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三花 * 서화당(書話堂)의 꽃 (4)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또 적화유라는 분에게 온 건가요?”
아침 일찍부터 적화유의 편지를 들고 희수궁을 찾아와준 수아와 함께 잔뜩 신이나 봉투를 뜯어내고 있는 이랑이었는데 때마침 방문이 열리며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들어오던 예의를 모르는 유시후가 질투……는 아닐 테고. 무언가 매우 불만이라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으며 말하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응. 요즘 기다린다니까~. 꼭 소설 읽는 거 같잖아.”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맞아요. 원래 사랑 이야기라는 게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나게 재미있는 거라니까요.”
다른 편지들과는 딱 봐도 차별화된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따로 상자 안에 모아두고 있던 적화유의 편지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가만히 바라보던 유시후가 상자 안에서 한 장을 꺼내 읽는 게 보였지만 이랑은 그의 행동을 굳이 말리고 있지 않았다.
보고 좀 배우라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흐음…….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요……. 이 편지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네가 이상한 거겠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유시후 님 실망이에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게 아니라……. 제가 많이 알고 있는 어느 이야기와 닮은 느낌이랄까요.”
남자가 되어서 사랑에 빠진 남자의 심정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는 유시후를 적화유의 편지 애독자가 되어버린 그녀들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그는 꽁꽁 얼어 어떤 충격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강철 심장을 지니고 있는 인간임이 틀림없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평소라면 좀 더 앉혀놓고 사랑 이야기를 감상할 때의 올바른 자세와 마음가짐에 대한 강의를 펼쳤겠지만, 아직 방금 받은 적화유의 편지를 다 읽지 못했으니 나중으로 미뤄두기로 한 그녀들이었다.
“이렇게 순수한 사랑을 이해 못 하다니!”
“……제가 말한 ‘이상하다’는 건 내용 면에서가 아닌데 말입니다…….”
나름대로 중얼거리며 이 상황을 피해 보겠다고 노력하는 유시후였지만, 돌아온 것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있으라.’는 눈빛과 ‘시끄러워서 집중할 수가 없잖아!’라는 짜증이 가득 담긴 이랑의 외침이었다.
2대 1. 수적으로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여전히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한 건지 눈치를 보며 잠시 가만히 있는가 싶더니 갑자기 수아와 이랑이 아직 다 읽지 못한 적화유의 최신 편지를 빼앗아 가듯 가져가 버렸다.
“아니,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진짜 뭔가 이상하다니…….”
차라리 이유라도 대면 들어주기라도 할 텐데 그저 이상하다는 말만을 반복하며 당당하게 자신의 감이라 우기는 그에게 편지를 돌려 달라는 듯 손을 뻗고 스스로 반성을 하고 반납할 시간을 주고 있던 이랑이었다.
하지만 돌려줄 마음 따위 없다는 듯 종이를 이랑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이까지 들어 올리는 등의 장난을 치고 있던 유시후가 갑자기 멈칫하더니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편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편지의 어떤 ‘부분’에.
“유시후, 왜 그래?”
편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그를 올려다보며 이랑이 질문했다.
“혹시…….”
순간 유시후 역시 이제야 그 편지를 읽고 같은 남자로서 감동 받았다고 생각한 이랑과 수아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지어졌고, 편지에 대한 그의 감상을 듣고 싶다는 표정으로 얌전히 대답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늘 고지식한 유시후와 이렇게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통주제가 생겼다는 기쁨에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었는데 갑자기 ‘찌이익’하는 매우 불안한 소리가 등 뒤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설마.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아닐 거라 이야기해줘…….’
“뭐……뭐하는 거야?!”
원래 재미있는 것일수록 뒤를 아껴가며 보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아직 다 읽어보지도 못한 편지였건만…….
유시후. 그의 손은 무슨 신의 손이라도 되는가. 분명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은 한 장의 종이였건만 어느새 순식간에 두 장으로 늘어나 있었다.
크기가 딱 절반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말이다.
순간 적화유의 편지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눈앞에서 보고도 상황 판단력이 흐려진 이랑은 잠시 동안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약 30초 만에 상황을 파악한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뭐야, 이게 무슨 짓이야! 그걸 왜 찢어 유시후!”
그런데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유시후는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을 내뱉고 앉아있었다.
“제 성격이 배배 꼬여서요.”
“성격이 꼬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면 스스로 노력하고 고치던가!”
“왜 애꿎은 종이에 화풀이하시는 건데요! 그것도 보통의 종이가 아니라 황송한 적화유의 편지라고요!”
