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궁안에 잠들어 있는 꽃-6화 (6/44)

六花 * 개화(開花) (1)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건 말도 안 돼.”

이미 수십 번도 넘게 읽었지만, 아직도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종이가 전하고 있는 말이 사실인가 의문이 드는 이랑이었다.

그녀의 표정은 지금 자신이 처한 이 상황이 너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후우…….”

잠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던 그녀는 다시 종이로 시선을 옮겨 처음부터 천천히, 자신이 뭔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없는지 확인을 하며 다시 읽어내려 갔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말도 안 돼…….”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다르게, 종이에 적힌 내용은 변할 생각을 않고 있었고, 그녀가 바라던 마법 같은 기적은 일어날 생각을 않고 있었다.

애초에 그런 희망은 아예 버려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물론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점이었지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럴 순 없어!”

방금 읽은 것이 정확하게 31번째 정독이었다.

이 종이에 적혀 있는, 말이 안 되는 지시사항도 문제였지만, 일단 그녀는 눈앞에 있는 또 다른 ‘문제’에 대한 대처 방법이 시급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

31번째의 정독을 끝낸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던 종이를 약간 내리고 그 위로 살짝 보이는 호랑이의 상태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

차라리 화를 내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질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천하의 호랑이 유시후는 지금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정말 아무 반응 없이 그저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차라리 화를 내. 그러고 있는 게 더 무서우니까.”

지금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는 아니었지만, 이 편지를 맨 처음에 읽은 건 그녀가 아닌 유시후였으니, 쉽게 말해 그는 이랑이 이 긴 장문의 편지를 31번 정독하는 동안 계속 저 상태 그대로 있었다는 것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화요? 화를 내면 그대로 받아들일 각오는 되셨습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니……. 그건 아니지만…….”

정말 괜찮겠냐는 말투로 조심스럽게 발동을 걸기 시작한 유시후를 보던 이랑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는 게 좋을까요?”

기나긴 침묵 끝에 유시후가 내뱉은 말이었다.

그의 말에 이랑이 잔뜩 겁을 먹고는 이미 어느 정도 그와 거리를 둔 상태였고 또 어떤 언어 공격이 와도 상처받지 않을 마음의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그리고 가장 충격을 받았을 자기 자신에 대한 격려도 잊지 않는 그녀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나 사고 안 쳤어. 정말이야. 다만 나의 완벽했던 계획에 아주 작은, 아주 작은 사고가 발생한 거뿐이지 괜찮아. 아직은 괜찮다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제가 분명히 사고 치지 말라고 했지요…….”

하지만 그녀의 그러한 노력은 영희궁의 호랑이라 불리는 인물 앞에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노력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일이 이 지경이 된답니까.”

드디어 고개를 든 유시후는 그냥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있어줬으면 너무나 고마울 거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차마 쳐다볼 수 없는 눈빛으로 이랑을 바라보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잠깐. 나도 할 말 많다고.”

그러자 이랑은 자신도 할 말이 있으니 일단은 최후의 변론을 할 기회를 달라는 듯 애절한 눈빛을 그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무슨 말을 하실지 매우 기대되네요.”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한 유시후의 표정에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듯 필사적으로 제 생각을 그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눈물 나는 노력을 보이는 이랑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자……. 생각해봐. 유시후. 그 왕은 나를 싫어해. 그렇지? 나를 싫어하기 때문에 그동안 내가 폐위시켜달라고 보냈던 자진 폐위 문서들을 무시한 게 분명해. 여기까지는 이해하지? 그러면 내가 폐위 당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 반대로 행동하면 되는 거야. 난 거기서 착안점을 얻어 편지를 썼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하~. 계속 왕후로 남고 싶다고 쓰셨군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렇지.”

유시후가 싱긋 웃으며 이해했다는 듯 말을 받아치자 그제야 표정이 풀리며 실실 웃기 시작하는 이랑. 그러나 그녀의 그 어색한 미소는 얼마 가지 못했다.

