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四花 * 서화당(書話堂)의 꽃 (5)
[요즘 제정신이 아닌 거 같습니다. 서화당의 유아 당신의 조언대로 제 감정을 인정하기 무섭게 도둑 입맞춤 따위를 하다니. 아무리 감정에 솔직해지자고는 했다지만…….]
“우……와! 보셨어요, 이랑 님?”
숨을 멈추고 감동을 맛보고 있던 수아가 눈을 반짝거리며 이랑을 바라보며 다급히 묻기 시작했다.
“당연히 봤지! 끝내준다! 그렇지, 유시후?”
“……그것 참 끝내주네요. 여러 가지 의미로.”
방금 도착한 최신 적화유의 편지에 감동한 여인들은 자신들이 설렌다는 듯 심하게 감정이 몰입되어 있는 반면, 방 안의 유일한 청일점 유시후는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찬바람이 쌩~ 하고 불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 정말 재미있다니까! 기왕 솔직해지기로 한 거 애정 표현을 좀 더 많이 하지.”
“그러게 말이에요!”
좋다고 날뛰고 있는 이랑과 수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혼자 짜증이 난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던 유시후가 살짝 불안하다는 움직임을 보이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순식간에 두 여인의 애정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종이를 낚아채어갔다.
아직 완벽하게 잊히지 않은 지난날의 ‘반쪽짜리 적화유 편지’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 이랑이 이미 유시후의 손에 넘어간 편지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 편지 압수입니다.”
“왜! 나 모으고 있단 말이야!”
‘적화유 편지 모음집’을 장식해줄 최강의 사연이 담긴 편지를 회수하기 위해 손을 쭉 뻗고 까치발까지 들어 올리는 등의 필사적으로 노력을 해보는 이랑이었지만, 그냥 가만히 서서 팔을 살짝 들어 올리는 것으로 그녀의 손에 닿지 않을 위치까지의 높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신장을 지닌 유시후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버렸다.
“이런 거 모으시면 정서발달에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절대 응원 금지입니다.”
이랑은 나이 18살이면 정서발달은 거의 이루어지다 못해 이제는 마무리 공사 단계임에도 이놈의 유시후란 녀석은 왜 자꾸 자신의 정서를 이리 걱정해 주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당장 안 돌려줘? 유시후. 지금 네가 잊고 있나 본데 아직은 내가 너보다 위에 있는 몸이시거든?”
순간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유시후가 동작 정지 상태가 되자 이를 기회로 여긴 이랑은 재빠르게 팔을 붙잡고 있는 힘껏 끌어내려 손안에 들려 있던 편지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웬일로 별다른 저항 없이 자신에게 ‘얌전히’ 편지를 빼앗겨주는 유시후의 반응이 이유모를 불안감을 불러오고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말이다.
‘잠시’보다는 약간 더 긴 시간 동안 아무런 반응과 표정변화가 없던 유시후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더니 곧이어 이랑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게 될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야.”
‘야?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익숙하지 않은 자신을 지칭하는 말에 놀란 이랑이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이 발칙한 짓을 한 사람을 찾아내겠다는 듯 번뜩이는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언제 나간 것인지 그새 수아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고, 방 안에는 그녀와 유시후. 이렇게 둘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으니 환청을 들은 거라면 몰라도 누군가가 자신을 ‘야’라고 부른 거라면 그것은 저기 멀뚱히 서 있는 유시후란 인간밖에 없다는 결론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아주 순식간이었다.
“야아?”
바로 무릎 꿇고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 듯 반성의 기미 따위 보이지 않고 오히려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와 말없이 눈싸움을 시작한 지 수십 초.
한숨을 내쉬던 유시후가 잠시 닫힌 방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주변 확인을 하더니 다시 문을 닫고는 이랑의 앞으로 다가왔다.
“내 말 들어서 나빴던 적이 있어, 없어?”
