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궁안에 잠들어 있는 꽃-17화 (17/44)

十八花 * 꽃이라고 얕봤다가는 큰일 난다. (3)

방 안은 화사했지만, 그 중심에 서 있는 이의 분위기는 어두웠다. 그리고 그 어둠 옆에 서 있던 이는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방 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아 있던 어두운 분위기의 남자가 곧 못 참겠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그의 그러한 동작에 소스라치게 놀란 또 다른 남자는 더욱 움츠러든 채 티 나지 않게 구석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얼마 전 대신들을 이용해 자신을 회의에 참석시키는 것으로 희수궁에서 멀어지게 하는 데 성공한 그 망할 소월가의 가주가 그 사이에 이랑을 찾아갔었다는 이야기가 그의 귀에 들어오게 된 건 바로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그가 이유도 모르고 회의에 참석한 대신들을 설득해 돌려보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희수궁을 찾아갔을 리는 없을 거라 굳게 믿고 있었는데 그 믿음이 이리 쉽게 깨질 줄이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도대체 호랑이 놈은 뭐 하고 있었던 거야?!’

혹시 몰라 바깥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이안을 통해 몇 궁인을 보내어 대충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에 대해 전해 듣기는 했는데 이게 또 문제였다.

일이 너무 커져 버린 탓에 당황한 듯 보이는 시하루는 방 안만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고 그의 옆에 서 있던 이안은 오늘도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언제 폭발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보니 상처받지 않도록 더욱 마음의 준비를 철저히 해야 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안!”

역시, 오늘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그가 주군의 화풀이 대상 1호로 지명되고 있었다.

이미 질릴 정도로 겪어왔기 때문에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는 게 오히려 슬플 지경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 하고 있는 거야? 당장 가져오지 않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무, 무슨……?”

뜬금없이 자신을 향해 ‘뭘 하고 있는 거야?’ 라고 질문하고 있는 시하루를 바라보며 이안은 눈빛으로 자신에게 원하는 게 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종이랑 붓!”

그럼 처음부터 그걸 가져오라고 말하면 될 일을 왜 이리 귀찮게 만들고 있는 건지 고개를 가로젓던 이안이 곧 허둥지둥 방 안을 돌아다니며 종이와 붓, 그리고 먹을 준비해 그의 앞에 대령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서하연의 유아에게 편지를 보낼 생각이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니……. 이번에는 안 여쭤봤는데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평상시라면 귀찮을 정도로 물어봤으면서 어째서 이번에는 조용히 있는 거야?!”

묻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대답을 하는 것도 모자라 평소에 질문하면 귀찮다고 화를 내던 주제에 이제는 왜 안 물어봤느냐고 화를 내고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는 이안의 눈은 눈물을 흘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미 울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도대체 자신이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건지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주군의 요구를 따라가기 어려운 그로서는 한숨만 나오는 상황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무……뭐라고 쓰실 생각이세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알아서 뭐하게.”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실패인가 보다.

곧바로 예민하게 반응을 하며 자신이 무슨 편지를 쓰는지 알 필요 없다는 듯 10보 이상 떨어져 있으라는 명령까지 내린 시하루는 곧바로 엄청난 속도로 하얀 종이 위를 검은 글씨로 채워가기 시작했다.

서하연에 편지를 보내지 않았던 그동안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기에 저 정도일까.

시하루의 명령에 따라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던 이안의 눈에 내용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여백이 얼마 없을 정도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자. 서하연에 보내고 와.”

이번만큼은 안 좋은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편지를 받아 방 밖으로 나가려던 이안이 마침 밖에서 들어오려고 문을 열고 있던 자신의 아버지 이신과 마주쳤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어디 가는 것이냐?”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버지…….”

