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궁안에 잠들어 있는 꽃-11화 (11/44)

十二花 * 서화당(書話堂)의 꽃 (3)

“아니. 그냥 좋아한다고 솔직히 인정하라고! 인정하면 되잖아. 그게 어려워?”

이랑은 지금 미쳐 버릴 것 같은 상태였다.

“미쳤어? 지금 누가 누굴 좋아한다는 거야?”

시하루 역시 지금 미쳐 버릴 것 같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에 의해 불쌍한 이안 역시 미쳐버릴 거 같은 상태였다.

고작 몇 글자가 적혀 있는 종이에 의해 현재 궁 안은 초긴장 상태였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 남자는 절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입니다. ]

[사람의 마음이 생각과는 달라서 쉽게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받아들이세요. 마음이란 것은 머리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부정하면 오히려 머리와 마음의 싸움에 휘말릴 뿐입니다. 그분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사랑이란 감정을 깊게 묻어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좋습니다. 많이 양보해서 ‘신경이 쓰인다.’ ‘좋아한다.’라는 정도로 타협을 보도록 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이상은 아닐 겁니다.]

[이미 어느 정도, 설령 그것이 일부분이라고 해도 인정을 했다는 면에서 많이 발전한 거라고 생각됩니다. 앞으로 그분의 앞에 놓인 미래는 어쩌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보일 거라는 확신이 듭니다. 물론 그것을 인정한 시점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을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현재가 아닌 나중이 되어 지금을 돌아봤을 때 후회를 하지 않는 선택을 하시길 바랍니다.]

거의 매일같이 오는 적화유란 사람의 편지에 이랑은 요즘 심심할 틈이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원래는 일주일을 간격으로 희수궁에 찾아오는 수아였지만, 적화유의 편지는 이랑에게 특별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올 때마다 바로 이랑에게로 갖고 와주었다.

거의 매일같이 오는 적화유의 편지 때문에 요즘 들어 제집처럼 궁 안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수아였으니, 이제는 ‘익숙함’을 뛰어넘어 만인의 여동생이 된 그녀는 여기저기서 작은 간식 같은 걸 받아 오물거리며 궁 안을 돌아다니고는 했었다.

“왔구나!”

동문이 열리는 소리만 들려와도 눈을 반짝이고 귀를 쫑긋이며 혹시 수아가 온 것은 아닐까 고개를 내밀며 기다릴 정도로 적화유의 편지 애호가가 되어버린 이랑은 오늘도 여전히 밖에 나와 이리저리 왔다 갔다를 반복하며 수아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의 바람대로 잊지 않고 배달을 해준 수아에게서 받아 낸 편지를 읽은 이랑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흐음…… 의외로 꽤 진중한 면도 있는 거 같네.”

자신이 주인공 중 하나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 그 사랑 이야기에 즐거워하며 이랑이 또다시 하루를 보내고 있을 무렵, 그 복잡한 사랑 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은 현재 어려운 발걸음을 직접 옮겨가며 어느 커다란 궁 앞에 서 있었다.

당장에라도 쳐들어갈 듯한 기세로.

“이런, 갑자기 말씀도 없이……어때 보였어?”

“소문대로예요. 요즘 들어 기분이 안 좋으시다는 게 정말이었어요.”

그리고 그의 걸음으로 인해 궁 안의 궁인들은 시간에 쫓기듯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마. 시하루 님께서…….”

걸음을 재촉한 탓에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어느 방 안으로 달려온 궁녀에 의해 방 주인의 여유로운 오후는 산산조각이 났다.

불안하다는 듯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누군가의 등장을 조심스럽게 알리려던 궁녀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드르륵’도 아니고 거의 ‘와장창’에 가까운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현재 궁 안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사람 1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예의를 지키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다소곳이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대비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 올려 제 아들, 시하루를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할 말이 있어서 왔다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대비가 한숨을 내쉬며 앉으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일단 어려운 걸음 하셨으니 앉으세요.”

“어째 여유로워 보이시는군요. 어마마마?”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으니까요.”

앉으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볼일만 끝나면 금방 돌아갈 거라는 듯 꿋꿋이 서서 바로 질문부터 해오기 시작한 상당히 건방진 아들놈이었지만 이미 그런 반응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버린 그녀였다.

“바쁘다는 핑계로 문안도 안 올리고, 딱 2주 만에 얼굴 내비치는 주제에 뭐가 또 불만인지……. 심통이 가득한 저 남자가 정녕 이 나라의 왕이자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 맞는 것이냐.”

대비가 상처받았다는 표정을 넘어, 아주 충격받았다는 표정으로 옆의 상궁을 바라보며 의문형으로 말하자 이미 그 모자(母子) 관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상궁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날씨가 참 좋은 거 같은데 오랜만에 이 어미와 산책…….”

“피곤합니다.”