정말 겁을 상실한 건지 갑자기 이랑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엄청난 힘으로 꾹꾹 누르기 시작한 유시후 때문에 그 힘에 못 이긴 이랑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어……없었지요. 암. 그럼요.”
“아. 짜증 나! 네가 지난 십 년 동안 나 부려 먹었던 일 하나도 안 잊고 기억하고 있거든? 이제 이 궁에 있을 날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일단 궐 나가고 두고 보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마디 할 기세로 무게 잡고 있던 이랑의 표정이 외치고 있었다.
‘난 이제 죽었다!’
떠올리기 싫은 과거와 이 궁을 나가면 자신에게 닥칠 미래의 일들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이랑이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있자 그제야 유시후가 통쾌하다는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유시후 님 여기 계세요?”
“어. 지금 나갈게.”
자신을 찾는 이의 목소리에 밖으로 나가버린 유시후.
방 안에 혼자 남은 이랑의 정신은 더욱더 바닥을 향해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궁에 들어오기 전에 유시후의 성격은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는 누군가의 조언을 늘 마음속에 새겨들으며 살아왔건만!
“내가 겁을 상실했지. 이제 어떡하지?!”
한편,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방 밖에 서서 살짝 열린 문틈으로 끙끙거리며 걱정에 시달리고 있는 이랑을 바라보던 유시후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찾고 있다는 이를 만나러 희수궁의 동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방금 전 승리의 통쾌함으로 인해 만들어졌던 미소는 동문에 서 있는 어떤 이의 등장으로 인해 순식간에 지워져 버렸다.
“도대체 왜 난 희수궁에 들어올 때마다 너를 거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건지 이유 좀 설명해 줄래?”
자신을 이리 취급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희수궁의 동문에 기대어 팔을 꼬고 삐딱하게 서 있던 시하루가 유시후의 그림자가 나타나기 무섭게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이곳의 보안 문제에 있어서 최고의 권력자는 저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아는데 네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이 궐 안에서의 최고의 권력자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닐 테고.”
“나름대로 정체를 숨기고 계시는 거 같은데, 제가 다른 이들과 달리 전하만 너무 쉽게 통과시켜드리면 이랑 님이 눈치를 채시지 않을까요?”
“……꼬맹이는?”
‘아, 그런가.’ 하고 납득을 해버린 시하루가 재빨리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옮기는 것으로 당황함을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랑 님이라면…….”
순간 이랑을 찾는 시하루의 모습에서 방금 전에 읽은 편지의 내용을 떠올린 유시후가 ‘저번에 끝까지 막았어야 했는데.’라고 후회를 했던 일을 연이어 떠올렸고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지로 말뿐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시하루의 동문 출입을 막아서기 시작했다.
“오늘은 못 들어가십니다.”
전보다 한층 강화된 유시후의 수비 태세에 시하루도 적지 않게 당황한 듯 잠시 주춤거리는가 싶더니 그 역시도 이대로는 물러설 수 없다는 듯 자신의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호랑이를 그냥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들어가 버리는 그였다.
상대가 왕인지라 그 신분차이를 무시할 수 없던 유시후가 결국에는 자리를 비켜주었지만, 이 말을 해야겠다는 듯 낮은 음성으로 스쳐 지나가는 시하루를 향해 경고했다.
“……한 번만 더 이랑 님께 ‘애정표현’ 해 보세요. 그때는 전하고 뭐고 없습니다.”
일개 호위무사가 이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권력자에게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 당장에 목이 날아가도 문제가 되지 않을 일이었지만, 지금 시하루는 유시후의 건방진 협박 같은 말보다도 다른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애정표현?’
순간 유시후의 입에서 나온 ‘애정표현’이라는 단어를 듣기 무섭게 시하루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딱 한 가지밖에 없었지만…….
‘그 일을 이자가 알고 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유시후의 눈은 ‘난 지난날 네가 한 짓을 다 알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 보이는 게 차마 눈을 마주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미 적화유라는 가명으로 쓰인 친절한 ‘자백서’와도 같은 편지를 읽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유시후였지만 시하루는 그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그저 우연이겠지 여기고 희수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치겠네…….”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할 수 없지……. 좋아하는걸…….”