왜 이제야 오셨냐고 붙잡고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또 아버지가 없는 자리에서 된통 혼쭐이 날 테니 꾹 참고 자신의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나아가는 기특한 이안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또 제 아들 녀석에게 화풀이라도 하셨습니까?”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의 표정에서부터 ‘살려주세요.’라는 도움 요청과 ‘나는 억울해요.’ ‘힘들어서 못 해먹겠어요.’ 등을 읽어 낸 이신이 제발 좀 자기 아들 괴롭히는 건 그만두라는 말투로 말하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야. 또 그 사이에 일러바친 거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부모의 감이라고 해두죠.”

대충 말을 얼버무리며 화재전환을 시도해보는 이신이었지만 이미 어느 정도 감 잡은 눈치 빠른 시하루는 다음에 그가 없을 때 이안을 단단히 혼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래서. 또 무엇 때문에 이리 온 거지?”

이번에는 제발 좀 부탁이니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아 달라는 시하루의 표정을 읽은 이신이 곧 ‘저에게 이러시면 후회하실 텐데…….’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아까 시하루가 서화당의 유아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준비시킨 붓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여기저기에 널려 있던 종이 중 한 장을 끌어다가 무언가를 끄적이며 대꾸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러니까 무슨 이야기?”

일부러 그의 호기심을 끌어내는 것이 목적인 이런 대화 방식은 시하루가 가장 싫어하는 방식이었고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이신은 시하루와의 대화에서 그를 골려주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대본처럼 예상된 반응을 얻어 낸 이신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새 쓰던 것을 마쳤는지 마무리로 품 안에서 작은 도장을 꺼내어 종이의 여백에 그것을 눌러 찍었다.

그리고 더더욱 신뢰성을 얹고자 자신의 엄지손가락의 지장까지 확실히 찍어두는 철저함을 보이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왕후 마마에 관련된 이야기지요.”

시하루 그는 자신이 그 이야기를 들은 게 방금 전인데 어떻게 이신이 그 이야기를 벌써 들은 건지 궁금하다는 눈치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혹시 이게 필요하지는 않으실까 해서 잠시 들렸습니다.”

작업이 끝난 그 종이 한 장을 시하루의 앞에 조용히 내밀고는 물러서는 이신이었다.

무심한 듯 눈길조차 주지 않던 시하루가 잠시 그것을 바라보더니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뀌어 생글생글 웃고 있는 이신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게 뭐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왕후 마마의 신원을 제 이름을 걸고 보장한다는 문서입니다.”

천하의 이신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누군가의 신원을 보장한다는 문서를 작성하다니. 그것도 누군가의 강요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

잘못하면 그가 쌓아온 지금까지의 명성을 한순간에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혹시 모르셨습니까? 천유국 법률상 누군가의 신원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최소 다섯 명 이상의 신분보증서가 필요하다는 걸.”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니……. 그건 알고 있지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참고로 보증인의 조건은 집행기관에 소속되어 있거나 어느 정도의 발언권을 갖고 있는 자. 그런데 저, 권한 있지 않습니까.”

은근슬쩍 자신의 위치를 잊지 말아 달라고 말을 하는 이신이었다.

그것은 자만이나 자랑이 아닌, 자신감이었다.

원래는 선대왕 때부터의 측근이었지만, 지금은 나이가 들어 자신의 동생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기로 하고 시하루의 스승 자리에 앉아 궐 안 돌아가는 일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는 그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필요한 건 다섯 명의 신원보증. 아마 대비마마께서 한 장 써주실 거고. 그렇다면 남은 건 석 장이네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니, 내가 묻고 싶은 건…….”

아까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움찔거리고 있는 시하루였지만 그런 그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선수를 치는 이신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걱정하지 마세요. 제 예상대로라면 아마 그 석 장은 문제가 없을 테니까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니 그게 아니야.”

그러나 시하루는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걱정조차 한 적 없다는 반응이었다.

