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궁안에 잠들어 있는 꽃-9화 (9/44)

九花 * 개화(開花) (4)

[ 서재(書齋) ]

서적을 갖추어 두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방.

엄청난 양의 책들이 가득 꽂혀 있고 단정하게 놓여 있는 책상과 의자들.

그래, 이제 남은 건 학습에 대한 열의가 가득한 이가 찾아와 경건한 마음으로 책을 한 장, 한 장 마음에 새기며 읽는 것뿐인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시하루 님. 책은 읽으라고 있는 거……같습니다.”

정신 못 차리고 또다시 버릇처럼 한 마디 날리려다가 불과 며칠 전의 일을 뒤늦게나마 떠올린 이안이 말끝을 흐리며 주군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물론 그의 말이 100번이면 99번은 맞았지만, 자신의 위대하신 주군께서는 그런 거에 관심이 있었나……. 아니, 절대 없지. 그저 자기 기분이 우선순위인 양반이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현재 이안의 마음속에서는 이 말을 쉴 새 없이 외치고 있었다. 물론 밖에까지는 들리지 않는 그저 조용한 마음속의 외침이었지만 말이다.

책을 읽으러 왔으면 얌전히 책이나 읽을 것이지, 읽으라고 꼽아뒀던 책들을 죄다 빼놓고는 책을 베고, 책을 덮고 누워 있는 주군의 저의가 무엇인지 그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 뭐가 이상하신데요?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이안. 자신이 볼 때는 아무것도 이상한 게 없었다. 오직 서재 안에서 책들 속에 파묻힌 채로 누워 있는 시하루의 잘못된 책의 사용법을 제외하고는.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그의 주군의 기분에 최대한 맞춰줘야 했다.

어제도 오전까지는 기분이 괜찮은 듯 보였는데, 무엇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진 것인지 예상도 안 될 정도로 아주 갑자기 서재 안을 난장판을 피워놓은 장본인이니 말이다.

오죽하면 아까 낮에 서재에 들어올 때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이 따라 들어가는 자신의 손을 붙잡고 울먹이면서까지 애원하지 않았던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많이는 바라지 않겠습니다. 그냥 시하루 님이 날뛰시면 최대한 빨리 제어해주세요.’

이안 역시 그들의 부탁대로 시하루의 폭주를 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고. 거짓 하나 보태지 아니하고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어제의 결과가 어땠는가, 전혀 소용이 없지 않았나?

하여 이안은 그들에게 가망 없는 희망을 안겨주는 게 오히려 고통스러울 거라 생각을 하며 자신을 붙잡고 있던 손들을 떼어낸 뒤 그들에게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미 많이 바라고 계십니다.’

오히려 ‘나 좀 살려줘!’란 눈빛으로 그들에게 애원하며 말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안. 내가 희수궁에 출입하지 않은 지 그로부터 며칠이나 지났지?”

그러고 보니 매일 있는 핑계 없는 핑계를 만들어가면서 제 집마냥 출입하던 희수궁에 며칠 전부터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이안이 머리를 굴리며 날짜 계산에 들어갔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대충……. 나흘 정도 되지 않았을까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래. 대충 나흘이지. 나흘이란 말이다……. 후후……. 나흘……. 나흘이면 긴 시간이냐, 짧은 시간이냐.”

시간의 흐름이란 개인마다 다르게 느끼는 것으로 아주 주관적인 질문이었다. 답이 정해지지 않은 질문이었으므로 다른 사람이라면 마음 편히 자기 생각을 답하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이안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꼬여버렸다.

이것이 함정일지도 몰랐다. 잘못 대답했다가는 구덩이로 떨어져 버릴지도 모르는. 눈에 뻔히 보이지만 피할 수 없이 어떻게든 빠지고야 마는 그런 함정 말이다!

대답에 따라 자신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그건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지 않을…….”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래. 느꼈지. 아주 길게 말이다. 나흘은 긴 시간이야. 그렇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됐다. 답이 나왔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럼요. 엄청나게 긴 시간이죠.”

어릴 적부터 시하루의 곁에 있어서 그런지 이제는 어느 정도 함정을 피하는 능력이 생긴 이안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런데…….”

또다시 한바탕 난리가 벌어질 거 같은 익숙한 불안감에 서서히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불쌍한 이안.

자신이 왜 굳이 되지도 않는 머리로 공부해, 무인 시험까지 치러 합격을 한 뒤에 그 고된 훈련까지 받아가며 이런 성질 더러운 인간을 지켜야만 하는 건가….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이해를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 그 꼬맹이는 왜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 지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바늘로 찔러도 신음은커녕, 눈 하나 깜빡도 안 하고 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을 거 같은 인간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가.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색다른 충격에 빠진 이안은 이번만큼은 대처 방법을 모른다는 듯 헤매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멍해진 머리였지만 그는 방금 시하루의 입에서 나온 ‘꼬맹이’라는 말이 희수궁의 소이랑 마마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음……. 이랑 님께 있어서 시하루 님이 딱 그 정도였나 보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정도? 그 정도가 어느 정도인데?”