이미 많이 고민하고 결심을 한 상태였다.
서화당의 유아의 말에 따라 스스로 사실을 말하자고. 물론 그 사실을 알게 된 이랑이라면 당장에 폐위를 시켜달라고 매달릴 거 같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싶은 그였다.
“……그, 그래도 오늘은 말고…….”
하지만 그의 선택은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겠다. 희안궁의 여우들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 *
“유시후 아직도 안 왔어?”
오늘은 여느 날과는 다른 하루였다. 이랑은 웬일로 늘 기다리던 적화유의 편지가 아닌 평상시 티격태격 싸우기 바빴던 인물을 이리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 인물이 갖고 올 무언가를.
“이랑 님. 그러다가 다치세요.”
희수궁의 호위무사 대장인 유시후가 잠시 자리를 비우는 동안 그녀를 지키라는 표면적인 명령이지만 사실은 ‘감시’ 목적으로 있는 병사들이 주위를 맴돌며 여기저기서 장난 아니게 잔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물론 잔소리 하면 유시후를 따라갈 사람이 없겠지만, 차라리 ‘한 명’의 유시후가 내뱉는 독설과도 같은 잔소리가 시차로 들려오는 ‘여러 명’의 가벼운 잔소리보다 낫겠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저기 오시는 거 같은데요?”
희수궁의 동문에 서서 밖을 응시하던 수아가 드디어 이랑이 기다리고 있던 이가 나타났다는 매우 반가운 소식을 외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 희소식에 이랑이 자신을 감시 중이던 병사들을 제치고 동문 앞으로 나아가니, 과연 수아의 말대로 저 멀리서 유시후가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왜 밖에 나와 계세요?”
이랑이 방에서 나오기만 하면 일단은 불안하다는 게 유시후가 자주 하는 말 중 하나였다.
평상시의 이랑이라면 ‘더 이상 애 취급하지 말라고 했지!’라고 싸움을 걸었겠지만, 오늘은 앞서 말했듯 여느 날과 다른 하루였다.
“받아왔어?”
“본인이 아니라 대리인 자격으로 받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요.”
투덜거리던 유시후가 자신의 주머니 안에서 짙은 자줏빛의 조그마한 주머니를 꺼내 들더니 그것을 이랑에게 내밀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주머니를 받아 조심스럽게 그것을 여미고 있던 줄을 풀어내는 이랑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우와…….”
손안에 딱 들어올 만한 크기에 네모반듯하게 깎여 그 단아한 자태를 뿜어내는 조그마한 패의 등장에 이랑은 물론이요, 그녀의 주위에서 관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축하해요. 드디어 성인이 되셨네요.”
천유국의 국법상 남녀 할 거 없이 아이가 18살이 되면 호패를 받고 성인으로 인정되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감이 늘어난다는 말과 같았기에 뭘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고 있는 궁인들이 있었지만, 이랑에게 있어서 호패를 받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그것도 잘 받아왔겠지?”
안 그래도 찾을 줄 알았다는 듯 이미 한 손에 하얀 종이봉투를 꺼내 들고 있던 유시후가 그것을 이랑에게 건네주었다.
사실 호패보다도 그 하얀 봉투의 물건을 더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방금까지만 해도 이랑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던 호패는 이미 그녀의 옆에 있던 궁인의 손에 맡겨져 있는 상태였다.
새하얀 봉투 안에는 그녀가 몇 년간 꿈속에서, 그리고 상상 속에서 이미 여러 번 본 적이 있던 작은 종이가 들어있었다.
비싼 보석을 다루기라도 하는 듯 아주 조심스럽게 봉투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작은 종이에는 붉은색의 도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 이거야. 바로 이거.”
“잃어버리지 않도록 잘 보관해두세요.”
“유시후는?”