오히려 다른 무언가가 신경이 쓰이고 있는 듯.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내가 궁금한 건 어째서 이신 그대가 이걸 쓰냐는 거야. 아무 관련 없는 일 아닌가? 원래 자신과 관련 없는 일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인간으로 알고 있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도 자신과 관련이 없다는 듯 멀찍이 떨어져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지켜보는 것을 즐기기로 유명한 이신이었기 때문에 이번 일에 대한 그의 반응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하루의 눈초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재빨리 자리를 뜰 준비를 하던 이신이 그래도 방을 나서기 전에 돌아서며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렇다면 아주 조금은 관련 있는 거로 해두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잠깐. 정확하게 말을 하고 가야지, 아주 조금이란 게 도대체 뭔데?!”

전혀 없다고는 말하지 않는 이신이었고, 오히려 그 대답 때문에 더욱더 큰 혼란에 빠진 시하루였다.

마치 도망치는 듯 재빨리 방에서 벗어나려는 이신을 붙잡는 데 성공한 시하루가 차와 몇 가지의 다과를 사이에 둔 본격적인 심문 시간을 가지려고 했지만 아까 나갔던 이안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기껏 시하루가 잡아놓았던 이신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버렸다.

이신을 놓친 것도 모르고 그저 놀라 멍한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잠시 주춤거린 틈을 타 어느새 문가에 서 있는 이신을 본 시하루가 이안을 죽일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무슨 일이야!”

시하루가 너무도 두려웠지만, 방금 자신이 듣고 온 이야기는 꼭 전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기에 이안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전해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지금 군사들이 희수궁으로 몰려갔다고 합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법을 어겼으니 아주 범죄자 취급을 하겠다 이거군요.”

슬쩍 문을 열고 나갈 기회를 보고 있던 이신이 상황이 상황인 만큼 벗어날 생각을 접은 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렇게까지 일을 벌이는 걸 보면, 아주 단단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래도 왕후인데 이렇게 함부로 대하면 안 되지! 당장 군사들을 보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안됩니다. 지금은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괜히 시하루님이 나서시면 상대 쪽에서는 신이 나 준비해온 명분들을 들먹일 게 분명하니까요.”

이신의 말에 동의하는지 금방이라도 방 밖으로 뛰쳐나갈 것만 같았던 그가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뒤로 돌아섰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니 유시후 그놈은 뭐 하고 있었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게……. 지금 궐 안에 안 계시다고 들었습니다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 자기가 모시는 마마가 옥에 갇히게 생겼는데 자리를 비웠다고? 제정신이야?”

유시후의 부재 소식을 접한 뒤의 시하루와 이신의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분이라면 아마 지금 시하루님과 달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고 있을 테니 그쪽은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잠시 아무런 반응이 없던 시하루가 그게 말이 되느냐는 듯 펄쩍 뛰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하루를 진정시키는 이신이었고, 그를 보며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어떻게 하면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는지 그 비법을 묻고 싶은 시하루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지금 시하루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은 딱 한 가지입니다. 왕후의 폐위 요구를 기각시킬 수 있는 보증서를 모으는 일이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세 장 남았다며.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든 걸 보니 분명 단합한 게 분명한데 대신 중 누가 서명을 하겠어?”

그렇게 싸울 때가 어제 같은데 자기들 딸뻘 되는 왕후 하나 자리에서 몰아내 보겠다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아저씨들이 단합하면서 이렇게까지 나오다니.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그럼 시하루님은 가만히 기다리고 계시면 될 거 같습니다. 마무리만 지어주세요.”

비꼬는 것처럼 들려오는 말이었지만 이신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문제가 있다면 시간이겠군요. 일을 이리 빨리 터트린 걸 보면 판결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겠다는 건데 과연 그 전에 유시후. 그가 찾으러 간 것들을 제때 들고 와줄지…….”

이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지만 따지고 들을 정신마저 없는 시하루였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가고 있었다.

* *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래서 결혼은 무덤이라고들 하나 봐.”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하…….”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이랑의 투정을 들어주고 있던 수아였다.

