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궁안에 잠들어 있는 꽃-16화 (16/44)

十七花 * 꽃이라고 얕봤다가는 큰일 난다. (2)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 그게 무슨 말이야.”

오늘도 일 끝나기 무섭게 희수궁을 향하고 있던 시하루가 이안이 전해준 말을 듣고는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돌아서 다시 자신의 본궁으로 돌아오고 있는 길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러니까…….”

하필이면 꼭 이럴 때 자신이 이런 말을 전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이안은 진심으로 신께서 자신을 버리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똑바로 말해.”

얼버무리고 있는 이안이 답답해지기 시작한 시하루가 아까보다 더욱더 짜증을 내기 시작했고, 더 이상 미루어서 될 문제가 아니라 판단한 이안은 그제야 제대로 어떠한 사실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대신들이 왕후 마마의 폐위를 요구하는 상소문들을 올리고 있습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러니까 갑자기 왜? 잠잠했었잖아.”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원래부터 예의주시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 전하께서 희수궁에 찾아갔다는 이유만으로 희안궁의 여인 두 명을 내치신 게 원인이 된 거 같습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젠장. 어머니께서 조심하고 있었던 게 이것이었군.’

안 그래도 얼마 전 대비전에서 나눈 대화 이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작정 이랑을 희수궁으로 데려온 건 너무 섣부른 행동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그였다.

희수궁이 어떤 자리인데, 많은 감시의 눈과 음흉한 음모들이 향하는 목적지와도 같은 자리가 아닌가.

그런 자리에 아무 생각도 없이 이랑을 앉혀뒀으니 그녀의 신변이 위험해 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본궁의 바로 옆이었기 때문에 대놓고 그녀를 건들 수야 없겠지만, 물리적으로 상처 주는 일 이외에도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은 아주 많았으니, 그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것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빠른 대신들의 움직임에 그는 적지 않게 놀라고 있었고, 제 이익들 챙기기 바쁘던 대신들이 뭉치니 이런 일까지 가능하다는 걸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일은 벌어진 마당.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라는 말도 있듯 이제 와서 다시 이랑을 영희궁으로 돌려보낸다고 끝이 날 일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편이 더 위험하지.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본궁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자신의 눈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이랑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상황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것들이 단체로 제정신이 아니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예?”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폐위가 무슨 개 이름인가. 그리 쉽게 부르게. 아무런 명분도 없이 무슨 폐위야.”

비웃는 듯한 그의 말에 뒤를 따르던 이안이 곤란하다는 듯 또다시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낌새를 눈치 챈 시하루가 본궁에 돌아가기 전에 할 말 있으면 지금 여기서 다 하라는 듯 걸음을 멈추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그것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야. 또 뭐가 있어?”

제발 부탁이니 할 말이 있으면 조금 조금씩 할 게 아니라 한 번에 다 이야기하라는 듯 성격이 급한 시하루가 이를 갈며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게 있기는 합니다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뭔데?”

이랑이 희수궁의 자리에 오르면 안 되는 이유 따위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는 거 같은데 그 귀신같은 대신들이 자신도 모르는 문제를 찾았다는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드는 그였다.

애초에 그동안 거의 유폐되다시피 영희궁에서 지냈던 데다 자신의 어머니가 철저히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 관한 정보는 일절 얻을 수 없었을 텐데 도대체 그들이 제시한 명분이 뭘까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였다.

실컷 뜸을 들이던 이안이 답한 것은 이것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랑님의 출신에 관한 문제인 거 같습니다.”

* *

한창 궐 안의 화젯거리였던 그들의 차가운 왕과 궐 안에 고이 잠들어 있던 왕후마마의 사랑 이야기가 위기를 맞이하는 순간이었고, 그것은 고스란히 궁인들에게 충격을 안겨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철벽과도 같은 수비로 둘러싸인 희수궁도 예외는 아니었다.

본궁은 물론이요 궐 안의 이곳저곳이 술렁이기 시작한 마당에 문제의 중심인 희수궁 만이 조용하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랑 님!”

빠른 걸음으로 잘 정돈된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던 유시후는 아침부터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던 중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지금 이러실 여유 없으십니다!”

원래는 서서히 화를 내는 성격인 그가 오늘은 웬일로 바로 불같이 성질을 내고 있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나무 위에 올라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이랑은 더 이상 버틸 용기가 나지 않는 듯 보였다.

유시후가 머리끝까지 화가 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오늘따라 더 저기압이네. 왜 그래?”

