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一花 * 서화당(書話堂)의 꽃 (2)
“좋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오늘은 나무가 아닌, 제대로 된 자리에 앉아 차분히 책장을 넘기며 독서에 빠진 이랑이었다.
“마음이 침착해지는 거 같아.”
“…….”
스스로 놀라워하고 있는 이랑과 달리, 옆에 있는 유시후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감동적이야…….”
“도대체 병법서를 보면서 어떻게 마음이 침착해질 수가 있는 거죠?”
“시끄러워. 내 감동을 방해하지 마.”
짧게 말을 끊고, 다시 책에 시선을 고정하는 이랑이었고 그런 그녀의 옆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다가 그녀가 중앙서재에서 빌려온 책더미들로 관심을 옮기는 유시후였다.
“책을 빌려와도 왜 이런 책들만…….”
잠시 제목들을 쭈욱 훑어보던 그가 곧 인상을 찌푸리더니 몇 권을 집어 하나하나 제목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무술과 예술, 약초와 독초의 구분법, 완벽 범죄…….”
책 제목이 하나같이 이상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게 유시후가 살짝 불안하다는 목소리로 여전히 독서에 몰두 중인 이랑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사람 하나 어떻게 해볼 계획 꾸미고 계세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어쩜 이리 빌려오신 책들이 한결같나 싶어서요.”
신경 쓰이게 만드는 제목들과 씨름하던 그가 더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 들고 있던 책을 옆으로 대충 던져놓고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안녕하세요!”
누구든 좋으니 이 숨 막히는 장소에서 자신을 벗어나게 해 줄 이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유시후에게 있어서 그 맑고 명랑한 목소리의 주인은 구세주와도 같았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유시후가 마침 희수궁으로 들어오고 있는 수아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어서 와.”
이제는 그 아이의 희수궁 출입이 자연스러워진 궁인들도 수아를 발견하면 너나 할 거 없이 희수궁까지 그녀를 안내해주고는 했었다.
성격이 밝은 수아는 그런 그들을 향해 늘 밝게 웃어주었고, 그래서 그런지 나름대로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기도 했다.
“이랑 님! 이것 좀 보세요. 대박이에요.”
서재에서 빌려 온 책을 읽느라 심심할 틈이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랑이었는데, 그세 또 일주일이란 시간이 지나가 버린 것인지 새롭게 모인 서화당의 편지들을 배달하러 온 수아였다.
“뭔데?”
관심을 보이며 들고 있던 책에서 눈을 뗀 이랑이 수아의 손에 들려 있는 종이로 시선을 옮겼다.
“금빛 문양이 새겨져 있고 종이의 질도 빳빳한. 왠지 비싸 보이는 종이에 쓰인 편지가 왔어요.”
한쪽 손에 들고 있던 보따리를 바닥에 내려놓은 수아가 다른 한 손에 들린 편지를 이랑에게 내밀었다.
서화당은 종이와 붓 사용이 무료.
하지만 종종 이렇게 개인적으로 집에서 편지를 써서 보내는 이들도 어느 정도 있었기에, 종이가 다른 편지들과 다르다고 해도 별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다.
서화당을 찾는 이중에는 돈 많은 부잣집 도련님과 아가씨들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겉봉투부터 남다른 분위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이유모를 호기심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 나게 읽고 있던 병법서를 덮어버린 이랑은 그 작은 아이가 내민 편지의 겉봉을 뜯고는 내용물을 확인했다.
“보낸 사람은요?”
무관심한 듯 보였던 유시후도 사실은 신경이 쓰였던 건지 계속해서 다가오며 물어오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가만히 기다려보라는 듯 손을 저어 보이던 이랑이 곧 곱게 접힌 편지를 펼쳐 맨 위의 문단을 읽어보더니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글쎄……. 가명이어서 모르겠다.”
“하긴. 서화당에 보내지는 편지들 대부분이 가명이기는 하죠.”