반이 싹둑 하고 잘려버린 편지를 바라보며 울상 짓는 수아의 외침에 그제야 약간 자신이 너무했나 싶었던 건지 유시후가 더 이상 이 방에 못 있겠다는 듯 쌩하니 빠져나가 문까지 닫아버렸다.
덕분에 노려볼 대상을 잃은 이랑의 눈은 그저 지금 일어난 일을 믿고 싶지 않다는 듯 허공을 향해 끔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편 이랑이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다는 표정으로 방을 나오던 유시후가 곧 어이가 없다는 표정과 함께 화가 단단히 난 듯 희수궁의 마당을 가로지르다가 손안에 들려있는 적화유의 편지 중 절반을 꺼내 들며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어설프다. 어설퍼……. 그 왕 혹시 바보 아니야? 아니, 설마 일부로 이런 거 아니야?”
유시후의 손에 들려 있던 편지 일부분의 아래쪽에는 선명한 붉은색의 도장이 흐릿하게도 아니고 아주 선명하게 찍혀져 있었다.
“이 인간이 미쳤나. ‘적화유’라는 가명을 쓰는 주제에 국새 찍힌 종이에 편지를 보내? 어째 가명부터가 수상하더라니…….”
* *
“꽃따리 오빠.”
“이름.”
요즘 책보다 더욱더 재미있는 어느 남자의 진솔한 사랑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긴 바람에 그동안 중앙서재까지의 걸음이 뜸했던 이랑이었다.
도대체 서재에 걸음하지 않았던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시작부터 무언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아까부터 자신의 이름을 말해보라 요구하고 있는 시하루의 태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안타깝게도 분명히 들은 기억은 있어도 그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은 이랑으로서는 난감하기만 한 상황이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해가며 저번에 읽다가 만 책을 찾기 위해 서재의 가장 안쪽에 있는 책장으로 들어간 그녀가 일부러 찾기 쉽도록 거꾸로 뒤집어 꽂아 둔 책을 빼내며 투덜거리는 것으로 상황을 피해 보려 했다.
“치사해.”
그동안 잘 지냈느냐는 형식적인 인사를 시작으로 함께 책도 읽고 놀려고 왔는데 늘 그렇듯 ‘꽃따리 오빠’라고 부르는 자신에게 갑자기 이제 와서 본명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 그 덕분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꽃따리 오빠’라는 이름이 너무나도 인상 깊게 남아 저 기억 속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할 그의 본명이 떠오를 생각을 않고 있었다.
“천성이 이래 먹었다.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돌아가던지.”
아침부터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잘 보고 있던 편지를 반 토막으로 잘라내고는 퉁명스럽게 밖으로 나가버린 유시후부터.
본명을 알아오기 전까지는 말도 안 하겠다 버티고 앉아있는 이 꽃따리 오빠까지.
‘오늘 정말 왜 이러지…….’
돌아가라는 말에 잠시 고민하던 이랑이 곧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그의 앞에 떡하니 자리 잡고 앉아서는 읽으려고 갖고 온 책은 옆으로 제쳐놓은 채 시하루를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
신경 쓰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한 시하루였지만 책을 읽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시선이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었으니.
애써 책에 집중하던 그의 눈동자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결국에는 얼마 못 가 고개를 슬며시 들어 올렸다.
“……그냥 돌아가라. 남의 일 방해하지 말고.”
‘일은 무슨, 서재에 처박혀서 책만 읽고 있으면서…….’
투덜거리고 싶은 이랑의 입이 씰룩거렸지만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그였으니, 특별히 그냥 넘어가 주기로 착한 다짐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심심해하는 자신을 위해 서재 출입증을 주고 또 언제 전하께서 나타나실지 모르는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 늘 이렇게 함께 있어주니 말은 저렇게 해도 얼마나 심성이 고운 오빠인가.
물론 그것은 이랑이 생각일 뿐이었고 전적으로 오해였지만.
“천성이 이래 먹었으니 마음에 안 들면 그냥 하시던 일 계속하시죠?”
응용력이 뛰어난 그녀가 방금 시하루가 내뱉은 말을 조금 바꿔서 답변하니 그게 웃겼는지 아까부터 인상 쓰고 있던 그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번져가기 시작했다.
“내가 싫지는 않나 보네.”
“당연하죠. 얼마나 좋아하는데.”
“유시후보다?”
이야기가 왜 또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는지는 둘째 치고, ‘유시후’란 이름에 간신히 잊어가고 있던 아침의 사건이 또다시 기억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게 다시 기분이 나빠지려 하고 있는 이랑이었다.