결국, 나무 위에서 내려와 자진출두를 해주는 이랑 덕분에 더 이상 유시후는 아침부터 희수궁이 떠나갈 정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만은 면할 수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안녕, 유시후. 좋은 아침이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좋은 아침이요?”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이해를 할 수 없는 묘한 표정의 이랑이 유시후의 앞을 지나 정원에 놓여있는 야외 탁자에 앉으며 인사를 건네었고, 그런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유시후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 인사를 받아주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잠깐. 무슨 말을 하려고.”

한바탕 잔소리가 시작될 것을 예상한 이랑이 먼저 그만 말하라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는 궁녀가 내온 과일을 먹는 것으로 스스로의 입을 봉인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오늘도 세상은 평화롭구나.”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평화? 지금 밖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아세요? 난리도 아니라고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또 무슨 일인데 그래.”

제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남의 일을 묻는 듯한 무심한 반응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지금 대신들이 이랑님의 폐위를 요구하는 상소문을 끊임없이 올리고 있어요.”

나름대로 진지하게 말한 거였는데, 받아들이는 입장인 이랑의 반응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고 그것은 또 다시 유시후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지금 웃으실 때가 아닐 텐데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왜? 잘됐지 뭐. 가만히 있어도 폐위당하게 생겼네. 좋은 거 아닌가?”

본인의 목적 달성에만 충실한 그녀였으니 결과만 같으면 과정이 어떻든 상관없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동안 내색을 안 해서 그렇지 사실 나…….”

이랑이 다음으로 할 말이 무엇이지 대충 예상이 가는 유시후였다.

늘 씩씩하게 내색을 안 해서 그렇지 그녀도 사실은 아주 외로웠을 것이고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혼자 큰 궐에서 지내다 보니 쓸쓸했다.’라던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편지 쓰는 거 지겹더라. 팔도 아프고. 슬슬 소재도 고갈되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렇죠. 늘 이렇게 제 예상과는 어긋나고는 했죠.”

이미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까지 끄덕이는 유시후였다.

잠시 아무런 말도 없이 과일을 집어 먹고 있는 이랑을 바라보던 그가 한숨을 내쉬며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며칠 전. 궐에 소월가의 가주가 입궐하는 걸 목격한 이가 있다고 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과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평화로움을 보이던 이랑의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다.

가장 큰 변화로는 열심히 과일을 향하던 손 역시 허공에 멈추었다는 것. 이것은 먹을 것을 밝히는 이랑으로서 매우 이상한 행동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왜?”

기나긴 침묵 끝에 내뱉은 말치고는 너무나 짧은 질문이었지만 그 ‘왜?’라는 말에는 아주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유시후가 말을 하는 데 있어서 뜸을 들이는 걸 보아 아직 말할 게 더 남아 있다는 의미였고 그 뒤에 올 말이 더 중요한 게 분명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희안궁을 찾아갔다고 하더군요.”

먹을 생각이 사라져 버려 과일들을 가지고 탁자 위에 줄을 세우며 딴 짓을 하고 있던 이랑이 그래도 들은 건 다 듣고 있던 모양인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희안궁이라…….”

별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장소 중 한 군데이건만, 요즘 들어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다 보니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말뜻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희안궁에 딸이 있다는 뜻이겠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갑자기 탁자 위로 털썩하고 엎어지며 외마디 신음을 내뱉는 이랑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제야 좀 심각성이 느껴지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쩌실 거예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쩌긴. 끝까지 모르는 척해야지.”

의미심장한 질문을 해오는 유시후를 빤히 쳐다보던 이랑이 무슨 그런 재미없는 질문을 하느냐는 듯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그러나 유시후는 오히려 그녀의 여유로움이 더 걱정되는 거 같았다. 확실히 하고 가야겠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물어오길.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디서부터 어디까지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처음부터 끝까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전하는 어쩌시고요.”

이번에는 이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을 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것도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모르는 척.”

* *

본궁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또 다른 장소.

넓은 공간의 맨 위를 차지하고 있는 상석을 제외한 자리들이 꽤 많은 인원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밖에서 안을 슬쩍 들여다보고는 이걸 들어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 지 수십 번도 고민하던 시하루는 결국 결심한 듯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그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던 대신들이 그의 등장에 웅성거리던 것을 멈추고 모두 고개를 숙여 주군을 향해 인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됐다.”