시하루가 다른 말은 듣기 싫다는 듯 최대한 간단한 대화를 요구해오자, 대비가 시하루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간 서로 노려보고 있는 알 수 없는 모자(母子)…….

그러나 곧 피식 비웃는 듯 웃어버린 대비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시하루를 바라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후후……. 그러고 보니 꽤 재미있는 일을 벌이고 있는 거 같은데…….”

정곡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저렇게나 속마음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흠칫 놀란 적이 있던가.

표정에 놀라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대비가 곧 그것이 웃긴 것인지 피식피식 웃다가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시하루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하하. 그래서요. 어찌 되셨습니까, 진전은 있으십니까?”

제대로 약점을 잡았다는 표정과 함께 더욱 신이 난 대비의 입이 빨라지기 시작했고, 동시에 시하루는 자신을 보며 즐거워하는 어머니의 반응에 굴욕이라는 듯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지금 무, 무슨 소리를 하고 계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름대로 ‘아닌 척’을 해 보는 그였지만 너무 티나게 노골적으로 시선을 피한 탓에 이미 들통이 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따지러 왔다가 오히려 이리 당하고 앉아 있으니 괜히 왔나 싶은 그였다.

그러다가도 그냥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 판단을 내린 건지 시하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이야기의 흐름을 가져오겠다는 의지로 고개를 들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어머니께서는 걱정하지 마시지요.”

실컷 웃던 대비가 웃음을 딱 멈추더니 순식간에 표정이 바뀌어 ‘하여간에 귀염성이 없어……’라고 중얼거리다가 심호흡을 하고는 시하루의 찌푸린 얼굴 따위 무섭지 않다는 듯 톡 쏘아붙이는 듯한 말투로 그의 신경을 더욱 긁어놓을 말을 이었다.

“아아. ‘꽃따리 오빠’라고 불린다지요? 나름 재미 보고 있는 거 같은데…….”

“어머니께서 그걸 어떻게?!”

사실은 익숙하지 않은 말이라 어렴풋이 기억해 이게 맞나 싶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찍어본 게 맞은 모양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과연 우리 이랑이는 아드님의 본명을 알고 있을까요? 아아~. 역시 모르겠지……. 쓸데없는 건 외우지 않는 아이니까…….”

뭐라 대답을 못 하고 그저 화를 참느라 몸을 부르르 떨던 시하루가 이따가 본궁으로 돌아가면 지금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이안에게 잔뜩 짜증을 부릴 거라는 나쁜 다짐을 하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떻게 그리 잘 아시는 겁니까?”

결국, 모든 것을 인정해버리는 시하루.

이미 기가 꺾어버린 자신의 아들을 보며 드디어 완벽하게 이겼다는 기쁨에 한 사람의 목숨이 달린, 해서는 안 될 말까지 줄줄 내뱉어 버리는 대비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최고의 소식통이 이곳까지도 찾아오기 때문이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소식통?”

(*소식통 - 어떤 내막이나 사정을 잘 아는 사람, 소식이 전하여지는 어떤 계통이나 연줄.)

아직 그 소식통의 정체까지는 말하지 않은 대비였지만 이쯤 되면 그게 누구인지 어느 정도 예상이 되었으니, 그의 곁에 있으며 그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잘 알고, 또한 이런 일에서는 입이 가벼우며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악(惡)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이 궐 안에 ‘그 인간’ 빼고 또 누가 있겠는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안……. 이따가 두고 보자!’

더 이상 변명이라던가 거짓말로 이 상황을 피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걸 알고 계시는 자신의 어머니셨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후우……. 좋습니다. 인정하겠습니다. 아마 어머니께서 알고 계신 것들 전부가 사실일 겁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머, 그렇다면 이랑이의 호위무사인 유시후와 연적(戀敵) 관계라는 말도 사실이었군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것 참. 만만한 상대가 아닐 텐데 말입니다~. 장담하는데 우리 아드님 가망이 없으십니다.”

이런, 설상가상으로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왜곡된 부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시하루 역시 이랑의 곁을 항상 맴돌다 못해 그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한 철통방어 태세를 한 유시후가 아주 신경이 안 쓰이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일개 호위무사를 연적(戀敵)으로 인정하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유시후는 그냥 호위무사지 저랑은 다른 입장……잠깐.”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듯 짜증을 내던 시하루가 갑자기 말을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순간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대비가 애써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 있었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떻게 어머니가 유시후를 알고 계시는 거죠?”

마치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최고의 변명거리를 찾으려는 듯 대비의 눈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그야! 워낙에 유명하지 않습니까. 희수궁의 유시후!”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긴…….”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이안에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설마 자신의 어머니까지 알고 계실 줄이야.