물론 설렁설렁, 일을 뒷전으로 미루고 노는 걸 좋아하는 게 문제였지만 막상 집중하면 날카롭게 상황을 파악하고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뛰어나기로 대신들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한 시하루였다.

그런 인간이 정말 모르는 건가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고 싶은 건가 이안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만큼 시하루는 표정의 변화가 없는 인간이라는 뜻이었다.

아니, 그건 둘째 치고 뻔히 보이는 사실을 굳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한 번 더 확인해야 하는 아주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이쯤 되니 이안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 듯 보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루 님이 이랑 님의 삶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존재라는 뜻으로…….”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안. 이것 좀 봐라.”

뜬금없이 화제를 돌리려는 것인지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시하루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이안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부른 시하루의 얼굴도 아니요, 서재의 풍경도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서재의 풍경들을 이루고 있던 아주 작은 부분 중 하나였던 두꺼운 책 한 권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책은 정확하게 이안의 얼굴을 정통으로 꽂히고 말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뭡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짜증 나서.”

얼굴을 감싼 이안이 나름대로 위협적으로 물었지만 돌아오는 시하루의 목소리에는 조금도 미안하다는 감정이나 걱정스럽다는 감정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차마 뭐라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이안. 그가 모시고 있는 주군이라는 인간은 원래 이런 인간이었다. 요즘 들어 그 꼬맹이 꼬맹이라 노래를 부르는 왕후님 앞에서의 모습을 봐서 그런지 몰라도 사실은 원래가 이런 인간이었다.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오히려 꽃따리 오빠라는 말도 안 되는 호칭을 들어가면서까지 하하 호호 웃으며 놀고 있던 그 모습이 더 이상한 모습이었으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내가 잠시 착각을 했지.’

아무래도 이대로 두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에 이안이 죽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한마디 할 각오로 고개를 들었는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 저기 그게…….”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예민한 주군의 기분을 여기서 더 거슬리게 했다가는 자신은 물론이요, 밖에 서 있는 병사들까지 위험할 거라는 생각에 이안이 최대한 주위를 끌어보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려고 했지만, 이미 시하루의 시선은 그 소음이 들려오고 있는 문가를 향하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시끄럽군. 이안 넌 좀 이따가 다시 보자.”

아까보다 더욱 좋지 않은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문을 향해 다가가 천천히 손을 뻗는 시하루의 행동에 이안은 이제 다 끝났다는 절망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오늘은 서재 안 정리가 아닌, 넓디넓은 궁궐 잡초 뽑기라도 시킬 태세였다. 아무래도 사직서를 내든가 해야지 이렇게는 도저히 못 살겠다는 생각까지 간 이안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냐! 왜 이리 소란스……!”

곧 밖에서 열심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두 병사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구원의 눈빛을 보내고 있을 거라 예상한 이안은 어떻게 하면 주군의 기분을 최대한 상하지 않게 사직의 의사를 밝힐까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다.

탕!

요란하게도 자신의 귓전을 때리는 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안이 무슨 일인 것인지 열었던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아버리고는 잔뜩 놀란 표정으로 그 문에 기대어 주저앉아 있는 시하루를 보고 덩달아 놀랐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시, 시하루 님? 왜 그러세요? 밖에서 귀신이라도 보셨…….”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 잠깐! 꽃따리 오빠! 나랑 눈 마주쳤잖아! 왜 그냥 문 닫아버리는 건데!”

문밖에서 들려오는 어느 익숙한 목소리 하나로 모든 상황 파악이 종료된 이안이었다. 과연, 밖에 있는 것은 무서운 것이 맞았다. 물론 자신의 주군에게 있어서는 말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소이랑? 꼬맹이가 어떻게 여기에…….”

잠시 빠른 상황 정리에 들어간 시하루가 뭔가 떠오른 건지 얼굴을 감싸 쥐며 탄식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내가 서재 출입증을 줬지…….”

희수궁이 심심하다고 중얼거리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지니고 있던 서재의 출입증을 준 것이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하면 뭐하나.

일단 이랑이 자신을 발견했으니 계속 서재 안에 박혀서 그녀가 돌아가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 그러니까……. 언제까지고 이런 상태로……. 있을 수는 없을 거 같은데요?”

어찌할 바를 모르며 문에 달라붙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시하루를 바라보던 이안이 한숨을 내쉬며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미 그도 어느 정도 소이랑이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가 끝난 상태였기에 ‘저 여자라면 분명 문을 부숴서라도 들어올 인물이야! 안 돼! 그렇게 된다면 또 밤을 새워가며 수리를 해야 하잖아!’란 생각을 하며 시하루 못지않게 불안해하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그럼 어쩌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일단은 나가봐야겠죠.”

체념이라도 한 듯 일단은 어서 문을 열고 맞이해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하루였다. 아니, 그전에 그는 사실 나흘 동안의 지루함 끝에 꼬맹이가 직접 납시어 주신 게 고마웠다.

