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九花 * 꽃이라고 얕봤다가는 큰일 난다. (4)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하십니까. 안 들어가실 겁니까?”
멍하니 어느 궁을 올려다보고 서 있던 시하루가 누군가의 부름에 의해 돌아섰다.
언제 온 건지 급하게 온 티가 나는 대비마마는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저는…….”
머뭇거리며 들어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대비마마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참석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지만 여기서 제가 들어가면…….”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자신도 짜증이 난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가 답답한 건지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듯 보였던 대비마마가 곧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툭 쏘아붙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겁쟁이 아드님이시네요.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괜히 시간만 낭비했다는 듯 쌩하니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대비마마였다.
망설임 없이 그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하루가 자신도 지금 상황이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난 그저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어.”
* *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야, 일주일 뒤라고 하지 않았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게……. 회의를 통해 빨리 당겨졌다고…….”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음’들 때문에 집중할 수가 없는 최악의 공부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랑은 붙들고 있는 책을 놓을 생각을 않고 있었고, 아무리 주위에서 뭐라고 해도 신경조차 안 쓰고 있었다.
아무리 그것이 자신의 ‘죄목’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자리여도 말이다.
이랑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분명히 옥에 가둘 때는 일주일 뒤에 자신에 대한 재판이 열릴 거라고 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눈을 떠보니 뜬금없이 지금 당장 재판이 열릴 것이며 그곳에 죄인으로서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따지고 물을 틈도 없이 이렇게 끌려온 것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당장 폐위를 시켜야 합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갑자기 폐위라니,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이 재판은 다 무엇입니까! 어째서 이 중요한 일을 우리는 오늘이 돼서야 듣게 된 거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갑자기’라니요. 지금 순서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있는 거 안 보이십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지금 순서라고 하셨습니까?!”
양쪽으로 나누어진 대신들이 서로 목소리를 높여가며 자신들의 뜻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제의 주인공은 양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틈에서 묵묵히 책장을 넘기고 있는 희한한 재판 모습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책을 덮다 못해 던져버리고 조용히 하라고 빽!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곁에 유시후가 없는 이랑은 스스로 모든 일의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일국의 왕후를 이렇게 죄인취급을 하다니요! 옥에까지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정말입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신분을 보장할 수 없는 자인 만큼 확실히 해야 했습니다.”
둘로 나뉜 대신들의 공방은 계속 이어졌다.
이신을 필두로 왼쪽에 자리 잡고 있던 대신들은 길길이 날뛰며 이게 무슨 상황이냐며 발악하고 있었고 반대쪽에 위치한 진유한과 몇몇 대신들은 대꾸조차 하기 귀찮다는 듯 아예 돌아섰다.
“자 그럼……. 천유국의 법에 따라 왕후…….”
“잠깐만요!”
진유한과 주변 대신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급히 판결을 내리려 하자 이게 말이 되느냐는 듯 반대편에 서 있는 대신들이 들고 일어섰다.
“이신 공! 어째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 겁니까?!”
엄숙한 재판은 이미 물 건너 간 지 오래고 아예 싸움판이 되기 일보 직전이었음에도 차분히 앉아 이 모든 상황을 관객마냥 바라보고 있던 이신을 향해 한 마디 보태어 달라 요구하는 대신들이었다.
아무리 저들끼리 똘똘 뭉쳤다고는 해도 명색의 선대 왕 때부터 명성이 자자한 이신인데 그의 말은 듣는 척이라도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낄 생각이 없다는 듯 무관심한 표정으로 그저 문가를 바라보고 있는 이신이었다. 마치 누군가의 등장을 기대하며.
“대비마마께서 납시셨습니다.”
그의 바람 덕분인지 높은 음성들이 오가고 있는 동안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벌컥’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열리고 위엄 있는 대비마마의 모습이 나타났다.
화가 난 건지 눈썹은 잔뜩 찡그려져 있었고, 가늘게 찢어진 눈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랑의 폐위 문제에 목청껏 찬성을 외쳐대던 이들을 향하고 있었다.
“참으로 가관이군요.”
이제야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이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이랑이 대비를 향해 나름 밝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대비마마께서 이곳까지는 어이…….”