“흐음……. 둘 다 좋기는 한데, 유시후는 언제까지고 같이 못 노니까 오라버니에게 특별히 가산점을 주도록 하죠.”
가만히 그녀의 대답을 듣고 있던 시하루가 ‘언제까지고 같이 못 논다’는 부분에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사실에 곧 활짝 웃는 것이……매우 바보 같았다.
“자꾸 그렇게 심술부리지 말고 그냥 가르쳐줘요.”
“스스로 알아 오던가.”
‘심술?’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도대체 얘 훈육담당이 누구야.’라 중얼거리고 있는 시하루에게 이름을 협상하자는 듯 매우 불쌍한 척을 하며 동정심 유발 작전을 펼치고 있는 이랑이었다.
“저 원래 사람 이름 같은 거 잘 못 외운단 말이에요.”
“그래? 그럼 유시후는 얼마나 걸렸지?”
또다시 거론된 유시후의 이름에 이게 그냥 넘어갈 게 아니라 의도를 파악하겠다는 듯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보는 이랑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 늘 정상적이지 않다는 게 문제였지만.
곧 어떤 결론을 내린 건지 그녀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지더니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묻기 시작했다.
“……오라버니도 남자니까 당연히 여자를 좋아하겠죠?”
과연 그녀가 던진 이 질문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뜬금없는 그녀의 질문에 당황한 기색이 가득해 보이는 시하루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별로?”
이랑은 모르고 있겠지만, 방금 그의 머릿속에서는 매우 빠른 속도로 어느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긍정을 답하면 이랑의 눈에 자신은 여자를 밝히는 남자로 취급되어 조금이나마 유시후보다 높다는 점수가 깎일지도 몰랐으니, 여기서는 일편단심형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그나마 나을 거라는 게 희안궁에 예비 후궁들을 여럿 달고 있는 시하루의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너무 티가 나는 건 아닌가…….’
스스로도 유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유시후를 견제한 건 아닌가.
뒤늦게 창피함이 몰려오고 있던 시하루가 이랑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설마 자신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걸 눈치를 챈 건 아닌가 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뭐냐. 그 반응은.”
그러나 그의 걱정과는 다르게 언제 이동한 건지, 이랑은 앉아 있던 의자의 뒤쪽으로 가 그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설마……. 유시후 좋아하는 거예요?”
“뭐?”
설마 그런 일은 아니겠지……. 하면서도 불안하다는 눈빛으로 시하루를 바라보고 있는 이랑의 표정에서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 보이고 있었다.
“그게 왜 그렇게 되는데?”
갑작스러운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그가 화도 내지 못하고 머리를 감싸고만 있자, 이랑이 자신이 눈치 없게 말실수를 했다는 듯 재빠르게 의자에 착석해 나름대로 위로를 하기 시작했다.
“딱히 오라버니의 취향을 부정하는 건 아니에요. 사, 사람에게는 각기 다른 가치관과 사상이 있는 거고……. 아! 사랑 앞에서는 국경도 신분도 나이도 없다고 하니까…….”
이제는 진짜 지쳤다는 듯 아예 탁자 위 펼쳐진 책에 머리를 박아버린 시하루가 도저히 그녀를 못 이기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랑 이야기하면 진짜 피곤하다……. 도대체 그런 비정상적인 발상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사실 서화당의 사연 중에는 몇몇 특이한 그런 고민도 자주 끼어들어 왔기 때문에 그녀에게 있어서는 전혀 어색하지 않은 문제였다.
물론 정서발달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일단 유시후의 검열에서 대부분 걸러졌지만, 서화당의 편지량이 엄청나다 보니 가끔 한두 개쯤은 그의 철통과도 같은 보완을 뚫고 이랑에게까지 도달하기도 했다.
“그럼 유시후한테 왜 그렇게 관심 가지는 건데요?”
“그야……. 싫어서 그러지! 난 그 녀석이 완전 싫어. 아주 싫어!”
“물론 사람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게까지…….”
그냥 싫은 것도 아니고 아주 격하게 싫다는 것을 손짓 발짓 가리지 않고 표정까지 합세해 외치던 시하루가 결국 힘이 다했다는 듯 온 지 얼마 안 된 이랑을 급하게 배웅하며 말했다.
“아, 됐어.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 아니야? 그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한테 또 혼나려고 그러지? 자자. 다음번에 만날 때는 내 이름 알아왔으면 좋겠어. 그럼 잘 가.”