한 번 열렸다가 갑자기 닫혀버린 문에 적지 않게 당황한 병사들이 아까와는 달리 차분해 보이는 시하루의 표정에 다시 바짝 긴장하며 깍듯이 인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흐음, 그나저나. 무슨 소란이지?”

그때부터 호위무사들의 머릿속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왕이 서재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희수궁에 자리 잡았다는 소문으로 유명한 그 작은 왕후, 소이랑이 서재에 찾아왔다.

무작정 들어가겠다고 우겨대는 그녀의 등장을 서재 안의 시하루에게 알리려고 했는데 그 과정에서 발생한 소음에 의해 이미 짜증이 난 상태였는지 문이 벌컥 열리며 왕이 잠깐 나오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도망치듯 다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에 아까와는 다르게 침착한 모습으로 밖으로 나온 주군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그게……. 이랑 님께서 서재에 출입하고 싶으시다……하여…….”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출입증이 있는데 어째서 들여보내지 않은 것이냐.”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오나 중앙 서재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시끄럽다.”

궐 안에는 여러 개의 서재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중앙 서재는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에 이랑의 출입을 통제한 그들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병사들의 표정은 무시한 시하루는 왜 안 들여보내 주느냐는 듯 퉁퉁거리는 이랑을 향해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들어 와."

병사들의 표정은 더욱 경악에 경악이 되었다.

이젠 어느 정도 추워진 가을바람에 약간 오들오들 떨고 있던 이랑은 한시라도 빨리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녀가 환호성(?)을 지르며 안으로 들어가자, 시하루가 피식 웃으며 무사들에게는 일보라는 듯 고갯짓을 하고는 뒤따라 들어 가버렸다.

이 상황에서 이해를 못 하고 밖에 남은 무사들은 다시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전하께서 이상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사람이 안 하던 행동을 하면 죽을 날이 가까워진 거라던데…….”

한편 서재 안. 이안이 의자에 앉아 있는 시하루와 책을 둘러보느라 정신없는 이랑. 그 둘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애써 책을 읽고 있는 ‘척’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정말 읽고 싶은 거 아무거나 빌려가도 돼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마음대로.”

순간적으로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 이랑이었지만 지금 그녀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한 30분 정도 서재 안을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던 그녀의 품 안에는 5-6권 정도의 책들이 안겨 있었다.

“고마워요. 꽃따리 오빠. 아……. 저분은 친구분?”

안 그래도 또 무슨 실수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잔뜩 긴장한 채로 책 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하려는 듯 책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이안이 이랑의 지목에 깜짝 놀라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아……. 저, 저는…….”

“어릴 적부터 두터운 우정을 나눈 친구다.”

도저히 친구를 바라보는 눈이라고 볼 수 없는 매우 무서운 눈빛으로 ‘친구다. 우린 친구인 거야.’라고 말하고 있는 시하루의 시선을 피한 채로 떨고 있는 불쌍한 이안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이안이라고 합니다.”

이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이랑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주었다.

“꽃따리 오빠 친구분이어서 그런지 잘생기셨네요.”

보통 여인에게 잘 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은 게 당연했지만, 지금 이안은 기분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주군의 눈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

눈앞의 작은 여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자신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 있어서는 가장 두려웠다.

아까 이랑을 두려워하는 시하루의 반응에 비웃었던 자신을 반성하며 최대한 이랑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뒤로 물러서는 이안. 안 그래도 복잡한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만이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여기서 나가고 싶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볼게요.”

고를 책들 전부 다 골랐으니 이만 희수궁으로 돌아가겠다는 이랑의 말에 얼굴에 화색이 도는 이안이었지만 시하루의 표정은 그와는 반대로 살짝 찌푸려지는 게, 또다시 위험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련 없이 책을 들고 돌아서는 그 작은 여인은 물론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주군의 기분을 거슬리게 했지만, 정작 그 기분을 풀어드려야 하는 건 이안, 그의 역할이었다.

“도, 돌아가시는 길에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너, 네가 마마를 모셔다 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

정말 애 많이 쓰고 있는 이안이었다. 또다시 괜한 소리를 한 건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게 시하루를 바라보았는데 ‘그래, 잘하고 있어!’란 표정을 본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감격상태에 들어섰다.

다행히도 오늘은 제시간에 퇴근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괜히 남아서 잡일을 한다고 시간 외 수당을 주는 것도 아닌데 일찍 퇴근해서 자신도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게 좋지 않겠는가.

자신의 주군은 아직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을 모르고 있는 듯 보였다. 아니, 이미 그의 깊은 마음속에서부터 그 사실을 거부하고 있는 것 일지도.

마음은 아직 10살짜리 꼬마 애 같은 주군을 모셔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탓하며 대충 책들을 정리한 후에 서재를 빠져나오는 이안이었다.

그가 나오기 무섭게 그를 향해 직각으로 허리를 굽히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병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말이다.