“우리 어여쁜 왕후가 이리 대접받고 있다는데 당연히 와야죠.”
궐 안 높으신 대비마마께서 이리 납시었는데 전혀 기가 죽지 않는 진유한은 이미 그녀의 등장쯤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 필요한 게 뭡니까. 신원보증? 그거라면 내가 하지요. 다들 이미 아시겠지만 애당초 이 아이를 궐에 데리고 들어 온 건 나입니다. 제 보증이라면 믿을 만하시겠죠?”
어느새 이랑의 옆까지 걸어간 대비가 그녀의 앞에 놓인 탁자 위에 미리 써 온 자신의 인장이 담긴 종이를 당당히 올려놓았지만, 반대파 대신들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 듯 그 종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과거의 기록을 알 수 없는 이의 신분을 되찾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섯 명의 보증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대비마마시라고는 하나, 나머지 네 명이 없어서는 승인할 수 없습니다.”
하늘같은 대비의 뜻을 한낱 대신이 거스르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는 뭐라 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이 나라 왕이라고 해도 독단적으로 결정하거나 거스를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법’이었다.
왕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백성들에게 그것을 지킬 것을 강요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으니 하물며 왕도 법을 지켜야 하는 데 대비라고 다를까.
대꾸할 말이 없는 대비가 그저 입을 꾸욱 다물고 있자, 벌써 이겼다는 생각이 든 건지 진유한과 다른 대신들이 미소를 짓는 게 보였고 이랑은 그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때. 닫혔던 문이 다시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시녀 한 명이 종종걸음으로 수많은 사람의 사이를 지나쳐 대비의 곁으로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알리기 시작했다.
대비의 바로 옆에 있던 이랑이었기 때문에 그녀 역시 시녀의 말을 들을 수 있었고, 짜증만 가득한 이 상황에서 시녀가 가지고 온 소식은 그녀의 입가에 미소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마 또 다른 보증서가 도착한 모양이군요. 들어오라 하세요!”
기세등등한 대비의 외침에 다시 문이 열리고, 이랑이 그렇게 기다리던 이가 오래간만에 그 얼굴을 내보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다급히 온 티가 팍팍 나는 유시후이건만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오히려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는 듯 엄청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는 이랑이었고, 그런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있던 유시후가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래, 무슨 일이지?”
차림으로 보아 일개 군사일 거라 생각한 진유한이 이곳에는 무슨 자격으로 왔느냐고 물었다.
그에 이랑이 때문에 잊고 있던 자신의 소임을 떠올린 유시후가 곧 품 안에서 종이 두 장을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갑자기 한 장에서 세 장으로 확 늘어나 버린 종이 수에 살짝 당황한 듯 보이는 반대파 대신들이었다.
일부로 이 재판을 소리 소문도 없이 준비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나. 괜히 알려졌다가 보증을 서겠다는 대신들이 모이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벌써 세 장이라니! 도대체 누가?
“누구의 보증입니까? 참고로 보증인의 조건은 집행기관에 소속되어 있거나 어느 정도의 발언권을 갖고 있는 자…….”
“한 장은 유월가의 가주께서 보내신 친필 보증서입니다.”
그 말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유월가’는 ‘소월가’와 마찬가지로 이름에 ‘월(月)’이 들어가는 또 다른 가문이었다.
‘하늘에 태양은 하나. 그리고 그 태양을 기준으로 양쪽에 달을 두 개 있으니.’ 여기서 태양이란 왕을 뜻하는 것이었고 양쪽의 달은 그 태양을 보필하는 두 개의 가문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천유국에는 많은 가문이 있었지만, 그 이름에 ‘월(月)’아 들어갈 수 있는 가문의 수는 딱 두 곳이었다. 바로 소월가와 유월가. 이 천유국의 두 개의 기둥이라는 뜻이었다.
소월가의 가주인 진유한은 거의 궐 안에 살다시피 하지만 유월가의 가주는 아주 가끔 그 모습을 드러내는 귀한 존재였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귀신같은 속도로 끝내버리는 신의 능력을 가진 것도 모자라 어떠한 어려운 일을 맡겨도 완벽하게 끝내놓은 실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 낭비라는 것을 아주 싫어해 일이 끝나면 무조건 퇴궐을 해버리는 성격 탓에 주위 다른 대신들과 친분이 거의 없었고, 그러므로 그를 아는 이 역시 적었다.