절대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듯 두 손에 들린 하얀 봉투를 꼭 쥐고 밝게 웃던 이랑이 안으로 들어서는 유시후를 향해 물으니 그가 씨익 웃으며 똑같이 생긴 봉투를 흔들어 보였다.
“저는 걱정하지 말고 이랑 님 본인이나 걱정하시죠. 그나저나 앞으로 바빠지겠네요.”
“괜찮아. 괜찮아. 나 의외로 머리는 좋거든.”
“그러게요. 제가 알고 있는 의외 중에 가장 큰 의외죠.”
이랑의 말에 유시후가 안 그래도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듯 부정하지 않고 옆에서 같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순간 한 대 쳐 줄까 생각도 해보는 이랑이었지만 오늘은 여러모로 특별한 날이었으니 봐주기로 한 모양인가 보다.
“아. 맞다. 유시후. 부탁할게 하나 더 있는데~.”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복수한다거나…….
안 그래도 새벽같이 나갔다가 부랴부랴 돌아오느라 피곤할 만도 한 그가 움찔거리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이랑이었지만, 가볍게 무시해주었다.
곧 있으면 폐위당할 몸이라고는 해도 일단 지금 자신은 왕후였고 그는 일개 호위무사일 뿐이었으니까.
‘부려 먹을 수 있을 때 마음껏 부려 먹어야지.’
* *
“……뭐냐?”
누군가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와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던 유시후의 눈이 ‘저도 별로 유쾌한 기분으로 온 건 아니거든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생에 한 번이라도 발걸음 해 볼 일이 있을까 말까 한 본궁의 중앙 서재에 나타난 유시후는 지금 그곳의 모든 이들에게 있어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래, 지금 그가 여기서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 원인은 바로 그 꼬마 왕후라지.
“꼬맹이는.”
“바쁘시다고 빌려 올 책 목록을 적어주셨습니다.”
그나마 공부를 한다니까 대신에 책을 빌려와 달라는 부탁을 받아드렸지, 만일 다른 일 때문이었다면 절대 고분고분 명령에 따르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며 잠시 자신의 이런 비참한 신세에 씁쓸함을 느끼고 있는 유시후였다.
한편, 거의 동시에 한숨을 내쉬고 있던 시하루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들로 꽉 차 있었다.
요즘 들어 바쁜 건지 얼굴 보기도 힘든 이랑이 혹시라도 그나마 좋아하는 책을 보러 서재에 들르지 않을까 하고 거의 살다시피 서재에 박혀 있었는데……. 바쁘다니 이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고, 자신의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다.
‘바쁘면 내가 바빴지!’
“빨리 찾아라.”
시하루가 자신이 언제부터 서재 지킴이가 된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유시후의 손에 들린 종이를 이안에게 던지듯 건네주며 명령했다.
한 번쯤 반항을 시도하려던 이안이 시하루를 흘끗 바라보더니 건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건지 역시 한숨을 내쉬며 터덜터덜 서재 안으로 들어가 이 책 저 책을 뒤져가며 곧 책 몇 권을 빼 와 유시후의 품 안에 안겨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전하.”
이랑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종이에 적힌 목록들과 일일이 비교를 해가며 마지막 확인까지 끝낸 유시후가 예의를 갖춰 감사의 인사를 하며 돌아섰다. 자신도 이 서재에 볼일만 없었다면 가까이하고 싶지도 않았다는 듯 아주 매정하게.
시하루 역시 유시후가 빨리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었던 건지 말없이 탁자에 앉아 건성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다가 문이 닫히기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답답하다는 듯 서재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바빠? 뭘 하는데 바빠? 어이, 이안! 꼬맹이가 바쁜 이유가 뭘…….”
서재 안을 뱅글뱅글 돌며, 이랑이 무엇 때문에 바쁜지에 대해서 열심히 추리의 세계를 펼치고 있던 시하루가 혼자의 힘으로는 안 되겠다는 듯 이안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유시후가 나간 문을 살짝 열고 밖을 바라보고 서 있는 이안은 지금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금 뭐하는 거지?”