* *

괜찮다는데 굳이 배웅을 해주겠다고 나서는 시하루 덕분에 이랑은 책 5권이라는 그리 무겁지 않은 짐을 직접 들지 않고서 희수궁의 동문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원래 본궁과 희수궁은 거리가 멀지 않았지만, 왠지 더 거리가 짧아진 거 같다고 혼자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 시하루가 자신의 책을 달라는 듯 손을 뻗고 있는 이랑에게 들고 있던 책을 건네주고 있는데 희수궁의 문 안에서 이랑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심기를 다시 불편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이랑 님.”

“유시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알아차린 이랑이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달려오는 유시후를 발견하고는 방긋 미소 짓기 시작했다.

“이거 봐라? 책 많이 빌려 왔다?”

자랑하듯 자신이 들고 있던 책들을 보이며 말하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유시후가 아직도 뒤에 서 있는 시하루에게 시선을 옮겼다.

“죄송하지만 이랑 님. 먼저 들어가시겠어요?”

“왜?”

조용히 이랑에게 손을 흔들며 자신도 돌아가려는 듯 발걸음을 옮기던 시하루가 걸음을 멈추고 자신에게로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유시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시하루를 바라보던 유시후가 그에게서 눈을 떼고 이랑을 내려다보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군사들끼리 근무시간 조정 때문에 할 이야기가 있거든요.”

“아. 그래? 그럼 빨리 끝내고 와.”

사람 말 잘 믿는 이랑이 방긋방긋 웃으며 희수궁으로 들어가자, 문틈으로 그녀가 잘 들어갔나, 지켜보던 유시후가 그녀의 퇴장을 확인하기 무섭게 희수궁의 동문을 닫았다.

“외람되지만. 전하.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랑 님은 당신이 왕이라는 걸 알고 계시나요?”

한 가지 물어봐도 괜찮으냐고 묻기만 했지, 아직 괜찮다고 허락을 하지도 않았는데 바로 질문을 던지는 유시후의 태도에 기분이 나빠진 시하루가 삐딱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고 있다. 그러니 그대도 입을 다물고 있어줬으면 고맙겠군.”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꼬맹이의 호위무사라 그런지 태도가 상당히 건방지다는 생각을 하며 유시후를 바라보고 있던 시하루가 경고하듯 날카롭게 말했다.

그 꼬맹이보다는 눈치가 빠른 덕분인지 아니면 군사로서 여기저기 비췄던 자신의 얼굴을 익히 봐둬서 그런지 눈앞의 남자는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있다면 알고 있음에도 자신이 모시는 이랑에게는 알려주지 않는다는 사실.

“……도대체 뭐가 하고 싶으신 겁니까?”

유시후 역시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슬슬 짜증이 밀려오는 그였기에 말이 다소 거칠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화를 낼 거라 생각했던 그의 예상과는 달리, 시하루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생각해 본 적 없다.”

“전하께서 그 무신경한 태도로 지금까지 이랑 님을 방치했다는 걸 모르시는 건 아니겠죠?”

“그 일은 나도 몰랐던 일이니 상관없다.”

“그럼 어째서 상관없는 이랑 님에게 접근하시는 겁니까. 혹시…….”

서서히 이런 대화내용이 귀찮아진다 느끼는 시하루가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꼬맹이가 직접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 하나에 기분이 나아지려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주 나빠져 아무래도 빨리 돌아가서 일찍 잠이나 자는 게 더 좋을 거 같다 생각한 그였다.

“네가 지키는 마마가 걱정되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라. 난 아마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던가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단언하시는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아니, 분명 아닐 것이다.

물론 관심이 가기는 했지만 둘은 완전히 다른 감정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주변에서는 그리 호들갑들인지 그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안도 그렇고, 방금 내 눈앞에 있던 유시후라는 남자도 그렇고 괜히 저들이 더 시끄럽게 말이다.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었다.

“다른 이를 사랑하지 않기로 맹세했으니까.”

十花 * 궁 밖에 있는 꽃

‘네가 지키는 마마가 걱정되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라. 난 아마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던가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괜히 그렇게 말했나.”

오늘 하루는 시작부터가 불안한 이안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침에 일어나기 무섭게 폭풍 후회 중인 자신의 주군의 모습이 뭔가 안타깝기도 하면서 그냥 계속 내버려 두고 싶은 생각들이 서로 교차하기를 반복.

그러던 중 문득 그는 어떠한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저 인간이 지금까지 뭔가를 후회한다거나 아쉬워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 절대 없었지! 적어도 내가 곁에서 저 성격 받아줬던 근 몇 년 동안은!

초반부터 저 상태면 오늘 하루는 최악이 될 게 분명했다. 모두를 위해서라도 이안, 그는 아침부터 이상 증세를 보이는 주군을 진정시켰어야 했다.

좋아, 일단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 주는 척을 하다가 조금씩 건드리며 무슨 일인지 캐내어 보자.

“저, 저기……. 시하…….”

“그 자식…….”

이안, 그는 아직도 상황 파악이 잘되지 않았다.