언제 웃었느냐는 듯 유시후의 나긋나긋했던 목소리는 순식간에 호통으로 바뀌어 이랑의 귀를 파고 들어갔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래서 지금 전하께서 희수궁(姬秀宮)으로 궁을 옮기라는 어명을 내리신 겁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바, 바로 그게 내가 아까 말한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아주 작은 사고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당하게 내보이던 자신 역시 할 말이 있으니 들어달라던 자신감은 어디로 가고 바로 꼬리를 내려버리는 이랑이었으니, 그런 그녀에게 더 이상 뭐라 못 하겠는지 한숨을 푸욱 내쉬는 것으로 감정을 다스리고 있는 유시후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과연 누가 머리가 좋은 건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지금 나 바보라고 놀리고 있는 거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런, 그렇게 들리셨어요?”

사건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왕께서 자신을 너무나 싫어하기 때문에 부탁을 안 들어주고 있다는 추리를 한 이랑은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 스스로 왕후란 자리에 매우 집착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앞으로는 왕후로서의 권위를 인정해 달라 주장하는 편지를 보냈고, 곧바로 왕에게서 답장이 왔다.

쓸데없는 서론 따위 빼버리고 그 긴 문장을 짧게 요약하면 이러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알았다. 내 이제부터 네 왕후의 권위를 인정할 것이며, 그대의 거처를 영희궁(英姬宮)에서 희수궁(姬秀宮)으로 옮길 것을 명한다.’

궐 안에는 여러 개의 궁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크게 네 개를 들 수 있는데, 왕이 머무는 본궁.

그리고 현재 이랑이 머물고 있는 궁이자, 궐 안에서 가장 구석에 위치한 데다 거의 방치되어있다 싶었기 때문에 궁인 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작은 궁인 ‘영희궁(英姬宮)’.

왕이 머무는 본궁 바로 옆에 위치한 궁으로 원래 왕후가 머무는 궁이지만 현재는 비어 있는 상태인 ‘희수궁(姬秀宮)’.

마지막으로 자신의 여식을 비어 있는 왕후 자리에 앉히기 위한 귀족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딸들을 궁에 들여보냈지만, 그녀들에게 관심조차 없는 시하루 때문에 계속해서 들어오는 귀족들의 영애들이 머물 장소를 내어주기 힘들어졌고, 결국 대신들은 회의를 통해 큰 궁 하나를 그녀들의 거처로 내어주었으니, 이 궁이 바로 ‘희안궁(姬安宮)’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왜. 어째서? 어째서냐고! 몇 년 동안의 편지는 무시했으면서 왜 하필 이번 편지는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냐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러게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동안의 부탁은 죄다 안 본 것 마냥 취급한 주제에 왜 갑자기 이런 말이 안 되는 편지 부탁은 들어주는 건데! 갑자기 마음을 좀 곱게 쓰자는 생각이 든 걸까? 이제야 세상 한 번 제대로 살아보려고 마음을 먹기라도 한 건가? 만일 그렇다면 뭐하나만 물어보자, 왜 하필 지금이야! 이미 당신 천당 가기는 글렀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러니까. 저한테 말씀하셔도 소용없다고요.”

난리가 난 이랑과는 달리 오히려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유시후였다.

이 상황에도 어떻게 저런 반응이 나올 수 있느냐며 울먹거리던 이랑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절망적이라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나 이제 어떡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잘 되셨네요. 희수궁은 이 영희궁보다 신식에다가 시설도 좋아 이랑 님이 심심해하실 틈이 없겠어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걸 아시는 분이 일을 이렇게 만드셨어요?”

약을 올리는 건지 아니면 혼을 내는 건지 구별이 안 되는 유시후의 설교에 휘말리고 있는 이랑이 입을 삐죽 내밀며 제대로 해결책을 생각해보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다시 한숨을 내쉬는 그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희수궁으로 궁을 옮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계시겠죠?”

왕후가 머무는 궁. 희수궁(姬秀宮).

