미있는 분이시죠? 아니, 웃기다고 해야 하나?”
“엄청요.”
공통 화젯거리가 생겼으니 이제 남은 건 몇 시간이 흘러도 시간가는 줄 모를 뒷담화였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게 아쉬운 둘이었다.
“제가 그동안 모르는 척을 한 이유는…….”
다 밝혀진 마당에 무슨 변명을 하리오.
이실직고하겠다는 마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눈치인 이신이 먼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먼저 스스로 정체를 밝히시기를 기다리고 계시던 거……아니셨습니까?”
기왕 말이 나온 거 제대로 알아주기를 바란다는 듯 이랑이 옥에 바짝 다가가며 말했다.
“사실 제 계획은 답답함을 못 참은 그쪽이 먼저 스스로 정체를 밝히고, 그때 폐위를 요구할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서하연의 이름을 이용해서 그냥 나갈 생각이에요.”
“아니.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답답한 감옥에서 나가겠다고 말했는데 어째 이신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말리고 있었다.
아니, 탈옥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근거를 제시해 법적으로 평화롭게 나가겠다는데, 그걸 왜 막는 거지?
저를 보며 불쌍한 감정도 안 드는 건지 나올 수 있게 도와주기는커녕, 나오지 말라고 하는 이신을 바라보는 이랑의 눈빛이 흔들렸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신이 곧 긴장 풀라는 듯 싱긋하고 웃어 보였다.
“저에게 아주 재미있는 생각이 있는데, 혹시 참여하실 의사 없으십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재미없을 거 같아요.”
대 놓고는 못하겠는지 빙빙 돌려 거절한 그녀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말이 들려왔다.
“그 바보 왕이 스스로 자신이 왕이라는 걸 말하게 만드는 일에 관해서요.”
겉으로는 인자하게 생겼지만 시하루를 놀리는 데에 있어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사악한 이신이 순진한(?) 이랑이를 꼬드기고 있었다.
“그게 가능해요? 제가 얼마 없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봤는데 남자가 돼서 소심해서는……”
혀까지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이랑의 눈이 서서히 반짝이기 시작하는 게 아무래도 넘어간 모양이었다.
“저에게 아주 좋은 방법이 있는데 말이죠. 추가로 시하루님에게 창피를 주기까지.”
“그것참 꼭 참여하고 싶네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되죠?”
제안을 한 사람은 이신이었지만 어느새 입장이 바뀌었다.
그녀의 적극적인 반응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이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의시키기를.
“그냥 이대로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재판 중에도 절대 스스로 서하연이라는 꽃이라는 걸 먼저 밝히지 않고 가만히.”
“그러면?”
“시하루님께서 앞뒤 생각도 안 하시고 등장하실 겁니다.”
당시의 이랑은 그게 도대체 무슨 계획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지만.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그때 이신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더니.”
“……너 지금 내가 떡이라는 거냐?”
하여간에 쓸데없이 귀만 밝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