도대체 가뜩이나 성격이 바닥인 자신의 주군을 아침부터 이렇게 만든 그 ‘망할’ 그 녀석이 누군지는 아직 몰랐지만 당장에라도 눈앞에 끌고 와 딱 죽기 직전까지만 패놓고 싶은 게 그의 심정이었다.

“그 자식…….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일개 호위무사 주제에 마음 놓고 꼬맹이한테 접근하는 거 아니야?”

방금 침소에서 날뛰고 있는 주군, 시하루의 입에서 나온 ‘그 녀석’이 희수궁의 호위무사로 유명한 ‘유시후’이고 ‘꼬맹이’는 ‘소이랑’이라는 것쯤은 아무리 무인 출신인 그라 해도 알 수 있었다.

눈치는 백단이었으니까. 아니, 설령 눈치까지 없었다고 해도 이건 간단한 문제였다. 오히려 모르는 사람이 바보지.

“……상관없으신 거 아니셨어요?”

“뭐? 당연히 상관없지. 그런데……. 없을 리가 없잖아!”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이안이었다. 도대체가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자신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을 하던 그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푸념을 늘어놓듯 말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

그래, 솔직하게 가자! 자고로 사람은 솔직해야 한다고 했으니까!

도대체가 알아먹을 수 있게 이야기를 해줘야 뭐라 조언을 해주던가, 아니면 미리 닥칠 상황에 대비해 피하기라도 하지!

단도직입적인 이안의 질문에 심각하게 고민에 빠진 시하루가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시하루에게 있어서는 별 의미 없는 잠깐이었겠지만, 이안에게 있어서는 괜히 또 나서서 자신의 주군의 성격을 건드리는 건 아닌가 하고 후회가 되는 숨이 막히는 순간이었다.

“……없지만 있다.”

긴 시간 끝에 내놓은 답변치고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시하루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평상시라면 이안에게 뭐라 뭐라 짜증을 부리고도 남았을 그가 한숨만 푹푹 내쉬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 맞다. 시하루 님.”

누가 그러지 않았나. 사랑문제(?)는 당사자들끼리 해결해야지 주위에서 이러쿵저러쿵 끼어드는 게 아니라고.

아무래도 자신이 끼어들은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것 같은 이안이 한 걸음 물러서다가 뭔가가 생각난 듯 다시 자신의 주군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주군께서는 현재 자신의 아주 개인적인 일을 생각하시느라 그의 목소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지만.

“……아버지께서 오늘 입궐하신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뭐?!”

자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엄청나다 못해 격한 반응을 보이는 시하루의 반응에 오히려 놀란 건 이안이었다.

“그 할아범이 왜?! 여행 간 거 아니었어? 나이도 많은데 아주 거기서 눌러 살라 하지 왜 돌아온데? 공기도 좋고 그 양반 좋아하는 강도 있잖아. 거기서 그냥 유유자적하게 낚시나 하면서 살라고 해!”

새삼 자신의 아버지가 다시금 존경스러워지기 시작한 이안이었다.

자신은 이 젊은 나이에도 저 제멋대로인 왕에게 휘둘리고 있는데, 나이 꽤나 먹은 자신의 아버지께서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저런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니…….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도대체 왜 갑자기 돌아온다는 건데?”

“아……. 그러고 보니 제가 며칠 전에 안부 편지 보내면서 요즘 시하루 님이 이상한 거 같다고 썼는데 그것 때문에 돌아오시는 게 아닌…….”

잔뜩 위축된 시하루의 모습을 눈앞에서 생중계로 보고 있던 탓인지 자신의 아버지를 앞세워놓고 기세가 등등해져 쉴 새 없이 말하고 있던 이안의 입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딱 다물어져 버렸다.

차라리 아무 말을 말지, 아침부터 매를 버는 이안이었다.

한편.

시하루가 짜증을 내고 있을 무렵, 다른 장소에 있던 다른 누군가도 짜증을 참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기분 좋게 늦잠을 자고 있던 이랑은 그 망할 유시후가 다짜고짜 거의 난입의 수준으로 대비마마께서 찾으신다고 말하며 단잠을 깨어놓는 바람에 아직 잠에서 완벽하게 깨어나지 않은 상태라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유시후의 힘에 못 이겨 질질 끌려가듯 익숙한 궁 앞에 도착한 그녀는 인사를 올리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연장자 앞에서 예의를 지켜야 했으니, ‘전 정신이 또렷합니다!’를 어필하기 위해 최대한 풀어진 눈을 반짝 집중하고, 휘청거리지 않고 똑바로 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물러가세요.”

약간은 고집스러워 보일 수 있을 법한 눈매의 중년의 여인이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앉아 그녀를 맞이하는 모습에선 ‘품위’가 넘쳐났다.

잠시 이랑을 바라보던 대비가 주위에 서 있는 궁녀들을 향해 말하기 무섭게 곧 다소곳이 인사를 올린 그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갔다.