일을 이 지경을 벌려놔 자신을 이리도 귀찮게 만들어 놓고 무슨 예의를 차리겠다고 뻔뻔하게도 인사를 올리고 있는 건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매정하게 그들을 무시하고 있는 시하루였고 오늘도 쓸데없이 회의에 참석한 주제에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차를 마시고 있는 이신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

이신은 이미 포기한 그였으니 내버려두고, 자신을 이 상황에서 도와줄 누군가의 등장을 기대하며 왼쪽에서 자신과 가장 가까운 자리를 바라보는 시하루였지만, 그 자리의 주인은 오지 않은 건지 공석으로서 그에게 배신감까지 안겨주고 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반대쪽인 오른쪽 자리를 바라보는 데 그 자리 역시 주인이 없는 공석이었다. 하지만 왼쪽과는 달리 배신감이 아닌 불안감을 안겨주는 상황이었다.

재빨리 자신의 옆에 있던 이안을 부른 시하루가 귓속말로 그에게 물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소월가의 가주는 아직 안 온 건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것이……입궐할 때는 분명 같이 있었는데…….”

일을 이렇게 벌여놓은 장본인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니.

불안해진 시하루가 다른 대신들을 향해 묻자 다들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자신들은 그저 모이라기에 모였다는 등의 말을 들려주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설마 나를 이곳에 묶어두고 그 꼬맹이에게 찾아간다거나 하지는 않겠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럴 리가요. 그 사람이 그렇게까지 표면에서 움직인 적이 어디 있었나요. 하지만 만일 그렇다 해도 걱정 안 하셔도 될 거 같은데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긴…….”

자신은 전혀 걱정이 안 된다는 이안의 말에 그제야 깜빡하고 있었다는 듯 시하루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희수궁에는 무서운 호랑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지.”

설마는 늘 사람을 잡았고, 그들은 희수궁을 지키는 호랑이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거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만큼은 그들의 예상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랑이를 운운하고 있을 시각. 그 근처에 있는 커다란 궁에서 역시 다른 의미의 호랑이가 거론되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랑의 시선이 잠시 동문을 향하는가 싶더니 일이 생겼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려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빨리도 납시었네.”

그녀의 시선이 머물렀던 곳을 향한 유시후 역시 표정이 좋지 못하게 변하더니 자신들이 있는 장소로 빠르게 걸어오고 있는 어떤 이의 뒤를 다급히 따르고 있는 다른 호위무사들을 향해 매서운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분명히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미 이 희수궁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막아서기에는 늦은 시점이었고 그렇다고 내쫓을 수도 없었다.

요즘 들어 손님들의 방문이 잦았던 희수궁이었지만 그동안의 무례한 손님들의 위에 서고도 남을 인물의 등장은 유시후를 가만히 못 있게 만들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저는 이곳을 총괄하는 대장……입니다. 함부로 희수궁 안에 들어오실 수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허. 내가 누군지 모르는가? 나는 이 천유국의 대 귀족인 소월가의 가주이다. 잠시 왕후마마를 만나러 왔으니 비키거라.”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말도 안 하고 희수궁에 발을 들여놓은 건방진 가주였지만, 그의 말대로 지금의 유시후로서는 그를 막을 힘이 없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괜찮아.”

잠시 이야기를 하러 온 거 같으니 그렇게까지 경계할 필요는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유시후를 물러나게 하는 이랑이었다.

그녀의 허락에 그제야 아주 조금이나마 찌푸리고 있던 얼굴을 풀고는 유유히 자신을 막아서는 이들을 지나치던 그 남자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유시후의 앞으로 바짝 다가가 관찰이라도 하듯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런데 말이지. 혹시 전에 어딘가에서 만난 적이 있지 않나? 낯이 많이 익은 거 같은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긴 그렇겠지. 내가 일개 호위무사 따위를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마치 심문이라도 하듯 물어오는 질문에 자연스러운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그럴 리가 있겠냐고 대답을 하는 유시후였고, 그런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남자는 곧 자신이 다른 이와 착각을 했다는 결론을 내린 건지 바로 시선을 떼고 이랑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원래 지금 제 위치 같은 것을 내세우거나 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꽤나 무례하신 거 같습니다.”

유시후를 골탕먹이거나 괴롭힐 때를 제외하고는 절대 한 번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왕후’라는 지위를 내세워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오죽하면 꽃따리 오빠가 자신에게 반말을 하거나 건방지게 굴 때도 뭐라 안 하고 다 들어주기까지 했겠는가.

딱히 ‘왕후’라는 자리에 미련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이번만큼은 별개였다. 함부로 이리 들이닥치다시피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제대로 소개를 해주세요. 당신은 누구죠?”

나름대로 목소리를 깔고 상대의 기에 눌리지 않고자 무게 잡고 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중년의 남자는 그런 이랑이 가소롭다는 듯 약간의 비웃음으로 대신 답을 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오히려 그 질문은 제가 하고 싶군요. 이 사람은 소월가의 가주. 진유한이라고 합니다.”