“화유. ‘적화유’래. 들어본 적 없는 가명인데? 아마 이번이 처음 보내는 건가 봐.”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랑이 손안에 들어오게 된 금빛 편지의 사연을 읽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펼쳐진 종이 위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글씨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녀가 좋게 말해서 특이하다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해서 쉽게 읽기 어려운 글씨체에 난감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글씨체를 보니 남자네. 뭐, 귀족 집 도련님도 고민은 있을 테니까.”
“그럼요. 고민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 기분 잘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유시후를 향해 잠자코 들어보라는 듯 이랑이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일단 인사는 해야겠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본명을 밝힐 수 없으니 대충 ‘적화유’로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 어차피 그쪽도 ‘서화당의 유아’란 이름 뒤에 숨어있으니 동등한 조건이라 여기겠습니다.]
“분명 성격이 이래저래 꼬인 남자일 거야.”
우선은 첫머리부터 그다지 예의가 느껴지지 않는 인상을 주는 적화유라는 이름의 남자였다.
첫인상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다고, 글 역시도 그러했다.
맨 첫 문장만 읽어도 그 글을 쓴 사람의 성격에 대해 어느 정도 판단이 가능했으니, 이 글을 쓴 사람은 엄청나게 자기중심적이고 권위적인 인간임이 틀림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이랑이었다.
[나는 그쪽에 대한 믿음이 확실하지 않지만, 내가 잘 아는 어느 누군가가 그대를 추천해 주었으니 한 번 두고 보기로 했습니다.
고민이라고 해도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냥 요즘 들어 도무지 제 머리로는 해결이 안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을 찾고자 이리 편지를 보냅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은 어떤 여자와 남자가 있다는 가정 하에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 여인은 아주 오랜 시간을 어떤 남자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들을 희생하고 완벽하게 제약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자유를 찾고자 합니다.
그러던 과정에서 남자와 여자는 만나게 되는데, 놀랍게도 남자는 그 여인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삶을 그렇게 만든 이를 원망하고, 남자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모든 것이 복잡하니 서로 곤란한 상황입니다.
물론 그녀가 원하는 대로 그녀를 보내주면 끝나는 일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남자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서 질문입니다. 남자가 그 여자를 신경 쓰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몰랐던 것의 등장으로 인한 단순한 ‘호기심’인 거 같지만 그렇다고 단정 짓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서화당의 유아. 당신이 천유국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고민 상담가라면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한 답을 알려줄 거라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큰 소리로 편지를 읽어 내린 이랑이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더니 곧 고개를 들어 마찬가지로 눈앞에서 집중하고 있던 수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둘 중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두 입은 동시에 떨어졌다.
“좋아하는 거네.”
아니, 딱 봐도 답이 나오는데.
지금 이걸 모르겠다고 이렇게 열어보기도 부담스러울 정도의 금빛 봉투에 담아 의기양양한 도입 부분으로 자신을 잠시 위축되게 만들었단 사실에 약간 자존심이 상하고 있는 이랑이었다.
주인공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방해물이라던가, 기타 등등 연애에 있는 갈등을 초래하는 무궁무진한 요소들을 기대했던 이랑이 그냥 자신의 진심에 대해 눈치를 못 채고 있는 어느 바보 같은 남자의 태도에 싱겁다는 표정과 함께 책상의 옆쪽에 가지런히 준비되어 있던 붓을 들어 그 존재 자체부터 휘황찬란한 기운을 내 뿜고 있는 편지에 답 글을 쓰기 시작했다.
* *
안 그래도 짜증내는 날이 많던 시하루는 현재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폭발해 버릴 거 같은 상태였다.
그 하나라는 존재에 의해 이미 본궁은 긴급 상태에 돌입해 있었고 또한, 2차적으로 발생할지 모르는 재앙에 대비하기 위해 궁 안의 모든 이들이 항상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요즘 들어 뭘 그리 불안해하시는 겁니까. 시하루 님.”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이렇게 회의에 나와 자리 하나 떡하니 차지하고는 끝날 때까지 차를 마시는 이신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시하루에게 있어서 또 다른 짜증을 불러오고 있었고 그의 옆에 서서 항상 불안에 떨고 있던 불쌍한 이안에게 있어서는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
“불안? 내가? 하하. 그럴 리가.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하는군. 이신.”