그런 유월가의 가주에게서 보증서를 받아오다니. 이는 놀라지 않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더 놀라운 것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평범한 종이들과 달리 화사한 꽃들이 붙어 있는 특별한 종이가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서하연의 려화께서 적어주신 보증서입니다.”
“잠깐! 서하연의 려화라니!”
유월가의 가주에 대한 충격이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상태이건만 그보다 더한 것이 등장해 대신들의 머릿속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천유국의 교육기관인 ‘서하연’ 그리고 ‘서하연’ 하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말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려화’라는 존재였다.
교육적인 문제에서 얼마든지 자유로운 발언을 할 수 있는 여인. 그것이 서하연의 정점에 있는 려화(=현대의 교육부 장관)였다.
‘도대체 저 여인이 뭐라고 유월가의 가주에 이어 려화까지 이리 나서는 거지?’
“잠깐만요! 갑자기 왜 여기서 서하연의 려화가 나오는 거죠?!”
“그분이 어떻게 이 일을 알고, 저 여인을 알고 있는 겁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누군가가 설명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대신들이었다.
그것은 이랑의 왕후 자리 유지를 주장하던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질문을 듣고도 아무런 대꾸 하나 안 하고 있는 이랑이었고, 그런 그녀의 반응 때문에 옆에 있던 대비가 대신 답을 해줘야 했다.
“그녀가 서하연의 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이랑이 믿을 수 없다는 대신들의 표정에 기분 상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아무 말 없이 손에 쥐고 있던 새하얀 노리개 하나를 가만히 들어 보였다.
“…….”
그것은 서하연의 학생. 즉 서하연의 꽃임을 상징하는 노리개.
귀족이며 평민 할 거 없이 다양한 계층이 모여 있는 서하연에서는 그들 간의 빈부의 격차를 막기 위해 옷이며 장신구들을 모두 통일했는데 유일하게 차이를 둔 게 있다면 바로 이 노리개였다.
오직 학력만으로 계급을 나누는 서하연에서는 노리개의 색으로 그들을 구분했다.
입학시험과 졸업시험을 포함해 서하연의 꽃들이 치러야 하는 시험은 총 64개. 등급은 [ 백. 적. 황. 록. 청. 남. 자. 흑 ]으로 나뉜다.
처음 입학할 당시에는 ‘백’ 그리고 각 단계의 진급을 거듭하다가 ‘남’ 색이 되면 졸업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졸업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는 서하연의 꽃도 있는데 바로 그다음의 ‘자’ 색이 서하연에서 단 세 명만이 지니고 있다는 삼화의 색이다.
그리고 그다음. 삼화 중에서도 단 한 명. 서하연에서도 딱 한 명만이 가질 수 있는 색. ‘흑’의 색의 려화를 상징하는 색이었다.
모든 시선이 이랑의 손으로 집중되었고 짧은 침묵 끝에 곧 그것을 알아보는 몇몇 딸 가진 대신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 저건 서하연의!”
“정말 서하연의 꽃이었다는 말입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정체조차 알 수 없던 왕후란 여인이 서하연의 꽃이었다는 말에 주위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진유한이 더는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아까부터 그를 주시하고 있던 이신의 반응이 더 빨랐다.
평소에 본 적 없는 놀라운 속도로 앞으로 나온 그가 겹쳐져 있던 세 장의 종이 위에 가만히 자신의 종이를 한 장 올려놓고는 유유히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대화들의 오가는 도중에 갑작스럽게 자신의 볼일만을 끝내고 나가려는 이신을 다른 대신들이 붙잡았다.
“뭡니까. 설마 저에게 자격 미달이니 그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죠?”
은근히 무시 받는 것을 싫어하는 이신이었기에 그는 자신을 불러 세운 대신들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아무리 나이를 먹었다고는 해도 그 분위기가 어디 가겠는가.
이신의 기에 눌러버린 진유한이 우물쭈물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만사가 귀찮기로 유명한 이신이 새벽같이 열린 이 회의에 떡 하니 참석해 있는 걸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는데, 설마 이렇게 보증서까지 써올 줄이야.