“우와. 저 사람이 유시후군요. 이렇게 제대로 본 건 처음이에요.”
“제대로 봐서 뭐 하려고.”
이야기가 이랑이 아닌 유시후 쪽으로 흘러가자 슬슬 기분이 불편해지기 시작한 시하루가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퉁명스러운 그의 말에 그제야 문가에서 발을 뗀 이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아까 하고 있던 책 정리를 마저 하려는 듯 서재의 안쪽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알아봤는데요, 역시 저분 보통 분이 아니셨어요. 그 유월…….”
“아. 됐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다.”
현재 머릿속에 이랑이 무슨 일을 하느라 시간이 없다는 건지에 대한 생각밖에 없는 시하루의 귀에 그 외의 일들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자신의 말이 도중에 잘리는 게 한두 번이 아닌 이안에게는 아주 ‘사소한’ ‘일상이었다.
“음…… 전하께 편지를 보내기 위해 연구를 하고 계신다든가?”
“그럼 다행이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단순하게도 말 한마디에 기분이 풀렸다는 듯 목소리부터가 달라진 시하루의 얼굴에 미소가 다 드리워지기도 전에 눈치 없는 이안의 두 번째 추측이 그를 공격해왔다.
“아. 폐위되시겠다고 선언하셨으니 열심히 그걸 실천하기 위해 노력 중이신다던가……!!!”
“그따위 것에 노력할 필요 없다.”
이런.
오늘도 불쌍하게도 책에다가 다른 방법으로 애정표현을 당하는 이안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거. 아버지께서 전해드리라 하셨어요.”
“뭔데.”
여전히 기분이 풀리지 않은 듯, 시하루가 투덜투덜거리며 이안이 힘겹게 내미는 종이를 거칠게 빼앗아 들었다. 이신이 자신에게 전해 달라 했다는 말에 살짝 두려운 기색을 보이며 조심스럽게 펼쳐보는 그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번에 국시를 치르는 수험생들 명단이라 하셨어요.”
한적한 시골 마을에 내려가 있다가 왜 갑자기 올라왔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속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때마침 국시 기간 때 돌아온 걸 보아 스스로 감독관을 하겠다고 나설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한 시하루였기에 그가 말하기 전에 먼저 손을 써 국시에 대한 권한을 이신에게 넘겨 버린 것이다.
물론 툭하면 자신의 곁을 맴돌며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잔소리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기도 했지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명단? 분명 모든 권한을 다 넘긴다 했는데 왜 굳이 명단을 나에게…….”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쭈욱 적힌 종이를 가볍게 훑어보던 그의 눈에 다른 이름들과는 달리 동그라미를 두른 것으로 그의 시선을 끌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이름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유아? 잠깐, 유아라면…….”
‘유아’라는 이름에 순간 시하루가 당황함을 역력히 드러내며 재빨리 무언가를 바라는 듯한 눈으로 이름 옆에 적힌 ‘소재지(所在地)’ 란으로 시선을 옮겼다.
안타깝게도 자신이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던 건지 곧바로 실망 가득한 눈으로 종이를 치우려던 그의 눈에 익숙한 세 글자가 들어왔다.
[서화당(書話堂)]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서화당의 유아’가 이번에 국시를 치른다고?”
갑작스러운 유시후의 등장. 그리고 바쁜 이랑을 보지 못해 생긴 짜증. 거기에 이안의 바보 같은 행동과 기타 등등의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던 그가 약간의 미소를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 표정에는 ‘실망’이라는 단어가 남아있었지만 말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조만간 인재를 얻을지도 모르겠군. 여인이라는 게 조금 걸리지만, 그것이 이 천유국에서는 별문제가 되지 않으니 말이야. 그래, 나이는 어떻게 되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번에 호패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럼 이제 막 18살?”
18살이라니. 그럼 자신은 여태까지 18살 꼬마한테 연애 상담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가.