“오랜만이구나. 요즘 네가 찾아오질 않아 내 이리 직접 불렀단다. 요즘 많이 바쁘니?”

마지막 궁녀가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히기 무섭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게를 잡고 있던 대비의 어깨가 추욱 쳐지더니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권위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왜 궁녀들을 다 내보낸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있을 법한 전형적인 ‘옆집 아줌마’의 모습의 대비마마였다.

이미 그녀의 그런 자유분방함에 익숙해진 이랑으로서는 놀라움 따위를 느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죄송해요. 요즘 갑자기 희수궁으로 옮기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서요…….”

“아~ 그렇……. 쿨럭!”

아까 궁녀들이 나가기 전에 이랑과 함께 먹기 위해 준비해놓고 간 차를 우아하게 마시고 있던 대비가 품위 따위는 다 어디로 던져 버린 건지 모를 정도로 뜨거운 차를 꼴깍하고 마셔버리다 못해 뿜어버렸다.

이번에는 놀란 이랑이 다급히 다가가려 했지만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어 보이는 대비에 의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매하게 서 있는 이랑이었다.

“어……. 으흠. 희, 희수궁으로 옮겼다고?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전하께서 그리 명령하셨다고 꽃따리 오빠가 그랬어요.”

‘전하’가 명령했다는 말에서 한 번 놀라고, 생전 들어보지 못한 ‘꽃따리’란 이름을 가진 ‘오빠’란 말에 더더욱 놀라는 대비가 이제는 아예 차를 마실 생각이 없는 것인지 이미 반쯤 엎어버린 찻잔을 내려놓은 채 멍하니 이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 이랑은 상관없다는 듯 뜨거운 차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차를 후루룩 마시고는 다과를 집어 들어 와그작와그작 먹으며 그런 대비의 허둥대는 모습을 관람하고 있었다.

“꼬, 꽃따리 오빠?”

“아~. 새로 사귄 친구예요.”

친구라니. 더더욱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여만 가고 있는 대비마마였다. 조금 전의 ‘전하께서’라는 말의 충격이 다 가시지도 않았는데 꽃따리? 그건 또 무엇이고, 오…… 오빠라니.

지금까지 영희궁에 있으면서 그녀는 철저히 격리되다시피 살아왔었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외간남자를 만날 수가 있었다는 말인가?

“다른 사람과 만난 거니? 언제? 어디서?”

현재 대비의 머릿속에는 ‘꽃따리 오빠’라는 호칭을 얻게 된 사람을 찾느라 복잡하게 얽혀가고만 있었다.

“될 수 있으면 다른 이들과의 접촉을 피하라고 말했잖니.”

“죄송해요. 너무 답답해서 한두 번 영희궁 밖으로 나간 적이 있었거든요. 아,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꽃따리 오빠는 좋은 사람이니까요. 매일 찾아와서 놀아주고요. 먹을 것도 주고요. 아! 서재 출입증도 줘서 매일 같이 서재에서 책 읽고 놀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늘 지니고 다니는 출입증을 보여 드리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이랑이 자랑스럽게 출입증을 보여 드렸는데 그녀가 건넨 것을 바라보던 대비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흐음, 그……. 꽃따리 오빠라는 분의 성함이……?”

대충 알 거 같다는 표정의 대비께서 자연스럽게 지어지려는 미소를 애써 참으며 물어보고 있었다. 물론 이랑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본명에 대해서는 말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지. 그냥 계속 ‘꽃따리 오빠’라고 불렀으니까.

“흐음…….”

하지만 분명히 처음에 만났을 때는 통성명 정도는 했을 것이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거뿐이었다.

‘그때……. 뭐라고 했더라…….’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머릿속에 뭔가가 두둥실 하고 떠오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잊어버렸어요.”

결국, 기억력에 한계를 느끼며 포기 선언을 하고 마는 이랑이 인상을 찌푸려가며 생각을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리 해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왜 부르신 거예요?”

그러고 보니 지금 이런 꽃따리 오빠니 희수궁이니 서재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아침부터 대비마마께 불려 온 게 아니란 생각이 문득 들어 고개를 들고 질문하니 대비께서도 그제야 원래 목적이 생각난 듯 갑자기 서랍들을 이리저리 뒤지시며 바빠지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으면 기억력이 떨어지네 뭐네 중얼중얼거리면서 이 서랍, 저 서랍을 다 뒤지던 대비가 한 8분 정도의 애매한 시간이 지났을 쯤에 위쪽에서 3번째 칸의 작은 서랍에서 작은 연 분홍빛의 복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저게 뭘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랑이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는데 그녀에게 받으라는 듯 말없이 건네주시는 대비마마셨다.

가만히 받아드니 뭔가 모양이랄까, 찰랑찰랑거리는 게 장신구라는 감이 왔다.

아무래도 전에 읽은 서화당의 편지 중에 시어머니께서 며느리를 불러다 앉혀놓고, ‘이건 우리 집안에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건데~. 내가 시집올 때도 받았다~ 뭐라 하면서 이제 너에게도 줘야 할 때가 된 거 같구나~.’ 로 시작하며 주는 물건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 있었던 게 떠오르며 방금 내가 받은 것 역시 그런 종류의 장신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기 시작하는 이랑이었다.