이랑의 주위에 있던 궁녀들이 그 말을 듣기 무섭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무언가가 이상한 거 같다는 표정을 주고받고 있는 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서 있는 진유한이라는 남자는 천유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명문 대 귀족 소월가의 현재 가주였지만 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 같은 곳에서 ‘소월가의 가주’나 ‘소월가의 주인’ 정도로만 자신을 소개해왔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그는 스스로의 이름을 싫어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진유한이라는 이름을 듣기가 무섭게 그의 뒤에 서 있던 유시후의 표정이 마치 듣기 싫은 말을 들었다는 듯 묘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랑이 눈앞의 남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살짝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유시후에게 표정관리를 잊지 말라는 경고를 하려고 했지만, 남자의 말이 더 빨랐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희수궁의 자리에 앉아 있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마치 ‘네가 누군데 지금 그 자리에 함부로 앉아 있는 것이냐?’고 물어오고 있는 듯.

이것이 현재 희수궁의 주인인 이랑을 향한 질문인 것은 틀림없었지만, 이 질문은 그녀를 왕후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등장부터가 예의 없었기 때문에 애당초 기대도 안 했다는 듯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랑의 태도는 꽤나 덤덤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질문에 당신이 원하는 답은 못 드릴 거 같네요.”

대답하기 싫다는 말이었지만 무슨 생각인 건지 화났다기보다 오히려 제 생각대로라는 듯 남자의 여유로운 그 미소가 이랑은 너무도 마음에 안 들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긴. 누구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어차피 곧 있으면 내쫓길 텐데.”

눈을 번뜩이며 말하는 것이 마치 늙은 살쾡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안타깝게도 저에게는 든든한 배경이 없어서 말이죠. 대 귀족님께서 저를 협박하신다고 해도 딱히 대응할 방법이 없네요.”

자신이 안 나가겠다고 버티는 것도 아닌 데 왜 이리 괴롭히려 드는지 모르겠다는 이랑은 이 싸움에 끼고 싶지 않다는 듯 보였다.

그냥 이대로 시간이 흘러 때가 되면 알아서 폐위를 당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 좋고 너희 좋고, 다들 좋은 걸로 끝나는 일인데 굳이 자신을 찾아와서 이러고 있으니 협박을 받고 있는 거 같아 웬만한 일에는 화를 잘 내지 않는 이랑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심각하게 불쾌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상황은 이랑이 생각하는 거만큼 순조롭게 흘러가지 않았으니, 진유한 그 역시 이 작은 왕후가 스스로 폐위를 희망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 이대로 내버려두면 제 발로 나가겠지 싶어 그냥 두고 봤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예상치 못한 변수라는 게 존재했으니 그것은 바로 왕이 그녀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왕후가 혼자 폐위를 주장한다 해서 쉽게 그것이 승인되는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복잡할 텐데 왕이 그녀에게 마음이 가 있는 상황이라 하면 이 폐위 문제를 없었던 일로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왕이라고 해서 주위 의견 다 무시하고 무조건 자신의 의견만을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모든 대신의 목소리를 모아 그녀가 폐위당해야 마땅한 이유를 만들어둬야 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송구스럽지만 제가 당신의 뒷조사를 좀 했습니다. 과거 행적이……아주 깨끗하시더군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제 삶의 목표가 나쁜 일을 안 하는 착한 어린이거든요.”

지금 장난을 치는 건지, 이랑이 그의 말을 유연하게 받아쳐 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말이 아니라. 제 말뜻은 아주 ‘백지’였다는 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본인도 알고 있었을 거로 예상되는데요?”

한 마디로 그녀의 과거에 관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어디서 태어났고, 부모님은 누구인지, 어디서 살았는지.

그녀가 궐에 들어오기 전까지의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떻게 호패를 받을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유국에서는 그 사람의 신분을 보장할 수 없는 경우에는 호패 발급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 기록이 없는 사람이 천유국의 국민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섯 명의 사람이 신분을 보증해줘야 합니다. 하지만 그 기록 역시 없더군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한 치의 거짓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인지 준비해온 천유국의 법에 관련된 서적을 펼치며 자세히 짚어주기까지 하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당신이 갖고 있는 호패의 위력은 무효입니다. 또한, 천유국 법도 상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호패를 발급받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천유국의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법이 있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

아까부터 별다른 대꾸 없이 가만히 앉아 그의 말을 듣고만 있는 이랑의 태도에 더욱더 자신감이 붙은 남자는 마지막으로 탁자를 쾅하고 내려치며 겁을 주려는 것인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즉. 당신은 법을 어겼습니다. 천유국 국민의 자격을 잃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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