설령 정식 교지를 받지 않은 여인이라고 해도 왕이 그 궁을 내어줬다면 이미 실질적인 왕후인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희수궁은 매우 큰 의미가 있는 자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이랑이 그곳에 들어간다는 것은 왕후 자리를 때려치우고 밖으로 나가기는커녕, 공식적으로 왕의 부인이 되었음을 뜻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필이면 이런 중요한 시점에…….”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별로 어렵지 않게 모든 걸 해결해왔던 유시후 역시 이번만큼은 손을 쓰지도 못하고, 이미 다른 곳에서 온 궁인들이 영희궁 안의 물건들을 희수궁으로 옮기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제 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으니 최대한 얌전히 계셔달라고 부탁드렸잖아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잠깐……. 방금 내 머릿속에 엄청난 게 스쳐 지나갔는데 말이야. 혹시 전에 내가 영희궁에서 나갔을 때 그 왕이 우연히 날 본 건 아닐까?”

마치 엄청난 걸 생각해 냈다는 듯한 이랑이 유시후의 말을 싹둑 잘라버리고 그를 더욱더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네. 그랬겠죠. 아주 우연히도 말입니다.”

상당히 짜증이 난다는 표정과 함께 뭔가를 말하고 싶은데 꾹 참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유시후와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이랑이었다.

사실, 유시후는 이랑과는 달리 일단은 궐 안에 소속되어 있는 무사였으니 다른 부대들과의 교류니 뭐니 여러 가지 이유로 영희궁 밖에 나가는 일이 꽤 있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왕, 시하루의 얼굴을 익힐 수가 있었다.

거기에 아무리 이랑은 그런 일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어도, 얼마 전 시하루가 영희궁에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일과 최근 들어 쓸데없는 이유를 들어가면서까지 영희궁을 찾아오는 걸음이 는 것으로 보아, 이랑이 전에 밖에 나갔을 때 누구와 접촉을 했고, 하필이면 그 사람이 시하루였다는 전개가 눈앞에 선 한 유시후였다.

게다가 이랑은 그를 ‘꽃따리 오빠’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아마 아직 이 모든 사실을 모르는 상태임이 분명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설마……. 이제 와서 내 미모에 반했다는 말도 안 되는 전개는 아니겠지?”

아주 조금만 생각해봐도 딱 답이 나오는데, 정작 이 작은 왕후님은 그러한 사실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다는 게 너무나 답답한 유시후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걸 그냥 말해, 말아?’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글쎄요.”

퉁명스럽게 대답을 하며 따가울 정도로 이랑을 향해 있던 시선을 뗀 유시후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멍하니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시후는 답지 않게 매우 피곤해 보였다. 원래 나이. 올해로 23살이었지만 어째 28살 정도의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게 아무래도 이랑 때문에 마음고생을 좀 많이 한 모양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미안, 유시후. 너의 그 5년이라는 시간, 내가 나중에 나름 성의껏 보상해줄게. 퇴직을 5년 정도 빨리 앞당긴다든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내가 볼 때는 이 왕이 이제야 제대로 세상을 살아 보겠다고 착한 마음을 먹은 거 같아. 다시 편지를 보내볼까? 제대로 폐위시켜달라고 말이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제가 볼 때는 이랑 님도 한 번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을 좀 둘러보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특히 주변 인물들을 말이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주변 인물들?”

자신의 근질근질한 입과 참을성에 한계를 느끼며 이를 바득바득 갈던 유시후가 말을 뚝뚝 끊으며 말했지만, 여전히 그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이랑은 잠시 고민에 빠진 듯 보였다.

그리고 그 짧다면 짧다 말할 수 있는 고민의 시간 끝에 그녀가 내린 답변은 이러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나. 그리고 유시후?”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고 한 말인 듯했는데, 그녀의 말을 듣기 무섭게 인상부터 찌푸리는 유시후를 본 이랑은 자신이 뭔가 아주 잘못 짚은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랑 님이 생각하고 계시는 이 세상은 매우 좁나 보네요.”