“그럼 조금만 알려주던가, 왜 이리 못되게 굴어요?”
“말했지. 천성이 못됐다고.”
그렇게 거의 내쫓기다시피 중앙서재를 벗어나게 된 이랑은 할 수 없이 터덜터덜 희수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오늘 하루 진짜 이상하네.”
* *
“……어제도 그 꼬맹이 왕후가 중앙서재에서 나오는 걸 봤다는 궁인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곳은 또다시 좋지 않은 기운이 맴돌고 있는 희안궁이었다.
이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듯 그녀의 하루일과에 대해서 그 어떤 사소한 일이라도 보고받고 있는 희안궁의 여인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왕후는 전하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궁인 모두가 아는 그 사실을 어떻게 지금까지 모를 수가 있는 거죠?”
“궁인들이 암묵적으로 입을 닫고 있는 거 같습니다. 분명 대비마마의 압력이 있었겠지요.”
“그럼 그 사실을 우리가 왕후께 알려드리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 중이던 여인들 틈에 끼어 아까부터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머리장식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월향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순간, 많은 말이 오갔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흐름이 제대로 보이지 않던 후궁들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시선들에 월향이 뭐가 문제가 되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간단한 문제 아니냐는 어조로 말했다.
“듣자하니 왕후께서는 스스로 폐위를 간절히 원하고 계신다고 하던데, 전하의 정체를 알려드리면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폐위문제가 알아서 거론될 테니 말입니다.”
뭘 어렵게 생각하느냐는 듯 차를 마시며 여유로워 보이는 월향의 말에 불안감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던 후궁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활짝 꽃들이 피기 시작했다.
“직접 전하를 만나 스스로 폐위를 요구하기 위해 그 오랜 시간 몸을 숨기고 있던 영희궁에서 나올 생각을 한 왕후입니다. 바로 곁에 있던 이가 자신이 그렇게 만나고자 했던 전하였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지체 없이 자신의 폐위를 요구할 겁니다. 지금 전하께서 스스로 정체를 말하지 않고 있는 이유 역시 그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임이 틀림없고요.”
월향의 말에 나머지 여인들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대화는 오가지 않고 있었고, 다시 서로의 눈치 보기 바쁜 여인들이었다.
그리고 그 틈에서 가장 중요한 발언을 했던 월향은 여전히 차를 마시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럼 누가 그 일을…….”
문가에서 그녀들을 지키는 것이 임무인 호위무사가 그 적막에 숨이 막혀 답답해할 때쯤.
다행히도 그녀들 중 어느 한 여인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다음에 오는 반응들은 조금 전에 잠깐 찾아왔던 고요함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폭발적이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요. 내가 할 겁니다.”
“나도 있습니다!”
희안궁의 여인들은 정식으로 후궁으로 임명된 여인들이 아니었으니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함부로 궐 안을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또한, 단독 행동 역시 금지였으니, 그 특별한 경우에도 적어도 세 명 이상은 함께 움직여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에게 있어서 이 기회는 왕후를 몰아낼 기회일 뿐만 아니라, 극히 드문 희안궁 바깥나들이 기회이기도 했고 운이 좋으면 어쩌면 전하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만히 앉아 눈치만 보던 여인들이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이 그 임무를 맡겠다고 난리를 부리자 그 목소리들이 하나로 모여, 적막에 숨이 막힌다는 듯 괴로워하던 병사가 차라리 아까가 나았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엄청난 소음이 되었다.
“월향! 당신은 어쩔 건가요?”
서로 자기가 하겠다고 하자 결국에는 가장 공평하게 뽑기로 결정하기로 한 여인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난리 통에 끼지 않고 물러나 있는 월향을 향해 참가 여부를 물어오고 있었다.
얌전히 앉아 그녀들의 반응을 바라보고 있던 월향이 싱긋 웃더니 우아하게 손을 내저어 보였다.
“저는 그 경쟁에 끼고 싶지 않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우리가 알아서 진행하도록 하죠.”
한 명이라도 참가자 수를 줄일 수 있다는 말에 누구 하나 그녀의 선택에 거짓말을 보태서라도 함께 하자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나같이 이기적인 여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으니까.
희수궁의 왕후를 알현하러 갈 사람을 고르기 위한 뽑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시끄럽다는 듯 조용히 방을 나서는 월향의 뒤로 시녀 몇 명이 눈치를 보며 따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째서 참가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애초에 이 방 안은 월향 님이 생각해 낸 게 아닙니까?”