“이신공께서는 이 일과 무관하지 않습니까?”
말 그대로 왜 일부로 귀찮은 일에 끼어들고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무관하다니요. 아주 관련 있습니다.”
그런 진유한의 질문에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표정을 짓고 있던 이신이 곧 피식 웃었다.
“사실은 이 아이가 왕후가 되기 위해 궐 안에 들어오던 날. 저 역시 그 자리에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
따져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이는 몇 대신들을 뒤로한 채, 그저 뜬금없는 발언을 남긴 이신은 그대로 방을 나서버렸다.
마치 아주 중요한 일이 남아 있다는 듯.
설명도 없이 통보식으로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은 제각기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 이신까지 저 꼬맹이를 왕후로 올리는 데 가담한 사람이었다니!’
‘도대체 대비를 제외하고도 몇 명이 더 이 일에 관련된 거야!’
‘유월가의 가주, 서하연의 려화, 대비마마로도 모자라 이번에는 이신공까지?’
점점 더 대신들은 자신들의 앞에 앉아 이 모든 일에 무관심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그 작은 여자아이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 *
일이 재미있게 돌아간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낀 이신이 피식 웃으며 궁을 나서고 있었다.
“아, 이신!”
그때까지도 밖에 서서 들어갈지 말지를 고민 중이던 시하루가 이신이 나오는 걸 보고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갔다.
“아직도 밖에 계셨습니까?”
“꼬맹이는? 괜찮아?”
“그렇게 걱정이 되면 들어가 보시지 그러십니까?”
자신의 질문에 대답은 안 하고 안에 있을 왕후님 걱정만 하는 시하루가 얄미웠던 건지 이신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답답하게 뭘 그렇게 두려워하시는 겁니까?”
“…….”
“……일단 제 것까지 포함해서 네 명의 보증이 모인 상황입니다.”
아무 말 없는 그를 바라보던 이신이 곧 한숨을 내쉬더니 현재 상황을 간단하게 요약해주었다.
“소월가를 중심으로 희안궁에 딸이 있는 대신들이 아주 똘똘 뭉쳤더군요. 제가 볼 때는 이 네 명이 모인 것도 대단한 겁니다.”
“그래도 다섯 명에 근접하게는 모아졌는데 그리 쉽게 내칠 수는…….”
“솔직히 정식으로 혼례를 올린 것도 아니고 그저 문서상의 부부 아닙니까. 그것도 전부 대비마마께서 벌이신.”
이제 손쓸 방도도 없이 끝났다는 듯 이신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쉽게 포기하는 법 없던 이신이 그런 반응을 보이자 시하루가 그제야 일에 심각성을 느끼고는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이제 어떡하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들어가 보시는 게 어떠세요?”
작별 인사나 나누라는 말을 하며 시하루의 분노를 끌어올리고 있던 이신이 저 멀리서 헥헥거리며 달려오고 있는 자기 아들 이안을 발견하고는 빨리 오라는 듯 손짓을 하며 말했다.
“아. 드디어 왔네요.”
그 말에 고개를 돌린 시하루가 분명 본궁에 남겨놓았을 이안이 무슨 일로 이곳까지 왔느냐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부탁하신 거 갖고 왔습니다.”
“아 그래. 힘들었을 텐데 수고했다.”
이안의 손에서 묵직해 보이는 붉은 주머니를 받아든 이신이 다시 시하루를 향해 돌아섰다.
이번에는 평소 그를 달래기 위한 회유가 아닌 조금은 엄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왕후마마께서는 폐위되실 겁니다. 이건 저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지요. 하지만 시하루님께서는 한 가지를 선택하실 수 있으십니다. 왕후께서 스스로 나가느냐, 아니면 대신들에 의해 이렇게 쫓겨나느냐.”
“뭐가 다른 거지?”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시하루가 눈썹을 찡그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결과는 모두 ‘폐위’로 이어지는데 지금 자신과 말장난을 하는 거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냥 이대로 쫓겨나시면 이 순간부터 아예 못 보는 거고, 이 위기에서 벗어나면 왕후께서 폐위를 주장한다 해도 어느 정도 시간이 있으니 그 사이를 또 노려볼 수도 있는 거겠죠. 즉 기회의 차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내가 들어가도 변하는 건 없을 텐데? 내가 법을 무시하고 저곳에서 꼬맹이를 데리고 나오면 난리가 날 거야.”