사실 이 며칠간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보통 서화당의 유아의 편지에 답 글이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일주일이라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을 못 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아마 그의 인생에서 가장 긴 일주일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하루하루가 가기를 바란 지 어느새 딱 일주일이 되던 날이었다.
‘이 시하루가 한낮 백성의 답장을 이렇게 애를 태우며 기다리는 날이 올 줄이야.’
한숨을 내쉬던 그가 잠시 동안 잊고 있던 일을 다시 하기 위해 탁자 위에 쌓인 종이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왜 내가 일일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 답장을 해줘야 하는 것이냐.”
“얼마 전 전하의 생신연회 때 타국에서 온 선물과 축하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보내는 건 기본 예의입니다.”
그냥 가만히 차나 마시지, 아까부터 무슨 말만 하면 이렇게 끼어들어 자신의 말을 가로막고 있는 이신을 당장에라도 내쫓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게 현재 그의 상황이었다.
겉으로는 온화해 보여도 사실은 엄청나게 짜증나는 영감이었으니까.
표정에서부터 짜증을 드러내며 이를 악물고 옆에 놓인 붓을 억지로 집어 들던 시하루가 인내심을 갖고 몇 자 적는가 싶더니 도저히 못 해 먹겠다는 듯 요란하게 붓을 내려놓았다.
“이런 거 굳이 내가 하나하나 다 쓸 게 아니라, 너희가 필사를 하면 되지 않느냐. 이안! 뭐하려고 지금까지 공부해왔다고 생각하지?”
“나랏일 하려고 공부했지, 필사 따위 하려고 공부한 게 절대 아닙니다!”
“학습이 덜 됐어.”
“죄송합니다. 제가 더욱 가르쳐야겠군요.”
웬일로 이번에는 시하루의 편을 들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이신이었다.
문제는 설마 자신의 편을 들 줄 몰랐다는 듯 시하루 역시 당황해서 붙잡고 있던 이안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시하루 님은 하시던 거 빨리 끝내세요.”
“아니, 진짜…….”
‘한 장을 쓰는 거면 뭐라 안 했지. 42장이라니! 어차피 예의 차리는 감사 인사라면서!’
그냥 자신이 한 장 대충 써주는 것을 다른 대신들이 나름대로 흉내를 내 필사 하면 되는 걸 왜 자신이 일일이 써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투덜대기 시작한 시하루였다.
“좀 열심히 하세요. 희수궁의 유시후는 호위무사이면서도 여러 가지 일을 군말 않고 다한다던데.”
가만히 있어도 얼마 못 가는데, 아버지 이신이 함께 있다고 겁을 상실한 이안이 훈계하듯 말하자 시하루가 인상을 찌푸리며 바로 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순간, 가뜩이나 기분이 안 좋을 자신의 주군의 성격을 괜히 뒤집어 놓은 건 아닌지 눈치를 보던 이안의 예상과는 살짝 다르게, 시하루는 그 무엇보다도 거슬리는 어떠한 단어에 거부감을 나타내며 물었다.
“네가 희수궁의 호위무사를 어찌 알아?”
얼굴에서부터 말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반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희수궁의 유시후라면 엄청나게 유명합니다. 궁녀들 사이에서도 미남 호위무사로 얼마나 소문이 자자한데요.”
“미남이라…….”
중얼거리며 이신의 감독 아래 다시 붓을 집어 드는 시하루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는 거 나왔다고 신이 난 이안의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 뭔가가 걸리는 거 같다고나 할까…….”
“뭐가.”
“글쎄요……. 확실히 뭐라고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같은 무인이 보기에 어딘가가 어색한 거 같기도 하고……. 가끔 보면 전혀 무인답지 않은 분위기가 있어요.”
“아 그래.”
건성으로 대답해주며 붓을 움직이기를 수십 분.
드디어 마지막 편지를 쓴 시하루가 끝났다는 기쁨에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고는 환호를 했지만, 그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으로 하실 일은 이것입니다.”
아무렇지 않게 쌓인 서류들을 시하루의 앞으로 밀어주는 이신의 당당함에 이안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새록새록 피어나고 있었다.
“아니, 나도 일단은 사람인데 중간중간 적절한 휴식을 취해가며…….”