그 말에 앞서 걷고 있던 월향이 걸음을 멈추더니 천천히 뒤를 돌아 가만히 시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가 왜 저들과 어울려야 하는 거지?”
“예?”
아까 회의를 할 때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비웃음.
그녀의 얼굴에는 한심하다는 표정과 비웃음만이 맴돌고 있었다.
“같은 귀족이라지만 나는 저것들과 차원이 다른 몸이다. 이 나라의 두 개의 기둥이라고 불리는 명문 중 소월 가(家)의 유일한 후계자란 말이다. 어찌 저것들과 어울릴 수 있겠느냐.”
“아…….”
“그만 따라와도 좋다.”
월향이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무섭게 시녀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기 무섭게 서로 웃기고 있다는 듯한 태도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 태도. 정말 건방진 거 같지 않아요?”
“그러게 말이야. 그래 봤자 정식 혈통의 후계자도 아니면서…….”
* *
희수궁의 동문.
웬 호랑이 한 마리가 으르렁거리며 누군가를 나름의 방식대로 반겨주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그래. 맡은 임무는 잘하는 거 같아 마음이 놓인다. 앞으로도 아무나 출입시키지 않도록. 그럼 이제 비켜라.”
동문에 들어서려던 시하루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고, 그 문 앞을 막아서고 있던 유시후의 뚱한 표정에는 그 어떤 변화가 없었다.
“듣기로는 바로 어제 이랑 님께 찾아오지 말라 하셨다던데, 그렇게 말씀하실 때는 언제고 이리 걸음 하신 겁니까?”
마음에 안 든다는 투로 말하는 유시후를 가만히 바라보던 시하루가 잠깐 다른 곳을 바라보며 딴짓을 하는가 싶더니 씨익 웃으며 짧게 대답을 했다.
“보고 싶으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을 막는 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동문을 통과하는 시하루를 차마 막지 못하겠는 유시후였다.
“……요즘 너무 막 나가고 계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차마 왕의 앞을 계속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최근에 좋은 조언자를 얻었거든. 물론 말도 안 되는 말을 늘어놓기는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내 감정을 인정하기로 했다. 걱정하지 마라. 자는 얼굴만 보고 바로 나올 것이니.”
그렇게 말하고는 유시후가 잡을 틈도 없이, 쌩하니 들어 가버리는 시하루였다.
밖에 남아 그런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던 유시후가 ‘하아…….’하고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무덤을 파고 마셨군요. 이랑 님…….”
한편. 희수궁 최고의 방어벽 호랑이 유시후를 뚫고 들어온 시하루가 가만히 침상에 누워 곤히……는 자고 있지는 않은 이랑을 내려다보고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확실히 애 맞네.”
발로 이불을 다 제쳐 놓은 채로 자고 있는 이랑에게 다시 이불을 목까지 잘 덮어주던 시하루가 조용히 침상의 끄트머리에 앉아 풀어헤쳐서 미역처럼 흐트러져 있는 머리카락을 정리를 해주며 짜증이 난다는 듯 말했다.
“어이. 건방진 꼬맹아. 빨리 내 이름 기억해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고집 부리는 것도 처음이란 말이다.”
이름을 먼저 기억해 내기 전까지는 말도 걸지 말라고 나름대로 강하게 나갔는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후회를 한 건 오히려 본인이었다.
설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안 올 줄이야. 그래도 절대 먼저 자존심을 버리고 얼굴 보러 가지 않겠다! 마음먹은 그였지만 역시 보고 싶은 건 어쩔 수가 없었나 보다.
시하루가 옆에서 혼자 뭐라 중얼중얼거리며 그녀의 흉을 보고 있는데, 마치 자기 흉보는 걸 알고 있는 건지 이랑이 잠결에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하자 그가 쿡쿡 웃기 시작했다.
너무 큰 소리로 웃었다가는 그녀가 깰지도 모르고, 깨면……. 그다음 상황을 어찌 감당하랴. 거기에 지금쯤 밖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있을 호랑이 한 마리도 있으니 말이다.
대충 이쯤에서 물러나자 마음먹은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외로 쉽게 돌아가나 싶었는데, 역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듯 잠시 문과 이랑을 번갈아 바라보며 심각한 갈등에 빠져있던 그가 결국에는 이랑의 옆으로 다시 다가오는가 싶더니 짧게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큭. 내가 제대로 미쳤나 보군.”
밖에서는 호랑이가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왕이란 남자는 그렇게 정신 나간 것처럼 실실 웃어대고 있었다.
물론 방주인은 그러한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채로 꿈나라에 계시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