괜히 무안해진 이랑이 툴툴거리며 대답을 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개인적으로 지금 상황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돼요.”

지금 이 순간에도 이랑에게 모든 사실을 말할까 말까에 대한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 유시후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그럼 혼자서 열심히 생각해 보던가. 난 지금 바쁘니까! 그래. 편지를 다시 쓰는 게 좋겠어. 유시후 가서 붓이랑 종이 좀 갖다 주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냥 차라리 말로 전하는 게 어떠세요? 그러면 종이 낭비도 안 하고…….”

유시후의 말에 이랑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한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내가 무슨 수로 전하를 만나? 유시후, 요즘 머리가 좀 잘 안 돌아가는 거 같아. 괜찮아? 업무과다로 인한 두통이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마 답답함으로 인한 화병일걸요.”

빠른 시일 안에, 근방에 갈대숲의 위치 하나 정도 알아두지 않으면 정말 화병에 걸려 죽을지도 모를 그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유시후……. 죽으면 안 돼. 너 없으면 나……. 물론 밥 잘 먹고 잘살 수는 있겠지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기대도 안 했어요.”

탁자를 손가락을 탁탁 치며 뭔가 깊은 고민에 잠긴 유시후가 대충 자신을 놀리는 이랑의 말에 짧은 간섭을 하고는 다시 생각하는 듯 눈을 감았다.

평소의 그라면 이런 상황에서 늘 눈부신 방법을 찾아내고는 했지만 아마도 이번 일에는 너무나도 큰 인물이 개입되어 있다 보니, 확실히 무리일 거란 생각이 드는 게 점점 절망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중. 희망의 실낱을 떠올렸다는 듯 감겨 있던 그의 눈이 번쩍 떠지며 곧 고민 따위 다 집어치워 버리고 빈 종이에 낙서하고 앉아있는 이랑을 향해 물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 이랑 님. ‘그거’ 결과발표. 곧 나오지 않나요?”

뜬금없이 등장한 ‘그거’라는 것의 정체에 대해 생각을 하던 이랑이 곧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겠다는 듯 눈을 반짝이다가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게 그렇게 빨리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건 유시후도 잘 알잖아. 아마 좀 더 걸릴 거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지만 이랑 님의 경우에는 처음도 아닌데 좀 더 빨리 나오지 않을까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안 될걸. 그곳은 ‘예외’를 만드는 걸 엄청 꺼리는 곳이니까. 하지만 지금 이 위기를 빠져나갈 수 있는 건 역시 그곳밖에는 없는 거 같네.”

‘그곳’이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짜증이란 짜증은 다 내던 이랑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리고 먼 산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말을 하니, 화를 내던 유시후 역시 어느 정도 표정이 풀렸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빨리 이곳을 나가시고 싶으시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말이라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제대로 여쭤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궁을 나가신 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생각이세요? 뭐, 대충 예상은 가지만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여기서 나간 다음이라…….”

대충 다음으로 올 답이 예상이 간다는 눈치였지만 그 질문에 이랑의 표정에서 그 어떠한 망설임 따위가 보이지 않자, 그 예상이 어느새 확신으로 바뀌는 그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뻔하잖아.”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긴 그렇죠.”

피식 웃으며 맞장구를 쳐주던 유시후가 이랑이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무언가를 풀러 탁자위에 내려놓는 걸 보고는 그 웃음을 멈추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찾으러 가야지. 내 어머니와 아버지에 관련된 일들을 모두. 그리고 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

이랑이 내민 것은 그녀의 차림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낡은 가죽끈을 이어 만든 목걸이였고, 그 줄의 끝에는 작은 은빛의 반짝거리는 반지 같은 것이 매달려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게 내가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기억이야.”