유시후가 궐 밖으로 나가기 전. 다급히 그녀를 불러서 자신은 궐 밖에 볼일이 있으니 돌아올 때까지는 꼭 이랑의 곁에 있어 줄 것을 부탁했고, 그 잠깐의 사이에 일이 터진 것이었다.

약속대로 일단 이랑이 갇혀 있는 옥까지 따라 들어오긴 한 수아였지만 문제라면 이곳은 희수궁과 달라 자유롭지 못한 공간인데다가 평생 가 볼 일 없을 장소라 여기고 있던 곳이었으니 어린 수아의 입장에서 그곳은 무서운 장소였다.

정작 이 모든 문제의 중심지인 당사자에게서는 두려운 기색 따위 느껴지지 않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뜬금없이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수아야. 너는 절대 결혼 같은 거 하지 마. 이건 경험자로서의 충고야. 잘 새겨들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생각해보니 이거 억울하네. 눈물 핑 돌 정도로 감동적인 청혼을 했어, 엄청나게 성대한 가례 식을 올리기라도 했어. 한 것도 없잖아. 문서면 다야? 아이고……. 내가 남자를 잘못 만났지.”

이 상황에서까지 투덜거리며 책을 붙들고 있는 이랑이 그저 신기하고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왕후라고 최대한의 불편함 없는 한에서의 대우를 해주려는 그들의 노력이 보이고 있었다.

일단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죄목 하에 수감되어 있는 왕후 감시를 위해 밖에 서 있던 보초들도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그냥 위에서 내린 지시에 따르는 그들이었기에 정확히 들은 이야기는 없었다.

그저 범죄자를 연행해 왔으니 옥에 가두고 탈옥하지 못하도록 잘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나가보니 범죄는커녕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않을 것처럼 생긴 여인과 그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7살 정도의 작은 여자아이.

게다가 탈옥은커녕, 지금 이 상황 모두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저항 따위는 없었고 스스로 옥에 들어가는 것도 모자라 뭐 필요 없느냐는 질문에 뜬금없이 ‘그럼 내 방에 있는 책 몇 권 좀.’이라는 소박하다 못해 성실하기까지 한 부탁을 하고 있는 이 아이들에게 오히려 자신들이 몹쓸 짓을 하는 거 같다는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냥 지켜보고 있으면 알아서 폐위당하겠지 했는데 설마 이렇게 될지는 몰랐지.”

옥 안에서 까지 책을 놓지 않으려는 이랑의 학구열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한 손에는 책을 다른 한 손에는 붓을 들고 열심히 암기에 몰입 중이던 이랑에게 조금은 진정하라는 듯 수아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 있었지만 오히려 자신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는 이랑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난 화가 나면 오히려 공부가 더 잘 돼.”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는 수아가 자신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

그런 수아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랑이 그제야 제대로 자신의 신세 한탄을 하려는 듯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설마 내가 스스로 폐위를 철회하기 위해 노력하는 날이 올 줄이야.”

물론 이대로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폐위당하는 건 문제 없겠지만 제 발로 나가는 것과 이대로 쫓겨나는 건 다른 문제였다.

방법이야 어떻든 나가기만 하면 된다지만 이대로 쫓겨날 경우에는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지기 때문이었다.

죄인의 낙인을 찍은 채로 나갈 바에야 차라리 평생을 이 안에서 썩히는 게 더 나을 지경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렇게 나가는 건 죽어도 싫어. 차라리 폐위를 미루는 게 낫지!’

* *

[ 서하연(曙荷娟) ]

이곳은 궐이 아니다.