어쩌면 유시후란 인물은 자신이 예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그 이상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시하루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이제 되었습니다. 제가 찾아온 이유는 그런 걸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니 말입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

일부러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하루의 정신을 교란시키려고 했던 대비의 작전이 맥없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처음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미 다 들어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한 달도 전에 우연히 본궁 주변을 산책하던 중 궐 안에서 어떤 여인을 만났습니다. ‘만났다’기보다는 ‘구출’에 더 가까운 듯싶은 상황이었지만 말입니다.”

이랑과 처음 만났을 때의 상황을 떠올리자 그 인상 깊었던 만남이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어이가 없었는지 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뒤로 이어졌던 건 뜬금없는 자기소개였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을 ‘소이랑’이라고 말했죠. 처음에는 희안궁의 그 귀족들이 멋대로 만들어놓은 후궁 예비 후보생들인가 뭔가 하는 여인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행색으로 보아 어디 귀족 집의 규수가 틀림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말입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희안궁의 여인들은 독단적으로 궁을 나와 돌아다닐 수가 없죠.”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듯 대비가 먼저 대답을 했다.

한 명도 아니고 십수 명이 지내고 있는 희안궁은 왕이 정식 후궁으로 인정하지 않은 만큼 꼭 나와야 하는 이유가 없는 이상 함부로 궐 안을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그것도 절대 혼자,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그런 모든 것에 있어서 제약이 있는 생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자진해서 희안궁에 들어가려는 여인들은 지금도 줄을 서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래서 나름대로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재밌는 사실이 나오더군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버려진 궁으로 알고 있던 영희궁에 저도 모르는 제 부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십 년이란 세월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초반까지는 일이 재미있게 돌아간다고 즐거워하던 대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무거운 표정과 침묵만이 그녀에게 남아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머니시죠? 그 꼬맹이를 영희궁 안에 들이신 게.”

빠른 대답을 요구하고 있는 시하루를 본체만체하던 대비가 잠시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멍하니 생각에 잠긴 듯 보이더니 곧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맞습니다. 제가 십 년 전에 그 아이를 영희궁으로 데려왔습니다.”

드디어 인정한 대비의 대답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시하루가 쉴 틈도 주지 않고 바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째서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것이 그 아이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키는 일’이라는 말에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하루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무엇으로 부터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건 말씀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딱 잘린 대답에 더는 자신의 어머니의 입에서 그것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을 거라고 예상한 시하루가 볼일이 끝났다는 듯 돌아서려다가 다시 물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제가 그 아이를 마음에 두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아니면 그냥 지금처럼 모르는 채로 있기를 바라셨습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글쎄요. 마음에 두기를 바라기도 했던 거 같네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렇다면 어째서 저에게 그 아이의 존재에 대해 말씀 안 해주신 겁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마도 저는 그냥 모르는 채로 있기를 바랐나 보군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렇다면 어째서 그 아이에게 '왕후‘의 지위를 주셨습니까? 언젠가는 저에게 들통이 날 텐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과연 저는 어쩌고 싶었던 걸까요?”

말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대답을 요리조리 바꾸고 있는 대비의 태도에 끓어오르려는 화를 애써 참으며 시하루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물은 것이었는데, 그 질문에도 역시 장난을 치듯 생글생글 웃으며 오히려 되묻고 있는 대비였다.

결국, 화를 내며 방을 나서려던 시하루의 요란한 퇴장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대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제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거 하나뿐입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또 뭡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만약 마음이 있다면 빨리 잡으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이건 어미로서 하는 충고입니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 *

[제 생각에는 그 남자가 여자에게 감추고 있는 비밀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그것이 악의가 아니라 해도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면 그 비밀을 감추기 위해 분명 또 다른 거짓말을 하게 될 겁니다. 스스로 비밀들을 털어놓기 전에 누군가로 인해 그 남자가 감추고 있는 무언가가 탄로 나게 된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윽.”

대비마마를 만나러 갔던 시하루가 일찍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이안은 잔뜩 긴장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그가 시하루에게 당하며 살아왔던 세월이 얼마인데, 이쯤이면 대충 감이 발달하고도 남았으니까. 그래서 주군께서 자신을 찾기 전에 재빨리 아버지인 이신이 있는 곳으로 피신하여 있던 중이었다.

과연 그의 불안감대로 돌아오기 무섭게 자신을 찾아내어 다짜고짜 화를 내기 시작하는 주군에게 방금 받은 ‘서화당의 유아’의 편지를 건네지 않았다면, 자신은 오늘을 마지막으로서 삶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아버릴 것 같은 이안이었다.

대충 ‘아…….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서서히 돌아오는 다리의 힘을 의지해 자리에서 일어서던 이안이었는데 하필 또 최고의 방어막으로 내놓았던 유아의 편지 내용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 두 번째 폭발을 일으키고 마는 하늘같은 주군이셨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답장을 보낼 것이니 빨리 종이와 붓을 가져오너라! 빨리!”

좀 도와주지.