투정과도 같은 그의 말에 이신이 이제는 답답함을 참기 어려워졌는지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전보다 높은 음성으로 말했다.
“누가 그냥 무작정 데리고 나오시라 했습니까?”
“그럼 뭐?”
“이안에게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퉁명스럽게 대답하던 이신이 조금 전에 아들에게서 받은 붉은 주머니를 시하루에게 던지듯 건네주었다.
얼결에 그 정체 모를 주머니를 받게 된 시하루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슬쩍 끈을 풀고 내용물을 확인했고, 곧 ‘이게 왜 여기에 있느냐?’라는 표정으로 바뀌어 이신을 바라보았다.
“이걸로 어쩌라고.”
“시하루님께서 잘하시는 게 있지 않으십니까.”
황당해하는 그에게 이신이 어쩌면 장난스럽게까지 보일 수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은 이제 볼일을 끝냈다는 듯 그를 지나쳐 아들 이안과 함께 그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시하루가 점차 표정이 점차 밝아지더니, 그제야 이신이 말을 이해한 듯 보였다.
막상 생각이 떠오르니 왜 지금까지 이 생각을 못 했는지 스스로 한심했다.
“고맙다. 이신.”
자신은 생각지도 못한 일을 대신 생각해 내줘서 고맙다는 건지, 아니면 그 물건을 이렇게 가져다준 것이 고맙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일단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는 빠르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그였다.
잠시 걸음을 멈춘 이신이 뒤를 돌아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시하루 때문에 피식 웃다가 그제야 걱정되는 일을 떠올린 듯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고마우시면 나중에 저한테 화내기 없기입니다.”
* *
한편, 다시 어이없는 재판이 일어나고 있는 내부로 돌아가.
그 사이에 어떻게 일이 진행되었는지 상황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있었다.
“아 그럼…….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은 이렇게 내는 것으로…….”
“잠깐 잠깐 잠깐!”
재판이 끝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던 시하루가 망설임 없이 문을 박차고 등장하자, 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깜짝 놀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일단은 상황을 파악하고자 아무 말 없이 주변을 둘러보던 시하루였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간 동안 아주 많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양쪽 대신들의 표정 모두 애매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그 때문에 누구의 주장이 이겼는지 단번에 알아볼 수가 없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시하루였지만 결과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눈에는 중앙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공부하고)있는 이랑이 밖에 안 보였다.
“저……전하?”
망설일 때는 언제고 나이도 먹은 어른들이 저보다 한참 어린 이랑을 가운데에 앉혀두고 죄인 취급하는 모습을 보니 이제는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그 신분 내가 보장하도록 하지.”
“전하!”
화가 나는 상황에 흥분한 시하루가 들고 있던 붉은 주머니 안에서 금색의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빠른 걸음으로 이랑의 옆으로 걸어간 그가 그녀 앞에 있는 탁자 위에 놓여있던 종이에 들고 있던 금색의 도장을 위협적으로 쾅! 소리 나게 내리찍어 버렸다.
“이 아이의 신분은 이 시하루가 보장한다. 이후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을 지겠다. 이래도 그대들은 믿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이제 다섯 명의 보증이 다 모였는데 아직도 뭐가 문제가 되는지 대신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말 많은 그들이 또 무엇으로 물고 늘어질지 몰랐기에 머리를 굴리던 시하루가 미리 선방어에 들어갔다.
“나 역시 천유국의 국민이고 발언권도 갖고 있으니 이 정도면 자격이 충분하지 않는가?”
여전히 이 당황스러운 상황 속에서 대신들은 서로 시선만 교환하고 있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던 이들 중 누군가가 그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고자 입을 열었다.
“그것이 아니라……. 아니 그 전에 어찌 전하께서 이리 직접…….”
그 말에 그것도 질문이냐는 듯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하는 시하루였다.
“아내의 일에 남편이 나서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는가.”
밖에서 머뭇거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당연한 일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