대충 그렇게 예상하며 꺼내어 보았는데…….

“……이제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는구나. 시간도 참 빨리 흐르지.”

아랫부분에 그녀의 이름 ‘소이랑’이라는 세 글자가 딱 새겨진 온통 새하얀 빛깔의 꽃 모양 노리개.

복주머니에서 나온 물건은 대비께서 잘 알고 있을, 그리고 이랑 역시도 아주 잘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원래 이랑, ‘자신의 것’이자, 그녀가 가지고 있어야 했던 물건이었다.

“…….”

이것이 무엇인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여서 그런지 조금은 어색하고 생소한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말없이 그 노리개를 이리저리 관찰하고 있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대비마마께서 다시 우아하게 차 마시기를 시도하시며 말을 이으셨다.

“네가 서하연(曙荷娟) 입학허가를 받은 날이 떠오르는구나.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어찌나 기특하던지…….”

“제 꿈이었으니까요.”

서하연(曙荷娟) 그곳은 여성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최초의 여성교육기관.

설립과정부터가 특이한 이 서하연은 천유국의 역사를 배울 때 빼놓으면 안 될 정도로 유명한 곳.

이랑 역시 이미 그곳에 입학허가를 받아 둔 상태였다. 그것도 서하연 역사상 최연소. 6살의 나이에 입학허가를 받은 것으로 당시 화제가 되었던.

어떠한 이유로 인해 직접 서하연에 다니지는 못해 그 유명세는 묻혀버렸지만 말이다.

“드디어 돌아갈 수 있게 되었네요.”

밝게 웃는 이랑과 달리 얼굴에 그늘이 지기 시작하는 대비마마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잠시 말없이 이랑의 손안에 있는 하얀 노리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뭔가 결심했다는 듯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네가 계속 이곳에 머물고 싶다면 난 언제든지 환영이란다.”

오히려 본인이 더욱더 바라고 있는 듯한 대비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랑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게 방긋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가만히 자신의 손안에 들린 노리개를 바라보며 말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전 서하연으로 돌아가야만 해요. 그곳에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놓고 왔거든요.”

“……역시, 넌 네 어미를 많이 닮았어…….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 이상 널 잡아둘 수 없겠구나.”

이만 돌아가 봐야겠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이랑을 궁 앞까지 나와 배웅을 하고 있던 대비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랑이 돌아간다……라. 설단. 그녀가 매우 좋아하겠군.”

“마마. 설단이라 하시면…….”

익숙한 이름의 등장에 그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는 듯 묻는 궁녀의 말에 대신 답을 내주는 대비였다.

“내 오랜 벗이자, 이 나라 유일무이한 기관 그 ‘서하연’의 수장(首長)인 여인이다.”

“서하연의 수장이라면……. ‘려화’ 님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려화’라는 말에 동경하는 눈빛으로 바뀐 궁녀를 보던 대비가 피식 웃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 시점에 희수궁이라니. 어쩌면 내가 바랐던 대로 이야기가 흘러갈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시간이 촉박하다는 듯 살짝 불안한 얼굴빛이 보였지만 곧 그녀에게 어울리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얼굴에 번져갔다.

“어떻게 할까……. 반칙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미로서 아들 녀석 등을 좀 밀어주는 건 규칙 위반이 아니겠지? 안 그래, 려화?”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고 있는 이랑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시후가 마주쳤다.

“무슨 일로 부르신 거예요?”

살짝 불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묻던 유시후가 곧 방긋 웃으며 자신의 손에 들린 하얀 노리개를 들어 보이는 이랑에 의해 서서히 펴지기 시작했다.

가만히 손을 뻗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해보겠다는 듯 그녀의 손에 들린 노리개를 가져다가 꼼꼼히 확인 작업에 들어간 그가 아랫부분에 확실히 적혀있는 그녀의 이름을 보고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받았네요. 이제 하나만 더 갖추어지면 궁에서 나갈 수 있겠어요.”

“이제 끝이 보여.”

“끝이라니요. 또 다른 시작이지요.”

한편, 그들과는 정반대로 불안해 미치겠다는 표정과 더불어 금방이라도 죽을 거 같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 입을 다물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시하루였지만 그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니, 시한폭탄 같은 그가 언제 다시 폭발할지 예측 불가한 상태에서 이안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설마 그 유시후란 놈을 좋아 한다든가…….’

수많은 생각이 현재 시하루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지만, 그렇다 할 딱 떠오르는 답은 하나도 없었다.

“으아아!! 모르겠어!”

쾅쾅쾅쾅쾅!

신경질적으로 국새를 종이에 찍어대고 있던 시하루를 이쯤에서 진정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르기 시작한 이안이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죽을 각오를 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 전하…….”

“왜!”

성질 더러운 그의 주군은 아무래도 이번 역시 그냥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보였다.