아들이 죽을지도 모르는 마당에 가만히 앉아서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는 아버지를 한 번 바라봐주다가 계속해서 종이를 가져오라 재촉하고 있는 시하루의 급한 성격에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던 이안이 탁자 위에 정리되지 않아 흐트러져 있는 종이 더미에서 한 장을 재빨리 집어 붓과 함께 시하루의 앞에 대령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제길. 서화당의 유아. 이런 거 말고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을 제시하라고…….”

편지의 내용을 모르는 이안으로서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답 글을 종이에 휘갈기듯 쓰던 시하루가 종이를 빠르게 접은 뒤에 미리 준비해둔 봉투 안에 넣고는 사람을 불러 서화당에 보내라 명령을 내리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순식간에 폭풍처럼 지나간 시하루의 손아귀에서 잠시라도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이안이 긴장이 풀린 듯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후우……. 이제 좀 마음을 놓아도 되겠어요…….”

이안이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여유로움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차를 좋아하는 그의 아버지 이신의 영향인 것인지 그 역시도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성질 더러운 누구 때문에 마실 시간이 없었던 거뿐이지.

이 고요함을 즐기자! 라고 마음먹은 이안이 차를 연속으로 한 석 잔쯤 마셨을 때였다.

이미 전부터 자리 잡고 앉아 차를 즐기고 있던 이신이 먼저 찻잔을 내려놓더니 그만 돌아가야겠다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궐에 놀러 오시는 거냐고 비아냥거리는 자기 아들을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대충 걸쳐두었던 겉옷을 입고 방을 나서려던 이신이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 나가려던 걸음을 멈추고는 여전히 차 삼매경에 빠져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자신의 아들을 가만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그러고 보니 안아.”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네? 아버지.”

잠시 뒤를 돌아 난장판이 되어 있는 탁자를 바라보던 이신이 자신의 아들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마지막으로 조언하기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좀 정리정돈을 하는 것이 네 생명연장에도 좋을 듯싶구나. 그런 종이, 함부로 쓰는 게 아니란다.”

안 그래도 정리정돈을 싫어하는 이안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런 종이’라는 아버지의 말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말길을 못 알아먹는 자신의 아들을 약간 한심하다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던 이신이 정리가 되지 않아 난리가 나 있는 탁자 위를 굴러다니고 있던 종이 중 한 장을 그의 눈앞에서 들어 올렸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러니까……. 이런 종이 말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

순간. 차를 마시기 위해 들어 올렸던 찻잔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새하얀 종이. 그래, 아주 새하얀 종이 위에 어느 익숙한 무언가가 떡 하니 자리 잡고는 이안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 이게 왜 여기에……?”

찻잔에 담겨 있던 액체가 출렁이다 못해 이리저리 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뜨겁지도 않은 건지 그 상태로 얼어버린 이안을 불쌍하다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던 이신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새 잊은 것이냐. 얼마 전에 전하께서 타국에 감사 편지 보낼 때 귀찮으시다고 종이를 늘어놓고 여기저기에 국새를 찍었던 것을. 그러게 내 뭐라 했느냐. 정리정돈은 그때그때 하는 거라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자, 잠깐만요……. 그러니까……. 서화당에! 지금 서화당에 편지를 보낸 거죠? 그것도 국새가 찍힌 종이에? 그럼……. 아. 어쩌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지도. 당장 가서…….”

제발 아니라고 말해달라는 듯 울먹이기 시작하며 아버지를 바라보는 이안이었지만 쯧쯧 하고 몇 번 혀를 차던 이신은 가차 없이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서화당의 유아가 적화유란 인물이 이 나라 왕이란 사실을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겠지. 그리고 아마 그 편지라면 벌써 궁에서 나갔을 거다.”

점점 더 혼돈상태에 빠져들고 있던 이안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부산스럽게 왔다 갔다 하기를 반복하고 있는 반면.

너무도 여유로워 보이는 이신이 자신은 이제 정말 가겠다며 그런 불쌍한 자신의 아들을 내버려둔 채 방을 나서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알고 계셨다면 미리 말씀해 주시지 왜 그냥 보고 계셨던 겁니까!”

마지막으로 곧 죽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아들의 발악을 들으며 말이다.

그 뒤로 뭐라 뭐라 더 외치는 거 같았지만, 방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무슨 말인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어느 정도 본궁에서 멀어졌을 쯤에야 걸음을 멈추고 그래도 자신의 아들이 걱정되는지 뒤를 돌아보던 이신의 얼굴에는 걱정은커녕 오히려 재밌는 일이 벌어질 거 같다는 미소가 가득 피어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미안하지만 아들아. 원래 이런 일에는 말이다, ‘예상치 못한 아주 작은 사고’가 하나둘쯤은 일어나야 재밌는 거란다. 그러니 네가 희생 좀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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