이건 그에게 있어서 완전 굴욕이었다.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 혹시나 하고 가명을 사용한 게 다행이었다.
살짝 철렁했던 마음을 진정시키고 안도하는 마음과 함께 어떤 사람인지 기대가 된다는 듯 피식 웃으며 명단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시하루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꽤 많은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까……. 서화당의 유아. 조만간 꼬맹이한테 모든 걸 고백할 생각이야. 아마 그대가 국시를 통과해 궁에 들어올 때쯤이면 모든 게 다 잘 해결된 뒤겠지. 그때 꼭 이랑에게 소개해주고 싶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것 참 좋은 생각이시네요. 같은 또래이다 보니 마음이 잘 맞을 테니까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그러고 보니까 둘이 나이가 똑같네.”
시하루의 손에 들려 있는 명단을 거꾸로 된 위치에서 바라보고 있던 이안이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금 떠올린 어떠한 ‘가정’에 또다시 그 가벼운 입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하, 이거 꼭…….”
하지만 이안 그 역시도 학습하는 인간이었으니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해 그나마 기분이 나아진 자신의 주군의 성격을 건들 건 또 뭔가 싶어 스스로 먼저 입을 다물고 미처 끝내지 못한 책 정리에 속도를 가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명단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시하루가 고개를 들더니 그를 향해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신기하다. 그렇지?”
해맑게 웃고 있던 시하루가 명단을 보며 실실 웃는 것도 모자라 혼잣말을 늘어놓고 있는데 서재 밖에서 약간의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시하루의 눈치를 보던 이안이 자진해서 잠시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가 나가보겠다는 말과 함께 빠르게 문을 열고 나가 밖을 살펴보더니 곧 미묘한 표정으로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왜 그래?”
자신이 화를 낼까 두려워하는 표정과 이해를 못 하겠다는 아리송한 표정들이 한 번에 섞여 만들어낸 지금 이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시하루가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는지 먼저 입을 열었고, 그에 대답해야 하는 입장인 이안이 우물쭈물거리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월향 님께서 뵙기를 청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조심스러운 이안의 말에 왜 그가 자신에게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을 찌푸리더니 곧, 다시 명단으로 시선을 옮기며 무심하게 물어왔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월향이 누군데.”
그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이안의 시선이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을 월향이라는 여인과 그녀를 모른다고 말하고 있는 자신의 주군 사이를 몇 번 왔다 갔다를 반복하더니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밖에서는 안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후궁 마마님 중 한 분이 아니십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후궁? 아……. 희안궁의 여우 무리 중 한 마리인가……. 아니, 그 전에 분명 희안궁 밖으로 못 나오게 잘 지키라고 했는데 왜 여우 한 마리가 저리도 당당히 돌아다니고 있는 거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월향이라면, 소월가의 후계자로 기세가 등등하기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한 마디로 대신들도 어찌 함부로 할 수 없는 여인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희안궁’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부터 기분이 좋지 못한 시하루가 더더욱 저기압이 되어 그냥은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서재 밖으로 나갔다.
오랜만 아니, 처음으로 희안궁을 나와 본궁에 들어와 보는 월향이었기에 평소보다 더 신경을 쓴 듯했다.
하지만 이것저것 껴입고는 과하다 싶을 정도의 장신구들을 치렁치렁 달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시하루의 눈에는 좋지 않게 보이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전…….”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당장 희안궁에 처넣어라. 궐 밖으로 내쫓을 수 있으면 더 좋고.”
그를 발견하기 무섭게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가득 번지며 인사를 올리려던 월향의 말은 애초부터 들을 생각이 없었던 건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시하루가 다시 돌아서며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제야 여유로워 보이던 미소를 지우고 어느 정도 다급함까지 보이기 시작한 월향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병사들을 바라보다가 큰 소리로 시하루의 마음을 돌려놓을 이야기를 외치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지, 지금 희안궁의 후궁 세 명이 왕후마마께 전하의 정체를 밝히러 희수궁으로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