“네. 그러니 이 일을 하시면서 동시에 휴식을 취하시면 되시겠네요.”
싱긋 웃기까지 하는 이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시하루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옆에 놓인 국새를 들어 올렸다.
‘됐어. 그냥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
“귀찮아…….”
다행히도 이미 한 번의 검토를 끝내 승인할 문서만을 모아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도장만 찍으면 되는 문제인데, 그것마저도 귀찮다고 중얼거리고 있는 시하루였다.
“할 수 없지.”
결심했다는 듯 갑자기 잘 모아진 종이들을 탁자 위에 넓게 깔아놓은 그가 옥새를 들어 무작위로. 그것도 성의 없게 쾅쾅쾅! 종이 위를 찍어대기 시작했다.
“시하루 님! 그럼 제대로 안 찍히잖아요! 그리고 도대체 몇 장을 찍으시는 겁니까?!”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진 이안이었다.
그걸 또 놓치지 않은 시하루의 손이 갑자기 멈추더니 이안을 향해 매서운 눈초리를 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덕분에 옥새남발은 멈추었지만, 다시 한 번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이안은 오늘은 또 어떤 벌칙을 받으며 하루를 낭비하게 될까……하고 그동안 해왔던 잡초 뽑기나 청소, 기타 등등 마치 ‘봉사활동’ 같은 일들을 떠올리며 절망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대신 한 명이 뛰어 들어와 그 불안감을 멀리 날아가게 해주었다.
“뭐냐.”
“시하루 님! 답장이 왔습니다.”
갑자기 등장해 자신의 주군의 폭주를 막아줄 아주 좋은 물건을 들고 와준 대신에게 이안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새도 없이, 그의 손에 들린 편지를 빼앗듯 가져온 시하루가 투덜거리며 엄청난 속도로 겉봉을 뜯어내고 있었다.
“도대체가! 고작 이깟 편지 한 통에 답을 하는 게 뭐가 그리 힘들다고 이리 오래 걸려?”
그가 보낸 건 ‘고작 이깟 편지 한 통’이었겠지만, 서화당의 유아란 이름을 지닌 이랑이 받은 편지들에 있어서는 수십 통 중에 한 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기에 그는 너무 이기적이었다.
잘 뜯기지가 않는 것인지 짜증을 부리며 안간힘을 쓰던 그가 성격대로 그냥 윗부분을 찢어버렸다.
과정이 어쨌건, 결국에는 그 속 안에 자리 잡고 있던 하얀 종이를 꺼낸 그가 조심스럽게 한 줄 한 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글을 보면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마 적화유 님께서는 급하고 작은 일에도 발끈하는 성격을 지니신 거 같습니다.]
시작 부분부터 자신의 성질을 긁어놓기 바쁜 편지 내용이 마음에 안 드는 시하루가 잠시 잡고 있던 종이 부분을 시작으로 힘을 주어 구기다가 그래도 끝까지 읽어보자는 생각이 든 건지 다시 펼쳐 아까 멈춘 부분부터 이어 읽기 시작했다.
[저번에 적화유 님께서 질문하신 문제에 대한 저의 답변입니다. 간단하게 답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
이안은 요즘 들어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주군의 침묵이 너무 두려웠다.
‘차라리 그냥 아까 뒷걸음을 치다가 나가 버리는 거였는데…….’
몇 잔째인지 모를 차를 마시며 가만히 앉아, 시하루의 말에 끼어들던 이신 역시 그 침묵에 관심이 생긴 듯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는 그를 향해 시선을 고정 중이었다.
“하……. 하하. 말도 안 돼.”
금방이라도 폭발할 거 같은 그의 성격이 결국은 펑! 하고 터지게 되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건지 편지를 노려보던 시하루가 종이를 구깃구깃 구겨버리더니 집어 던지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이거 완전 엉터리네! 내가 뭐……? 하. 어이가 없어서.”
온갖 짜증을 부리다가 연신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를 반복하며 밖으로 나가버리는 시하루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이안이 조심스럽게, 언제 다시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방금 그가 던져놓은 구겨진 종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만둬라. 그러다가 또 혼날라.”