이랑이 자신의 목에서 풀은 줄에 걸려있는 반지를 손가락으로 굴리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제 더 이상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아버지셨어. 아버지가 이걸 나에게 주셨어. 이제 내 것이니 잘 가지고 있으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주셨어. 그게 끝이야. 내가 기억하는 부모님들에 대한 기억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궐에 들어와 생활했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이라는 건 자연스럽게 잊어 갔고, 결국 그러한 것이 익숙해져 버린 그녀였다.

하지만 아무리 궐에 들어올 당시 그녀의 나이가 어렸다고는 해도, 그전까지의 부모님과의 일들을 기억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궐에 들어와 한동안 부모님을 찾지 않던 이랑이 처음으로 유시후를 붙잡고 물은 적이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있지, 유시후. 내 엄마 아빠는 어디 계셔?’

유시후는 솔직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가 어리다고 어정쩡하게 말을 얼버무리거나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그렇게 대처했기 때문에 지금의 이랑이 있는 걸지도.

그녀는 곧 빠르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고, 그것이 자신의 부모님에 대해 묻는 마지막 질문으로 끝이 났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렸을 때 일 기억나시는 거 있으세요?”

웬만해서는 궐에 들어오기 전의 일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이 없던 유시후가 오늘은 웬일인지 과거 이야기를 먼저 꺼내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음……. 요즘 들어 많이 떠올려보려고 노력하는데 역시 잘 기억은 안 나. 너무 오래전의 일이기도 하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렇겠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하지만 엄청 넓은 집에 살았던 건 기억이 나. 아마 직접 가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몰라.”

분명 편지를 쓰기 위해 준비를 해 둔 종이이건만 어느새 이랑은 그 종이 위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랑의 낙서 아닌 낙서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유시후의 머릿속에는 문득 어떤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랑 님.”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응?”

잠시 아무 말 없던 유시후가 희미한 기억들이지만 떠올리는 게 즐겁다는 듯 웃으며 종이위에 나름대로 열심히 집을 그리고 있던 이랑의 손에 들린 붓을 뺏고는 그녀가 왕에게 보낼 다른 편지를 쓰기 위해 준비해 놓은 종이 중 하나를 집어 들어 자신의 앞으로 끌어갔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즐거움을 빼앗긴 이랑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데.’라는 표정으로 유시후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고 있는 듯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하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찾은 거 같아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를?”

이랑이 여전히 이게 무슨 짓인가 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유시후는 그저 싱긋하고 미소만 짓고 있었다.

곧이어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붓이 유연하게 종이 위를 춤추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지금 이 상황을 빠져나갈 길을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정말? 뭔데?”

순간 유시후가 다시 듬직해 보이는 이랑이 눈을 빛내며 자신에게도 계획을 알려달라고 조르기 시작했지만,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는 그저 싱긋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번에는 제가 한 번 써보도록 하죠.”

궁금한 건 못 참는 이랑의 성격에 어떻게든 허리를 꼿꼿이 펴서 종이를 채우고 있는 글씨들을 읽으려는 노력을 보였지만, 그녀는 유시후의 방어를 뚫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려준다고 말하며 그녀에게 제발 얌전히 있어 달라 부탁을 했지만, 천하의 소이랑이 순순히 말을 듣겠는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누구한테 쓰는 건데?”

이랑이 23번째로 같은 질문을 반복했을 즈음.

유시후도 이쯤 되니 일단 시끄러운 그녀를 먼저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인지 계속해서 종이와 붓에 주고 있던 시선을 떼고 가만히 이랑과 눈을 마주치고는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걱정하지 마세요. 이랑 님. 제가 반드시 이 궐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 드릴 테니까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것 참 든든하네.”

어이가 없다는 이랑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유시후의 표정에서는 그 어떠한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오직 보이는 건 ‘확신’뿐.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래서, 누구한테 쓰는 거냐니까?”

끈질긴 이랑이었다.

빠르게 움직이던 유시후의 손이 멈추고, 그가 고개를 돌려 이랑을 바라보며 ‘시끄러우니 먼저 말해주겠다’는 듯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느 사랑하는 여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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