커다란 건물들이 많이 줄지어 있기는 했지만 열려 있는 궐의 정문과는 다르게 굳게 닫혀 있는 정문은 그 누구의 출입도 허가하지 않으려는 거 같았고 밖의 세상과는 단절된 분위기였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궐 안의 사람들과 달리 자신들에 일에 치여 바삐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유로워 보였고 하나같이 품위가 있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이 있다면, 그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여자들뿐이었고, 그녀들의 손에는 모두 책들이 들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여인들의 사이를 빠른 걸음으로 가로지르며 나타난 어느 긴 머리의 여인의 등장에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던 다른 여인들이 허리 숙여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안녕하세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안녕하세요. 삼화(三花) 님.”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안녕하세요!”

모든 이들의 시선을 받고 있던 여인이 익숙하다는 듯 그 인사들을 받아주며 곧 아주 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자신의 등장으로 인해 잠시 소란스러워 졌던 밖과는 달리 아주 조용한 내부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대박.”

건물 안으로 들어선 이 긴 머리의 여성은 뭐가 웃긴 건지 복도가 떠나갈 정도로 웃으며 경쾌하기까지 한 걸음을 계속 옮기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조금 전에 온 편지가 들려 있었고, 편지를 보낸 이의 다급함이 느껴져 올 정도로 편지의 글씨체는 마구 휘갈기듯 쓰여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우와. 완전 악필이네. 내가 글 쓸 때는 또박또박 쓰라고 그렇게나 경고했는데.”

곧 빠른 걸음으로 어느 문 앞에 도달한 여인이 잠시 멈추더니 뛰다시피 걸어오느라 흐트러진 옷차림을 정리하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곱슬거리는 머리를 단정하게 하나로 올려 묶었다.

그리고는 한번 쭉 훑어보며 마지막으로 옷 매무새를 점검한 후 눈앞에 보이는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들어오세요.”

방 안에서 들려오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에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여인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무슨 일이죠?”

방 안에 들어서자 바닥에 하얀 종이를 펼쳐놓고 수묵화를 그리며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던 중년여성의 모습이 보였고 그 여인은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던 붓을 든 손을 허공에 멈춘 채 고개를 들어 자신을 찾아온 이를 반갑게 맞이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방금 제 앞으로 편지가 한 통이 왔습니다. 꼭 보셔야 하는 내용이어서 가져왔습니다.”

젊은 여인이 내민 편지를 받은 중년의 여성이 아무 말 없이 그 내용을 훑어 내리더니 왜 밖에서 웃음소리가 났는지 이제야 알 거 같다는 표정으로 그녀도 재미있다는 듯 따라 웃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런, 우리 이랑이가 옥에 갇혔다고 하는군요. 지금쯤 그 아이는 겁에 질려 있을까요?”

중년 여인의 질문에 그럴 리가 없다는 듯 그 앞에 서 있던 다른 여인이 강력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옥에 들어가서도 책을 보고 있을 녀석이에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쿡……. 그거 왠지 말이 되는군요. 하아……. 다섯 명의 승인이라…….”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편지의 내용을 확인하던 여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마지막 부분을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제 것도 필요하다는 말이네요.”

곧 간단히 내용정리를 끝낸 여인이 앉아 있던 자리의 옆에 있는 작은 서랍 같은 상자 안에서 검은색의 주머니를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탁자 위에 놓일 때의 소리로 보아 꽤 묵직한 물건임이 틀림없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 몸의 인장은 옥새처럼 이곳저곳에 막 찍어대는 게 아닌데 말이죠…….”

꽁꽁 묶여 있는 끈을 풀어내는 데 성공한 그녀가 곧 검은 주머니 안에서 작고 검은빛을 띠고 있는 네모난 도장을 꺼내 들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어떤 대신들도 설마 이 사람의 인장을 받아 내리라는 생각은 못 하고 있겠죠.”

그리고 잠시 고개를 돌리며 무언가를 찾더니 곧 조금 전까지 자신이 그리고 있던 수묵화 종이를 발견하고는 피식 웃으며 그 위에 도장을 눌러 찍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거이거 직접 가서 대신들의 반응을 보지 못한다는 게 아쉬운데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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