그냥 말 한번 걸어보려 해도 이리 무섭게 반응을 하니, 섣불리 다가갈 수가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저 인간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줘야 자신이 살고, 또 이 궁을 지키는 병사들이 사니 말이다. 이 한 몸 희생해서라도…….

“요즘 들어 이상해지셨다는 아들 녀석의 말이 사실인 거 같군요.”

눈 딱 감고 할 말을 하려던 이안의 두 눈이 놀라 번쩍하고 떠졌다.

심지어 짜증을 내던 시하루까지 당황하게 하는 어느 목소리가 들려오며 그들이 있던 방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고, 곧 새하얀 수염을 지닌 어느 노인의 등장에 이안과 시하루는 희비가 엇갈린 듯 표정이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우선은 ‘이제 살았다!’싶은 듯 감격에 찬 표정의 이안이 노인을 향해 반갑게 다가가며 인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오셨어요? 오랜만에 뵙네요.”

“오냐. 안 본 사이에 많이 야윈 게 아무래도 하루 님께 된통 당했나 보구나.”

울먹이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제 아들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던 노인이 탁자에 엎드려 무슨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듯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시하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왜 온 거야……. 망할 할아범.”

“그래도 일단은 다 죽어가는 아들 녀석 살리는 게 아비 된 자로서 해야 할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죽긴 뭘 죽어. 도대체 안부 편지에 뭐라고 쓰면 저 인간이 이렇게 튀어 올 정도인지 나중에라도 꼭 한번 그 편지를 읽어봐야겠다고 다짐하는 시하루였다.

“아들 녀석도 그렇지만 하루 님 역시 안 본 사이에 아주 늠름해지셨네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망할 할아범이라니……. 이거 섭섭해지려고 합니다.”

정말 지금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눈물연기에 들어간 노인을 가만히 바라보던 시하루가 한숨을 내쉬며 짜증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오……. 오랜만입니다.”

시하루에게 있어서는 대하기 어려운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눈앞의 그 이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인이었다. 늙어서도 저 연기력과 윗사람 다루는 능력은 변함이 없구나!

“너는 오랜만에 일찍 돌아가거라. 내 오늘은 오랜만에 전하와 담소를 나누다 들어갈 테니.”

과연 담소를 나눌 분위기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에 좋아 죽겠다는 듯 눈을 반짝이는 이안을 바라보는 시하루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물론 기쁨에 눈이 멀어 그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한 거 같지만,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지도. 알았다가는 오늘이라는 시간마저 편히 쉬지 못할 테니 말이다.

순식간에 이안이 밖으로 나가고, 단둘이 남은 방 안에는 고요함만이 가득 맴돌았다. 시하루는 계속해서 자신의 할 일에 몰두하고, 이신은 차를 마시는 등 각자의 할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느 정도의 침묵이 지난 후에야 먼저 입을 여는 시하루였다. 이신 공이 차를 연속으로 한 여섯 잔을 마셨을 때쯤이었다.

“……스승님…….”

시하루의 부름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은 이신 공이 피식 웃으며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렇다. 그는 시하루의 스승. 그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 신이었다.

“천하의 시하루 님께 스승님이란 소리를 다시 듣게 되다니. 뭔가 있기는 한 모양이군요.”

지금까지 그의 스승인 이신의 말은 거의 맞았다. 그렇기에 시하루는 함부로 그의 말에 태클을 걸 수가 없는, 대들 수 없는 유일한 대상.

그래서 그런지 이신의 아들, 이안을 궁에 들어왔을 때부터 무의식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었다. 마치 평소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듯이.

“답지 않게 고민이 있으신가 봅니다.”

정곡을 찌르는 그의 말에 평소에는 남의 말 인정하기를 싫어하던 그가 긴 한숨을 내쉬며 대답을 안 하는가 싶더니 눈을 가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에게 있어서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행동이었겠지만 시하루에게 있어서는 그 높디높은 자존심을 버리고 한 엄청난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것까지도 역시 잘 알고 있는 이신이었기에 이번일이 그렇게 간단하기만 한 어린 꼬마의 고민이 아니라는 걸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흐음……. 이번엔 이 늙은이는 도움이 안 될 거 같군요. 대충 보니 젊은이들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고민인 거 같은데…….”

역시 눈치 백 단인 이신.

“하아…….”

뭔가 절망적인 한숨을 지어내는 시하루를 바라보며 어떤 조언을 해줘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이신의 눈이 곧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반짝이기 시작했다.

“제가 고민 상담을 해주기는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유명한 상담가를 하나 아는데요. 가명으로도 고민 상담을 받아들이는, 비밀은 확실히 보장되는 상담처를 말입니다.”

“유명한 상담가?”

그가 잔뜩 의심을 담고 되묻자, 이신이 그의 반응이 매우 재미있다는 듯 씨익 웃으며 말했다.

“……‘서화당의 유아’라고 들어보셨나요?”

설마……나이가 이렇게 지긋하신 분까지 알고 계실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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