나름 아들을 위해 조언을 해준 이신이었는데 궁금해서 미치겠다는 눈의 이안이 그를 향해 대들 듯 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궁금하지 않으세요?”
이안의 말에 찻잔에 남은 차들을 후루룩하고 단숨에 마신 이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피식 웃으며 답을 하고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밖으로 나가버렸다.
“뭘 물어보셨을지 대충 예상이 가고, 뭐라 답이 왔는지 뻔하다.”
읽으려면 읽을 수 있었지만, 막상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자신의 아버지가 읽지 말라 하니, 이걸 읽어도 될지 아니면 말아야 할지. 자신의 손안에 있는 종이를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진 이안이었다.
이 일을 시작으로 궁 안에는 새로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요즘 들어 짜증 가득한 주군에게 어느 한 통의 편지가 왔고, 그 편지를 받은 주군은 그 뒤에 방에 처박혀 뭘 하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히 깊은 생각에 잠겼다고 한다.
그간 최고의 이야깃거리였던 시하루와 소이랑의 연애담이 줄어들어 풀이 죽어 있던 궁 안의 사람들은 과연 그 편지가 무슨 편지인가를 예상하느라 하루를 다 보낼 정도였고, 결국 그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답 중 가장 호응이 좋은 답은 이랑을 연모하는 어느 남자에게서 온 ‘도전장’을 받은 시하루가 고민에 빠졌다는 이야기.
결국, 궁금증을 견디다 못한 궁인들이 이안을 만날 때마다 붙잡고 물어보기 시작했지만, 읽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두려움에 결국에는 안 보고 나온 그는 자신도 모르겠다고 울먹이며 그 말도 안 되는 상상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궁 안을 들썩이게 하는 소문이 통과하지 못한 곳이 있었으니.
이번 역시 너무나도 조용한 그곳은 바로 본궁 옆에 있는 궁. 희수궁이었다.
소문조차 통과하지 못한 희수궁의 정문인 동문을 가볍게 통과하고 있던 수아가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이와 마주했다.
“어? 이랑 님을 만나러 온 거니?”
일주일에 한 번씩 서화당의 편지를 모아 희수궁을 찾는 수아였지만 지금은 시기상 너무 이른 방문이었기도 했고, 또한 그녀가 올 때마다 들고 왔던 편지 꾸러미가 이번에는 들려져 있지 않은 걸 보아 서화당의 일이 아니라 판단한 유시후가 물어본 것이었다.
“아니요. 이번에는 유시후 님을 만나러 왔어요.”
길을 자주 헤매는 수아를 이랑이 있는 방으로 안내하기 위해 몸을 돌렸던 유시후가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을 만나러 왔다 말하는 수아의 말에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나를?”
의아하다는 표정의 유시후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던 수아가 손에 꼭 쥐고 있던 어느 편지 하나를 그에게 내밀며 밝게 웃기 시작했다.
“혹시 이거, 기다리고 계시지 않으셨어요?”
가만히 수아의 손에 들린 편지를 바라보고 있던 유시후가 잠시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린 듯. 늘 차분하던 눈빛을 반짝이기까지 하며 봉투를 뒷면으로 뒤집었다.
“엄청 기다리고 있었지.”
깔끔한 편지봉투에는 보낸 이의 이름 따위 없었고, 아주 작게 한 줄의 글이 쓰여 있을 뿐이었다.
[나의 사랑하는 임에게]
받아든 편지의 봉투에 적힌 작은 글을 읽고는 뭐가 즐거운지 쿡쿡 웃던 그가 수아를 향해 이랑 님에게 데려다 줄 테니 따라오라고 말하며 앞장서자 그 뒤를 가만히 따르고 있던 수아가 기분 좋아 보이는 그의 상태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기 시작했다.
“이제 유시후 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갑자기 시작된 질문에 앞서던 유시후가 걸음을 멈추고는 매우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싱긋 웃으며 답했다.
“어쩌긴. 나도 슬슬 준비해야겠지.”
“준비요?”
유시후가 자신보다 훨씬 작은 수아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 갑갑한 궁에서 나갈 준비를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